공릉(恭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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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의 능.

개설

장순왕후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한명회(韓明澮)의 셋째 딸로, 성종의 비(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와는 자매간이다. 1457년(세조 3)에 뒷날의 예종인 해양대군(海陽大君)이 왕세자로 책봉된 뒤, 1460년(세조 6)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이듬해인 1461년(세조 7) 11월에는 원손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았으나, 다음 달에 승하하였다. 이에 시호를 ‘장순(章順)’이라 하고 장순빈(章順嬪)으로 삼았다(『세조실록』 8년 2월 4일).

조성 경위

1461년 12월 5일에 장순왕후가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자, 이듬해 2월 25일에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에 안장하였다. 이처럼 공릉은 애초에 세자빈의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빈전도감(殯殿都監)이나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아닌 염빈도감(斂殯都監)과 조묘도감(造墓都監)이 설치되어 장례와 관련된 각종 일들을 맡아보았다.

이후 예종이 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왕후로 추존되었고, 성종대에는 시호를 ‘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로 추존하고 능호를 ‘공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추존된 뒤에도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즉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폐단을 없앤다는 이유로 능침에 더 이상의 의물을 설치하지 못하게 하여 공릉은 왕릉으로서의 격식을 갖추지 못하였다(『성종실록』 1년 1월 25일). 능에 조성된 석물이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한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성 상황

파주 삼릉 중 하나인 공릉은 한북정맥(漢北正脈)에 속하는 개명산에서 분기하여 우암산 비호봉을 거쳐 명봉산에 이르는 능선에 위치해 있는데, 그리 높지 않은 용맥이 능역을 감싸는 지형이다.

재실과 행랑채는 능역 입구 왼쪽에 자리 잡고 있으나, 공릉의 재실인지 조선 영조의 맏아들 진종(眞宗)과 그 비 효순왕후(孝純王后)의 능인 영릉(永陵)의 재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공릉에는 연못이 없으며, 홍살문 서남쪽 170보 거리에 전사청 3칸이 있었다. 또한 제기고는 전사청 옆에 위치하였으며, 안향청은 6칸, 재실은 20칸 서남측으로부터 150보 거리에 있었다.

한편 『능원지(陵園誌)』에 따르면, 정자각은 능 아래 65보에 있으며, 정자각 오른쪽 14보 거리에 수라청 3칸이 있었다. 수복방 3칸은 정자각 왼쪽 14보 거리에 있었고, 정자각 서쪽 49보 지점에는 망료위가 있었다. 또 홍살문은 정자각 동쪽 140보 거리에 있었다.

관련 사항

공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으며, 상계, 중계, 하계로 이루어진 층계도 없다. 다만 봉분 좌우에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이 서로 엇갈려 2개씩 배치되어 있으며, 문인석 1쌍과 마석(馬石) 2개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장순왕후가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한 까닭에 왕릉의 예(禮)로써 능역을 조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장순왕후가 추존된 뒤에도 백성들을 대거 노역에 동원하는 등의 폐단을 염려한 대왕대비의 하교에 따라 공릉에는 더 이상의 의물이 설치되지 않았다.

한편 조선전기에는 광중(壙中)에 석실을 두었으나,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이후에는 대부분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우는 회격분으로 조성하였다. 예종의 능인 창릉(昌陵)도 마찬가지인데, 공릉은 이와 달리 석실로 조성되었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왕릉이 아닌 세자빈의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공릉은 왕릉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군과 공주, 옹주의 무덤인 원(園)과 같은 묘제(墓制)를 적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 『춘관통고(春官通考)』
  • 목을수, 『고려·조선능지』, 문성당, 1991.
  • 문화재관리국, 『헌릉(원경왕후능)해체실측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89.
  •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상편』, 민속원, 1985.
  •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하편』, 민속원, 1992.
  •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 이희중, 「17, 18세기 서울주변 왕릉의 축조, 관리 및 천릉 논의」, 『서울학연구』1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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