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주청(誥命奏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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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이 궐위되고 새 왕이 즉위하였을 때 중국 조정에 그 사실을 알리고 조선의 왕으로 책봉하는 고명을 발급해 주도록 요청하는 일.

개설

조선시대 왕이 사망하거나 선양에 의하여 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 혹은 세제가 순조롭게 즉위하였을 때, 또는 반정으로 왕이 축출되고 새 왕이 즉위하였을 때 중국 정통 왕조[명나라, 1637년 이후에는 청나라의 조정]에 그 사실을 알리고 새 임금을 조선의 왕으로 책봉하는 임명장인 고명(誥命)을 발급해 주도록 요청하는 중요한 외교 사안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이 중국 정통 왕조에 고명을 주청하는 외교는 삼국시대 이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었던 ‘조공(朝貢)-책봉(冊封)’의 외교 체제를 답습한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전근대 역사에서 중국 주변의 약소국들은 중국의 정통 왕조를 종주국(宗主國)으로, 자기 나라를 종속국(從屬國)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형식을 통하여 의제적인 봉건 체제를 형성함으로써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국제 질서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약소국의 사대(事大)에는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보살핌[字小]이 반대급부로 주어졌다. 중국 황제가 발급하는 고명은 조선의 왕들에게 외교적인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왕권을 강화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으므로 정상적으로 계승한 왕도 그러하였지만 특히 혁명이나 반정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한 왕은 더욱 중국 황제의 고명을 얻는 데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내용

1392년(태조 1) 7월에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즉위한 태조이성계는 즉위한 다음 달부터 여러 차례 명에 사신을 보내어 고명을 요청하였으나, 홍무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공민왕 이래 조선건국까지 혼란이 심하였던 왕위 계승 문제나 당시의 외교적 현안 때문에 불신이 심화된 탓이었다. 홍무제는 태조가 요청한 대로 조선의 국호를 정해 주기도 하였지만, 끝내 조선의 왕으로 책봉해 주지 않았다. 태종은 1401년(태종 1) 즉위한 후 명의 건문제(建文帝)로부터 조선 왕의 책봉 고명과 금인(金印)을 받았으나, 이듬해 9월 명의 내전에서 승리한 성조(聖祖)영락제(永樂帝)는 종전의 고명과 인신을 취소하고, 1403년에 새로이 책봉을 시행하였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모두 즉위 초에 명으로부터 고명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조선은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고 사대의 예를 다하여 외교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였다. 조선이 책봉을 요청하면 중국은 거의 관행적으로 고명을 발급하였다. 그러나 광해군(光海君)과 같이 적장자가 아니거나 인조반정(仁祖反正)과 같은 변란이 있을 때는 중국에서 경위를 조사하고 고명을 주는 일도 있었다.

변천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淸)의 지배를 받게 된 조선의 왕들은 청으로부터 고명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과의 책봉-조공 관행은 청일전쟁 후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끝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동문휘고(同文彙考)』
  • 박충석, 『한국정치사상사』, 삼영사, 1982.
  • 이영춘,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집문당, 1998.
  • 이춘식, 『사대주의』,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7.
  • 전해종, 『한중관계사연구』, 일조각, 1972.
  • 이춘식, 「조공의 기원과 그 의미」, 『중국학보』 10, 1969.
  • 신석호, 「조선왕조 개국당시의 대명관계」, 『국사상의 제문제』 1, 1959.
  • 유근호, 「조선조 대외관의 특질」, 『조선조 정치사상연구』, 한국정치외교사학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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