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득뢰(高得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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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3년(선조26)].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 활동한 무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제 2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전사한 의병대장(義兵大將). 자는 은보(殷甫)이다. 본관은 용담(龍潭)인데, 대대로 전라도 남원(南原)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고효륜(高孝倫)이다.

선조 시대의 활동

고득뢰(高得賚)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였고 기상과 절개가 있었다. 경서(經書)를 읽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1577년(선조10)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어란만호(於蘭萬戶)와 방답첨절제사(防踏僉節制使) 등을 지냈다.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남원에 있다가, 1591년(선조24) 일본에서 조선에 화의(和議)를 청해오자, 그는 앞으로 큰 난리가 있을 줄 미리 짐작하였다. 이리하여 나이 젊은 남원의 무사(武士)들을 모아놓고 “국가가 위태롭고 어지러운 상황에 처하였을 때 신하가 된 자로서 마땅히 위급한 데로 달려가 죽어야 되겠는가? 아니면 난리를 피하여 살아야 되겠는가?” 하고 이들을 교육하여 모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임진왜란 때 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득뢰를 따라서 의병으로 자원한 남원 사람들이 6~7백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그는 남원 의병을 이끌고 전라도 우의병장(右義兵將) 최경회(崔慶會)와 좌의병장(左義兵將) 임계영(任啓英)이 함께 전라도 의병을 남원에 집결하였다. 최경회는 고득뢰를 그의 부장(副將)으로 삼고, 그로 하여금 전라도장수(長水)·무주(茂朱)·금산(錦山) 등지에서 왜병과 맞서 싸울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그 결과 의병들은 조직적으로 싸워서 전라도에 침입하는 왜적을 막을 수 있었다. 그해 10월 경상도 진주(晉州)에서는 진주목사(晉州牧使)김시민(金時敏)이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왜병 3만여 명을 공격하여 왜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것이 제1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이다.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등이 연합한 10만 대군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여 전날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하였으므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 3도의 관군과 의병이 진주성에 총집결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에 임명된 최경회가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충청도병사(忠淸道兵使) 황진(黃進), 복수대장(復讎大將) 고종후(高從厚), 김해부사(金海府使)이종인(李宗仁) 등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용감히 싸우다가 군관민(軍官民) 6~7만 명이 모두 옥쇄(玉碎)하였다.

이때 고득뢰가 진주성에 들어가기 직전에 조정에서 그를 평창군수(平昌郡守)에 임명하였다. 그를 마중하러 온 평창 서리가, “평창은 후미진 고을이라서 온 가족이 몸을 보전하기는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니, 그는 “국가의 형세가 위태롭고 급박한데, 어찌 자신만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라고 단호히 거절하며, 최경회를 따라서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남원 의병 중에 결사대 3백여 명도 그를 따라서 진주성으로 들어가서 9일 동안 왜적과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되면서 모두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이를 제 2차 진주성 싸움이라 한다.

추증과 유사 기록

선조가 관원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하였다. 뒤에 병사(兵使) 황진(黃眞)을 모신 정충사(旌忠祠)에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은봉전서(隱峯全書)』 8권에 「고득뢰유사(高得賚遺事)」가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은봉전서(隱峯全書)』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