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강상인(京江商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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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강 지역을 근거로 각종 상업 활동과 선박 운수업 등에 종사했던 상인들.

개설

한강 일대인 경강(京江) 주변에는 전국의 주요 산물이 국가의 물자 운송 체계인 조운을 통하거나 선상(船商)의 선박을 통해 운반·집적되었다. 이곳은 15세기 초부터 많은 상인이 집결해 하나의 경제 권역을 형성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선상을 접대하고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여 구문(口文)을 받아 생활하던 경강 여객주인(京江旅客主人), 조운을 전담하던 경강선인(京江船人), 지역적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많은 이익을 남기던 경강선상(京江船商) 등이 경강을 무대로 활동하던 상인이었고, 이들을 통칭하여 경강상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18세기 이후 경강에서 유통되는 미곡, 어물, 목재, 소금 등 주요 상품의 유통권을 장악하였고, 이를 토대로 도고(都賈) 상업을 이끌어 나갔다. 나아가 이들은 전국의 유통 체계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원인은 그들의 자본력이 우월했다는 점, 선상·선운업 그리고 여객주인을 대부분 겸업하거나 여기에 투자했기 때문에 다른 상인에 비해 상품유통 체계 안에서의 조직력이 우월했다는 점, 그리고 권력과 결탁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 경강상인들의 주된 영업 활동은 선상 활동(船商活動)과 정부의 세곡(稅穀), 양반층의 소작료를 운반하는 운수업이었다. 이들은 정상적인 선상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17세기 이후 세곡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운반곡에 일정량의 물을 타서 곡물을 불려 그만한 양을 횡령하는 이른바 화수(和水)라는 것이 있었다(『숙종실록』 45년 2월 23일). 또한 운반곡의 일부 또는 전부를 착복하는 투식(偸食)이라든가(『현종실록』 10년 5월 13일), 선박을 고의로 침몰시키는 고패(故敗) 등도 그들이 자주 행하던 부정행위였다(『고종실록』 19년 2월 9일). 이러한 행위는 정부의 조세수입을 감축시켰고 결국 그들의 임운 활동을 제약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로서는 이들이 세곡을 운반하며 얻는 이익을 일방적으로 박탈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당시 사정으로는 조운제도에 의한 세곡 운반이 경강상인을 통한 세곡 운반보다 정부 측에 편의와 이익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첫째, 정부에서 세곡 운반권을 일방적으로 박탈할 수 없을 만큼 경강상인은 이미 상인으로서의 위치와 중앙정부와의 관계가 확고하였다. 둘째, 그들이 세곡 운반을 폐업한다면 서울에 거주하는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운반할 길은 끊어지게 되었다. 셋째, 조정에서 직접 조운제도를 실시할 경우, 조운선(漕運船)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조선 정부는 경강상인이 세곡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가 1789년(정조 13)의 주교사(舟橋司) 설치였다(『정조실록』 13년 12월 4일).

주교사 설치는 경강상인에게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세곡 운반권을 안정적·독점적으로 인정해 주는 한편, 이들에 대한 관리를 통해 부정을 최소화하려는 제도였다. 이후 경강상인이 안정적으로 세곡 운송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미곡 유통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선상업, 운수업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경강상인들은 점차 다른 영업에도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정부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공인계(貢人契)에 참여하여 상품유통이나 영업 독점권을 장악하고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마계(馬契), 빙계(氷系)의 창설이 그 예이다. 또 경강선상으로 부를 축적하면 여객주인으로 변신하여 정착 상인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18세기 이후 여객주인권이 확대되면서 여객주인은 많은 이윤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경강에서 경강선상, 여객주인업, 세곡 운송업 등은 대부분 소수의 경강상인에게 집중되어 갔다. 이는 상품유통 과정의 다양한 단계를 소수의 경강상인이 장악했음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장악한 유통 체계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올리는 유통 구조, 즉 도고 상업을 만들어 냈다.

경강상인에 의한 도고 상업은 미곡, 목재, 소금, 어물 등 대부분의 상품에서 나타났다. 나아가 이들 경강상인들은 경강에서만이 아니라 서울 지역, 나아가 전국의 유통 체계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원인은 우선 그들의 자본력이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는 이들이 선상·선운업, 여객주인을 대부분 겸업하거나 여기에 투자했기 때문에 다른 상인에 비해 상품유통 체계 안에서의 조직력이 우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유통 체계는 선상 → 여객주인 → 중도아(中都兒) → 행상(行商) → 소비자로 계열화되었다. 이러한 유통 체계의 중심에는 여객주인이 있었고, 이들이 곧 경강상인이었다. 이 유통 체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객주인과 중도아 사이에 있어야 할 시전상인이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경강상인과 시전상인은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대립에서 금난전권은 시전상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경강상인이 유통 체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결탁할 필요도 있었다. 경강상인은 시전의 금난전권이나 그 밖의 관서의 침탈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경강상인과 권력의 결탁은 시전상인의 경우와 달랐다. 시전상인은 상업 이윤을 얻기 위해 권력과 결탁했다면, 경강상인은 자신들의 자본력과 조직망을 토대로 상업 이윤을 획득하는 한편, 그렇게 획득한 이윤을 지키기 위해 권력과 결탁하였다. 이 점에서 경강상인이 갖는 역사적 성격은 시전상인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었다.

변천

19세기에 경강상인들은 포구를 중심으로 한 시장권을 완전히 장악한 대상인(大商人)으로 성장하였다. 게다가 경강상인은 도고 상업뿐 아니라 조선(造船) 사업에도 눈을 돌려 밤섬 등지를 중심으로 산재하던 선장(船匠)들을 고용하여 조선업을 직접 경영하기도 하였다. 상업자본의 축적을 기반으로 조선업에 자본을 투자하였다는 점에서 경강상인이 단순한 수탈적인 존재에서 벗어나는 측면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는 한편 이들의 독점상업에 대해 도시 빈민을 비롯한 영세 소상인과 수공업자에 의한 도고 해체, 반도고(反都賈) 운동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1833년(순조 33)에 일어났던 쌀 폭동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세도정치가 정치 운영 원리로 작용하는 19세기 전반기에 유통 부분에 대한 권력기관의 개입으로 상업자본의 축적은 큰 제약을 받았다. 개항 이전의 상품유통 구조 속에서 상업자본의 축적은 경강상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이러한 제약 때문에 자본 축적의 정도는 개항 이후 침투한 외래 자본과 경쟁하여 승리할 만큼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4.
  • 고동환, 『조선 후기 서울 상업 발달사 연구』, 지식산업사, 1998.
  • 이욱, 「18세기 말 서울 상업계의 변화와 정부의 대책」, 『역사학보』 142,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