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려청(居廬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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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상 기간 중 후계 왕이 국장 이전까지 장례를 거행하기 위해 빈전 주변에 마련한 1칸의 여차(廬次).

개설

거려청이란 ‘거려(居廬)하는 곳’이란 의미이고, ‘거려’는 작은 초막을 뜻하는 ‘여차에 거처하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후계 왕은 선왕의 장례 이전에 관을 모시는 전각인 빈전(殯殿) 주변에 여차를 마련하고 머물렀는데, 그 장소가 바로 거려청이다. 따라서 거려청은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장례를 위해 빈전 주변에 임시로 마련한 건물이 바로 여차이자 거려청이었다.

위치 및 용도

조선시대 국왕이 승하하면 국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의 제사와 호위를 담당하는 빈전도감(殯殿都監)과 왕의 장례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국장도감(國葬都監) 그리고 왕릉 축조를 담당하는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었으며, 각 책임자로는 조정 대신이 임명되었다. 국왕의 승하 후 5일째에 입관하였고, 입관 후 후계 왕은 유교 예법에 따라 5개월 만에 국장을 치렀는데, 이 기간 동안 시신을 모시는 곳을 빈전이라고 하였다.

빈이란 건물 안에 시신을 가매장한 장소를 뜻하며, 손님이란 의미의 빈(賓)과도 통하였다. 자식의 입장에서 돌아가신 부로를 빈에 모실 때는 손님처럼 모신다는 뜻으로서, 죽은 자와 생전에 맺었던 혈연의 정을 점차 정리하라는 의미였다. 이 기간 동안 후계 왕은 빈전 주변의 여차에 거처하면서 수시로 빈전을 찾아 곡을 함으로써 어버이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다하였다.

『세종실록』 「오례」의 흉례(凶禮)에서는 국왕의 빈전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 설치하고, 여차는 빈전의 중문(中門) 밖에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세종실록』 오례 흉례 의식 여차], 이 여차가 바로 거려청이었다. 이는 조선전기에 경복궁이 정궁(正宮)이었기에 나타난 규정이었고, 실제는 근정전 이외 다른 건물에도 빈전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건물인가에 빈전이 설치되면 주변의 적당한 공간에 여차가 설치되었고, 이곳에서 후계 왕은 국장 전까지 머물며 장례를 거행하였다. 국장 이후에는 여차가 철거되고 위패를 모시는 혼전(魂殿)이 의례의 중심 공간이 되었다.

변천 및 현황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이 정궁으로서 근정전에 빈전이 설치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된 이후에는 더 이상 근정전에 빈전이 설치되지 않았다. 그 대신 창덕궁이나 창경궁에 빈전이 설치되고 그 빈전 주변에 거려청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후기에 빈전 및 거려청이 설치된 대표적인 건물은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이었다. 문정전은 숙종의 빈전, 경종의 빈전, 인조의 빈전 등으로 이용되었는데, 문정전의 행랑에 거려청이 설치되었다(『영조실록』 34년 4월 18일).

형태

태종이 승하한 후 빈전은 창덕궁 동쪽에 자리한 수강궁(壽康宮)에 마련되었는데, 당시 세종은 광연루(廣延樓) 동쪽에 한 칸의 초막으로 된 여차를 설치하였다(『세종실록』 4년 5월 14일). 조선시대에 비록 빈전의 장소와 여차의 장소는 무수하게 바뀌었지만 1칸의 초막으로 된 여차의 형태는 동일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재위 기간 중 여러 차례에 걸쳐 창경궁 문정전을 빈전으로 이용하고 문정전의 행랑에 거려청을 마련했던 영조는 「효소전단양제문(孝昭殿端陽祭文)」을 지어 문정전 재사(齋舍)에 게시하게 하였는데(『영조실록』 34년 4월 18일), 효소전은 숙종 왕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의 혼전 이름으로서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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