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후(姜裕後)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606년(선조39)~1666년(현종7) = 61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여수(汝垂), 호는 옥계(玉溪)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강극성(姜克誠)의 증손자다.

인조~효종 시대의 활동

1649년(인조27) 과거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에 임명되었고, 기장현감(機張縣監)으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예조좌랑,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효종(孝宗) 때 사간원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이보다 앞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김홍욱(金弘郁)이 강빈(姜嬪) 옥사(獄事)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그 벌이 그 아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강유후가 효종에게 간청하여 마침내 그 벌을 면하게 하였다. 시강원(侍講院)사서(司書), 병조정랑을 역임하고 경기도도사(都事)로 나갔는데, 청주(淸州)는 땅이 커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여 강유후를 청주목사(淸州牧使)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1659년(효종10)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가, 그해 암행어사(暗行御史)로서 호남 지방을 염찰(廉察)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대간(臺諫)으로서 있으면서 술사(術士)의 말에 따라 국장(國葬)의 기간은 그 달을 넘기는 것이 불가하다고 상소하였다가, 현종의 뜻을 거슬려서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좌천되었다. 그때 동료들이 위로하니, 그는 말하기를, “다만 노모와 멀리 떨어지는 것이 마음 쓰일 따름이다.” 하였는데, 그가 계모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안도 지방은 예로부터 권귀(權貴)들이 백성들의 전장(田莊)을 빼앗아 차지하였는데, 그가 목사로 부임하여 그 점탈한 땅을 찾아내어 모두 백성에게 돌려주었다. 1661년(현종2) 변방 지방의 강계부사(江界府使)를, 1663년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하고, 1665년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되어 8년 동안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다가, 1666년(현종7) 1월 해주(海州)의 수양관(首陽館)에서 갑자기 죽으니, 나이가 61세였다.

청나라 교역의 부정 부패 일소

당시 청(淸)나라 사신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사신의 뜻에 영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유독 강유후만은 정주목사로서 청나라 사신들이 요구하는 물건을 제대로 주지 않았는데, 사신을 접대하는 재상이 사단이 생길까봐 두려워하자, 그는 “내가 혼자 감당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는 한 마디 말로써 사신에게 그들이 원하는 바를 거절하니, 청나라 사신도 어쩔 수 없이 웃고 그만두었다.

강유후가 의주부윤으로 부임하였는데, 의주(義州)는 조선과 청나라의 교역(交易)을 담당하는 곳으로, 재용(財用)이 아주 컸고 교활한 관리도 매우 많았다. 관청의 창고를 조사해보니, 모자라는 돈이 누만 금(累萬金)이나 되었다. 이에 그는 장부를 살펴보고 관리들을 잡아다가 취조하여, 당장 공금을 모두 갚게 하였다. 그 중에서 가난해서 갚을 수 없는 자는 기간을 1년 동안 연장하여 갚게 하였다. 당시 역관, 장사치들이 의주를 근거지로 삼고 교역하였기 때문에 관가에 찾아오는 자들은 부정하지 않은 자가 드물었는데, 그가 부임한 이후로 감히 관가의 문전에 찾아오는 자가 없었다. 고을 사람들은 의주목사 중에서 강유후를 제일 훌륭한 수령관으로 꼽았으며, 청나라의 사신들도 역시 그를 제일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연천(漣川) 옥계(玉溪)의 선영(先塋)에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수촌집(水村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
  • 『명재유고(明齋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