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염
무염(無染) | |
대표명칭 | 무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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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Muyeom |
한자 | 無染 |
생몰년 | 801년-888년 |
시호 | 대낭혜(大朗慧) |
호 | 무량(無量), 무주(無住) |
법명 | 무염(無染) |
탑호 | 백월보광(白月葆光) |
성씨 | 김씨(金氏) |
승탑비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목차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낭혜화상 무염(朗慧和尙 無染)은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801년(애장왕 2) 태어났다.[1] 그의 집안은 조부 때까지는 진골 귀족이었지만 아버지 김범청(金範淸)에 이르러 육두품으로 강등된다.[2]
(대사의) 법호(法號)는 무염(無染)으로 달마대사의 10대 법손(法孫)이 된다. 속성(俗姓)은 김씨(金氏)로 태종무열왕이 8대조이시다. 할아버지는 주천(周川)으로 골품(骨品)은 진골이고 한찬(韓粲)[3]을 지냈으며, 고조부와 증조부는 모두 조정에서는 재상, 나가서는 장수를 지내 집집에 널리 알려졌다. 아버지는 범청(範淸)으로 골품이 진골에서 한 등급 떨어져서 득난(得難)[4]이 되었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탄생 설화
어머니 화씨(華氏)는 천인(天人)이 연꽃을 내려주는 꿈을 꾸고 대사를 잉태했으며, 다른 꿈에서는 한 도인(道人)에게 10계(戒)를 받았다.
어머니 화씨(華氏)가 꿈에 긴 팔을 가진 천인(天人)이 연꽃을 내려주는 것을 보고서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얼마 후에는 다시 꿈 속에 서역의 도인(道人)이 나타나서 스스로 법장(法藏)이라고 하면서 10계(戒)를 주면서 그것으로 태교(胎敎)를 하게 하였다. 마침내 1년이 지나서 (대사가) 태어났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유년기
무염은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 불렸다.[5]
대사는 아해(阿孩)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이니 중국말과 다르지 않다] 적에 걷거나 앉을 때 반드시 합장을 하고 가부좌를 하였으며, 여러 아이들과 놀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모래로 무엇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불상이나 탑을 본떴다. 하루도 부모님의 곁을 떠나지 않다가 아홉 살 때에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눈으로 본 것은 반드시 입으로 암송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해동의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출가수행
무염은 사람들이 공부하는 유학을 비롯한 법가(法家)나 명가(名家)사상들을 비루하다 느꼈다. 마침내 그는 공부를 그만두고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로 출가하여, 당시 중국에서 능가선(楞伽禪)을 배우고 돌아온 법성선사(法性禪師)에게 『능가경(楞伽經)』을 배웠다.[6]
열두 살을 넘기고 나서(13세)는 여러 학문을 비루하게 여기고 불도(佛道)에 들어가려는 뜻을 갖게 되었다. 먼저 어머니에게 그 뜻을 이야기하자 어머니는 이전의 꿈을 생각하고는 울면서 “예[우리말로 허락이다]”라고 하였다. 뒤에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자신이 늦게서야 깨달은 것을 후회하였으므로 기뻐하며 “잘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서 입으로는 경전을 부지런히 읽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데 힘을 다하였다. 이 절에 법성선사(法性禪師)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일찍이 중국에 가서 능가선(楞伽禪)을 배웠었다. 대사는 이분에게 수년간 배웠는데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이었으므로 법성선사가 말하기를 “빠른 발로 달린다면 뒤에 출발하여도 먼저 도착한다는 것을 나는 너에게서 직접 보았다. 나는 아는 것이 적어서 그대에게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다. 너와 같은 사람은 중국에 유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사는 “알았습니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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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법성선사는 무염에게 중국 유학을 권유했지만, 무염은 부석사(浮石寺)의 석징대사(釋澄大師)를 찾아가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자신이 바라는 성과를 이룰 수 없음을 느낀 무염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곧 그곳을 떠나 부석산(浮石山)의 석징대덕(釋澄大德)에게 화엄(華嚴)을 배웠는데, 하루에 서른 사람 몫의 공부를 하니 푸른 색과 붉은 색이 남초(藍草)와 천초(茜草)의 원래 색을 무색케 하는 것 같았다. 대사는 조그만 구멍에 담긴 물에서는 잔이 뜰 수 없듯,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곳에서는 자신의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생각하고서 “동쪽을 바라보기만 하다가는 서쪽의 담(중국)은 보지 못할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가 멀지 않을 터인데 어찌 살던 곳만 고집하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선뚯 산에서 나와 바다로 나아가 중국으로 건너갈 기회를 엿보았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구법유학
드디어 821년(헌덕왕 13) 무염은 친구인 도량(道亮)과 함께 중국으로 떠난다. 그러나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보름 동안을 표류하다가 지금의 흑산도 지역에 닿았으며, 마침 사신으로 중국에 가기 위해 그곳을 지나던 태종 무열왕의 9대손 김흔(金昕)의 도움으로 중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때마침 나라의 사신이 天子가 하사한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천자에 조회할 일이 있었으므로 그 배에 의지하여 중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거칠어져서 큰 배가 깨어지니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대사는 벗 도량(道亮)과 함께 한장 널판지에 걸터앉아 바람에 맡긴 채 떠다니게 되었다. 밤낮없이 반달 가량을 떠다닌 후에 검산도(劒山島 : 黑山島)에 표착(漂着)하게 되었다. 무릎 걸음으로 물가에 도착하여 한참이나 실의에 잠겨있다가 말하기를 “물고기 배 속에서도 간신히 몸을 건졌으니 용의 턱밑에도 손을 넣어 (바라는 구슬을) 아마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구르는 돌이 아니니 물러남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장경(長慶 : 821~824) 초에 조정사(朝正使)로 가게된 왕자 흔(昕)이 당은포(唐恩浦)에 배를 대었기에 태워줄 것을 부탁하니 그러라고 하였다. 마침내 지부산(之罘山) 기슭에 도착해서는 전에는 어려웠던 일이 이제 쉽게 됨을 생각하고서 해약(海若 : 바다의 신)에게 공손히 절하고서 “큰 파도를 자제하고, 바람의 마군과 잘 싸우셨습니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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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무염이 중국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지상사(至相寺)로, 이곳은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을 배운 곳이었다.[7] 그러나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산(麻谷山) 보철화상(寶徹和尙)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8]
그곳을 떠나 마곡(麻谷) 보철화상(寶徹和尙)을 찾아가 모시면서 힘든 일을 하는 것을 가리지 않고, 남이 하기 어려워 하는 것을 쉽게 해내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선문(禪門)에 있어서 유검루(庾黔婁)와 같은 남다른 행실을 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보철화상은 대사의 노력을 현명히 여기고서 하루는 불러서 말하기를 “전에 나의 스승인 마화상(馬和尙 : 馬祖道一)께서 나와 헤어질 때에 말씀하시길 ‘봄에 꽃이 많으면 가을에 열매가 적은 법이다. 보리수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을 슬프게 여긴다. 지금 너에게 심인(心印)을 전하니 후일에 제자 가운데 재주가 뛰어나서 북돋아 줄만한 사람이 있으면 북돋아 주어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간다는 말은 거의 예언에서 나온 말이니 해뜨는 곳(동쪽)에서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바탕이 거의 완숙해졌을 것이다. 만일 네가 동쪽 사람으로서 눈으로 말할 만한 사람을 얻어 잘 이끌어 지혜의 물이 바다 바깥(중국 바깥)에 까지 덮도록 한다면, 그 덕이 적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다. 스승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네가 왔으니 기쁘구나. 이제 심인(心印)을 전하여 동방에서 선종의 으뜸가는 사람이 되게 하니 가서 삼가 실행하거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지금은 강서(江西) 마조(馬祖)의 수제자이고, 후세엔 해동(海東) 선문(禪門)의 할아버지가 될 터이니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구나”고 하였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보철화상이 입적한 후 무염은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고독한 사람, 병고를 겪고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폈다. 이에 그의 이름이 중국 전역에 퍼졌고, 사람들은 그를 '동방의 대보살'이라고 불렀다.[9]
그곳에 머무른 지 얼마 안되어 보철화상이 세상을 떠나 묵건(墨巾)을 머리에 쓰고 이내 말하기를 “큰 배가 이미 떠나버렸는데 작은 배가 어디에 묶여 있을 것인가”라 하고 이때부터 각지를 유랑하였는데 바람처럼 하여 그 기세를 막을 수 없고,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분수(汾水)를 건너고 곽산(崞山)을 오르기까지 오래된 (불교의) 자취는 반드시 찾아가고, 참된 승려는 반드시 만나 보았다. 머무르는 곳은 인가를 멀리하였으니 그것은 위태로운 것을 편안히 여기고 고생을 달게 여기며, 몸은 종처럼 부리되, 마음은 임금처럼 받들기 위해서였다. 이런 가운데도 오로지 병든 사람을 돌보고, 고아와 자식없는 늙은이들을 도와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지독한 추위나 더위가 닥쳐,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손이 트고 얼음이 박히더라도 전혀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 이름을 듣는 사람은 멀리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의를 표하면서 동방(東方)의 대보살(大菩薩)이라고 크게 떠들어댔다. (중국에서의) 30여 년간의 행적은 이와 같았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귀국 및 활동
무염은 845년(문성왕 7) 중국에서 일어난 폐불(廢佛) 때문에 신라로 귀국했다.
회창(會昌) 5년(845)에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황제가 (외국 승려들을 귀국하도록)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나라 사람들이 서로 즐거워하며 말하기를 “여러 성(城)과 바꿀 수 있는 귀한 보배가 다시 돌아왔으니 이것은 하늘이 해주신 일로 땅에는 복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배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마치 벼와 삼같이 빽빽하였다. 서울에 들어와 어머니를 찾아뵈니 (어머니는) 크게 즐거워하면서 “돌이켜 보니 전에 내가 꾼 꿈이 우담화가 한 번 드러난 것이 아니겠느냐. 바라건대 내세를 제도하라. 나는 다시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같은 태종무열왕계 후손인 김흔의 후원으로 성주사(聖住寺)를 건립하고[10] 성주사를 선문구산(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교화하였다.[11] 「성주사사적기(聖住寺事蹟記)」에 따르면 이 사찰의 원래 이름은 오합사(烏合寺)였는데, 문성왕이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라 지어주고 대흥륜사에 편입시켰다.[12]
그때 마침 왕자 흔(昕)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산중(山中)의 재상(宰相)으로 불렸는데 우연히 바라는 바가 합치되었다. (昕이) 말하기를 “스님과 나는 함께 용수(龍樹) 을찬(乙粲)을 조상으로 하고 있으니, 스님은 안팎으로 모두 용수(龍樹)의 자손입니다. 참으로 놀라와 감히 미칠 바가 못됩니다. 그러나 바다 밖에서 함께 했던 일이 있으니 옛적의 인연이 결코 얕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웅천주(熊川州) 서남쪽 모퉁이에 절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나의 조상인 임해공(臨海公) [휘(諱)는 인문(仁問)이고, 당나라가 예맥(濊貊 : 실은 高句麗를 말함)을 정벌할 때에 공이 있어서 임해공(臨海公)으로 봉해졌다]께서 봉토로 받은 곳입니다. 그 사이 커다란 불이 일어나 사찰이 반쯤은 재가 되어버렸으니, 자비롭고 현명하신 분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부디 이 부족한 사람을 위하여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대사는 대답하기를 “인연이 있다면 머물러야겠지요”라고 하였다.
대중(大中 : 847~859) 초에 그곳으로 가서 머물기 시작하면서 말끔히 단장하였던 바, 얼마 되지 않아 도(道)가 크게 행하여지고 절은 크게 번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의 먼 곳에서부터 도(道)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천리 먼 길을 반걸음처럼 가깝게 여기고 찾아오니 그 수가 이루 셀 수 없었다. ...(중략)... 문성대왕(文聖大王)께서는 대사가 행하는 일이 왕도(王道)를 행함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들으시고는 매우 기특하게 여기셔서 급히 어찰을 보내어 위로하였으며, 또한 대사가 산중(山中) 재상(宰相)에게 대답한 네 마디 말[有緣則住]을 중하게 여기셔서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바꾸고 대흥륜사(大興輪寺)에 편입시키도록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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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무염은 문성왕을 비롯하여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등 역대 왕의 청으로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는데, 헌강왕은 그에게 '광종(廣宗)'이라는 법호를 내렸다.[13] 무염이 왕궁에 들어가면 왕이 직접 그에게 향을 올리고 제자의 예를 갖춰 삼배를 올렸다고 한다.[14]
임금께서 대사를 인견함은 선조(先朝 : 景文王) 때의 예절과 같았는데 예에 덧붙여진 것으로서 손꼽을 만한 것으로는, 임금께서 직접 음식을 봉양한 것이 첫째이고, 손으로 향을 전하신 것이 둘째이며, 몸·입·뜻의 삼업(三業)으로 세 번이나 경의를 표하신 것이 셋째이며, 작미로(鵲尾爐)를 잡고 영생의 인연을 맺은 것이 넷째이며, 법칭(法稱)에 '광종(廣宗)'을 더하여 준 것이 다섯째이며, 다음날 어진 이들에게 대사가 머무는 절에 나아가 기러기처럼 열을 지어 인사드리도록 한 것이 여섯째이며, 나라 안의 시(詩)를 짓는 사람들에게 대사를 송별하는 시(詩)들을 짓게 하여서 재가제자(在家弟子)인 왕족 소판(蘇判) 억영(嶷榮)이 가장 먼저 시(詩)를 지으니 그것을 거두어서 두루마리로 만들고, 시독(侍讀)이며 한림관(翰林官)인 박옹(朴邕)이 거기에 인(引)을 붙여서 떠날 때에 준 것이 일곱째이며, 행차를 담당하는 관리들에게 정결한 방을 준비하도록 거듭 명하여 그곳에서 작별하신 것이 여덟째이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입적
무염은 888년(진성여왕 2) 89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제자는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원장(圓藏), 영원(靈源), (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이 그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세웠다.[15] 법계는 무염 → 심광(深光) → 여엄(麗嚴)·현휘(玄暉) → 대통(大通)으로 이어진다.[16]
당(唐)나라가 무공(武功)으로 (黃巢의) 난을 평정하고 연호를 ‘문덕(文德)’으로 고친 해(888년) 11월 17일 해가 질 무렵, 신라(新羅 : 海東)의 두 임금에 걸쳐서 국사(國師)를 지내셨던 선승(禪僧) (朗慧)화상(和尙)께서 목욕을 마치신 후 가부좌를 하신 채 돌아가셨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슬퍼함이 마치 두 눈을 잃을 정도로 심하였는데 하물며 그 문하의 제자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아아! 이 땅에 태어나신 지 89년이 되었고, 승복을 입으신 지는 65년이 되었다. 돌아가신지 3일이 지나도 자리에 단정히 앉은 그대로였고, 얼굴 모습도 살아 계신 것 같았다. 문인(門人)인 순예(詢乂) 등이 소리내어 울며 유체(遺體)를 받들어 선실(禪室)에 임시로 모셔 두었다. 임금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며 사자(使者)를 보내어 글월로 조문(弔問)하시고, 곡식으로 부의(賻儀)하여 (葬禮의) 공양(供養)에 보탬으로써 죽은 분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셨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진성여왕은 무염에게 '대낭혜(大朗慧)'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의 이름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했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아가신 성주대사(聖住大師)는 참으로 부처님이 세상에 나신 것과 같은 분이셨다. 전에 나의 부왕(父王 : 景文王)과 헌강왕(憲(獻)康王) 모두 스승으로 섬기셔서, 오랫동안 나라에 이로움을 주셨다. 나도 왕이 되어서는 선왕들의 뜻을 이으려 하였으나, 하늘은 (그런 분을) 남겨주지 않았다. 이에 나의 마음이 더욱 애달프다. 생각컨데 큰 일을 한 사람에게는 큰 이름을 주어야 하므로 시호를 '대낭혜(大朗慧)', 탑의 이름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고 하노라."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지식관계망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와 낭혜화상 무염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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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무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A ekc:isSteleOf B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최치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A ekc:writer B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최인연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A ekc:calligrapher B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신라 진성여왕 | A는 B가 이름을 지었다 | A dc:contributor B |
김범청 | 무염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법성 | 무염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석징 | 무염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보철 | 무염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무염 | 심광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무염 | 여엄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무염 | 현휘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무염 | 자인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무염 | 영주 부석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무염 | 보령 성주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보령 성주사 | 신라 문성왕 | A는 B가 이름을 지었다 | A dc:contributor B |
성주산문 | 무염 | A는 B가 개창하였다 | A ekc:founder B |
구산선문 | 성주산문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무염 | 김흔(신라)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라 태종무열왕 | 무염 | A는 B의 선조이다 | A ekc:hasDescendant B |
신라 태종무열왕 | 김흔(신라) | A는 B의 선조이다 | A ekc:hasDescendant B |
무염 | 신라 문성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무염 | 신라 헌안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무염 | 신라 경문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무염 | 신라 헌강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무염 | 신라 정강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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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년 | 무염이 태어남. |
821년 | 무염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남. |
845년 | 무염이 신라로 귀국함. |
888년 | 무염이 입적함.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무염",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이일야, "성주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121쪽.
- ↑ 신라시대의 5관등 대아찬. "득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신라시대 신분계층의 하나. 일반적으로 신라 골품제에서 득난을 육두품의 별칭으로 이해하고 있다. "득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위석, "무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5월 2일. - ↑ 이일야, "성주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124쪽.
- ↑ 이일야, "성주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125쪽.
- ↑ 김위석, "무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5월 2일.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무염",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온라인 참조: "무염",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위석, "무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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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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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5월 2일. - 이일야, "성주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121-145쪽.
-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5-3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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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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