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여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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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엄(麗嚴)
BHST Monk1.png
대표명칭 여엄
영문명칭 Yeoeom
한자 麗嚴
생몰년 862년(경문왕 2)-929년(태조 12)
시호 대경대사(大鏡大師)
탑호 현기(玄機)
성씨 김씨(金氏)
본관 경주(慶州)
출신지 남포(藍浦: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승탑 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
승탑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정의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은 862년 충청남도 남포(藍浦: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에서 태어났다.[1]

Quote-left.png 대사의 법휘는 여엄(麗嚴)이요, 속성은 김씨(金氏)이니, 그의 선조는 계림 사람이었다. 먼 조상은 화주(華胄: 귀족의 자손) 출신으로 왕성에서 번연(蕃衍)한 귀족이었다. 그 후 관직의 임지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살다가 남포로 이사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사의(思義)인데 조상의 덕을 추모하였고, 오류(五柳) 선생과 같이 명예를 피하고 은거하였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깨어 보니 영광(靈光)이 방 안에 가득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87쪽.

온라인 참조: "보리사대경대사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출가수행

여엄은 9세 때인 870년(경문왕 10) 무량수사(無量壽寺)로 출가하여 주종(住宗)의 제자가 되었으며,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한 뒤 19세 때인 880년(헌강왕 6)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2]

Quote-left.png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려는 뜻이 간절하였으니 부모도 그의 뜻을 막지 못하여 문득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무량수사(無量壽寺)로 가서 주종법사(住宗法師)에게서 처음으로 화엄경을 배웠고, 그로부터 여러 괴류(槐柳: 여러 해를 경과하였다는 뜻)를 지났으니, 참으로 귀중한 바는 반년만에 화엄경의 백천게송(百千偈頌)을 외웠는데, 하루에 외운 량이 다른 사람이 30일 동안 걸려야 외울 수 있는 것이었다. 광명(廣明) 원년[3]에 비로소 계(戒)를 받고, 그 후 하안거(夏安居)를 하면서 초계비구(草繫比丘)와 같이 굳게 계를 지켰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87-88쪽.

온라인 참조: "보리사대경대사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그러나 교종(敎宗)의 가르침이 진실을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 아님을 느끼고, 선종(禪宗)으로 옮긴 뒤 성주사(聖住寺)무염(無染)을 찾아가서 수년 동안 수행하였다.

Quote-left.png 그러나 마침내 교종이 최상승의 진실이 아님을 깨닫고, 드디어 마음을 현경(玄鏡: 선종)으로 기울이고 눈을 보림사로 돌렸다. 이 때부터 서쪽을 향하여 숭엄산를 바라보다가 멀리 보령 성주사에 선지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행장을 정돈하여 달려가서 친견하니, 광종대사(廣宗大師: 무염국사의 시호)가 스님으로부터 뜻하는 바를 자세히 듣고 허락하여 입실(入室)시켰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88쪽.

온라인 참조: "보리사대경대사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887년(진성여왕 1)에 무염이 입적하자 영각사(靈覺寺) 심광(深光)의 밑에서 수행을 계속하였다.

Quote-left.png 거기서 수 년을 지낸 후, 광계(光啓)[4] 3년에 광종대사가 입적하였다. 그 후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리이(邐迤: 비스듬히 이리 저리 지나가는 모양)하게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영각산에 이르러 심광화상(深光和尙)을 친견하였으니, 이는 대경(大鏡)의 사형 뻘인데 오랫동안 마니(摩尼)를 온적하여 인중(人中)의 사자(師子)라고 존숭되었다. 그리하여 숭엄의 제자가 되었으니 모든 학자들이 우러러보았다. 부르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찾아오는 도리성혜(桃李成蹊)를 이루었으니, 그의 문하가 마치 저자거리와 같이 많았다. 아침에 셋, 저녁에 넷씩 찾아오되, 빈손으로 왔다가 가득히 채워서 돌아갔다. 대사는 여러 해 동안 심광화상을 복응(服膺)하면서 참선 수행을 계속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88-89쪽.

온라인 참조: "보리사대경대사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구법유학

이후 여엄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운거도응(雲居道膺)의 지도를 받았다.[5]

Quote-left.png 당나라에 도착한 스님은 강표(江表)를 거쳐 홍부(洪府)를 지나 계속 서쪽으로 상행하여 마침내 운거선사(雲居禪師)를 친견하였다. 대경대사를 본 운거는 "그대와 이별한지 그다지 멀지 아니한데, 여기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구려! 내가 운근(運斤)하고 있을 때에 자네가 찾아온 것을 기뻐한다"라고 말하였으며, 오사(吾師: 그대 또는 자네라는 뜻)가 법을 물어오니 "내 그대를 위하여 대답을 아끼지 않으리라"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90쪽.

온라인 참조: "보리사대경대사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여엄의 탑비인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碑) 비문의 도입부에서는 청원행사(靑原行思)에서부터 여엄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기술하고 있다.

Quote-left.png 조계(曹溪)의 직하(直下)에 쌍벽의 두 제자가 있었으니 하나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이고, 다른 하나는 청원행사(靑原行思)이다. 행사의 제자는 석두희천(石頭希遷)이고, 희천의 제자는 마곡보철(麻谷寶徹)이며, 보철의 제자는 운암담성(雲岩曇晟), 담성의 제자는 동산양개(洞山良价), 양개의 제자는 운거도응(雲居道膺), 도응의 제자가 바로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이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86쪽.

온라인 참조: "보리사대경대사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귀국 및 활동

여엄은 909년(효공왕 13)에 귀국하여 무주(武州) 승평(昇平: 지금의 순천)으로 돌아왔다.[6] 그러나 전란이 심하여 여러 곳으로 난을 피하였다가 소백산에 은거하였다.

Quote-left.png 이로써 대각의 마음을 전해 받고 운거의 심인(心印)을 전승하여 거듭 경수(鯨水)를 넘어 다시 제잠(鯷岑)으로 돌아오니, 이 때가 바로 천우(天祐) 6년[7] 7월이었다. 무주 승평에 도달하였다. 이후 배를 버리고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충주 월악산에 이르렀는데, 세상이 시끄러워 편안히 연좌(宴坐)할 곳이 없었다. 세상을 살펴보니 모두가 도탄에 빠져 있고, 인간을 돌아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비록 수석(水石)에 의지하나 어느덧 연진(煙塵)에 가까워지므로 다시 나령(奈靈: 경북 영주)으로 갔는데,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미봉을 바라보면서 은거하다가 다시 소백산으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91-92쪽.

온라인 참조: "보리사대경대사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이때 기주(基州: 지금의 풍기) 지역의 호족인 강훤(康萱)이 그의 감화로 깊이 불도를 믿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자 고려 태조는 즉시로 그를 맞아들여 보리사(菩提寺)에 있게 하고 극진히 대접하였다.[8]

Quote-left.png 여기에 기주의 제군(諸軍) 지휘권을 맡은 상국(上國)인 강훤(康萱)이 불심이 돈독하여 보수(寶樹: 교종)에 교풍을 흠모하여 선림(禪林: 선종)에 깊이 심취하였다.

...(중략)...
이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임금께 아뢰었더니 왕이 스님의 도덕이 중화에 으뜸으로 그 이름이 양국에 높았음을 감탄하여 봉필을 보내어 용지(龍墀: 왕궁)로 초빙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산골 바위의 빗장을 나와 옥연(玉輦: 서울, 개경, 왕궁의 뜻)에 도착하니 왕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깊이 찬앙(鑽仰)하는 마음이 다른 때보다 더욱 간절하였으니, 숙무제가 불교를 신봉한 것과 동등하게 비교하여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중략)...
또 고산(故山)을 생각하여 돌아가려 하므로 왕은 개경과 너무 멀다하여 지평 보리사를 수리하고 거기에 계시도록 요청하였다. 이 때 깊이 성은에 감읍하고 그 곳에 가서 주석키로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92, 93, 94쪽.

온라인 참조: "보리사대경대사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입적

여엄은 929년(태조 12) 후학의 지도에 전념하다가 보리사에서 입적하였다.

Quote-left.png 동광(同光) 7년(929) 11월 28일에 약간의 병세를 보이다가 그 다음 해 2월 17일에 법당에 앉아 입적하시니, 춘추는 69세요, 승랍은 50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햇빛은 처참하고 바람은 쓸쓸하였으며 구름은 탄식하는 듯 시냇물은 오열하였고, 천인(天人)은 애도하며 도속(道俗)은 모두 창자를 도려내는 듯 통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마(紺馬)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청오(靑烏) 또한 터를 점복하였으니 입적에 따른 상서가 전고(前古)로 듣기에 드물었다. 임금께서 스님의 니원(泥洹: 열반) 소식을 들으시고 가만히 슬픔에 잠겼다. 특히 조서(弔書)와 부의(賻儀)를 보내어 국사에 대한 예의를 다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94-95쪽.

온라인 참조: "보리사대경대사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태조는 '대경대사(大鏡大師)'라는 시호와 함께 '현기(玄機)'라는 탑호를 내렸다.[9] 여엄은 이엄(利嚴), 경유(慶猷), 형미(逈微) 등과 함께 해동사무외인(海東四無畏人) 중 1인이다.[10]

Quote-left.png 학업을 전해 받은 제자 융천(融闡)과 흔정(昕政) 등 500에 가까운 사람들이 공손히 스님의 유덕(遺德)을 펴고자 비석을 세울 것을 윤허해 달라는 표(表)를 올렸다. 그리하여 왕은 시호를 대경대사(大鏡大師)라 하고, 탑명을 현기지탑(玄機之塔)이라 추증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95쪽.

온라인 참조: "보리사대경대사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지식관계망

  •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와 대경대사 여엄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여엄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 여엄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최인연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고려 태조 A는 B가 이름을 지었다 A dc:contributor B
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 고려 태조 A는 B가 이름을 지었다 A dc:contributor B
사무외대사 형미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사무외대사 여엄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사무외대사 이엄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사무외대사 경유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도응 형미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도응 여엄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도응 이엄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도응 경유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무염 여엄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무염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심광 여엄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여엄 함양 영각사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여엄 양평 보리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여엄 강훤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여엄 고려 태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여엄 양평 보리사 A는 B에서 입적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고려 태조 사무외대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62년 여엄이 태어남.
870년 여엄이 출가함.
880년 여엄구족계를 받음.
909년 여엄이 귀국함.
929년 여엄양평 보리사에서 입적함.
939년 여엄의 탑비인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양평 보리사에 건립됨.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박상국, "여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박상국, "여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唐의 희종 연호. 880년 (신라 제47대 헌강왕 6).
  4. 唐의 희종 연호. 887년(신라 제51대 진성여왕 1).
  5. 박상국, "여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여엄",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唐의 소종 연호. 909년(신라 제52대 효공왕 13).
  8.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여엄",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9. 박상국, "여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여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 김혜완, 「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49, 2008, 257-292쪽.
  • 박상국, "여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지관,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78-99쪽.
  • 임세권, 「보리사 대경대사 현기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8: 고려2 비문2』, 한국국학진흥원, 2014, 5-1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8: 고려2 비문2",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 "여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여엄",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보리사대경대사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