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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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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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谷城 泰安寺 廣慈大師塔碑 |
이칭 | 대안사광자대사비(大安寺廣慈大師碑) |
주소 |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산18-1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275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01.21 |
찬자 | 손소(孫紹) |
서자 | 미상 |
각자 | 문민(文旻) |
승려 | 윤다(允多) |
승탑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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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泰安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 864-945)의 탑비.
내용
탑비
귀부(龜趺) 위에 이수(螭首)만 얹혀져 있는 상태로, 비신(碑身)은 파괴되었다.
탑비는 대사가 945년 입적하고 그로부터 5년 후인 950년에 조성되었다. 945년 대사가 입적한 후, 사리탑(보물 제274호)이 조성되고 950년(광종 1)에 탑비가 조성되었다.
이수(螭首)의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極樂鳥)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求禮 鷰谷寺 東 僧塔, 국보 제53호)이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求禮 鷰谷寺 北 僧塔, 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1]
비문
비문은 손소(孫紹)가 짓고, 문민(文旻)이 새겼으며, 글쓴이는 알 수 없다.
유당(有唐) 고려국(高麗國)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대안사(大安寺) 광자대사비문(廣慈大師碑文)과 아울러 서문.
태상(太相) 전수예빈령(前守禮賓令) 원봉령(元鳳令) 겸지제고(兼知制誥) 상주국(上柱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손소(孫紹)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사찬(沙粲) (결락) 監 (결락) 賜緋魚 (결락) 는 비문을 쓰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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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비신이 파괴되어 문헌을 통해서 비문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결락이 극심하여 후반부분은 거의 마멸 상태이고,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결락이 심하여 뜻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며,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은 거의 완비한 상태로 되어 있다.[3]
정간(井間)을 치고 쓴 이 비의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행서(行書)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초서(草書)도 간간히 나타나며, 또한 결체(結體)에 있어서 약간의 무리와 과장이 여실한 김생(金生)의 독특한 필치를 닮은 글씨들도 섞여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필력이 건경(健勁)하며 아취와 신운(神韻)이 감도는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비하여 서예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걸작이다.[4]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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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윤다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곡성 태안사 | A는 B에 있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손소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문민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조선금석총람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해동금석원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한국금석전문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
가릉빈가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 A는 B에 조각되어 있다 |
시각자료
답사 이후 추가 예정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탑비",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43쪽.
- ↑ 이지관,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탑비",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43쪽.
- ↑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1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