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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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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王羲之)
"왕희지", 『위키백과』.
대표명칭 왕희지
한자표기 王羲之
생몰년 303년-361년
이칭 왕우군(王右軍), 서성(書聖)
담재(澹斋)
일소(逸少)
출생지 진나라 저장 성 사오싱
사망지 진나라
국적 중국
유형 서예가



정의

중국 동진(東晉)시대의 서예가.

내용

개요

왕희지(王羲之)는 중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書聖:글씨를 빼어나게 잘쓰는 사람을 높여서 이르는말)으로 불린다. 예서(隷書)를 잘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의 서체를 완성하였다.[1] 왕희지의 공적으로 인하여 글씨는 단순히 기록의 수단을 넘어 예술로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2]

생애

왕희지는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임기현(臨沂縣)인 낭야(琅琊)에서 회남태수(淮南太守)를 지낸 왕광(王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숙부 왕도(王導)는 동진(東晉)[3] 왕조 건설의 일등공신이었고, 또 다른 숙부인 왕돈(王敦) 역시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4] 이러한 명문사족의 집안환경은 왕희지가 격조 높은 문예사조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5]

16살 때 동진의 명신 치감(郗鑒)의 눈에 들어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후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6]의 서풍을 배웠고, 한(漢)나라와·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하였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 궁중 도서관의 사무관에서 시작해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351년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7] 및 회계내사(會稽內史)에 이르렀다. 하지만 처음부터 출세보다는 도(道)를 추구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원하는 마음이 강해 부임한지 4년만에 사임하였다.[8] 왕희지는 회계에 머물며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다가 5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7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 또한 명필로 이름이 높아 보통 아버지인 왕희지와 더불어 이왕(二王)으로 겸칭된다.[9]

대표작품

해서(楷書)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10]》 《황정경(黃庭經)[11]》이, 행서(行書)로는 《난정서(蘭亭序)》, 초서(草書)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12]"》이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13]》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도 《상란첩(喪亂帖)[14]》, 《공시중첩(孔侍中帖)[15]》,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이 있다.[16]

난정서(蘭亭序)

난정서(蘭亭序)[17]는 왕희지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 353년 3월 3일에 왕희지를 비롯한 동진의 명사들 41명은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다. 이 때 참석자들이 지었던 시를 모아 책을 만들었는데 왕희지가 서문(序文)을 짓고 그 글씨를 손수 썼다. 이것이 바로 난정서이며 지금까지도 중국 서예의 최고 진품(珍品)으로 인정받고 있다.[18]

관련일화

왕희지의 거위사랑

왕희지는 거위를 매우 좋아하였다. 왕희지는 붓글씨를 더욱 생동감 있고 힘차게 표현하기 위해 늘 거위가 물에서 헤엄치는 모양을 본떠서 손목을 단련했다고 한다.[19] 어느날 산음에 사는 한 도사가 좋은 거위를 기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는데 도사는 왕희지에게 『도덕경(道德經)[20]』을 써주면 거위를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왕희지는 흔쾌히 써주고 거위를 모두 품에 안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일화와 관련해 전해내려오는 이백(李白)의 《왕우군(王右軍)》이라는 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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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右軍 왕우군
右軍本淸眞 왕희지는 타고난 본성이 청진하여
瀟灑出風塵 맑고 깨끗한 성정이 속세를 벗어났다네.
山陰遇羽客 산음에서 도사를 만나니
要此好鵝賓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 맞이하였네.
掃素寫道經 흰 비단에 도덕경을 쓰니
筆精妙入神 필법이 정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었네.
書罷籠鵝去 글씨 다 쓰고 거위를 조롱에 넣고 가니
何曾別主人 어찌 일찍이 주인과 작별인사인들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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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월간민화』online


나무판을 파고든 필력

왕희지의 필력(筆力)은 매우 출중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진나라 황제가 북교(北郊)에 제사를 드리러 갔을 때, 왕희지를 시켜 나무판 위에 제문을 쓰도록 한 다음 장인(匠人)을 보내 조각하도록 했다. 장인은 나무판을 한 층 한 층 깎아내서 왕희지 서법의 친필이 항상 보일 수 있도록 했는데, 세 번을 깎아내고 나서야 밑바닥이 보였다. 왕희지의 글씨가 나무판을 그렇게 깊게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21]

왕희지의 연습량

왕희지는 길을 걸어갈 때나 앉아서 쉴 때나 언제나 손가락으로 붓글씨를 쓰는 연습을 했다. 글자체의 구조와 필법을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면서 손가락으로 옷에 한 획 한 획 그려보곤 했는데,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나중에는 옷이 닳아서 구멍이 났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붓글씨 연습을 끝낸 후에 붓과 벼루를 집 앞에 있는 못에서 씻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 못의 물이 다 검어졌다고 한다. 하루는 부인이 그가 좋아하는 마늘과 떡을 가져왔는데,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붓글씨만 쓰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부인은 음식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서재를 나갔다. 얼마 후에 부인이 다시 서재로 가보았더니, 왕희지의 입 언저리가 온통 새까맣게 되어 있고 손에는 먹물이 잔뜩 묻은 떡을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22]

당태종이 사랑한 왕희지

당 태종(唐 太宗)은 왕희지의 서체에 깊게 빠져, 왕희지의 글자는 모두 모았으며, 《왕희지전론(王羲之傳論)》이라는 평론집을 만들어 왕희지를 연구하기도 했다. 당태종은 왕희지의 글을 베끼고, 행서(行書)를 익혔다. 이후 당태종은 해법추미(楷法遒美:글꼴은 반듯한 해서의 글꼴이어야 하고 운법은 힘과 조형미가 우러나야 한다)라는 서예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통치철학으로 내세우기도 했다.[23]

훌륭한 사위, 탄복동상(坦腹東床)

왕희지의 장인 치감(郗鑒)이 왕도 집안과 혼사를 결정했을때, 자신의 수하를 보내 사윗감을 물색했다. 왕희지의 형제들과 사촌들은 몸을 단장하고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 이리저리 모여 앉아 토론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희지는 침상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으면서, 누가 왔는지 전혀 신경을 안 쓰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 위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필체를 가다듬는 연습 중이었던 것이다. 치감은 결국 배를 드러내 놓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왕희지를 사위로 선택했다. ‘집안 자제들이 머무르는 동쪽 건물의 침상에서 배를 내놓은 사람’이라는 뜻의 ‘탄복동상(坦腹東床)’은 그에 관한 성어로, 지금은 훌륭한 사위라는 뜻으로 쓰인다.[24]

100전의 부채

하루는 왕희지에게 한 노파가 부채를 팔러왔다. 노파는 부채를 팔아 가족이 생계를 꾸려간다며 하나만 팔아달라고 간청했다. 왕희지가 하나에 얼마냐고 물으니 20전 이라고 하였다. 왕희지는 아무말도 없이 부채에 쓱쓱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파는 부채를 빼앗으며 온 집안의 생계가 걸린 부채에 글씨를 써서 망쳐놓는다며 크게 화를 내었다. 왕희지는 노파에게 시장에 가서 희지가 쓴 글씨라고 말하면 부채 하나에 100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노파는 황당했지만 왕희지가 하라는대로 하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금새 다 사갔다. 노파는 그제서야 왕희지의 정체를 알고 다시 부채를 가지고 왕희지에게 가서 한 번 더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지만 왕희지는 응대하지 않았다.[25]

책상위에 쓴 글씨

왕희지가 어느 날 한 제자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제자는 스승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좋은 음식을 준비하여 상을 차려 내놓았다. 왕희지는 제자의 지극한 정성에 너무 감동하여 글씨로서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방안 한쪽에 새로 만든 책상위에 반쪽은 초서를 쓰고 반쪽은 해서를 각각 써 주었다. 이후 제자는 스승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 사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책상 위를 깨끗이 닦아 버렸다. 제자는 존경하는 스승의 글씨를 잃어버린 것이 너무 안타까워 몇 날을 식음을 전폐하며 가슴앓이를 하였다.[26]

관련 탑비

국내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탑비문이 여러개 있다.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의 비문은 왕희지가 직접 쓴 행서체를 집자한 것이며,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의 비문은 당 태종이 쓴 왕희지체 행서를 집자한 것이다.

지식 관계망

  •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왕희지 왕헌지 A의 아들은 B이다
왕희지 해서 A는 B를 관련있다
왕희지 행서 A는 B를 관련있다
왕희지 초서 A는 B를 관련있다
왕희지 당 태종 A는 B와 관련있다
왕희지 왕희지체 A는 B와 관련있다

주석

  1. "왕희지", 『두산백과』online.
  2.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월간민화』online,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
  3. "동진, 『두산백과』online.
  4.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월간민화』online,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
  5. 李昇姸, 「王羲之의 道敎觀과 書藝」, 도교문화연구 제23집, 2005, 316쪽.
  6.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화문화사, 2010. 온라인참조: "위삭", 중국역대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왕우군(王右軍)이라는 그의 별칭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8. 처음부터 회계에서 벼슬을 한 것도 이곳의 아름다운 산천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왕희지".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9. "천하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와 가문 일화", 『열국연의』online, 작성일: 2011년 9월 27일.
  10.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온라인참조: "악의론", 미술대사전(용어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1. "황정경". 『두산백과』online.
  12. "십칠첩, 『두산백과』online.
  13. "순화각첩". 『두산백과』online.
  14.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온라인참조: "상란첩", 미술대사전(용어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5.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온라인참조: "공시중첩", 미술대사전(용어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6. "왕희지", 『두산백과』online.
  17.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온라인참조: "난정서",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8. "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월간민화』online, 지디비주얼, 작성일: 2016년 8월 13일.
  19.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왕희지".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0. "도덕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21.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왕희지".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2.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왕희지".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3. 하코, "중국 서성, 왕희지(王羲之)", 『네이버 블로그 - HaierKorea 친절한 하코씨』online, 작성일: 2014년 9월 10일.
  24. 강원구, "중국이야기 56- 서예의 성인, 왕희지(王羲之)의 난정(蘭亭)", 시민의소리, 작성일: 2012년 11월 22일.
  25. 甫岩 朴正植, "왕희지 일화(1)", 『다음 블로그 - 연우당』online, 작성일: 2010년 11월 23일.
  26. 甫岩 朴正植, "왕희지 일화(2)", 『다음 블로그 - 연우당』online, 작성일: 2010년 11월 23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