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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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2월 23일 (목) 01:56 판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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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대표명칭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한자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이칭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
주소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번지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658호
문화재 지정일 1979.05.22
찬자 권근(權近)
서자 천택[1]
각자 미상
승려 혼수(混修)
승탑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靑龍寺址)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고승 보각국사 혼수(普覺國師 混修)의 탑비.

탑비

전체높이 265.4cm, 비신높이 232.2cm, 너비 115.5cm, 두께 19.6cm.[2]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


Quote-left.png 임금이 본산(本山)에 대사의 탑을 세우게 하되, 경비는 모두 국고에서 부담하게 하고 역부(役夫)로는 부근 주민을 동원토록 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장엄이 주밀(周密)하고 조탁(彫琢)도 매우 우아하였다. 상수문인(上首門人)들이 다시 조정에 건의하되 “선사신(先師臣) 아모가 다행하게 임금님의 도움을 입어 탑을 세웠으니, 국은(國恩)이 망극하여 생전과 사후에 걸쳐 함께 영광이오나 아직 탑에 따른 비명(碑銘)이 없어 선사께서 생전에 쌓은 도행(道行)이 점차로 (결락) 윤몰(淪沒)할까 두렵사오니 비를 세우도록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수비(樹碑)를 허락하시고 미신(微臣)인 저에게 비문을 지어 스님의 선화(禪化)를 의양(宣揚)토록 하라 명하셨으나, 소(紹)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을 만한 재주도 못되며 학문(學問)도 오거(五車)의 책도 읽지 못한 변변치 아니한 선비이므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하여 주생(朱生)과 같이 근부(斤斧)를 잡고, 예씨(禰氏)를 칭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억지로 엮어 비문을 지었다. ..... 광덕(光德) 2년 세차 경술 10월 15일 세우고, 문민(文旻)이 글자를 새기다. Quote-right.png
출처:



이수의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極樂鳥)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求禮 鷰谷寺 東 僧塔, 국보 제53호)이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求禮 鷰谷寺 北 僧塔, 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3]

비문

비문은 손소(孫紹)가 짓고, 문민(文旻)이 새겼으며, 글쓴이는 알 수 없다. 비신이 파괴되어 문헌을 통해서 비문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결락이 극심하여 후반부분은 거의 마멸 상태이고,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결락이 심하여 뜻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며,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은 거의 완비한 상태로 되어 있다.[4] 정간(井間)을 치고 쓴 이 비의 글씨는 왕희지(王羲之)행서(行書)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초서(草書)도 간간히 나타나며, 또한 결체(結體)에 있어서 약간의 무리와 과장이 여실한 김생(金生)의 독특한 필치를 닮은 글씨들도 섞여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필력이 건경(健勁)하며 아취와 신운(神韻)이 감도는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비하여 서예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걸작이다.[5]

가상현실

답사 이후 추가 예정


갤러리

답사 이후 추가 예정


그래프

관련항목

각주

  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문화재검색, 문화재청.
  2.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忠州靑龍寺普覺國師幻庵定慧圓融塔碑)",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문화재청.
  3. 문화재청
  4. 이지관
  5. [네이버 지식백과]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泰安寺廣慈大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