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양주 회암사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30번째 줄: 30번째 줄:
 
[[조선 태조]]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ref>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ref>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년(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 태조]]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ref>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ref>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년(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가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이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었다.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 발굴하고 있다.<ref> 국내관광진흥팀,"[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6544&out_service=Y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ref>
+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가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이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었다.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 발굴하고 있다.<ref> 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6544&out_service=Y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101번째 줄: 101번째 줄:
 
* 한정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4301191 회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정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4301191 회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 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 국내관광진흥팀,"[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6544&out_service=Y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
* 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6544&out_service=Y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주석'''==
 
=='''주석'''==

2017년 5월 15일 (월) 23:29 판

양주 회암사지
(楊州 檜巖寺址)
대표명칭 양주 회암사지
한자 楊州 檜巖寺址
주소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 128호
문화재 지정일 1964년 6월 10일
건립시기 1328년(충숙왕 15)
창건자 지공
경내문화재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절.[1]


내용

역사

회암사가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나,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1174년(고려 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12세기쯤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2] 그 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이 중건하였다 한다. [3] 이 같은 내용은 고려 말에 목은 이색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총 262칸에 전각들로 이루어진 회암사의 가람은 동방에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4.5m)의 불상 7구와 10척(3m)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했다.[4]

조선 태조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5]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년(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가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이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었다.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 발굴하고 있다.[6]

지식 관계망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174년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328년 원나라에서 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서 회암사를 중창했다.
1378년 나옹이 회암사를 중건했다.
조선 태조 조선 태조가 무학을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722년 삼법이 쌍계사(옥천사)를 창건하였다.
1821년 이응준이 회암사에서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다
1828년 지공무학의 비를 원래 위치에 다시 세웠다
1964년 회암사지가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1996년~ 경기도 박물관에서 회암사지를 조사, 발굴하고 있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양주 회암사지 A는 B에 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양주 회암사지 A는 B에 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양주 회암사지 A는 B에 있다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나옹 A는 B를 위한 비이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무학 A는 B를 위한 탑이다
나옹 양주 회암사지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이색 양주 회암사지 A는 B와 관련있다
무학 양주 회암사지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보우 양주 회암사지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지공 양주 회암사지 A는 B를 창건하였다
조선 태조 양주 회암사지 A는 B와 관련있다

시각 자료

영상


참고문헌

주석

  1. 조유선,"양주 회암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10월 14일.
  2.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
  3. 한정수, "회암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
  5.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
  6. 국내관광진흥팀,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