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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백제 말기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있어 쌍릉이라 부르며, 북쪽의 것은 대왕묘, 남쪽의 것은 소왕묘라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백제 말기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있어 쌍릉이라 부르며, 북쪽의 것은 대왕묘, 남쪽의 것은 소왕묘라고 한다.
  
마한(馬韓)의 무강왕(武康王)과 그 왕비의 능이라고도 하며, 백제 [[무왕(백제)|무왕]](武王)선화비(善花妃)의 능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도굴된 기사가 있고, 1917년에 학술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그 구조는 원분(圓墳)으로 부여 능산리(陵山里)에 있는 백제 왕릉과 동일 형식에 속하는 판석제 굴식돌방으로 밝혀졌다.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당시의 돌방 안에서 비교적 완전한 나무널〔木棺〕이 출토되어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6·25전쟁 중 파손되었다. 지금은 복원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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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익산시에 위치하는 고대 무덤 2기. 7세기 백제 [[무왕(백제)|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적 제 87호.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도굴된 기사가 있고, 1917년에 학술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그 구조는 원분(圓墳)으로 부여 능산리(陵山里)에 있는 백제 왕릉과 동일 형식에 속하는 판석제 굴식돌방으로 밝혀졌다.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당시의 돌방 안에서 비교적 완전한 나무널〔木棺〕이 출토되어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6·25전쟁 중 파손되었다. 지금은 복원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발굴 당시 높이는 3.1m, 양 무덤의 너비는 약 0.5km였다. 현재는 보수되어 대왕묘의 지름은 30m, 높이는 5m, 소왕묘의 지름은 24m, 높이은 3.5m이다. 대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꼭대기에서 7.2m 아래에 있는데, 널방〔玄室〕 규모는 길이 3.80m, 너비 1.78m, 높이 2.27m이다. 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이 설치되었는데 널문〔羨門〕과 널길 입구는 판석을 세워 막았고 4면벽과 바닥·천장을 모두 돌널[板石]로 조립하였다. 바닥 중앙에는 널받침〔棺臺〕이 놓였다. 소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윗면에서 5.5m 아래에 있는데 돌방의 형식과 석재 등은 대왕묘와 같다. 널방은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1.7m로 규모가 약간 작다.
 
발굴 당시 높이는 3.1m, 양 무덤의 너비는 약 0.5km였다. 현재는 보수되어 대왕묘의 지름은 30m, 높이는 5m, 소왕묘의 지름은 24m, 높이은 3.5m이다. 대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꼭대기에서 7.2m 아래에 있는데, 널방〔玄室〕 규모는 길이 3.80m, 너비 1.78m, 높이 2.27m이다. 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이 설치되었는데 널문〔羨門〕과 널길 입구는 판석을 세워 막았고 4면벽과 바닥·천장을 모두 돌널[板石]로 조립하였다. 바닥 중앙에는 널받침〔棺臺〕이 놓였다. 소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윗면에서 5.5m 아래에 있는데 돌방의 형식과 석재 등은 대왕묘와 같다. 널방은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1.7m로 규모가 약간 작다.

2022년 9월 23일 (금) 16:07 판

익산 쌍릉(益山 雙陵)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백제시대 무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 6-13 등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백제 말기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있어 쌍릉이라 부르며, 북쪽의 것은 대왕묘, 남쪽의 것은 소왕묘라고 한다.

전라북도 익산시에 위치하는 고대 무덤 2기. 7세기 백제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적 제 87호.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도굴된 기사가 있고, 1917년에 학술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그 구조는 원분(圓墳)으로 부여 능산리(陵山里)에 있는 백제 왕릉과 동일 형식에 속하는 판석제 굴식돌방으로 밝혀졌다.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당시의 돌방 안에서 비교적 완전한 나무널〔木棺〕이 출토되어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6·25전쟁 중 파손되었다. 지금은 복원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발굴 당시 높이는 3.1m, 양 무덤의 너비는 약 0.5km였다. 현재는 보수되어 대왕묘의 지름은 30m, 높이는 5m, 소왕묘의 지름은 24m, 높이은 3.5m이다. 대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꼭대기에서 7.2m 아래에 있는데, 널방〔玄室〕 규모는 길이 3.80m, 너비 1.78m, 높이 2.27m이다. 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이 설치되었는데 널문〔羨門〕과 널길 입구는 판석을 세워 막았고 4면벽과 바닥·천장을 모두 돌널[板石]로 조립하였다. 바닥 중앙에는 널받침〔棺臺〕이 놓였다. 소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윗면에서 5.5m 아래에 있는데 돌방의 형식과 석재 등은 대왕묘와 같다. 널방은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1.7m로 규모가 약간 작다.

쌍릉이라는 말 자체는 봉분이 2개인 무덤을 뜻하는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즉 예를 들어 황남대총도 무덤의 형식을 말할 때 쌍릉이라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는 전북 익산시의 백제 무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 두 기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서의 쌍릉을 다룬다. 둘 중 큰 것을 대왕릉(또는 대왕묘, 북총), 작은 것을 소왕릉(또는 소왕묘, 남총)이라고 한다. 이 왕릉은 이미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 때에 도적들에 의해 도굴을 당했으며, 또한 백제 멸망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며 원래 주인이 누군지는 잊혀지고 마한의 무강왕의 능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근대 고고학적 접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있었다. 그리고 쌍릉을 조사하여 발굴한 유물들은 광복 이후로 한국에 남았다. 2018년에 쌍릉을 재발굴하여 정확한 실측조사를 했는데, 발굴과정에서 추가로 유물을 발굴하였다.


백제왕 계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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