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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초상(전신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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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초상>은 화폭이 상당히 크고 장황되지 않은 상태이다. [[신임]]의 81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화면 맨 윗 부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좌참찬을 지낸 충경공 한죽당 신선생의 초상(贈領議政 行左參贊 忠景公 寒竹堂 申先生眞.)”라고 적혀 있고 좌측 상단에는 “팔십일 세에 그리다(八十一歲寫.)“라고 쓰여 있다. 81세 때 1719년은 [[신임]]이 [[기로소]]에 들어간 해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단의 표제는 사 후 [[영의정]]에 추증 된 후 기록된 것이다.<br/>
 
<신임 초상>은 화폭이 상당히 크고 장황되지 않은 상태이다. [[신임]]의 81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화면 맨 윗 부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좌참찬을 지낸 충경공 한죽당 신선생의 초상(贈領議政 行左參贊 忠景公 寒竹堂 申先生眞.)”라고 적혀 있고 좌측 상단에는 “팔십일 세에 그리다(八十一歲寫.)“라고 쓰여 있다. 81세 때 1719년은 [[신임]]이 [[기로소]]에 들어간 해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단의 표제는 사 후 [[영의정]]에 추증 된 후 기록된 것이다.<br/>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신임]]의 [[신임 초상(단령본)|와룡관본 반신상]]도 전해오고 있다. 전신상에서 보이는 둥근 [[상투관]]과 달리 각이 진 형태이다. 전신상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얼굴, 복식의 전체적인 형태, 기본적인 화법이 동일하여 전신상과 거의 동시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와룡관]] 안의 머리와 [[상투관]]의 표현이  전신상보다 치밀하지 못하고, 수염 묘사 등 묘법이 성글며 옷의 주름선 표현도 간솔하여 일종의 부본(副本)이나 시험 삼아 그려본 시사본(試寫本) 형식으로 전신상과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ref>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221쪽.</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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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는 [[신임]]의 [[신임 초상(반신상)|와룡관본 반신상]]도 전해오고 있다. 전신상에서 보이는 둥근 [[상투관]]과 달리 각이 진 형태이다. 전신상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얼굴, 복식의 전체적인 형태, 기본적인 화법이 동일하여 전신상과 거의 동시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와룡관]] 안의 머리와 [[상투관]]의 표현이  전신상보다 치밀하지 못하고, 수염 묘사 등 묘법이 성글며 옷의 주름선 표현도 간솔하여 일종의 부본(副本)이나 시험 삼아 그려본 시사본(試寫本) 형식으로 전신상과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ref>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221쪽.</ref><br/>
<신임 초상>은 1710년작 〈[[심득경 초상]]〉과 함께 야복전신좌상의 이른 예이다. 또한 [[와룡관]]을 착용하고 [[불자]]를 든 자세, 형식, 적극적인 음영법의 사용 등 사대부 초상화 가운데 희귀한 형식의 초상으로 주목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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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초상>은 1710년작 〈[[심득경 초상]]〉과 함께 야복전신좌상의 이른 예이다. 또한 [[와룡관]]을 착용하고 [[불자]]를 든 자세, 형식, 적극적인 음영법의 사용 등 사대부 초상화 가운데 희귀한 형식의 초상으로 주목되는 작품이다.
  
 
===초상에 묘사된 모습===
 
===초상에 묘사된 모습===

2017년 11월 24일 (금) 02:33 판


신임 초상(전신상)
국립중앙박물관, "신임 초상", 소장품 검색, 『e뮤지엄』online, 문화체육관광부.
한자명칭 申銋 肖像
작가 미상
제작시기 1719년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유형 초상
크기(세로×가로) 151.5×78.2㎝


정의

조선시대 문신인 신임(1639∼1725)의 모습을 그린 초상.

내용

초상의 제작 및 보관

<신임 초상>은 화폭이 상당히 크고 장황되지 않은 상태이다. 신임의 81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화면 맨 윗 부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좌참찬을 지낸 충경공 한죽당 신선생의 초상(贈領議政 行左參贊 忠景公 寒竹堂 申先生眞.)”라고 적혀 있고 좌측 상단에는 “팔십일 세에 그리다(八十一歲寫.)“라고 쓰여 있다. 81세 때 1719년은 신임기로소에 들어간 해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단의 표제는 사 후 영의정에 추증 된 후 기록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신임와룡관본 반신상도 전해오고 있다. 전신상에서 보이는 둥근 상투관과 달리 각이 진 형태이다. 전신상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얼굴, 복식의 전체적인 형태, 기본적인 화법이 동일하여 전신상과 거의 동시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와룡관 안의 머리와 상투관의 표현이 전신상보다 치밀하지 못하고, 수염 묘사 등 묘법이 성글며 옷의 주름선 표현도 간솔하여 일종의 부본(副本)이나 시험 삼아 그려본 시사본(試寫本) 형식으로 전신상과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1]
<신임 초상>은 1710년작 〈심득경 초상〉과 함께 야복전신좌상의 이른 예이다. 또한 와룡관을 착용하고 불자를 든 자세, 형식, 적극적인 음영법의 사용 등 사대부 초상화 가운데 희귀한 형식의 초상으로 주목되는 작품이다.

초상에 묘사된 모습

<신임 초상>은 와룡관을 쓰고 옅은 녹포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이다. 안면은 좌안칠분면이고 몸체는 거의 구분면이다. 특이하게 손이 노출되어 있고 양손으로 불자를 들고 있다. 가는 손가락과 잘 다듬은 손톱이 너무 고와서 노인의 손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신발은 가죽에 비단을 댄 태사혜를 신고 있으며, 바늘땀을 일일이 그려 묘사하였다. 족좌대의 나무결은 몰골법으로 묘사하였다.[2] 안면은 윤곽선과 이목구비를 선묘로 그리고 선염으로 입체감을 주었다. 얼굴은 아주 마른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눈은 푹 꺼져 있고 검버섯이 얼굴 전체에 퍼져 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신임 초상(전신상) 초상 A는 B에 해당한다 A dcterms:type B
신임 초상(전신상) 신임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신임 초상(전신상) 국립중앙박물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신임 초상(전신상) 신임 초상(단령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임 초상(전신상) 국립중앙박물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신임 초상(전신상) 심득경 초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심득경 초상 심득경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심득경 초상 윤두서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심득경 윤두서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심득경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좌안칠분면 신임 초상(전신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와룡관 신임 초상(전신상)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녹포 신임 초상(전신상)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불자 신임 초상(전신상)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태사혜 신임 초상(전신상)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719년 신임 초상(전신상)이 제작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238510 126.9804700 신임 초상(전신상)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221쪽.
  2.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초상화 I』 국립중앙박물관, 2008, 198쪽.
  3. 국립중앙박물관, "신임 초상", 소장품 검색, 『e뮤지엄』online, 문화체육관광부.
  4. 국립중앙박물관, "신임 초상", 소장품 검색, 『e뮤지엄』online, 문화체육관광부.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1. 전시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