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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고고학적 접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있었다. 그리고 쌍릉을 조사하여 발굴한 유물들은 광복 이후로 한국에 남았다. 2018년에 쌍릉을 재발굴하여 정확한 실측조사를 했는데, 발굴과정에서 추가로 유물을 발굴하였다.
 
근대 고고학적 접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있었다. 그리고 쌍릉을 조사하여 발굴한 유물들은 광복 이후로 한국에 남았다. 2018년에 쌍릉을 재발굴하여 정확한 실측조사를 했는데, 발굴과정에서 추가로 유물을 발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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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쌍릉 무덤주인 논란 ‘[[무왕(백제)|무왕]]’으로 일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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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슈의 화수분이 된 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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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쌍릉 인골 분석결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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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사망한 큰 키의 50대이상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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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주인은 백제 [[무왕(백제)|무왕]]’ 사실상 결론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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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전주박물관 ‘젊은 여성’ 추정 뒤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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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발굴할 소왕릉 선화공주 실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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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백제)|무왕]]이 확실합니다. 무덤 주인을 둘러싼 논란은 사실상 일단락됐다고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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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언론설명회장에서 만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사람들의 말이다. 그들은 설명회장에 공개된 뼈들을 지켜보며 자신만만해 했다. 설명회는 전북 익산 쌍릉의 대왕릉 발굴 과정에서 나온 인골에 대해 과학적 분석결과를 밝히는 자리였다. 연구소의 발표내용을 요약하면, 인골의 주인공은 [[무왕(백제)|무왕]]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과학적 분석과 추론을 통해 인골의 면면을 살펴본 결과 7세기 초중반 숨진 60~70대 이상 노년층 남성의 것으로 드러났고, 이런 정황에 부합하는 당대 백제 왕은 600년 즉위해 641년 숨진 [[무왕(백제)|무왕]]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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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석왕동 숲 속에 자리한 쌍릉은 <서동요> 설화의 주역인 [[무왕(백제)|무왕]]의 무덤이란 설이 전해져오는 대왕릉과 <서동요>에서 [[무왕(백제)|무왕]]의 연인으로 나오는 신라 선화공주의 것이란 설이 있는 소왕릉(작은 무덤)으로 나뉘어 있다. 대왕릉은 1917년 일본 학자 야쓰이 세이이쓰가 처음 조사해 치아와 목관의 관재, 토기 등을 처음 발굴했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첫 발굴 100년만인 지난해부터 재발굴을 벌여 무덤 안에서 정체불명의 인골들을 채운 나무상자를 발견해 지난 4월 공개했다. 그 뒤 인골의 정체가 [[무왕(백제)|무왕]]인지를 놓고 논란이 뜨거웠는데, 연구소가 논란에 마침표를 찍을 만한 결과를 이날 공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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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무덤 속에 남은 유골 조각 102개체를 대상으로, 고고학과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 수종 등을 심층조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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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만에 재조사한 익산 쌍릉 석실 내부 모습과 그 안에서 나무상자에 든채 발견된 인골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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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성별은 확실한 남성으로 판명됐다. 팔꿈치 뼈의 각도(위 팔뼈 안쪽 위 관절융기 돌출양상), 발목뼈의 일부인 목말뼈의 크기, 넙다리뼈 무릎 부위의 너비 등을 볼 때 남성의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정강이뼈 시료를 미국 베타연구소에 의뢰해 가속 질량분석기(AMS)로 방사성탄소연대를 재보았더니 보정연대가 620~659년으로 나왔다. 즉 인골의 주인은 7세기 초중반의 어느 시점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알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연구소는 600년 즉위해 641년 사망한 [[무왕(백제)|무왕]]의 재임 기록으로 미뤄 10대 또는 20대에 즉위한 [[무왕(백제)|무왕]]의 사망 연령은 쌍릉의 인골 추정 연령과 비슷해진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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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3일 (금) 16:24 판

익산 쌍릉(益山 雙陵)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백제시대 무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 6-13 등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백제 말기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있어 쌍릉이라 부르며, 북쪽의 것은 대왕묘, 남쪽의 것은 소왕묘라고 한다.

전라북도 익산시에 위치하는 고대 무덤 2기. 7세기 백제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적 제 87호.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도굴된 기사가 있고, 1917년에 학술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그 구조는 원분(圓墳)으로 부여 능산리(陵山里)에 있는 백제 왕릉과 동일 형식에 속하는 판석제 굴식돌방으로 밝혀졌다.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당시의 돌방 안에서 비교적 완전한 나무널〔木棺〕이 출토되어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6·25전쟁 중 파손되었다. 지금은 복원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발굴 당시 높이는 3.1m, 양 무덤의 너비는 약 0.5km였다. 현재는 보수되어 대왕묘의 지름은 30m, 높이는 5m, 소왕묘의 지름은 24m, 높이은 3.5m이다. 대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꼭대기에서 7.2m 아래에 있는데, 널방〔玄室〕 규모는 길이 3.80m, 너비 1.78m, 높이 2.27m이다. 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이 설치되었는데 널문〔羨門〕과 널길 입구는 판석을 세워 막았고 4면벽과 바닥·천장을 모두 돌널[板石]로 조립하였다. 바닥 중앙에는 널받침〔棺臺〕이 놓였다. 소왕묘의 돌방 바닥은 봉분 윗면에서 5.5m 아래에 있는데 돌방의 형식과 석재 등은 대왕묘와 같다. 널방은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1.7m로 규모가 약간 작다.

쌍릉이라는 말 자체는 봉분이 2개인 무덤을 뜻하는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즉 예를 들어 황남대총도 무덤의 형식을 말할 때 쌍릉이라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는 전북 익산시의 백제 무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 두 기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서의 쌍릉을 다룬다. 둘 중 큰 것을 대왕릉(또는 대왕묘, 북총), 작은 것을 소왕릉(또는 소왕묘, 남총)이라고 한다. 이 왕릉은 이미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 때에 도적들에 의해 도굴을 당했으며, 또한 백제 멸망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며 원래 주인이 누군지는 잊혀지고 마한의 무강왕의 능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근대 고고학적 접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있었다. 그리고 쌍릉을 조사하여 발굴한 유물들은 광복 이후로 한국에 남았다. 2018년에 쌍릉을 재발굴하여 정확한 실측조사를 했는데, 발굴과정에서 추가로 유물을 발굴하였다.

익산 쌍릉 무덤주인 논란 ‘무왕’으로 일단락 역사 이슈의 화수분이 된 쌍릉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쌍릉 인골 분석결과 발표 “7세기 사망한 큰 키의 50대이상 남성” ‘무덤주인은 백제 무왕’ 사실상 결론 지어 2년전 전주박물관 ‘젊은 여성’ 추정 뒤집어 향후 발굴할 소왕릉 선화공주 실체 나올까

“백제 무왕이 확실합니다. 무덤 주인을 둘러싼 논란은 사실상 일단락됐다고 보면 됩니다.”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언론설명회장에서 만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사람들의 말이다. 그들은 설명회장에 공개된 뼈들을 지켜보며 자신만만해 했다. 설명회는 전북 익산 쌍릉의 대왕릉 발굴 과정에서 나온 인골에 대해 과학적 분석결과를 밝히는 자리였다. 연구소의 발표내용을 요약하면, 인골의 주인공은 무왕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과학적 분석과 추론을 통해 인골의 면면을 살펴본 결과 7세기 초중반 숨진 60~70대 이상 노년층 남성의 것으로 드러났고, 이런 정황에 부합하는 당대 백제 왕은 600년 즉위해 641년 숨진 무왕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익산시 석왕동 숲 속에 자리한 쌍릉은 <서동요> 설화의 주역인 무왕의 무덤이란 설이 전해져오는 대왕릉과 <서동요>에서 무왕의 연인으로 나오는 신라 선화공주의 것이란 설이 있는 소왕릉(작은 무덤)으로 나뉘어 있다. 대왕릉은 1917년 일본 학자 야쓰이 세이이쓰가 처음 조사해 치아와 목관의 관재, 토기 등을 처음 발굴했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첫 발굴 100년만인 지난해부터 재발굴을 벌여 무덤 안에서 정체불명의 인골들을 채운 나무상자를 발견해 지난 4월 공개했다. 그 뒤 인골의 정체가 무왕인지를 놓고 논란이 뜨거웠는데, 연구소가 논란에 마침표를 찍을 만한 결과를 이날 공개한 것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무덤 속에 남은 유골 조각 102개체를 대상으로, 고고학과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 수종 등을 심층조사했다고 한다.

100년만에 재조사한 익산 쌍릉 석실 내부 모습과 그 안에서 나무상자에 든채 발견된 인골들의 모습.

우선 성별은 확실한 남성으로 판명됐다. 팔꿈치 뼈의 각도(위 팔뼈 안쪽 위 관절융기 돌출양상), 발목뼈의 일부인 목말뼈의 크기, 넙다리뼈 무릎 부위의 너비 등을 볼 때 남성의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정강이뼈 시료를 미국 베타연구소에 의뢰해 가속 질량분석기(AMS)로 방사성탄소연대를 재보았더니 보정연대가 620~659년으로 나왔다. 즉 인골의 주인은 7세기 초중반의 어느 시점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알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연구소는 600년 즉위해 641년 사망한 무왕의 재임 기록으로 미뤄 10대 또는 20대에 즉위한 무왕의 사망 연령은 쌍릉의 인골 추정 연령과 비슷해진다고 짚었다.


백제왕 계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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