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포 서일의 독립운동과 자유시참변- 장 우 순 (성균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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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 서일의 독립운동과 자유시참변- 장 우 순 (성균관대학교)

1. 자유시 참변과 독립운동가 서일

‘자유시참변’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었다. 그간 ‘자유시참변’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다. 자유시참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생산되었다. 신재홍, 「自由市慘變에 對하여」, 『백산학보』 14, 백산학회, 1973 ; 조규태, 「3·1운동후 노령지역의 무장독립운동과 자유시참변」, 『순국』 113, 순국선열유족회, 2000 ; 윤상원, 「자유시사변 전후 조선인 무장부대 통합운동」, 고려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 윤상원, 「‘자유시사변’의 성격에 관한 몇가지 문제」, 『사림』 17, 수선사학회, 2002 ; 주미희 「이용의 민족운동연구 : 1910∼1920년대 항일독립운동을 중심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생존한 관련자가 거의 없고, 관련 자료 역시 찾기 어렵기 때문이겠지만, 연구자들의 무관심이 더 큰 원인일 수 있다. 봉오동대첩, 청산리대첩, 임시정부, 3.1운동 등 한국 사회 주류가 선호하는 주제에 연구의 자원과 역량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소비에트화된 러시아 경내에서 그것도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계열 간 갈등으로 비추어질 수 있는 사건은 그다지 매력적인 연구 주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은 1920년 독립전쟁의 귀결점이며, 이후 항일무장투쟁의 새로운 기점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의 가장 중요한 변곡점의 하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전술·전략의 관점에서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이후의 민족운동은 서로 다른 전망과 노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세력은 볼셰비키적 민족혁명의 전망을 공유한 채 소련에 남았고, 만주를 근거지로 삼았던 세력들의 운동은 한인 자치 및 실력양성을 표방한 삼부를 건립하는 과정으로 수렴되었다. 서일에 대한 연구 역시 아직은 미진하다. 사료의 부족과 더불어 몰락한 대종교의 교세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주로 그의 사상이나 독립운동을 다룬 단편적인 연구들 신용하, 「대한(북로)군정서독립군의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집,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 강용권, 「민족독립운동과 서일」, 『수촌 박영석교수회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 논총』, 탐구당, 1992 ; 복기대, 「한국 민족주의와 서일」, 『고조선연구』 제2호, 지식산업사, 2014 ; 「김동환, 백포 서일 대일항쟁의 철학적 배경」, 『고조선연구』 제2호, 지식산업사, 2014 ; 정길영, 「서일의 대한군정서 설립과 상해임시정부에서 역할」, 『고조선연구』 제2호, 지식산업사, 2014 ; 이숙화, 「대한군정서의 성립과 독립군단 통합운동 : 총재 서일의 활동시기를 중심으로」, 『역사문화연구』 63집, 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문화연구소, 2017 ; 신운용, 「대종교인 서일의 대일항쟁과 그 의미」, 『군사논단』 통권 75호, 한국군사학회, 2013 ; 조준희 「서일의 대종교『오대종지강연』」, 『숭실사학』 29집, 숭실사학회, 2012 ; 이동언 「서일의 생애과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과 그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다룬 연구 정길영, 「백포 서일 연구 : 대일항쟁을 중심으로」, 국제뇌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등이 생산되었지만, 종교나 사상적인 측면에 치우쳐 객관적인 시각으로 독립운동가, 혹은 민족운동가로서 서일을 조명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종교인 서일이 아닌 독립운동가로서 서일을 독립운동의 전술과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경신참변 및 자유시참변과 연결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독립운동가 서일과 1920년 독립전쟁 발발의 내·외적 요소

객관적으로 서일의 독립운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종교인, 저술가, 철학자로 그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일정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그가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의 총재이자 대종교의 주요인물이었다는 이유로, 그의 대종교 활동 자체를 독립운동으로 보는 시각은 올바른 관점이라고 보기 어렵다. 모든 대종교 신도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았고, 모든 독립군이 대종교 신도가 아니며, 대종교의 모든 활동이 독립운동이 아닌 이상 이런 단순한 등치는 객관적인 사실과 배치되며, 또 다른 선험의 동굴 속에 논의를 가둘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서일이 시기별, 단계별로 어떻게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실천하였는지 전술, 전략의 차원에서 그의 독립운동 전반을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사실에 접근하는 보다 유용한 방법일 수 있다. 서일은 1881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하였다. 10세가 되던 해부터 경원의 名儒인 金魯奎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였는데, 강한 민족의식을 가진 김노규의 영향으로 일찌기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김노규가 지은 『북여요선』 등에는 강렬한 민족의식이 드러난다. 정길영 등은 김노규가 중화주의를 버리지 못한 유학자라며 그 사상적 한계를 지적하고, 서일대종교에 입교한 것도 그가 추구하던 것이 김노규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편협한 세계관에 근거한 주관적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나철, 김교헌, 박은식, 신채호 등 대종교 핵심인물 대다수의 학문적 기반 역시 유학이었다. 유학을 신념이 아닌 학문으로 이해한 유학자들이 전통적 평등관을 바탕으로 실학을 정립하였고, 이런 전통은 동학, 대종교 등 혁신적 민족신앙이 탄생하는 사상적 토양이 되었다. 종교나 사상은 시대적 환경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는 생물과 같은 존재다. 한 시기의 종교나 학문의 특징이 결코 그 종교나 학문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이 될 수 없다. 조선과 달리 중국과 일본에서는 유학이 실용적인 학문으로 기능하였고, 삼국시대에도 제도적 관점에서 수용되었다. 개인의 사상 역시 변증법적인 변화, 발전의 과정을 통해 단절이 아닌 연속적인 진화의 궤적을 거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서일의 시기별 사상의 변화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발전과정의 일부일 것이다. 김노규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독립운동가 서일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1898년까지 유학을 수학한 서일은 후일 咸一學校로 개편되는 鏡城有志義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학습한다. 그가 유지의숙에 입학한 것은 1902년이라는 졸업 시기를 고려할 때 1899년의 일로 추정된다. 신학문 학습은 김노규를 통해 각성한 민족의식이 근대적 전망과 과학적 확장성을 획득하여, 실천적 역량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유지의숙을 졸업한 서일은 고향에서 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10년 가까이 교육과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서일이 얘국계몽운동에 참여한 증거는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유지의숙 출신들이 대부분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서일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과정을 김노규의 가르침에서부터 일관되게 발전, 성장한 그의 민족의식에서 찾는다면 망명과 독립운동을 결행하기 전에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정한 시간 및 활동의 축적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이 시기 유지의숙 출신인 현천묵 등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을 것이다(김일, 『항일전기 백포종사-순국선열 독립군총재 서일 장군 항일전기』, 장백산문학사, 6-7쪽). 함일학교로 연결되어있던 이운협(유지의숙과 후신인 함일학교의 설립자)과 현천묵이 대한협회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서일 역시 대한협회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국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낀 그는 가족과 함께 1911년 봄에 망명을 결행하여 동만의 왕청현 덕원리에 정착한다. 김일, 『항일전기 백포종사-순국선열 독립군총재 서일 장군 항일전기』, 장백산문학사, 10-13쪽(출간시기 미상). 김일은 그가 쓴 서일의 전기에서 망명의 직접적 동기를 경원경찰서의 서일 일가에 대한 탄압을 들고 있다. 그가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한 것이 사실이라면, 일정한 타당성이 있는 분석이다. 그는 1911년 초에 명동학교를 설립하는 등 이주 한인들의 실력양성을 위한 지역적 기반을 조성하였고, 기존 기록과 연구에서는 1912년에 명동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김일이 쓴 전기에서는 1911년 초에 심권, 박승익 등과 상의하여 그들이 운영하던 한학서당에 사립 명동학교를 개설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중광단의 조직에 앞서 학교를 설립하였다는 것은 서일의 국내 활동이나 전력 등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설명이다(김일, 앞의 책, 17쪽). 10월에는 중광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조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단체로 서일이 총재를 맡았다(「대한군정서약사」, 『독립신문』 1920년 4월 22일자). 중광단의 조직 시기를 1911년 3월로 보는 국내의 기록들은 신뢰하기 어렵다. 대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망명을 하자마자 대종교인들을 규합하여 대종교 관련 단체를 결성하고, 총재가 되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서일대종교의 관계가 설명되지 않는다. 김일이 쓴 전기에서는 1911년 10월 3일 개천절에 단군시조에게 제를 올리고 중광단을 조직한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한국의 기록보다 전·후의 상황에 잘 부합한다(김일, 앞의 책, 20쪽). 중광단이 1911년에 조직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1971년 간행된 『대종교중광육십년사』에 기록된 서일대종교 입교 시기 ‘1912년 10월’은 오류로 판단된다. 대종교 신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에서 신도가 아닌 사람이 단장을 맡았다는 것은 상식과 배치된다. 중광단을 조직할 때 서일은 대종교적 배경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망명을 결행하는 1911년 3월 이전 국내에서 대종교에 입교하였거나, 적어도 중광단이 조직되는 1911년 음력 10월 3일 이전에는 입교를 한 것으로 보인다. 서일은 만주 한인사회에서 대종교를 포교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가 포교에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은 이동언의 분석처럼 한인 다수가 함경도 출신인 것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 이동언, 앞의 글, 54-55쪽. 하지만, 동향이라는 이유만으로 포교가 쉽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동만 지역의 기독교 관련자 역시 대부분 함경도 출신이었다. 1906년에 설립한 한북흥학회나, 한북흥학회, 서우학회의 통합으로 1908년에 설립된 서북학회의 기관지에 단군 관련 주제가 꾸준히 제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박은식, 「본회취지서」, 『서우』 1호, 1906(『백암박은식전집』 5권, 백암박은식전집편찬위원회, 2002, 324-325쪽) ; 박은식, 「서부학회취지서」, 『서북학회월보』 15호, 1908(앞의 책 『백암박은식전집』 5권, 378쪽). 이는 일제의 강점 이전 이미 함경도와 평안도 주민들 사이에 단군에 대한 인식이 폭넓게 확산되었다는 의미로, 이러한 단군에 대한 대중적 정서가 대종교를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심리적 기반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단군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을 공유한 지역 사회에서 단군에 대한 인식을 보유한 상태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쉽게 대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서일의 탁월한 종교적, 철학적 식견과 뛰어난 인품 역시 대종교 전파의 중요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종전, 전후 처리를 위해 열렸던 파리강화회의, 러시아혁명 등은 한국의 독립과 관련된 국제정세에 커다란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 이들 사건은 동학농민혁명 이래 축적되어온 한국인의 근대적 ‘민족의식’을 자극하였고, 마침내 1919년 3.1운동을 통해 처음으로 한민족을 근대적 민족 정체성으로, 근대적 민족 실체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토록 하였다. 농업기반의 전통 산업구조가 재편되고, 일제에 의해 근대 산업들이 이식되면서 근대적인 직업군이 형성되었고, 역설적으로 이들에 의해 혁신적인 근대 민족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마르크스가 설파하였듯이 제국은 식민지를 착취하기 위해 제국의 기제를 이식하지만, 동시에 노동계급과 그들의 계급의식 역시 확산시킨다. 일제에 의한 근대 산업의 조선 이식은 조선과 조선인들을 착취하기 위해 진행되었지만, 역설적으로 혁명적인 계급의식을 가진 임금노동자를 양산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3.1운동 이전, 공장노동자, 광산노동자, 부두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빈번하게 파업이 발생하면서 맹아적 형태의 근대적 계급의식과 식민지적 불평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었고, 3.1운동을 계기로 노동자는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각성하며, 민족운동의 주체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실제로 3월 하순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의 60%는 노동자였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권(1973)을 참고). 일제의 식민정책과 수탈이 3.1운동의 1차적 원인이었지만, 식민지적 불합리에 맞서 민족의식을 날카롭게 벼르며 스스로를 일깨워간 노동자와 농민, 청년·학생 등의 주체적 역량의 성장이야말로 3.1운동과 이후의 독립운동을 추동한 주된 내재적 주관적 역량이었다. 1919년의 3.1운동, 3.13운동(만주), 3.17운동(연해주)은 세계의 한민족이 독립이라는 거대 의제에 공감하고, 근대적 의미의 확장된 민족의식을 공유한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한편, 한인의 이주로 개척되기 시작한 만주와 연해주 지역은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한인의 이주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급격하게 한인사회가 성장하였다. 1920년 독립전쟁 발발 당시 만주지역의 전체 한인 인구는 459,427명이었고, 동만 지역만 30만 명에 달했다. 장우순, 「1920년대 만주 한인사회의 세대교체와 운동이념의 변화」, 『사림』 26호, 2006, 143쪽. 1910년 대비 두 배 이상 인구가 급증하였고,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근대 산업이 성장하였고, 학생과 노동자 수도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이렇게 인구와 경제, 사회구조가 한결 고도화된 한인사회는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물적, 인적, 공간적 자원을 공급하는 핵심적인 내재적 기반이었다. 1920년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내적 요소 중 주관적 요소가 3.1운동을 통해 형성된 근대적 민족의식이었다면, 객관적 요소는 물적, 공간적, 인적 배경이 되었던 만주와 연해주 지역 한인사회의 존재였다.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정부의 총리로 북간도와 연해주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이동휘의 주도로 1920년 3월 2일 ‘대대적인 독립전쟁의 수행’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정방침」으로 채택되었다는 점도 독립전쟁을 촉진한 중요 요소였다. 대한민국도서관 편,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1976, 107-111쪽. 무장투쟁론은 이동휘의 지론이자 간도 및 연해주 지역 민족운동가들 대다수의 지향이었다. 이들 민족운동 세력은 주로 무장투쟁을 염두에 두고 만주 및 연해주로 망명한 이들이다. 임시정부의 존재는 국가의 체계를 갖추고 소련 등과 연합하여 일본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교전 당사자의 지위를 확보한다는 상징적 의미에서도 중요한 동기와 명분이 되었다. 한편, 파리강화회의가 승전국의 잔치로 끝나면서 외교독립론의 입지가 현저히 줄어든 국제정세, 러시아혁명으로 제국주의 진영에 맞서는 거대한 배후로 등장한 소비에트 러시아, 약소민족 해방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천명한 코민테른의 방침, 재만 무장투쟁 진영에 대한 중국당국의 우호적 태도, 러시아 내전의 발발 등 만주와 연해주를 둘러싸고 전개된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독립전쟁이 전개될 수 있었던 외재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독립전쟁의 전망을 급격하게 증폭시키고 있었다. 동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수뇌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이동휘 등의 역할을 통해 이러한 국제정세의 급변은 긴밀하게 한인사회와 연결되었다.

3. 독립전쟁의 전개-전략의 수정과 전술적 착오

1) 서일의 독립운동 전략

독립전쟁론, 실력양성론, 외교론 등은 그 자체가 전략이 아닌, 독립이라는 최상위의 전략을 위한 실천적, 전술적 선택지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글에서는 전략의 의미를 넓게 해석하여 이들 독립과 관련한 운동론 역시 한정된 의미의 전략으로 가정한다. 함께 언급될 그 하부의 전술들과 혼동을 피하기 위함이다. 서일은 1919년 이전까지 주로 교육과 포교, 운동 조직의 결성과 확대 등 실력양성론이라는 전략에 근거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국내에서 전개하였던 애국계몽운동과 유사한 전략이다. 하지만 실력양성론이 독립전쟁을 전제로, 독립전쟁에 선행하는 축적의 과정으로 배치되었다면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시기적 전술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경우 독립전쟁론이라는 전략은 역량을 축적하는 준비의 시기와 직접 전쟁을 수행하는 실행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들은 각각 독립전쟁이라는 전략을 위해 기능하는 시기별 전술로 분류할 수 있다. 서일의 실력양성론은 나철의 유언이나 대종교의 교리에도 부합하는 운동의 방략이었다. 서일의 망명 초기 활동은 국내에서의 애국계몽운동과 큰 차별점을 찾기 어려운데, 이는 망명 초기 서일의 인식이 독립전쟁보다 한인의 실력양성을 통해 만주지역에서 한인을 중심으로 하는 대종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는데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1919년 3.1운동 이전 중광단의 활동에서도 무장투쟁이나 의열투쟁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만일 중광단의 활동이 대한군정서의 결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이전의 활동만으로는 독립전쟁을 위해 결성된 단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망명 초기 서일의 활동은 독립전쟁론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전략과 전망에 근거하여 전개되었으며, 따라서 서일의 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전의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운동기와 3.1운동 이후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운동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서일은 3.1운동 직후 대한정의단, 대한군정부, 대한군정서 등 무장투쟁을 위해 새로운 단체들을 결성하는데, 이는 3.1운동이 운동의 전략을 수정하는 결정적 계기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전략의 수정에는 일정한 내적 축적의 과정이 필요하다. 공들여 닦아놓은 지역 사회의 기반을 전쟁 실행의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들여 계획을 수립하고, 계획에 맞추어 단계적인 준비를 해야만 했다. 충분한 수의 병사를 양성하고, 충분한 양의 군수물자를 축적하며, 비전투원인 현지 한인들의 보호를 위한 충분한 안전장치 역시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전략을 수정한 서일에게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사정은 자치를 주장하다가 갑작스럽게 무장항쟁에 뛰어든 대한국민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준비되지 못한 전략의 수정은 불가피하게 여러 전술적 차질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전략적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서일은 1919년 3.13운동 직후 대한정의단을 조직하고, 김좌진 등의 新民會 계열과 함께 대한군정회를 조직하여 그 산하에 두었다. 강덕상, 『現代史資料』 26, 「朝鮮」 2, 東京, みすず書房, 1967, 249쪽의 조직표 참고. 10월에는 대한군정회와 대한정의단을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를 조직하고, 애국동지원호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1956, 303-308쪽. 임시정부의 지시로 대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한군정서약사 및 군정서 총재의 신청서」, 『독립신문』 1920년 4월 22일자. 사실상 대한군정부대한군정서로 이름을 바꾼 것에는 동만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의 회장 구춘선이 “이미 상해임시정부가 있는데, 다시 또 ‘정부’라는 명칭을 쓰는 단체는 촌시라도 그냥 둘 수 없고, 파괴해야 한다.”고 대한군정부에 경로를 보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3, 611-614쪽 참고) 서일은 교통의 전수도 5년 미루고,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대종교총본사 편,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총본사, 1971, 390-391쪽. 하지만 ‘독립전쟁’이라는 전략은 3.1운동으로 강하게 각성된 민족의식과 국제정세의 급변에 따라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충분한 준비 없이 결행된 측면이 있다. 서일 역시 이러한 낙관적 전망을 공유한 채 사전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성급하게 독립전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3.1운동 이전 중광단이나 대종교 교단 차원에서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는다. 3.1운동 이후 공교도 측이나 신민회를 만나 무장투쟁을 위한 방책을 고민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대한군정서의 독립전쟁은 철저히 준비되지 못하였고, 당시의 시국 상황을 급하게 쫓아간 측면이 있다. 대한국민회(대한독립군을 포함한)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았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황에서 직접적인 교전보다 사관연성소를 세워 사관과 병사를 양성하여 독립전쟁의 기반을 확보하려고 하였던 서일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전술이었고, 다른 무장부대들도 이 시기 직접적인 대일 교전 대신 전체적인 전쟁 수행 능력의 제고를 위해 내실을 다지면서 부대 간의 통합운동에 집중하는 등 독립전쟁을 위해 ‘축적’이라는 준비기의 시기적 전술을 이행했어야만 했다.

2) 전술적 차질 1-대한국민회와의 반목과 연합작전의 무산

1919년 동만 지역의 항일운동은 전체 지역적 차원에서 크게 두 개의 흐름이 나타난다. 하나는 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면서 국민회군, 대한독립군이 주도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흐름이다. 다른 하나는 중광단, 대한정의단, 대한군정서를 결성하며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대종교 중심의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기독교계=국민회로 대표되는 세력과 대종교계=대한군정서로 대표되는 세력 간에는 지역적, 인적 교류와 협력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알력이 존재했다. 국민회 회장인 구춘선이 1919년 8월 대한군정서의 전신인 대한군정부를 상대로 보낸 경고나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부정적이었던 대한군정서의 움직임은 두 세력이 상당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동만 한인사회에는 기독교도가 가장 많았고, 대종교도 수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국민회가 결성되기 전인 간민회 활동 시기에는 기독교 신자인 이동휘, 정재면, 이동춘과 함께 대종교 신자인 박찬익이 對中 교섭을 위해 북간도 대표로 참여하는 등 기독교 계열과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독립전쟁론이 점화된 이후 두 세력 간의 알력은 대립으로 치달았다. 1919년, 1920년의 상황은 국민회가 그간의 활동을 기반으로 북간도 전역을 아우르는 상황이었고, 자금력이나 조직원 확보에서도 가장 우세하였다. 국민회는 자신들을 북간도 통일기관으로 자부하였고, 일본 당국도 국민회의 세력이 가장 크다고 보았다. 陸軍省, 「朝特報 第20號」 (1920. 4. 6), 『朝特報關スル綴』. 반면, 대한군정서는 동만의 다른 단체들과는 고립된 채 대종교 신도와 교단 위주로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물론 남만의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전체적인 역량에 있어서 국민회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들 간의 반목에는 동만 지역 민족운동의 주도권 쟁탈전의 성격이 있었다. 이 반목은 종교적 대립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임시정부나 다른 지역에서 확인되는 대종교의 활동에서 종교적 원리주의나 분열적 종교인식은 발견하기 어렵다. 북간도에서도 이 시기를 제외하면 이러한 대립은 발견되지 않는다. 김좌진의 성향에서 기인한 대립은 아니었는지 충분히 의심은 되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사실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독립전쟁의 과정에서 발생한 이러한 대립은 일시적으로 대한군정서를 고립시키고, 커다란 위험에 직면하도록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도 특파원을 보내 무장단체들의 통합을 도모하였으나, 이에 적극적으로 응한 국민회와 달리 통합을 거부한 대한군정서는 동만 전역이 연결되는 연합전선의 기회를 무산시켰다. 대한국민회를 통한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는 이준 열사의 아들인 이용을 임시정부의 동로사령관으로 파견한 이동휘의 영향력이 작용하였다. 이용의 주선으로 통합기구인 대한북로독군부가 결성되었고, 대한군정서는 2차로 파견된 안정근의 주선으로 일부 연해주 무장세력과 통합할 수 있었다.


3) 전술적 차질 2-시기를 놓친 이동

1920년 독립전쟁은 1919년 8월 홍범도 부대의 국내 진공 작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항일무장부대의 국내 진공 작전은 2020년 1월∼3월까지 24회, 강덕상, 앞의 책 27(조선 3), 「對岸不逞鮮人ノ江岸侵入情況一覽表」 (647-648쪽) 3월∼6월까지 32회 전개되었고, 「北間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독립신문』, 1920년 12월 25일자. 일제는 심각한 충격을 받고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한다. 1920년 6월 4일 북로독군부 연합부대 산하의 신민단 부대가 종성군 강양동에 진입하여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하면서 봉오동전투가 시작되었다. 신민단의 종성 습격은 북로독군부 차원의 전체적인 계획 속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추격대가 월강하여 간도로 진입하였을 때 보여준 일사불란한 대응과 봉오동에서의 매복 및 기습은 이들 연합부대가 이미 전술적으로 일정한 작전 아래 역할을 분담하여 일본군에 대응하였음을 보여준다. 함경북도 종성군, 화룡현 삼둔자, 왕청현 봉오동을 무대로 6월 4일에서 6월 7일까지 전개된 봉오동전투의 결과는 복로독군부 연합부대의 대승이었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래 한인 무장부대가 거둔 초유의 대승이었다. 봉오동 대첩에서의 일본군 피해는 일본 측의 주장과 국민회 및 임시정부의 주장에 많은 차이가 있다. 일본영사관은 전사자 1명, 부상 5명, 7명 또는 10명이라고 보고하였고(강덕상, 앞의 책 27(조선3), 634쪽), 『독립신문』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독립신문』 1920년 12월 25일자)으로, 국민회는 150명 전사한 것으로 파악하였고(강덕상 앞의 책 27(조선 3), 613-616쪽). 중국의 『上海時報』도 전사자를 150명으로 보았다(강덕상 앞의 책 27(조선 3). 한편 『홍범도 일지』에서는 500-600명이 죽은 것으로 회고하였다(『홍범도 일지』, 19쪽). 한편 연길보위단 제1대 대장 서백린은 일본군 병사 49명과 장교 3명이 죽었다고 보고하였는데(연길도윤공서 외교과, 「汪清縣呈報韓亂等第20號」), 아마도 가장 객관적인 기록이 아닐까 판단된다. 당시 중국당국은 한국이나 일본의 입장에 서서 사상자를 과장하거나 축소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종성군 강양군 습격부터 삼둔자전투, 봉오동전투 전체를 봉오동대첩으로 본다면 일본군의 피해는 임시정부나 국민회가 파악한 것처럼 100명 이상으로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봉오동대첩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한편으로 중국당국을 강박하여 중·일 합작의 독립군 토벌을 합의하고, 陸軍省, 『間島出兵史』, 9쪽. 간도지역의 중국군은 규모와 무장면에서 독립군을 토벌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심정적으로도 독립군을 동정하거나 지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실제로 독립군을 토벌할 가능성은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여러 차례 열린 중국과의 협상에서 중국당국이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였기 때문에(강덕상, 앞의 책 28(조선 4), 64-66쪽) 일제의 입장에서는 출병의 필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間島地方不逞鮮人討伐計劃」을 작성하여 陸軍省, 『間島出兵史』, 12쪽. 일본군의 간도 출병 및 독립군 토벌은 1920년 7월 하순에 입안하여 8월에 확정되었다(강덕상, 앞의 책 28(조선 4) 116-쪽121). 은밀하게 간도출병을 준비하였다. 결국, 10월 2일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 일본영사관 습격하게 하는 소위 ‘훈춘사건’을 일으켜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간도 출병의 명분을 조작할 수 있었다. 陸軍省, 『間島出兵史』, 15-19쪽.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긴급회의를 통해 간도 침략을 결정하였고, 陸軍省, 『間島出兵史』, 20-21쪽. 대규모의 병력을 조직하여 백두산으로 막혀있는 서쪽을 제외한 남, 동, 북의 세 방향으로 간도를 침략하였는데 당시 일본군 병력은 19사단, 20사단, 11사단, 13사단, 북만주 파견대인 안서지대, 관동군을 포함하여 최소 18,000명에서 최대 25,000에 달하였다. 陸軍省, 『間島出兵史』,, 54-114쪽.

1920년 7월 24일 일본의 강박으로 토벌을 약속한 장작림은 8월 15일 주연길 중국육군 제2 혼성여단 보병대 1단장 孟富德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독립군 토벌에 나서도록 하였다. 강덕상, 앞의 책 28(조선 4), 「齊情第 1號」 (95쪽). 당시 중국 관료들은 일본에 대해서는 강한 반감을, 한국인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孟富德은 국민회 및 각 무장부대 관계자들과 비밀리에 만나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막기 위해 부득이 출동하니 독립군 측에서 중국군의 체면을 고려하여 현재의 근거지를 떠나 삼림지대로 이동할 것을 요구하였고, 독립군 측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백두산의 삼림지대로 근거지를 옮기기로 하였다. 신용하, 「대한군정서 독립군의 연구」, 『독립운동사연구』 2집,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235쪽. 이런 합의에 따라 항일무장부대들은 8월 하순부터 백두산의 삼림지대나 러시아 국경지대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대한독립군을 시작으로 국민회군, 군무도독부, 신민단, 의군부, 의민단 등 대한국민회와 연합하였던 각 무장부대들이 모두 기존의 근거지를 버리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박창욱, 앞의 글, 121쪽 ; 강덕상 앞의 책 28(조선 4) 393 ; 「무산대안에 집중한 조선인 음모단」, 『매일신보』 1920년 10월 11일자. 대부분 백두산으로 향하는 화룡현 이도구,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하고,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는 북쪽의 연해주 접경 나자구로 이동하였다. 군무도독부는 러시아로 이동을 고려한 반면, 다른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의 지속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대한군정서는 9월 초까지 사태를 관망하며 이동을 주저하고 있었다. 중국군과의 협의로 1개월의 이동시간을 확보한 대한군정서는 강덕상, 앞의 자료 27(조선 3), 101쪽. 9월 7일 무기구입을 위해 러시아로 갔던 서일과 계화가 돌아오고, 양현과 현갑 등이 무기운반 3개 중대와 함께 본대로 귀환하자 9월 9일 사관연성소의 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9월 17일, 18일이 되어서야 왕청현 서대파를 벗어나 백두산 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강덕상, 앞의 자료 27(조선 3), 「軍政署ニ拘禁セラレ居リタル朝鮮人ノ談話ニ關スル件」 (239쪽). 대한군정서는 다시 한번 엄중한 전술적 착오를 범하고 만다. 일본군이 중국당국을 강력하게 압박하여 토벌대가 구성된 상황이고, 중국 토벌대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면 일본군이 침략을 감행할 수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총재인 서일이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러시아로 출장을 갔던 것도, 그리고 무기 구입과 운반을 위해 부대를 떠났던 인력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처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북간도의 다른 부대들은 이미 8월 하순부터 이동을 시작하여 대한군정서가 이동을 시작할 무렵 이미 모두 백두산 인근의 삼도구에 집결하여 일본군이 간도를 침입하면 신속하게 백두산 쪽으로 대피하고자 하였다. 이는 무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연해주의 ‘4월참변’을 통해 확인된 일제의 민간인에 대한 만행을 막기 위한 결정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대한군정서는 부대 전체와 한인사회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였다. 게다가 이들의 이동은 이미 일본군 정탐들에 의해 파악되고 있었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연구자들의 기존 주장 신용하는 앞의 글, 「대한군정서 독립군의 연구」에서 대한군정서의 무기가 풍부하였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인용한 것은 모두 일본에 의해 사후에 만들어진 보고서다. 출병의 명분과 전투에서의 패배를 윤색하기 위해 상대방의 병력과 무기를 과장해야 했던 일제의 문서는 비판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중국군이 이동을 종용하고, 일제의 침략이 코앞에 닥친 급박한 상황에서 무기구입을 위해 피같은 시간과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야 했다면, 근거지 이동 전까지 대한군정서의 무기 공급상황은 충분하지 못하였거나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과는 달리 대한군정서가 충분한 무기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어서 무기의 구입이 매우 절실한 과제였거나 지휘부가 전체적인 전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을 가능성이다. 혹은 무기도 부족하고, 지휘부의 전술 능력 역시 예리하지 못한 2중의 난관에 봉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대한군정서는 전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착오를 범하고 말았다. 청산리에서의 전투는 대한군정서가 일본군 추격부대에 꼬리가 잡히면서 시작되었다. 東支隊는 대한군정서가 화룡현 이도구에,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몇 개의 부대가 삼도구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山田討伐聯隊를 삼도구에 보내고 사령관 東正彦이 이끄는 본대는 홍범도의 연합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도구로 향했다. 강덕상, 앞의 자료 28(조선 4) 216-217, 318쪽 참조. 본대가 직접 이도구로 진격한 사실에서 이도구있던 부대를 주력부대로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홍범도 부대를 독립군부대의 주력으로 보았다는 것으로 『間島出兵史』, 『현대사자료』 등도 홍범도 부대를 김좌진 부대에 앞서 서술하고 있다. 東支隊 5,000여 병력의 공격으로 시작된 청산리대첩은 10월 21일에서 10월 26일까지 6일간 계속되었으며, 크고 작은 십여 회의 전투를 통해 잘 알려진 대로 일제에 궤멸적 패배를 안겼다. 백운평 전투(대한군정서)를 시작으로 완루구(홍범도), 천수평, 어랑촌, 맹가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 등에서 전투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 전사자 1,200명, 부상자 2,100명, 독립군 전사자 130명, 부상자 220명이 발생하였다고 임시정부는 추정하였다.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 피해에 대한 일본 측 자료는 신빙성이 없다. 교전 과정에서 전사자 11명이 발생하고 독립군 100명 이상을 사살한 전과를 올린 일본군이 참패에 대한 보복의 성격인 경신년 대토벌을 감행하여 3,000∼10,000명에 이르는 조선인을 학살하였을 리 없다. 임시정부 1,200명(「아군의 활동」, 『독립신문』 1920년 12월 13일), 서일 1,250명(「大韓軍政署報告」, 『독립신문』 2921년 1월 18일), 박은식 2,000명(박은식, 『독립운동지혈사』), 이범석 3,300명(이범석, 『우등불』, 1971, 83쪽) 등으로 기록자에 따라 차이가 있고, 그 편차도 매우 크다. 중국의 『대공보』는 600명(1921년 1월 6일자), 『遼東日日新聞』는 2,000명(신용하, 앞의 글, 52쪽)으로 보고 있어 전사자나 부상자의 수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장세윤은 봉오동에서 100여 명, 청산리에서 4-500명이 살상되었고, 독립군도 그만큼 피해를 입었다고 보았으며(장세윤, 『중국 동북지역 민족운동사』, 명지사, 2005, 156쪽.), 박창욱은 지형과 부대편성의 규모를 감안할 때 1,000명 이상 전사자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아마도 중국 언론 『대공보』의 600명 전사자가 비교적 사실에 부합하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인다. 정확한 일본군 측 피해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보고서에 실패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규모의 피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독립군부대는 1919년 8월의 국내 진공작전부터 1920년의 청산리대첩까지 지속된 독립전쟁에서 일제에 커다란 타격을 입히며 승전을 거두었다. 하지만, 만주 한인사회 목전에는 패전으로 독이 오른 일제의 피의 보복이 다가오고 있었다. 작지 않은 전과를 올렸지만, 운동의 근거지이자 배경인 한인사회의 엄중한 파괴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1920년 시점에서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전쟁이 과연 올바른 전략이었는지, 진정한 승리였는지 다시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뒤늦은 철수로 청산리에서 전투를 유발함으로써 더욱 큰 규모의 보복을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대한군정서는 일제의 경신년 대학살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이는 독립전쟁 기간 대한군정서가 노정한 가장 큰 전술적 착오였다. 한인 빨치산부대를 포함한 수천 명의 러시아 빨치산부대가 1920년 3월 니콜라예프스키에서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인 거주민을 들을 처형하는 ‘니항사건’이 발생하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들의 가옥을 방화하고 학살한 ‘4월참변’이 발생하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이나 교전이 한인에게 무자비한 보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간도 지역의 무장부대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경신참변’은 1920년 10월 14일에서 11월 20일까지 일제가 한인사회를 상대로 저지른 학살과 만행을 일컫는다. 경신참변으로 북간도 지역에서 한인 3,664명이 피살되고, 155명이 체포되었으며, 민가 3,520채, 학교 59개소, 교회 19개소가 소실되었다. 「間島慘狀後報」, 『독립신문』, 1921년 1월 27일자. 한편, 관동군에 의해 학살과 만행이 저질러진 서간도(남만) 지역에서는 한인 1,323명이 피살되고, 125명이 체포되었으며, 민가 1채와 교회 3개소가 소실되었다. 「西北間島 同胞의 狀 血報」, 『독립신문』, 1920년 12월 18일자. 경신참변은 결과적으로 친일세력의 확장과 일제의 한인사회 지배력 강화라는 크나큰 전략적 실패를 초래하였다.

4. 독립군단의 러시아 이동과 자유시참변

1) 독립군단 러시아 이동의 배경

이동휘가 이끄는 한인사회당은 1919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차 확대회의를 열어 김규면, 『노병 김규면 비망록』, 5쪽(주미희, 「이용의 민족운동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35쪽에서 재인용) ‘통일된 강령 없이 각자 행동하는 독립투쟁은 해독사업이며, 총을 들어도 희생이 희생을 가할 뿐’이라며 ‘노동계급적 민족해방 방향’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전쟁을 담당할 혁명위원회를 결성하고 ‘무장훈련보다 정치의식, 혁명적 이론에 대한 습득을 강조’하였다. 김규면, 『誠齋 戰略에 대한 回想記』, 16쪽(주미희, 앞의 글, 35쪽에서 재인용). 한편, 민족운동을 국제운동과 연결시키기 위해 한국 독립군과 러시아 빨치산의 합동을 제의하고, 극동러시아의 해방이 한국해방의 전제조건이라 보고 적극적인 극동 해방전쟁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다. 김규면, 『노병 김규면 비망록』, 6쪽(주미희, 앞의 글, 35쪽에서 재인용). 이동휘와 한인사회당 계열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의 승리를 확보함으로써 연해주를 한국해방의 전진기지로 만들고,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북간도의 무장투쟁을 사실상 주도하였던 이동휘와 한인사회당 세력은 독립전쟁이라는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독립군의 통합이라는 전술적인 과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동휘는 연해주 한인사회가 원호인(귀화한인)과 여호인(비귀화한인)으로 갈라져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던 상황에서 한인사회당을 건설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분열과 반목이 결과적으로 운동의 실패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경험하였다. 따라서 통합의 가치를 매우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동휘 세력이 임시정부에서 북간도로 이용, 안정근, 왕삼덕을 파견하여 독립군단체들의 통합을 주도한 것도 통합과 연합이라는 그들의 전술 목표를 달성여 전략목표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볼셰비키와의 연합도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불가피한 전술적 선택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인사회당의 인식은 사실상 계급적 관점보다는 전술적으로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천명하였던 소련 및 극동공화국의 지원을 이용하여 독립이라는 전략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던 민족적 관점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이 제시한 농업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관점은 투철한 계급적 관점보다는 민족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민족주의 노선의 연장에서 사회주의적 전망을 결합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은 폴란드의 민족사회주의와 유사하며, 이후 한국 근대민족주의 특징이 되었던 사회주의적 전망 장우순, 「1920년대 만주 한인사회의 세대교체와 운동이념의 변화」, 『사림』 26, 수선사학회, 2006. 장우순은 이러한 한국 근대민족주의의 사회주의적 경향을 ‘사회주의적민족주의’라 명명하였다. 과도 연결된다. 1920년 5월 이동휘는 독립전쟁의 본격적인 전개에 앞서 대소교섭을 위한 임정 전권대사로 한형권을 파견하여 소련 정부에 4개조의 요구안을 제출하였다. 한형권, 「혁명가의 회상」, 『삼천리』 속간 제6호, 1948, 10-11쪽. 1920년 7월 19일부터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채택한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는 세계혁명을 위해 식민지와 반식민지에서의 민족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민족식민지문제소위원회’ 19개국의 20인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한 한인사회당의 박진순이 1920년 7월 초 작성한 「혁명적 동방과 코민테른의 당면임무」는 “동방에서는 사적 자본주의의 잔인한 발전의 시기를 피하면서 농업의 질서에서 사회주의 질서로 가장 고통없이 이행 가능한 경제계획의 창조로 나아가야 한다.”는 새로운 이행전략을 제시하였고, 7월 28일 행한 소위원회의 연설에서는 “동방 제 민족과 서구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 혁명투쟁이 불가결하다는 인식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전명혁, 「1920년 코민테른 2차대회 시기 朴鎭淳의 민족·식민지문제 인식」, 『한국사연구』 134, 한국사연구회, 2006, 211-213쪽). 박진순의 인식은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농업혁명을 경유하는 사회주의의 길을 전략목표로,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 즉 혁명화된 소비에트나 코민테른에 참여한 국가들의 원조와 공동투쟁을 전술로 제시하였다. 이 지점에서 한인 민족운동은 간섭군과 전쟁 중이던 소련과 이해를 공유할 수 있었다. 한인은 소련과 함께 간섭군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훗날 소련의 지원으로 한국의 독립을 쟁취,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백군 및 간섭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한인 등을 동원해야 할 현실적 필요가 일정 정도 반영된 결의로, 코민테른은 동아시아에서 한국, 중국, 몽고, 일본의 혁명운동에 대한 지원을 모색하는 한편, 내전에 참여할 국제군을 편성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한형권의 교섭과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채택된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의 영향, 당시 임정 총리였던 이동휘의 개입으로 1920년 8월 임시정부와 소련 간에 「대일한러공수동맹」이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日本外務省,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の部-在西比利亞』 11卷(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전자자료)』 36집, 2000), 618-619쪽.


1조. 한국은 러시아의 공산주의를 찬성하고, 노농정부는 한국을 원조한다. 2조. 노농정부는 한국의 독립을 찬성, 원조하여 동양의 평화가 영원히 유지되도록 한다. 3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군대를 설치, 시베리아에 주둔시키고 러시아 총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 4조.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과 개전 시 한국군대는 당연히 러시아를 원조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대는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러시아 정부는 탄약 기타 군기를 공급하고 강병을 응원한다. 5조. 이상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양국은 시베리아에 러한선전부를 설치한다. 6조. 한국정부는 일정한 시기 노농정부가 공급한 탄약 기타 군기의 대가를 상환한다.

이동휘 그룹은 소련과의 연합이 독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술적 선택이라고 믿었다. 아울러 1920년 당시 유일하게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연대의 의사를 밝힌 강대국 소련과의 연합은 국지전이나 유격전이 아닌 대규모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사실 이동휘는 만주에서 일본과의 교전을 바란 것이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 무장세력을 통합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전토록 하고자 독립전쟁론을 제기하였다. 이동휘 등은 다음의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① 한인 무장부대 통합 → ② 시베리아로 이동, 소련과 연합 → ③ 일본군 축출과 극동의 해방 → ④ 극동을 독립전쟁의 전진기지로 활용 → ⑤ 소련의 원조로 대규모 독립전쟁 전개 → ⑥ 한국의 해방 → ⑦ 농업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하게 정리하면 주적인 일본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소련을 우선 돕고, 승전 후 소련의 원조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이동휘 그룹 및 임시정부는 이러한 전술적 전망 위에서 ‘한러공수동맹’을 믿고 각 독립군부대가 러시아로 이동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에서 파견되어 독립군부대와 동행한 이용 본명은 이종승(李鍾乘)으로 헤이그 특사였던 이준(李儁)의 아들이다. 한인사회당 계열로 이동휘(李東輝)의 지시로 1920년 독립전쟁 당시 북간도에 동로사령관으로 파견되어 만주와 연해주 한인 무장부대의 통합운동을 주도하였고, 시베리아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다. 은 상해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의 방침에 따라 1920년 독립전쟁 당시 독립군부대의 통합과 경신참변 후 러시아로의 이동을 이끌었다. 대다수 독립군부대가 대대적으로 러시아 경내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동휘 그룹 및 임시정부의 전망, 즉 소련과 연합하여 일본과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전술적 선택에 동의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수동맹에 언급된, 독립군이 소련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들여 사실상 소련군의 일부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조항은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2) 러시아로의 이동

청산리대첩 이후 대규모 일본군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정보를 파악한 독립군부대들은 백두산의 삼림지대로 향하지 않고, 러시아와 접경인 북만주 密山을 향해 이동을 시작하였다. 북만주의 밀산으로 향한 이유는 러시아로 들어가 강력한 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이동의 배후에는 러시아 빨치산과의 연합 및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독립전쟁을 지속하려던 이동휘 및 한인사회당 계열의 움직임이 있었다. ‘한러공수동맹’에 근거하여 러시아로 부대를 이동시키기 위함이었다. 간도 각 지역에 분산되었던 독립군부대들은 집결하거나 개별적으로 밀산으로 향하였고,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間島出兵後의 不逞鮮人 團體의 狀況」, 『독립운동사자료집』 10, 1984, 236-237쪽. 김좌진과 홍범도는 직접 해산시켰던 병사들에게 소집령을 내려 밀산으로 오도록 촉구하였다. 강상덕, 앞의 자료집 28(조선 4), 「軍政署部隊員再召集」(441쪽). 1920년 12월 말까지 밀산에 모인 독립군부대는 대한군정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군무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대한정의군정사 등으로 간도 지역의 무장단체 대부분이 포함되었고, 인원도 3,500여 명에 달하였다. 밀산조선족백년사편찬위원회, 『밀산조선족백년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47-48쪽 밀산에 모인 독립군부대들은 서일을 총재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1921년 1월초부터 이만을 거쳐 연해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였다. 1921년 3월 이만에 집결한 모든 부대와 병사들을 모아 ‘대한의용군총사령부(이하 대한의용군=사할린의용대)’를 결성하였는데, 대한의용군에는 간도 지역의 독립군부대뿐 아니라 연해주의 사린대(박일리야), 청룡대, 이만대 등을 포함하여 36개의 한인 무장부대가 참여하였다. 이로써 간도와 연해주 지역을 아우르는 형식적이나마 통일된 무장부대가 탄생하였고, 그 병력도 3,000에 달하였다.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東京, 原書房, 1967, 519쪽.

당시 러시아에 모인 한인 무장세력은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하나는 한 한인사회당 계열의 연해주 무장부대와 임시정부 및 한인사회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간도 지역의 독립군부대들이었고, 이들은 임시정부를 한인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보고 그 노선을 따르는 무장세력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원호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민의회 및 전로한인공산당 계열의 자유대대였다. 이들은 임시정부가 아닌 원호세력 중심의 국민의회를 지도기관으로 인정하는 세력들로 구성되었다. 한인사회당 계열의 인사들은 한인사회당 결성 시기부터 적극적으로 한인을 지원하였던 크라스노쉐코프가 1920년 설립된 극동공화국의 수상이 되자, 극동공화국에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 박애, 김진, 계봉우, 장도정, 박창은 등 상해파가 운영하였으며, 이동휘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를 설치하고,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의 통합을 추진하었다. 크라스노쉐코프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시기 재정러시아의 편에 섰던 원호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국민의회는 혁명세력의 승리가 유력해지자 다시 아무르주로 이동하여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와 접촉하면서 한인사회당 세력에 대한 모략과 방해를 일삼으로 러시아 한인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었다. 한인 무장부대의 러시아 이동 및 체류에는 크라스노쉐코프의 지원 및 한인사회당 계열의 역할이 커다란 작용을 하었다. 하지만, 1921년 4월이 되자 상황이 급변하였다. 극동공화국과 일본 사이에 휴전협정이 진행되면서 휴전협정 체결을 혁명 보위를 위한 급선무로 인식한 크라스노쉐코프는 한인 무장세력을 지원하던 입장을 바꾸어 “슈마츠키와 한인들의 무모한 계획을 반대한다.”면서 ‘한국진공작전’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편, 「모스크바 외교인민위원부 치체린 동지」, 『한국독립운동사자료』 34(러시아편 1), 164-165쪽. 반면, 1920년 이르쿠츠크에서 원호인들을 중심으로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가 열릴 때부터 전로한인공산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슈마츠키는 1921년 20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이 되어 전로한인공산당 계열과 함께 한인무장세력의 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슈마츠키는 전로한인공산당 계열과의 관계로 인해 한인사회당이나 한인민족운동 전반에 대해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로한인공산당 계열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나 이전투구, 협잡, 거짓 등이 사실상 자유시 참변의 1차적인 원인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최고려의 언행과 역할은 훗날 코민테른 비서장에게 호통을 받을 정도로 분열과 악의로 가득 찬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전로한인공산당 계열의 전횡과 자유시참변이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1921년 1월 이용 등이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극동공화국의 군부와 교섭하여 극동공화국 한인부에서 정기회의를 열고 무장세력의 통합 계획을 수립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편,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 회의록(1921. 1. 16)」, 『한국독립운동사자료』 34(러시아편 1) 154-155쪽. 이 시기 이용이 발표한 “경고문”에는 레닌과 이동휘의 협약사항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 청계연구소, 1986, 277-283쪽. 한인사회당 및 임시정부가 주도한 러시아 경내에서의 한인 무장세력의 통합운동과 독립전쟁의 수행과 관련한 일련의 활동이 레닌과 이동휘의 협약을 근거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개의 협약사항은 첫째, 원동공화국 범위 내에서의 한인군대 편성의 무제한, 무기, 피복, 식량의 무제한 공급, 둘째, 한인군사위원회 이외의 군권을 허용하지 않으며, 사관학교의 설립, 한인군대와 지방부대의 정리계획, 사단 편성계획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극동공화국이 한인 무장부대 통합 및 지원에 대해 소극적으로 돌아서자, 전로한인공산당 계열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를 내세워 한인 무장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전로한인공산당 계열은 한인군사위원회의 합법성을 부인하고, 이러한 협약사항을 허구라 주장하였다. 김하석은 이용, 채영과의 대담에서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임시정부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고, 코민테른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이용은 “상해임시정부를 봉대한 주견이고 대한국민의회와 더불어 대한혁명을 도모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김준엽·김창순,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 청계연구소, 1986, 286-287쪽. 대한국민의회 및 전로한인공산당은 처음에 원호의 입장에서 러시아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재정러시아를 지원하다가 볼셰비키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전로한인공산당을 조직하여 여호인을 기반으로 이동휘 등이 조직한 한인사회당 계열과 대립하였고, 임정 참여문제를 놓고 상해임시정부와 대립하는 등 기득권에 집착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여호인을 착취하며 군림하였던 노동계급의 적이자 러시아인으로 행세하던 반민족주의자들인 그들은 재정 러시아에 붙어 집단의 이익을 취하였듯이 이제 볼셰비키에 붙어서 다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상해파와 연결되어있던 이용 등은 임시정부 봉대라는 기본원칙과 운동의 통일이라는 전술적 요구를 실천하기 위해 투쟁하였고, 민족적, 계급적 이익과 민족독립을 관철하기 위해 일관된 노선을 견지하였다. 1921년 3월 15일 마사노프에서 2회 한인군사회의는 한인무장통합부대를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지휘 아래 두기로 하고, 명예회장으로 레닌, 트로츠키, 크라스노쉐코프, 이동휘를 추대하고, 군사위원으로 이용, 채영, 한운용, 장기영, 박일리야 등 5인을, 참모부원으로 홍범도, 안무, 서일, 조성환, 이청천, 이용, 최진동, 오하묵, 김규식, 김경천, 강국모, 이계 등 15인을 선출하였다. 이로써 한인무장통합부대는 사할린의용대라는 단일명칭으로 통합되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 2군단에 배속되었고, 총병력은 3,000여 명에 달하였다.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1949, 102쪽.

슈마츠키가 극동공화국의 한인부를 찾아가 한인 빨치산부대애 대한 모든 권한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넘길 것을 요구하면서 한인 무장부대를 둘러싼 한인사회당 계열을 포함한 임정파와 국민의회파의 대립은 본격화되었다. 슈마츠키는 국민의회의 자유대대를 중심으로 고려혁명군정의회를 만들어 사할린부대(사할린의용대)를 산하에 소속시키고, 자유시로 이동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사령관은 갈란다라시빌리, 부사령관 오하묵, 위원 김하석, 최고려 등이었으며, 소련의 5군단 산하 기병 600여 명과 한인부대 600여 명이 배속되었다(김준엽·김창순,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 2, 아세아문제연구소, 1976, 21-24쪽. 한일무장부대 대부분은 군수품과 식량의 보급, 코민테른의 방침과 극동공화국의 외면, 통합의 명분 등을 고려하여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일부는 북간도로 되돌아갔다. 1921년 5월 말에 합동민족연대의 600명 병력이 자유시에 도착하고, 6월 6일 갈란다라시빌리가 코카서스 기병 120명과 함께 자유시에 도착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이하, 군정의회)가 정식으로 성립되자 간도 지역의 일부 부대가 자유시로 들어가 군정의회의 통합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홍범도, 안무, 최진동, 이청천 등이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이동을 윤상원은 대의명분이나 실력 면에서 통합의 주도권이 자유대대 쪽으로 넘어간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윤상원, 앞의 글, 37쪽. 간도에서 온 무장부대들에서는 여전히 상해임정과 한인사회당 계열의 영향력이 막강하였고, 단순하게 군정의회의 통합에 순응하기 위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상해임정과 한인사회당 중심으로 통합을 전개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기 위해 자유시로 들어갔을 개연성도 고려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들의 통합주도권을 인정한 수많은 비무장 인원을 상대로 그러한 살육을 자행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6월 19일 통합을 위한 무장부대 지휘관 전체 회의가 소집되어 군정의회 및 코민테른의 결정을 옹호하고,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통합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한인혁명부대 혁명군사소비에트의 전권대표의 보고서」, 『한국독립운동사자료』 34(러시아편 1), 177쪽. 6월 21일 사할린의용대의 장교들은 오하묵, 김하석, 최고려 3인 때문에 군정의회에 복종할 수 없다는 뜻을 갈란다라시빌리에게 전달하였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앞의 책, 36쪽. 이들 3인의 전력을 들어 다른 한인무장부대와의 통합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시하였고, 이러한 주장에 많은 한인병사들이 동조하였다. 자유대대 측은 상해임정, 심지어 이승만과 연결시켜 사할린의용대를 성토하였지만, 코민테른과 소련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사할린의용대와 임시정부의 관계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윤상원, 앞의 글, 42-43쪽. 통합무장부대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병사들에게 거짓으로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과장하였던 것이다. 무장부대의 통합이 이러한 이유들로 난항을 겪자 갈란다라시빌리는 몇 차례 타협을 권고하였지만, 사할린의용대를 설득할 수 없었던 자유대대 측의 요청으로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사할린의용대를 비롯한 한인무장부대에 대한 무장 해제를 단행하였다. 군정의회 측은 단지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400∼600명에 이르는 동족을, 그것도 백기를 내걸고 저항하지 않던 동지들을 상대로 살육을 자행하였다. 「한인혁명부대 혁명군사소비에트의 전권대표의 보고서」는 120명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였고(앞의 책, 189쪽), 「高麗共産黨の沿革」(장도정, 『성재 이동휘 전서』 하)에서는 400명, 북간도 항일단체들이 발표한 「성토문」에는 6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주장한다. 군정의회 측은 사망자 36명, 포로 864명, 불참한 자 19명, 도망자가 34명이라고 밝히고 있다(「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앞의 책, 41쪽). 최고려, 오하묵, 김하석 등 자유대대 관련 인물들이 통합부대의 주도권을 한인사회당 계열에 넘겨주느니 차라리 몰살을 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국민의회, 전로한인공산당, 자유대대, 군정의회가 가졌던 이러한 굴절되고 독선적인 인식은 러시아에서 여호인을 기반으로 사회당을 결성하고, 소련 중앙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한인사회당 계열이 가진 혁명적 정통성에 대한 질투와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회로 대표되는 원호인들은 정세에 따라 변절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집단으로 최종적으로 볼셰비키보다 더 볼셰비키다운 집단으로 변절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이미 1920년 9월 공산주의의 수용을 선언하고, 자유시를 기반으로 전로한인공산당 세력과 반 이동휘, 반 한인사회당 전선을 형성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이들의 최종적 목표는 한인사회당 대신 코민테른에서 유일한 한국의 공산당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시에 집결한 병력을 확보하여 세력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동족을 몰살한 이들의 행위는 절대로 용서될 수 없다. 훗날 그들이 조선공산당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그들에게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정통성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은 재정러시아 옹호세력에서 볼셰비키로 변신한 ‘러시아인’으로 반동적 과거를 숨기고 계급적 정통성을 윤색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집단이었다. 계급적 변절자이자, 민족을 배신한 반민족주의자들이었을 뿐이다. 친일파가 그랬던 것처럼 재정러시아에서는 재정러시아 당국에, 혁명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당국에 충성하며 영혼과 민족을 팔아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였던 그들은 러시아혁명 이전 동족을 상대로 착취와 학대를 일삼았던 원호인의 1921년 판 볼셰비키 버전이었을 뿐이다. 이들의 과거 행적과 성향으로 짐작건대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 무장세력을 이용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결행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3) 자유시참변과 서일

각 단체 간의 통합 움직임이 활발하던 1921년 3월 초 서일은 각 단의 지도부에게 대표자회의의 개최를 위한 통첩을 보내 통합을 호소한다. 「불령단의 통일운동」(1921. 3. 9), 秘受3180號-機密121號(정길영, 앞의 글, 191쪽에서 재인용) 결국, 3월 15일의 2차 군사회의를 기점으로 통일무장부대로 사할린의용대가 결성되었다. 동만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무장부대 역시 사할린의용대로의 통합과 자유시로의 이동을 결정하였다. 4월 12일에는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대한독립군단으로 개칭하고 체제를 정비하였으나, 「國外情報, 五月中間島地方情況並露領方面不逞鮮人の情勢」 (1921. 6. 25) (김정명, 『朝鮮獨立運動』 3, 382-383) 소련과의 연합투쟁에 회의적이던 서일과 김좌진이 대한군정서 일부를 이끌로 북간도 밀산으로 돌아가면서 사실상 통합부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서류상의 부대에 그치고 말았다. 홍범도, 최진동, 안무, 이청천 등이 무장부대를 이끌고 자유시로 모두 집결한 것은 5월 중순이며, 비슷한 시기 서일, 김좌진 등은 일부 대원과 함께 북간도 밀산현 당백진으로 돌아왔다. 북간도로 돌아온 이들은 다시 근거지를 설치하고, 대한군정서를 재건하였으며, 8월경에는 임시정부로부터 간도 지방의 군사행동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게 된다. 신운룡, 앞의 글, 265쪽.

여기서 궁금한 것은 다른 대부분의 부대나 병사들과 달리 서일은 왜 자유시로의 이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는가 하는 점이다. 자신의 수하에 있던 대한군정서의 병사들 마저 대부분 자유시로 자발적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서일이 취한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영 등 당시 한인사회당 계열의 통합 움직임은 임시정부와 교감 아래 이루어지고 있었고, 대규모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독립군단의 통합이나 소련과의 연합은 당시의 주, 객관적인 상황에서 전술적으로 최선의 선택일 가능성이 있었다. 서일의 선택은 임시정부를 봉대하고, 대규모 독립전쟁을 전략으로 채택한 그의 소신이나 전략과 일치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 불셰비키에 대한 거부감 등을 원인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정확한 분석이라고 보기 어렵다. 서일이 1921년 4월까지는 한인사회당 계열인 이영 등이 주도한 통합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협력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고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4월 중순까지 통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자유시로 들어갈 의사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의 불참을 이해하려면 오히려 4월 이후 변화한 상황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 변화가 서일의 태도를 바꾸게 하였고, 5월 중순 통합을 포기하고 밀산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4월 이후 독립군단 통합 움직임에서 두드러진 가장 커다란 변화는 오하묵, 김하석, 최고려 등의 자유대대를 중심으로 하는 군정의회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지로 성립되어 통합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부대나 병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일은 이들 원호인들의 이중적이고, 권력 지향적 행태에 불만을 가지고 이들이 주도하는 통합과 통합부대에서의 이들의 주도권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서일의 우려대로 이들 전로한인공산당 세력에 의해 자유시로 들어간 사할린의용대는 처참하게 유린당하였고, 서일을 비롯한 통합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이 기대하던 통합과 이를 통해 대대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려던 희망은 처절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1921년 8월 26일 밀산 당백진에서 군사훈련을 하던 대한군정서 병력을 마적단이 야습하여 수많은 청년 병사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었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대한군정서 병력 대부분이 희생되었고, 이로 인해 재기를 꿈꾸며 신명을 다하였던 서일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서일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서일은 병사들의 희생에 책임을 느끼고 1921년 9월 28일(음력 8월 27일) 자결을 결행하였다. 서일의 죽음에 대해서는 피살설과 자살설이 있다. 이동언(이동언, 앞의 글 76-77쪽)의 분석처럼 부친에게 온 통신을 인용하였다는 점에서 「元 大韓軍政署 總裁 徐一의 死亡에 관한 건」((1921. 11. 27), 『불령단관계잡건-한국인의 부』)의 기록이 가장 신뢰할만하며, 자살일 가능성이 크다. 책임감 있는 지도자이자, 고결한 영혼의 종교인이었던 서일은 자신의 삶뿐 아니라 죽음마저도 대종교도를 포함한 한민족과 공유하는 길을 택하였다.

5. 독립전쟁의 격랑에 휩쓸린 종교인

1919년 3.1운동과 국제정세의 변화는 외교론 대신 독립전쟁론을 강력한 독립운동의 전략으로 채택되도록 하였다. 1920년 초반부터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계열의 인사들과 상해임시정부는 러시아의 혁명과 극동공화국을 이용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소련당국과 교섭하는 한편, 간도와 연해주 등에 이용, 안정근 등을 파견하여 독립군단의 통합을 주도하였다. 3.1운동 이후 급박하게 운동의 정세가 독립전쟁론으로 기울자 서일은 기존의 ‘실력양성론’ 대신 ‘독립전쟁론’으로 운동의 전략을 수정하고, 기존에 조직한 중광단을 기반으로 신민회 등을 받아들여 대한군정서를 만들어 독립전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미 한인사회당 계열이나 임시정부의 인물들에 의해 독립전쟁의 커다란 틀이 기획되어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또한, 그에게 주어진 시간 역시 전략을 바꾸고 그것을 원활하게 밀고 가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략의 변화와 부족한 시간은 북간도 지역 독립군부대 간의 통합 과정과 이동 시기 선택에서 전술적 착오로 이어졌고, 만주 한인사회에 엄중하게 피해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전략의 수정 이후 그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국민회와의 갈등, 청산리전투, 경신참변 역시 결코 그가 계획하거나 의도하여 이루어진 일들이 아니었다. 밀산과 러시아로의 이동, 한인무장부대 간의 통합 역시 한인사회당 계열이 의도한 대로 진행되었고, 자신의 부대원 대다수가 사할린의용대에 가담하여 자유시로 이동하고, 자유시에서 목숨을 잃는 상황 역시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자유시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일부 병력과 함께 러시아를 빠져나와 북간도로 철수한 것 정도가 그가 독립전쟁의 과정에서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결정적 선택의 하나였다. 수정된 전략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아직은 한인사회와 민족운동세력이 독립전쟁을 수행할 온전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고, 전로한인공산당과 같은 반역의 무리가 내부를 이간질하며 분열을 획책하고 있었다. 서일이 독립전쟁론을 선택한 순간부터 세력과 세력이 부딪히고, 사건과 사건이 맞물리면서 그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태는 전개되어 갔다. 독립전쟁이라는 거대한 격랑에 휩쓸려 그 흐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운동가나 투사보다는 종교인의 모습이 훨씬 어울리는 인물이었고, 독립전쟁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종교인다운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항상 신망을 받는 뛰어난 인품을 가지고 있었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을 다하였으며, 부하들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어 자신의 목숨으로 사죄를 할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종교적 수행의 경지를 보여줌으로써 불과 2년여에 불과한 짧은 독립전쟁의 여정에서 독립운동가로, 종교인으로서도 독보적인 이정표를 남길 수 있었다.

서일(徐一) 총재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개설본관은 이천 서씨(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서기학(徐夔學), 호는 백포(白圃).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의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6년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이 되어 활동한 결과, 나철(羅喆)의 교통(敎統)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1917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와 노령(露領)의 동포에게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대한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같은 해 8월 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고 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계

부인 : 채씨

장녀 : 서모(徐模, 1902~?)

차녀 : 서죽청(徐竹淸, 1906~?)

사위 : 최관(1900~?)

아들 : 서윤제(1908~1969) 독립운동가

자부 : 권씨(1907~1931)

손자 : 서경섭(徐敬燮, 1925~2008)

손자 : 서만섭(徐萬燮, 1930)

가족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유(徐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 정2품. 장관.양경공파(良敬公派))

12세 서경흥(徐敬興. 목사(牧使). 정3품.당상관.차관)

13세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14세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15세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16세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17세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

18세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19세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대종교(大倧敎)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중광단(重光團)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청산리(靑山里) 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건립된 비석.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徐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회삼경(會三經)

백포 서일(徐一) 종사 저서(白圃宗師著)

이 경의 내용은 삼일(三一)의 원리를 강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 대종교는 유교·불교·도교의 세 교를 포함한 것인데, 이 경전은 실로 불교의 묘법(妙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에 관한 오묘한 뜻이 갖추어진 것이므로 혹시 [삼동계(參同契)]와 대조해볼지도 모르나 [삼동계]는 그 방술만을 탐구한 것이요, 이 경은 그 철리를 강술하여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위치는 인천 연수구 연수동 먼우금로 251번길 27, 201호

법인은 일제하 이국 만리에서 오로지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신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 순국선열유족과 더불어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조국과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대를 건너 이어지는 북로군정서 창설의 역사

1911년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하고 고향을 떠난 서일 총재가 두만강을 건너 처음 만난 사람이 봉오동을 무장독립군 기지로 건설하고 있던 최운산 장군이다. 북간도 봉오동에서 처음 만난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는 서로의 의기를 알아보았고 그 자리에서 무장투쟁을 결의하였다. 서일총재는 최운산 장군이 내어준 덕원리, 즉 서대파에 머물며 학교를 열었고, 서대파를 근거지로 대종교인들을 이끌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서대파를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 서영승씨 “독립지사 후손답게 고국 위해 봉사”

“선조의 항일·희생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로 이날 행사에 참석한 서영승씨(인천시 연수구)는 2대째 독립지사 가문의 후손이다. 서영승씨의 아버지인 서희우씨부터 서만섭, 서일 총재까지 이어지는 가계도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 평탄치 않은 가정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통해 재조명 '청산리 독립 전쟁의 서일 총재'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첫 소절이다. 한때는 한국인이라면 이 가사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던 시기가 있었다. 가곡 <선구자>는 1절만 윤해영 작사이고, 2·3절은 후에 작곡자 조두남이 작사했다고 한다. 1절이 자주 불려서 2·3절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 였다. 1980년대까지는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에 나오는 지명 때문에 만주, 특히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리하여 1980년대까지 매우 자주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나 곡 모두 훌륭한 가곡으로 평가되었으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던 가곡으로 매번 선정될 정도였다.

항일무장투쟁의 별 -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 정길영 (지은이)

서일은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요, 종교지도자이며 철학자요, 군사전략가이며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는 짧은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살신성인한 인물이었다.   

백포(白圃) 서일(徐一)과 대종교-그 정체성(正體性)의 여정(旅程)-김 동 환 (국학연구소)

백포 서일과 청산리대첩- 김 병 기 (광복회학술원)

1910~20년대 중국 동북지역 - 항일무장투쟁과 서일- 이 동 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백포 서일의 독립운동과 자유시참변- 장 우 순 (성균관대학교)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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