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통해 재조명 '청산리 독립 전쟁의 서일 총재'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통해 재조명 '청산리 독립 전쟁의 서일 총재'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첫 소절이다. 한때는 한국인이라면 이 가사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던 시기가 있었다. 가곡 <선구자>는 1절만 윤해영 작사이고, 2·3절은 후에 작곡자 조두남이 작사했다고 한다. 1절이 자주 불려서 2·3절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 였다. 1980년대까지는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에 나오는 지명 때문에 만주, 특히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리하여 1980년대까지 매우 자주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나 곡 모두 훌륭한 가곡으로 평가되었으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던 가곡으로 매번 선정될 정도였다.
지금은 작사가, 작곡가 모두 친일 행적 논란에 휘말리는 바람에 외면 받는다. 가곡 <선구자>의 가사 ‘일송정 푸른 솔’ 중 ‘일송정’은 대일항쟁의 구심으로 단군민족주의를 제시하고 실질적으로 대일항쟁을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 대한독립군단 백포 서일 총재를 비롯한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을 상징한다.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에 있는 ‘일송정’은 대일항쟁의 역사와 정신이 깃든 곳으로 독립투사들이 오가며 쉬던 곳이었다. ‘일송정’은 원래 정자 모양의 소나무였는데, 일제가 1938년 고사 하였다. 1991년 그 자리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를 다시 심었다.
청산리 독립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는 가곡 <선구자>를 들으면 가슴 뜨거워지던 시기인 1983년에 개봉된 영화 <일송정 푸른솔은(부제 : 청산리 독립 전쟁)> 이다. 이장호 감독, 배우 진유영, 윤양하, 김운하, 이보희 주연의 청산리대첩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주요 줄거리는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 애국 청년들은 치욕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북로군정서’라는 독립단체를 결성하고, 김좌진 장군을 비롯하여 이범석, 나중조 등의 투사들은 민족혼에 불타고 있었다. 한편 만주까지 정복한 일제는 독립군을 섬멸하기 위해 만주의 비적 장작림을 포섭하는 등 독립군을 몰아내려는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독립군은 김좌진 장군을 필두로 청산리에서 대혈전을 벌였고, 수십 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은 대승을 거둔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청산리대첩을 다루었던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의 한 장면이다.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은 단연 김좌진 장군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김좌진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좌진 : “그 동안 7개월에 걸쳐 블라디보스톡에서 무기구입에 전력투구하신 우리 군정서 총재 각하를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김좌진 장군보다 높은 서열인 총재 각하가 등장한다. 이 사람이 바로 대한군정서 총재인 백포 서일이다. 영화감독이었던 이장호는 이렇게 말했다.
이장호 : “그 당시 김좌진 장군의 부대에는 서일이 최고 지도부였어요.”
백포 서일은 누구인가?
백포 서일은 이천 서씨로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일항쟁 운동가이자 종교인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기관의 총사령관이자 총재였다.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실질적으로 승리로 이끌어 청산리대첩이라는 대일전쟁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신 분이시기도 하다. 그런 분이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지청천 장군 등에 가려 그 빛을 보지 못하였다. 네 분의 뛰어난 장군들을 거느리고 대일전쟁의 지휘관이었고 대일항쟁의 정신적 지주였다. 대종교인으로서 대종교의 철학ㆍ사상 기반을 만들었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역사에 눈을 떠 ‘대한민국’의 ‘한’의 의미를 정립하기도 하였다. 백포 서일은 ‘한’의 근원을‘단군’으로 보았고, 단군의 역사가 곧 ‘한’의 역사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서일의 호는 백포, 본관은 이천서씨이었다. 열일곱 살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경성의 함일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21세에 졸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귀의, 국내에서 활약하다가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단체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이 때 나이 30세였으니 김좌진 보다는 8세 위였다. 그 뒤 대종교를 포교하면서 북간도 일대에서 명망을 얻었다.
서일과 김좌진, 두 거목의 만남
서일과 김좌진, 두 장군의 만남은 청산리대첩이라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3.1항쟁이 일어나자 그 해 8월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군정부는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보내준 군자금을 기금으로 하여 1,500명에 달하는 독립군을 보유하였다. 서일은 또 사관양성소를 설립하여 우수한 교관을 물색하던 중 김좌진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김좌진은 사관양성소 소장이었다. 사관양성소는 오늘날의 사관학교이다. 김좌진 장군은 오늘날의 사관학교 교장이었고, 그 사관학교를 설립한 인물이 바로 백포 서일이었다. 서일은 삼일항쟁을 겪으면서 비폭력으로는 독립을 할 수 없고 오로지 무력만이 자주 독립이 가능하다고 판단, 군대를 설립하고 뛰어난 군인 양성을 위하여 사관양성소도 설립한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하늘이 시킨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일 없이 김좌진 없고, 김좌진 없이 서일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빛나는 항일 무장투쟁의 별
3.1항쟁이 일어나고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일의 '군정부'란 이름이 마치 또 하나의 정부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하여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동시에 임시정부 산하에 들어갔다. 북로군정서는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짝을 이루어 간도 독립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서일이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빛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일항쟁의 최선봉이었던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서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지청천 등 대일전쟁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장군들을 통솔했던 실질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군이 대종교 신자였다. 서일은 대종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독립단체를 이끌다가 대한군정서, 북로군정서 등의 수장을 거친 뒤 통합독립군인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를 맡았다. 대한독립군단이 와해되자 자신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말한 뒤 대종교 최고 수련 경지였던 폐식호흡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권력만 가지면 책임지지 않는 이 시대 정치권과 사회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지청천 등의 명성에 비해 서일 장군이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어 있다. 다음은 그의 마지막 어록이다.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백포 서일의 한민족주의
100년 전 백포 서일은 역사는 안보이며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고 했다. 그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단군사상을 연구했다. 그 정신은 독립군 양성과 청산리 전투 등 대일항쟁으로 이어졌다. 서일은 “왜 우리가 일본에게 압제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나?”라고 질문했을 때 가장 큰 이유가 사대주의였다고 본 것이다. 사대주의를 벗어나 우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했고, 그래서 그는 단군조선의 역사를 강조했다. 그리고 홍익인간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3.1독립선언서와 무오독립선언서를 비교해 보면 그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내건 3.1항쟁에서 독립을 선언한 민족대표 33인은 이후 일부 변절했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일본과 싸워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과정이 힘들겠지만 단군대황조가 보살펴준다는 대목이 나온다. 서일의 제자인 윤세복, 김좌진 등이 서명했다. 이들이 상해 임시정부의 주축 세력이 된다. 나철은 무장투쟁을 하지 말자고 했다. 서일은 나철이 죽자마자 무장투쟁으로 돌아선다. 일본이 총칼을 들고 오는데 우리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 운동을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나철은 대종교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반면에 서일은 현실주의자였다. 서일의 판단이 옳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20세기 리더 국가로서 한민족주의를 제안했다. 대한제국이 1897년에 성립되었고, 그때 단군이 조명되었다.
근대 최대의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군조선을 근간으로 하는 한민족주의였다. 백포 서일은 한민족주의의 이론적 틀을 확립하고, 그 이론을 행동으로 옮겼다. 당시 암울했던 대일항쟁에 그 길을 열었던 지도자였다.
이제 한국은 세계로 나가야 할 때이다. 그럴 때 한국 고유의 사상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일본은 세계화를 하면서 천황주의를 하다가 실패하였다. 미국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을 설파하면서 세계화에 성공하였다. 우리는 상생이라는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로 세계화를 한다면 충분히 성공할 것이라고 본다. 이 상생의 이념을 확립한 분이 바로 서일이었다.
독립군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영화 서두에 중국 마적에게 붙잡혔다가 김좌진 장군의 도움으로 풀려난 3명이 나온다.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농사꾼으로 나오는 사내는 일상의 편안함을 부끄럽게 여긴다. 갑산면옥에서 국수를 파는 여인은 남편의 친일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같이 죽기 위해 양잿물을 먹었지만 살아났다고 한다. 성씨가 김가인 사내아이는 홍범도 장군이 아버지라고 끝까지 우긴다. 1920년대 일제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간도지역으로 이주해 온 조선인들의 삶과 그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1920년 7월 9일 노령으로부터 최초의 무기가 도착하였고, 전쟁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이때 사령관 김좌진 장군 등장한다.
무기 운반대로 징모되어 연해주(블라디보스톡)로 떠나게 된 한 농부(조갑석)의 집에서 떠나기 전 날, 농부와 농부의 아내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독립군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지키는 모든 농부가 독립군임을 알 수 있다.
농부(조갑석) : “나로서는 참 좋은 기회요. 마침 금년 메밀 농사는 다 끝난 셈이고, 추수야 아직 아버님이 근력도 계시고 하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오.”
농부의 아내 : “열흘 정도면 이번 일에 징모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다니 그때는 돌아올 수 있잖아요.”
농부(조갑석) : “이 산골에서 겨울에는 딱히 할 일도 없소. 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농사 꾼이었지만 모두 뜻 높은 분이었소. 때가 되면 병기를 들고 나가 싸우셨 소. 이제 내 차례요. 내 대에 와서 선영에 욕보일 수는 없잖소.”
중국 동북3성은 마적 출신 장작림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일본이 우리 독립군을 만주 땅에서 없애 버리라고 압력을 가하는 상황이었으며, 무기 운반대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관양성소 1회 필업식(졸업식)을 앞두고 중국군과 충돌하게 되었으니 사령부로서는 위기상황이었다. 이때 김좌진 장군이 단군영정, 홍암 나철, 백포 서일 총재 사진을 걸어 놓고 수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좌진 장군이 대종교 교도임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대일항쟁 역사에서 최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
1920년 10월 21일 새벽 5시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를 했는데, 모두 승리하였다. 이것을 두고 ‘청산리대첩’이라고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동네 부녀자들이 먹을 것을 머리에 이고 전장에 뛰어 들어 독립군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독립군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인상적인 장면은 전장에 사물놀이패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적군을 교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동네의 부녀자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총알이 날아오는 전장에 들어가 직접 독립군들에게 주먹밥을 나누어 주거나 직접 먹여 주었다. 다음은 청산리 전투 생존자 이우석 옹이 남긴 증언이다.
"그때 엄호를 맡았던 동지들은 모두 전사했거나 실족을 했어요. 이제 나도 멀지 않아 저 세상으로 가겠죠. 그런데 이 늙은이 죽기 전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어요. 나라가 반쪽으로 갈라졌단 말이에요. 요즈음 젊은이들은 그래도 마음이 편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이 반평생을 남의 땅에서 고생한 사람들은 그게 자꾸 서럽단 말이에요. 우리 후손들 모두 똑똑하고 능력도 많은데, 어서 이 나라, 한 나라로 합쳐질 수 있도록 힘 좀 써 봐요."
진정한 일송정 푸른 솔은
이 영화를 통해 독립군을 처음 보았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켜 왔는지를 알 수 있었고 일제의 잔학성 또한 알 수 있었다. 영화에서 배우 박암이 서일 총재 역할을 했다. 또한 배우 김기주가 김좌진 장군 역을 했다.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백포 서일 총재를 조명한 책, <항일무장투쟁의 별,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이 최근에 나와 백포 서일에 관해서 알려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잘 모르는 한국인들이 많은 것 같다. 서일 총재의 호는 백포(白圃), 김좌진 장군의 호는 백야(白冶) 이다. 두 분의 호를 보면 두 분의 관계를 헤아려 볼 수 있다. 백포(白圃)는 밝은 농부이고, 백야(白冶)는 밝은 대장장이이다. 농부에게 필요한 농기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 대장장이라면 서일 총재와 김좌진 장군의 관계가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청산리 독립 전쟁에서 서일과 김좌진, 두 거목이 존재했고, 그 외의 많은 독립군들, 음식을 나눠 준 여성들, 사기를 북돋아 주었던 풍물패 등 당시 청산리에 존재했던 모든 조선 동포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의 진정한 '일송정 푸른 솔'이었다.
서일(徐一) 총재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개설본관은 이천 서씨(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서기학(徐夔學), 호는 백포(白圃).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의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6년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이 되어 활동한 결과, 나철(羅喆)의 교통(敎統)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1917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와 노령(露領)의 동포에게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대한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같은 해 8월 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고 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계
부인 : 채씨
장녀 : 서모(徐模, 1902~?)
차녀 : 서죽청(徐竹淸, 1906~?)
사위 : 최관(1900~?)
아들 : 서윤제(1908~1969) 독립운동가
자부 : 권씨(1907~1931)
손자 : 서경섭(徐敬燮, 1925~2008)
손자 : 서만섭(徐萬燮, 1930)
목차
- 1 가족
- 2 대종교(大倧敎)
- 3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 4 중광단(重光團)
- 5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 6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7 청산리대첩
- 8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 9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 10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 11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 12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 13 회삼경(會三經)
- 14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 15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 16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 서영승씨 “독립지사 후손답게 고국 위해 봉사”
- 17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통해 재조명 '청산리 독립 전쟁의 서일 총재'
- 18 항일무장투쟁의 별 -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 정길영 (지은이)
- 19 백포(白圃) 서일(徐一)과 대종교-그 정체성(正體性)의 여정(旅程)-김 동 환 (국학연구소)
- 20 백포 서일과 청산리대첩- 김 병 기 (광복회학술원)
- 21 1910~20년대 중국 동북지역 - 항일무장투쟁과 서일- 이 동 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 22 백포 서일의 독립운동과 자유시참변- 장 우 순 (성균관대학교)
- 23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24 이섭대천(利涉大川)
- 25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26 같이 보기
가족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유(徐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 정2품. 장관.양경공파(良敬公派))
12세 서경흥(徐敬興. 목사(牧使). 정3품.당상관.차관)
13세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14세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15세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16세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17세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
18세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19세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대종교(大倧敎)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중광단(重光團)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청산리(靑山里) 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건립된 비석.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徐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회삼경(會三經)
백포 서일(徐一) 종사 저서(白圃宗師著)
이 경의 내용은 삼일(三一)의 원리를 강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 대종교는 유교·불교·도교의 세 교를 포함한 것인데, 이 경전은 실로 불교의 묘법(妙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에 관한 오묘한 뜻이 갖추어진 것이므로 혹시 [삼동계(參同契)]와 대조해볼지도 모르나 [삼동계]는 그 방술만을 탐구한 것이요, 이 경은 그 철리를 강술하여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위치는 인천 연수구 연수동 먼우금로 251번길 27, 201호
법인은 일제하 이국 만리에서 오로지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신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 순국선열유족과 더불어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조국과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대를 건너 이어지는 북로군정서 창설의 역사
1911년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하고 고향을 떠난 서일 총재가 두만강을 건너 처음 만난 사람이 봉오동을 무장독립군 기지로 건설하고 있던 최운산 장군이다. 북간도 봉오동에서 처음 만난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는 서로의 의기를 알아보았고 그 자리에서 무장투쟁을 결의하였다. 서일총재는 최운산 장군이 내어준 덕원리, 즉 서대파에 머물며 학교를 열었고, 서대파를 근거지로 대종교인들을 이끌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서대파를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 서영승씨 “독립지사 후손답게 고국 위해 봉사”
“선조의 항일·희생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로 이날 행사에 참석한 서영승씨(인천시 연수구)는 2대째 독립지사 가문의 후손이다. 서영승씨의 아버지인 서희우씨부터 서만섭, 서일 총재까지 이어지는 가계도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 평탄치 않은 가정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통해 재조명 '청산리 독립 전쟁의 서일 총재'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첫 소절이다. 한때는 한국인이라면 이 가사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던 시기가 있었다. 가곡 <선구자>는 1절만 윤해영 작사이고, 2·3절은 후에 작곡자 조두남이 작사했다고 한다. 1절이 자주 불려서 2·3절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 였다. 1980년대까지는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에 나오는 지명 때문에 만주, 특히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리하여 1980년대까지 매우 자주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나 곡 모두 훌륭한 가곡으로 평가되었으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던 가곡으로 매번 선정될 정도였다.
항일무장투쟁의 별 -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 정길영 (지은이)
서일은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요, 종교지도자이며 철학자요, 군사전략가이며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는 짧은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살신성인한 인물이었다.
백포(白圃) 서일(徐一)과 대종교-그 정체성(正體性)의 여정(旅程)-김 동 환 (국학연구소)
백포 서일과 청산리대첩- 김 병 기 (광복회학술원)
1910~20년대 중국 동북지역 - 항일무장투쟁과 서일- 이 동 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백포 서일의 독립운동과 자유시참변- 장 우 순 (성균관대학교)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