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째 신앙 전통 이어온 믿음의 서상륜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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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째 신앙 전통 이어온 믿음의 서상륜 가문 서원석장로·서경석목사 가정

대를 이어 신앙의 전통이 이어지는 가정.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갖는 소망일 것이다. 스스로 혹은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 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나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하는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고, 게다가 신앙의 전통이 2대를 넘어 3대, 4대째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정에 대한 부러움은 이루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그런 유서 깊은 신앙 전통의 맥을 이어오는 가정들 중에서 서원석장로(새문안교회·대한성서공회 진흥국장)와 서경석목사(우리민족서로돕기 사무총장) 형제의 가정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부러움을 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신앙 집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

이들 집안의 신앙 내력을 따지자면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84년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서상륜·서경조 형제가 이들의 증조부가 되기 때문. 어찌보면 이들 가정의 신앙 역사가 한국 기독교 역사보다도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순수 자생 토착교회인 `소래교회'의 창설자인 증조할아버지 서상륜서경조목사, 첫 유아세례자인 할아버지 서병호장로, 독립운동가로 해군제독으로 애국의 길을 걸어온 아버지 서재현장로에 이어 교계에서 대를 이어 봉사하고 있는 서원석장로·서경석목사 등 이들 서씨 집안은 한국 기독교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집안인 것. 국내 성경 반포의 주역인 서상륜과 그의 동생 서경조. 서상륜이 끝까지 평신도 전도인으로 남아있던 것에 반해 서경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 7인 가운데 하나였다. 서원석·서경석 형제 집안의 신앙 내력을 이야기 함에 있어 서상륜서경조를 함께 이야기할 수밖에 없음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가 있다.

혹자들은 이들 형제가 서상륜의 후손인지 혹은 서경조의 후손인지에 대해 많은 궁금증들을 갖고 있는데 실상은 이런 것. 우선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들은 서경조 목사의 후손이다. 서목사의 둘째 아들인 서병호장로의 장남 서재현장로의 후손들이므로. 하지만 서상륜 증조할아버지의 슬하에 아들이 없던 고로 옛날에 흔히 그랬듯이 동생 서목사의 둘째 아들인 서병호서상륜의 아들로 호적에 입적된다. 그러므로 호적상에는 서상륜이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것. 다시 말하면 핏줄로는 서경조의 후손이지만 호적상으로는 서상륜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누구의 후손인가를 지금에 와서 굳이 따져볼 필요는 없지만, 이렇든 저렇든 간에 서원석장로와 서경석목사 형제는 오랜 신앙의 맥을 이어온 가정의 후손들임이 자명하다.

서씨 집안과 관련한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이들에 그치지 않는다. 할아버지 서병호의 부인 즉 외할머니의 집안도 신앙의 내력에 있어서는 내로라 하는 집안인 것. 외할머니 광산 김씨 집안도 독립운동가 김규식, 여성 운동가 김마리아, 최초의 신학박사인 남궁억을 비롯해 정신여고 초대교장인 김필례, 서울여대 초대 총장을 지낸 고황경에까지 신앙의 가계가 이어진다. 서씨 집안의 장남 서원석 장로는 그가 몸담고 있는 대한성서공회 집무실 한켠에 자그마한 보따리를 하나 간직하고 있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자필 문서 및 이분들에 대해 조사된 각종 자료 뭉치와 사진들이다.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인 서병호장로(서경조목사의 아들)와 함께 살았지만, 한번도 증조 할아버지의 아버지 즉 서경조할아버지와 서상륜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등 집안 내력에 대해 자랑 삼아 이야기 하신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서장로는 "하지만 매일 새벽 무릎 꿇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던 모습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 있다"고 회고한다. 대한적십자사 초대 이사장, 한국기독교연합회 초대 회장, YMCA 전시대책 위원장 등으로 눈부신 활약을 했던 할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서원석·서경석 형제에게는 늘 무릎 꿇어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으로만 각인돼 있는 것.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히려 외부 사람들의 노력과 발굴에 의해 알게되었을 정도로 집안 에서 회자된 적이 별로 없던 것으로 기억하는 이들 서씨 형제는 한결 같이 이렇게 입을 모은다.

"저희는 모두 아버님(故 서재현장로)을 존경합니다. 근면하고 검소하게 또 정직하게 평생을 사셨던 아버지의 삶을 존경합니다.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인 서병호장로의 삶을 보고 자라셨기에 가능하셨겠지요.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삶을 본받으셨겠구요. 말로 전해내려 오는 집안의 신앙 가훈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 섬기기를 말없이 하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셨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신앙은 삶을 통해 저희의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집안의 신앙 전통이 아버지의 삶을 통해 계승된 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4대째 새문안 교회의 장로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 서원석장로는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하던 성서반포 사업을 물려받듯 대한성서공회에서 진흥국장직을 맡아 일하고 있다. 그 바로 밑의 동생인 서경석목사(우리민족서로돕기 사무총장)는 요즘 한창 관심을 모으고 있는 `재외동포법' 제정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3남 서만석씨는 미국에서 목사로 사역중이고, 4남 서창석씨는 새문안교회 집사로 봉사중이다.

"아버님을 회상할 때마다 긴장이 되고 지금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 형제는 교회를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이러한 신앙 유산이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전해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묄쌔" 이들 형제를 보며 떠오른 시 한구절이었다.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徐閈)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내용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13세 때 부모를 잃고 만주에서 홍삼장사를 하였다. 31세 때 만주에서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맬 때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목사인 매킨타이어(McIntyre, J., 馬勒泰)에게 구호를 받은 후 완쾌되어 신자가 되었다.

몇 달 후에 매킨타이어와 같은 선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목사 로스(Ross, J., 羅約翰)를 만나서 세례를 받고 그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그 뒤에 이성하(李成夏)·이응찬(李應贊)·백홍준(白鴻俊)과 함께 신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1882년 가을 쪽 복음 형태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간행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 전의 일로, 민족교회 성립의 기초를 이룬 것이었다.

1884년에는 『예수셩교젼셔 마태복음』과 『말코복음』을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간행하였고, 1887년 이른바 ‘로스 번역 성서(Ross Version)’라고 하는 신약성서 번역본을 『예수셩교젼셔』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다.

이는 중국어 성경에서 번역한 것으로 성서 번역뿐 아니라 식자와 인쇄도 모두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성서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에 반포하는 것도 시도하였다.

1883년 성서를 가지고 입국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의주(義州)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때. 의주부 집사이며 교인이었던 김효순(金孝順)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고향인 의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상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동생 서경조(徐景祚)와 함께 황해도 장연군솔내(松川) 마을로 이주, 교회를 세우고 전도활동을 하여 한국 개신교회의 요람지로 발전시켰다. 1887년 서울 새문안교회가 설립될 때 설립교인 14명 중 13명이 그의 전도로 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말년에는 솔내 교회에서 전도활동에 전념하였다. 1936년 9월 제25회 장로회 총회에서 기념비 건립이 결정되어 1938년 그의 묘지에 기념비가 세워짐으로써 선구자적 선교 사업을 기리게 되었다.


『한국개신교사(韓國改新敎史)』(백낙준,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상』(차재명 편, 신문로교회당, 1928)

최초 한글성경 번역한 서상륜(徐相崙)

서상륜이 황해도 소래에 세운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한국기독교선구자 서상륜 기념비

4대째 신앙 전통 이어온 믿음의 가문

서원석장로·서경석목사 가정

대를 이어 신앙의 전통이 이어지는 가정.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갖는 소망일 것이다. 스스로 혹은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 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나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하는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고, 게다가 신앙의 전통이 2대를 넘어 3대, 4대째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정에 대한 부러움은 이루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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