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현(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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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현(徐載賢).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양할아버지: 서상륜(徐相崙 한국 최초 교회 소래교회 설립자)
  • 친할아버지: 서경조(徐景祚 한국 최초 목사)
    • 큰아버지: 서동원(徐東元 1901-1950 목사)
    • 아버지(서상륜의 양자): 서병호(徐丙浩 장로.독립운동가)
      • 본인:서재현(徐載賢 장로. 독립운동가)
        • 아들:서원석(장로.대한성서공회 본부장)
        • 아들:서경석(徐京錫 경실련 설립자)

1906년 11월 15일 황해도 장연군 서대면 송천동(현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서병호와 어머니 김구례(金求禮)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에 부친을 따라 상하이로 이주했고,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설립한 인성학교(仁成學校) 소년회 회장으로 부임해 "나라를 찾는데는 돈이냐 피냐"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던 1925년 5월 29일 상해대학 학생연합회에서 각 대학교에 조계공부국경찰서(租界工部局警察署)에 인치되어 있는 학생의 방면 및 배외운동을 위해 5월 30일부터 동맹 휴교하고 시위를 벌이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송하자, 한인 유학생이 가장 많은 동제대학(同濟大學)과 호강대학(滬江大學)의 한국인 학생 25명은 중국 학생에 호응하여 배외운동에 협조할 것을 맹세하고 5월 30일 오전 9시에 학생연합회에 집회하여 각 학교에서 각자가 협정한 구역을 시위를 벌였다.

당시 동제대학 학생이었던 서재현은 최병락(崔炳洛), 김규선(金圭善) 등과 함께 시위에 참가했고, 오전 11시부터 상해 역전에서 대오를 정비하고 절강로 남쪽을 향해 행진하며 조계 회수, 제국주의 타파, 치외법권 철폐를 외쳤다. 이들이 오후 2시경 남경로에 이르렀을 때, 조계공부국(租界工部局) 노갑경찰서(老閘警察署) 경찰과 마주쳤다. 경찰이 이들을 향해 발포하자 중국인 학생 1명이 즉사했고, 시위대는 각기 흩어져 해산했다. 이후 그는 6월 1일부터 5일까지 조계 외곽에서 가두연설과 전단 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서재현은 1931년 9월 4일 김석의 자택에서 독립운동의 전위적 임무를 실천할 목적으로 조직된 상해한인독립운동 청년동맹의 중흥 방침을 협의한 뒤 1931년 11월 오후 8시부터 개최된 임시총회에 출석해 무력화된 청년동맹을 해소시키고 새로운 조직을 설립할 계획을 수립하는 등 일련의 임무를 일임받았다. 그는 1932년 1월 25일 프랑스조계 망지로에 위치한 중국요리점에서 이덕주, 유상근, 김덕근, 조시제, 이규서, 정충렬, 유진동 등 9명과 함께 모여 신당조직 준비회를 개최하고 신당의 명칭을 상해한인청년당(上海韓人靑年黨)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그는 이덕주, 김석과 함께 강령규약 선언서 기초위원에 선출되었고, 1932년 1월 31일에는 마량로 보경리 4호 대한교민단사무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당헌, 당칙, 선언서를 심의, 결정했다. 이 상해청년당의 목적은 조국 독립을 위해 한국 청년의 단체적 훈련을 도모하고 혁명 역량을 총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수사가 심해지자 상하이를 떠나야 했고, 이후 1944년 3월 난징에서 조직된 민족혁명당의 감찰위원으로 활동했다.

8.15 광복 이후 조국에 귀환한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중령으로 활동했고, 1955년 해군공창장을 역임한 뒤 준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한국기계공업 사장, 강업산업 주식회사 부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새문안교회 장로를 맡기도 했다. 또한 금성충무무공훈장, 은성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1999년 7월 14일에 서울 보훈병원에서 병사했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徐閈)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4대째 신앙 전통 이어온 믿음의 가문

서원석장로·서경석목사 가정

대를 이어 신앙의 전통이 이어지는 가정.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갖는 소망일 것이다. 스스로 혹은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 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나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하는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고, 게다가 신앙의 전통이 2대를 넘어 3대, 4대째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정에 대한 부러움은 이루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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