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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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희(審希)
BHST Monk1.png
대표명칭 심희
영문명칭 Simhui
한자 審希
생몰년 855(문성왕 17)-923(경명왕 7)
시호 진경(眞鏡)
탑호 보월능공(寶月凌空)
이칭 법응대사(法膺大師)
승탑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
승탑비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진경대사 심희(眞鏡大師 審希)는 855년(문성왕 17)에 태어났다. 심희는 임나(任那)의 왕족으로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이라 하였다.[1]

Quote-left.png 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이며 속세의 성은 신김씨(新金氏)[2]이다. 그 조상은 임나(任那)의 왕족으로 성스러운 가지로 뻗어났으나 매번 이웃 군사에게 괴로움을 당하다가 우리나라에 투항하였다. 먼 조상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은 금오산의 기상을 이어받고 신라의 정기를 타고 올라서 문부(文符)를 잡아 재상이 되고 무략(武略)을 지녀 왕실을 도와 ... 두 적을 끝내 평정하여 우리 나라를 길이 평안케 한 사람이며, 세 왕을 극진히 받들어 멀리 진한의 풍속을 어루만졌다.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봉림사 진경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60-6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유년기

어릴 때부터 심희는 남다른 자태를 드러냈고,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거나 향을 올렸다고 한다.

Quote-left.png 대사는 남다른 자태가 넉넉히 드러났고 신비한 안색은 화락하고 맑았다. 어린 시절에도 아이 같은 마음이 없었고, 일곱 여덟 살 되어서는 불사(佛事)에 ...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나뭇잎을 따서 향을 올렸다.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봉림사 진경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6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출가수행

심희는 9세가 되던 863년(경문왕 3) 여주 고달사(高達寺)에 머물던 원감대사 현욱(圓鑑大師 玄昱)을 찾아가 출가하였다.

Quote-left.png 나이 9살에 곧장 혜목산으로 가서 원감대사(圓鑑大師)를 뵈니, 대사가 지혜의 싹이 있음을 알고 절에 머물기를 허락했다. 나이는 비록 적으나 마음 속의 뜻이 오히려 정교했고, 부지런히 노력함은 고봉(高鳳)이 공을 미루고 민첩함은 양오(揚烏)가 아름다움을 사양할 정도였다. 더욱 승려의 ...를 실천하고 법당을 떠나지 않았다.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봉림사 진경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6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활동

심희는 873년(경문왕 13)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명산을 순방하다가 888년(진성여왕 2)부터 송계산(松溪山)에 머물면서 좌선에 몰두하였는데,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다.[3]

Quote-left.png 문덕(文德, 888-904) 초년부터 건녕(乾寧, 894-898) 말년까지 우선 송계(松溪)에 자리를 잡자 배우는 자들이 비오듯 모였고, 잠시 설악에서 여유롭게 머무니 선객(禪客)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어디를 가도 감추지 못하니 어찌 그뿐이었겠는가.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봉림사 진경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62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얼마 뒤 김해의 서쪽에 선림(禪林)이 있음을 듣고 경상남도 창원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가 성 안에 정진할 수 있는 처소를 지어 머물러 있게 하였다.[4]

Quote-left.png 얼마 뒤에 김해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홀연히 이 산을 떠나며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하였다. 진례에 도달하여 잠시 머뭇거리니 이에 ...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가 있어 도를 흠모하는 정이 깊고 풍모를 득고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기다리다가 성 안으로 맞이하여 들어갔다. 그리고 사원을 고쳐서 스님이 머물러 줄 것을 요청하니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비를 만나고 온갖 질병이 의왕(醫王)을 만난 듯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봉림사 진경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62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또한 심희는 당시 김해 지방의 세력가였던 김인광(金仁匡)의 후원을 받아 봉림사(鳳林寺)를 건립하게 된다.

Quote-left.png 이 절은 땅이 비록 산줄기와 이어지고 문이 담장 뿌리에 기대었지만, 대사는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산안개가 아른거리는 빼어남을 가리고 기린이 서쪽 산굴에서 놀며 올빼미가 옛 터에서 우는데, 어찌 과연 대사(大士)의 성정에 마땅하고 신인(神人)의 ...에 깊이 들어맞는다고 하겠는가. 그래서 작은 절은 크게 수리하고 바야흐로 발길을 멈추어 봉림이라 이름을 고치고 선우(禪宇)를 거듭 열었다. 이에 앞서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이 집에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서는 충성을 다하며 선문에 귀의하여 절을 수리하는 것을 도우니, 대사는 마음으로 기꺼이 여겨 끝까지 머물 뜻을 가지고 그윽한 종지(宗旨)를 높이 펴고 불도(佛道)를 널리 떨쳤다.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봉림사 진경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62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하나인 봉림산문(鳳林山門)은 이 때부터 그 선풍이 크게 선양되었다.[5] 918년(경명왕 2)에는 경명왕의 청으로 왕궁에 가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방법을 설파하였다.[6] 설법이 끝난 뒤 왕은 심희에게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존호를 주었다.[7]

Quote-left.png 과인은 대업(大業)을 ...하고 나라의 기틀을 이어받아 도안(道安)과 혜원(慧遠)의 기풍을 돕고자 하고 우(禹), 탕(湯)의 운세를 이루기를 기대하였다. 대사가 당시 천하의 존경을 받고 신라에서 독보적이며 북악의 그늘에서 오래 머물며 가만히 동산(東山)의 법을 전수한다는 말을 듣고, 흥륜사(興輪寺) 상좌(上座) 석언림(釋彦琳)과 중사성(中事省) 내양(內養) 김문식(金文式)을 보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써 간곡히 초빙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비록 깊은 산에 있지만 왕토에 속하며, 하물며 부촉을 받았으니 왕신(王臣)[8]을 거절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정명(貞明) 4년(918, 경명왕 2)) 겨울 10월에 문득 절을 나서서 왕경에 이르렀다. 11월 4일에 이르러 과인이 면류관과 예복을 갖추고 생각을 좀 맑게하여 □궁(□宮)으로 이끄러 들이고 난전(蘭殿)에 경건히 맞이하여 특별히 스승과 제자의 예를 표하며 공손히 우러러 받드는 의례를 폈다. 대사는 법복을 높이 휘날리며 곧 설법하는 자리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방법을 설하고 승려와 ...에 귀의하는 방도를 진술하였다. 과인은 자비로운 얼굴을 기쁘게 올려보고 오묘한 뜻을 몸소 들으면서 감격하여 여러 번 자리를 피해 앉았고, 즐겁고 기뻐서 일일이 받아 적었다.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봉림사 진경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62-6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입적

심희는 그 뒤 봉림사로 다시 돌아와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나이 68세, 법랍 50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진경대사(眞鏡大師)', 탑호(塔號)는 '보월능공(寶月凌空)'이다.[9]

Quote-left.png 갑자기 가벼운 병을 앓았는데 오히려 창백한 기색이 짙으니 대중이 돌아가실 것을 걱정하여 입적할 슬픔을 미리 머금었다. 용덕(龍德) 3년(923, 경명왕 7) 4월 24일 이른 아침 대중에게 고하되 "모든 법은 공(空)하며 온갖 인연은 다 고요하다. 말하자면 세상에 의탁한 것은 마치 흘러가는 구름과 같다. 너희들은 법을 지키며 교화하고 삼가하여 슬퍼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오른쪽으로 누워 봉림선당에서 입적하니 속세 나이로 70이요 승랍 50이었다.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봉림사 진경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6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지식관계망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와 진경대사 심희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심희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 심희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신라 경명왕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신라 경명왕 A는 B가 이름을 지었다 A dc:contributor B
현욱 심희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봉림산문 현욱 A는 B가 개창하였다 A ekc:founder B
봉림산문 심희 A는 B가 중창하였다 A ekc:renovator B
심희 여주 고달사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현욱 여주 고달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심희 창원 봉림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심희 창원 봉림사 A는 B에서 입적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심희 김율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심희 김인광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심희 신라 경명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유신 심희 A는 B의 선조이다 A ekc:hasDescendant B
구산선문 봉림산문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최인연 A는 B가 제액을 썼다 A ekc:calligrapher B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국립중앙박물관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 국립중앙박물관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55년 심희가 태어남.
863년 심희여주 고달사로 출가함.
873년 심희구족계를 받음.
918년 심희신라 경명왕의 청으로 왕궁에 가서 설법함.
923년 심희창원 봉림사에서 입적함.
924년 심희의 탑비인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창원 봉림사에 건립됨.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배상현, "심희", 『디지털창원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김정학, "구형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배상현, "심희", 『디지털창원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왕이 보낸 사신.
  9.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김용선, 「현욱, 심희, 찬유와 여주 고달사」, 『한국중세사연구』 No.21, 한국중세사학회, 2006, 111-139쪽.
  •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배상현, 「진경 심희의 활동과 봉림산문」, 『사학연구』 No.74, 한국사학회, 2004, 99-129쪽.
  • 배상현, "심희", 『디지털창원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지관,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40-364쪽.
  • 하일식, 「봉림사 진경대사비」,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52-6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3 : 신라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심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