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고증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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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예복과 자결 관련 고증오류

작품 속 민영환은 훈장과 견장을 단 서구식 예복을 입고 있고, 왼손 근처에 작은 칼이 놓여져 있다. 실제 그의 자결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상반되는 의견들이 있는데, 당시 그의 최후를 목격했던 김우현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민영환은 한복차림으로 사망했고, 장도(粧刀)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사망 현장 목격자 중 한 명인 시종무관 어담(魚潭)은 그가 오른손에 손톱 깎기만한 작은 칼을 쥔 채로 사망하였고, 할복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여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었다고 회고하였고, 민영환의 장남 민장식의 아들인 민병진도 그의 조부가 단도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혔다.


  • 자결장소 고증오류

작품에 묘사된 배경은 승려와 마당의 석등[1]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뒤편에 있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민영환순국 자결한 장소는 의관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시종무관 어담(魚潭)김우현 목사, 민병진의 회고에 따르면, 민영환의 집민영환의 어머니와 가족이 있었기에 자결 장소를 청지기였던 이완식의 집으로 택했으며, 그의 유해가 이완식의 집에서 발견된 뒤 본저(本邸)로 옮겨졌기 때문에 자결한 당시 모습을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만 목격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1.조정래, <아리랑 1: 조정래 대하소설>, 해냄, 2001, 325쪽;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 1994, 291쪽.(2017년 3월 2일 확인) - 시종무관 어담(魚潭)의 회고
2."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1980.02.26(2017년 3월 2일 확인)
3.김태완, "항일(抗日)과 친일로 이어진 명성황후 후손들의 120년 영락", 『월간조선』, 2015.10.06(2017년 3월 2일 확인) -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의 회고

주석

  1. "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석등",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비스(2017년 3월 2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