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틀:출처 필요 틀:다른 뜻 설명 틀:다른 뜻 틀:조선 표 조선(朝鮮, 틀:문화어, 1392년~1897년)은 이성계가 세운 나라이다. 505년간 27명의 왕이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통치하였다. 공식 명칭으로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으며, 때로 대조선국(大朝鮮國)이라는 명칭을 어보(御寶), 국서(國書) 등에 사용하였다.[1] 흔히 조선(朝鮮) 혹은 조선 왕조(朝鮮王朝)라고 부르며, 일제 강점기에는 이씨 조선(李氏朝鮮) 또는 이왕조(李王朝), 이조(李朝)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2][3] 1897년, 광무개혁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고려 말기 신진사대부의 지원을 받은 무관 이성계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이후 500여 년 동안 존속됐다. 조선은 유교에 의한 통치 이념을 기본으로 임금과 신하에 의한 치를 중요시했다.
조선이 통치하는 동안 한반도에서는 한글(훈민정음)의 창제와 과학 기술 및 농업 기술의 발달 등이 이루어졌으며,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외침을 극복하고, 현재의 한민족과 한국 문화의 직접적 전통의 기반이 되는 문화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목차
개요
추존된 임금 환조 이자춘의 아들이자 고려왕조의 신흥 무인세력이었던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창왕·공양왕을 왕위에 강제로 올렸다가 신씨인 신돈의 아들이라고 사건을 거짓으로 조작시켜서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했다. 1392년 7월(음력, 양력으로는 8월 5일)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들고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4] 1393년 2월 15일에는 국명을 “조선(朝鮮)”으로 정하였고[5],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6]
태종 이방원은 특권층이 소유하고 있는 개인 사병들을 강제 해체하고 조선의 군대에 편입시키고,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왕권을 크게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6조 직계제)를 정비하였다. 세종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할 정도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성군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엄청나다. 이 당시에 과학이 크게 발전했다. 세조(수양대군 이유)는 조카 단종 이홍위를 몰아내고 왕위 정통성에 문제가 있자, 반발하는 세력을 무마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 태종처럼 신권을 제한하여 왕권이 강력하게 강화되었고, 《동국통감》,《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했다.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 제도를 정비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 대신인 훈구와 신진 관료 세력인 사림이 대립하면서 정치는 혼란해졌으며, 이에 따른 전반적인 사회상이 혼탁해졌다. 선조 때에는 마침내 훈구파들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사림들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사림들은 '붕당'을 형성하여 조선 정치의 꽃이자 역모 반란죄에 해당될 수 있는 붕당정치(朋黨政治)를 시행한다.
이어 16-17세기에 주변국인 일본, 청(후금)과 치른 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이후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으나 조선의 임금 효종이 얼굴에 났던 종기(부스럼)에서 피가 지혈이 안 돼서 세상을 갑작스럽게 뜨자,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은 실행하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붕당은 학파적 성격과 정파적 성격을 모두 띈 일종의 정당으로, 각 붕당은 국가의 공론(여론)을 따름으로써 여당이 되려고 노력했다. 각 붕당은 학문적,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여 스스로 부패하는 것을 경계했다. 각 붕당은 지방의 서원을 통해 그들의 스승에 제사를 지내고 결속을 다졌는데, 이 서원의 교장 격인 '산림' 은 조선 중앙정부의 삼사 언관직 선비들과 함께 공론(여론)을 형성했다. 조선의 이와 같은 여론정치는 당대 동서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정치였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남인의 허적이 자기 마음대로 왕실 물건을 사용해서 당시 숙종은 분개하였다.)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고, 그기야 정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환국이 일어나면서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공존이라는 '붕당 정치의 원칙'이 무너지고 특정한 붕당이 다른 정권의 붕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을 띠면서 국왕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정치에 개입이 되어 국정이 마비될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이 때문에 여러 붕당 간에 갈등과 오해로 서로 죽이고 또 죽이는 당쟁으로 인해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 이선이 뒤주 안에 갖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그래서 왕권이 신하들에 의해 약해지자 당쟁을 막기 위해 영조와 정조는 당파의 균형을 고려한 인재기용(탕평책)을 실천했다. 그러나 정조가 1800년에 갑작스럽게 종기의 염증으로 세상을 뜨자 노론세력이 독점하여 정국을 이끌었지만, 19세기의 순조·헌종·철종 등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들 외척가문은 왕위 임명에도 손을 대는 등 부정부패 속에서의 절대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풍양 조씨의 가문의 대표였던 조대비)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하여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명복(고종)을 조선 국왕 자리에 올린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붕당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들을 축출한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와 협박을 물리치고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지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으로 하야하고 친정을 하면서,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마자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1880년대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무능한 개혁 정책은 조선을 근본적인 근대화로 이끌지 못했다.
1890년대에는 농민 수탈에 대한 저항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기도 했다. 1894년에는 친일적인 성격을 지닌 갑오개혁이 실행되었다. 한편 일본이 친러파인 명성황후를 없애고, 친일 내각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암살으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민씨를 살해하자, 고종은 1896년 몰래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러시아 주한 공사관에 1년 동안 피신했다. 1897년 11월 경운궁(景雲宮)으로 환궁한 고종은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고쳐 쓰고, 원구단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조선이란 국호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황제의 국가인 대한제국의 국호로 사용하게 되어 지위가 격상되었다.
역사
조선(1392~1897)의 역사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며, 전기를 다시 둘로 나눠 전기와 중기로 보아 전기-중기-후기로 보기도 한다. 이때 전기-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임진왜란](1592~1598)이며, 전기-중기-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전기와 중기는 중종반정(1506), 중기와 후기는 [임진왜란]또는 병자호란(1636~1637)이다.
전기 (1392~1592)
1388년 고려의 무신이었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계기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했다. 이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으로 인하여 정몽주가 제거되고 139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재위 1392년 ~ 1398년)가 되었다. [7]
1393년에는 국명을 명으로부터 선택받아 조선으로 고치고[8] 1394년에는 개경의 민심이 안 좋아 한양으로 천도하여[9]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태조는 재위기간 동안 개국공신에게 권력을 거의 다 주어 특별히 한 업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개국공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못 본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1398년)을 일으켜[10] 정권을 장악하다가, 1400년 정종(재위 1398~1400년)의 선위로 집권했다. 태종 이방원(재위 1400~18년)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했다.
세종대왕(재위 1418~1450년)은 학문 · 군사 · 과학 ·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세조(재위 1455~68년)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신권)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성종(재위 1469~94년)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개국 초기
14세기 말 당시 고려는, 안으로는 기존의 귀족 세력인 권문세족과 그에 반발하는 신진 사대부들이 대립하여 정치가 혼란하였고,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약탈과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이어지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고려의 무신인 이성계는 왜구, 홍건적, 몽골족, 여진족의 침입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명성을 얻어 중앙 정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무렵 고려 조정은 철령위 문제로 밖으로는 명과, 안으로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태조)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장군에게 회군을 거듭 청했다. 그러나 회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1388년 6월 24일(음력 5월 20일) 군사를 수도 개경으로 돌려 회군을 일으켰다 (위화도 회군).
이성계는 회군으로 수도 개경에 있는 모든 정권을 잡아 최영 세력을 숙청하고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다.”라고 폐위한 뒤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이듬해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 사전 개혁(私田改革)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하였다. 전제 개혁으로 이성계·정도전·조준 등은 막대한 과전을 받게 되었으나, 권문세족들은 농장을 몰수 당함으로써 경제적 토대가 붕괴했다. 한편 공전(公田)의 증대는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켜 새로운 왕조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게 했다.
1392년에는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개경 선죽교에서 척살(斥殺)하고, 그 해 8월 5일(음력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에게 왕위를 받은 이성계가 마침내 조선을 건국했다.[11]
이성계는 건국 후 1년이 되어서야 국호를 바꾸었다.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에는 나라의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1394년 음력 1월에 한성부로 천도했다. 태조는 고려 때에 큰 폐단이 되었던 불교 대신에 유교를 존중하여 이를 정치·교육의 근본이념으로 삼으니, 불교는 점점 쇠퇴하여 천대를 받고, 유교는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1,2차 왕자의 난
태조는 8번째이자 막내 왕자인 의안대군 방석을 왕세자로 삼았으나 개국 당시 공이 컸던 5번째 왕자 정안대군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1398년 이방원은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켜 왕세자 방석과 7번째 왕자 무안대군 방번, 그리고 왕세자를 지지했던 정도전과 그의 일파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태조의 아들 중 가장 위인 2번째 왕자 영안대군 이방과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였고 그해 음력 9월 태조는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었고, 이방과는 조선의 임금인 정종이 되었다.
그러나 넷째 왕자 회안대군 방간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불만을 품은 박포와 공모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방원의 군사와 개경에서 맞붙어 패했으므로 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종은 이방원을 왕세제로 삼고 음력 11월에 양위하여 태종이 왕위에 등극하였다.
사대교린 정책
외교면에서는 명(明)에 대해서는 사대정책(事大政策)을 썼다. 특히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내부적으로 국호를 정했으나,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령(和寧)과 조선(朝鮮) 중에서 승인을 받았던 일이 있다. 따라서 서로 사신의 내왕이 잦았으며, 이를 통하여 조공(朝貢)·회사(回賜) 형식의 국가 간의 무역이 행해졌다.
조선의 국왕들은 명에 대한 사대 관계를 형성, 고려말부터 종주국으로 받들어오던 명에 형식적으로 제후, 속국의 예를 취했으나 이는 형식적인 것이었다. 1400년 이후 정식 국왕으로 책봉된 이후로도 조선의 역대 국왕들은 즉위 직후 명에 책봉 고명사를 파견하여 책봉 승인을 받아왔고, 국왕의 재위 중 왕후의 사망과 계비를 맞이할 때, 세자를 책봉할 때, 세자빈을 간택, 책봉할 때 역시 명에 책봉 고명사를 보내 승인을 받아온다.
조선에서는 매년 명나라에 진하사, 문안사, 동지사 등을 보냈고 태종 때부터 선조 때까지는 종계변무사를 파견했다. 개국 초기 정도전의 요동정벌 문제로 명나라는 조선의 국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국왕 책봉고명사신이 도착하면 권지고려국사 혹은 권지조선국사라는 임명장을 내려주었다. 조선 국왕을 정식 국왕으로 승인한 것은 1401년(태종 1년) 태종 때였다.
또 다른 주변 국가인 일본과 여진에게는 교린 정책(交鄰政策)을 취했다. 이 두 정책은 조선의 근본정책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제도의 정비와 문화 융성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해서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했다. 태종은 사병을 혁파했으며 양전 사업과 호구 조사를 통해, 조세 제도와 호적 제도를 개혁했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했고, 또한,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해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켜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신하들을 견제하게 했다. 또한, 지금의 8도 정책도 태종 때부터 자리 잡은 정책이다.
이렇게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세종(세종대왕)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했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이 시기에는 주자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했으며, 고려 말에 들여온 면화가 보급되어갔다. 또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북방 지역인 4군 6진을 개척해서 국경선을 확정시켰고, 남으로는 대마도 정벌을 통하여 일본 왜구들의 약탈을 방지했다. 또한,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했다. 개량된 금속활자로 여러 가지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의서인《향약집성방》을 통해서 의료 관계 개선이 집약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짧은 치세 뒤에 서거하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뒤를 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보위는 쉽지 않아 병권을 잡은 김종서가 국사를 봤으나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정난(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정대신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세조가 되었다. 세조는 세종이 채택한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태종이 주창한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신하가 숙청당하고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던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신권)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국조보감》등을 만들기도 했다.
세조의 손자인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여 사라진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했으며, 세조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었던《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했다. 성종은《경국대전》의 편찬을 반포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했다. 또한,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했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대량숙청 되지만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대부분 숙청되었고 인종 때 잠시 등용되었지만, 명종 을사사화 로 훈구,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선조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중기 (1592~1637)
시대가 내려오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났다. 특히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훈구 재상의 대토지 소유는 토지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진 사류의 불만을 사게 되어, 여러 번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을 빚어냈다.
처음에는 신진 사림세력들이 빈번히 화(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림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 사림들 간 자기 일파(일당 전제화)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대립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으로 변질 되는 등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이어 16세기~17세기에 주변국인 일본, 청과 치른 전쟁(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후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씻고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보답하자 하여 북벌론이 대두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했다.
경제 체제의 해이
양반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과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신전·별사전(別賜田)을 받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세습되었다. 양반 관리들은 또 매입(買入)·겸병(兼倂)·개간 등의 각종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했다. 특히 비옥한 삼남 지방의 넓은 공전(公田)을 침식하였다. 직전법조차 폐지되자 그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농장(農莊)의 확대를 가져왔고, 토지를 잃고 유망(流亡)하는 농민의 증가는 점차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한편 양반 관리들의 사치를 위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공납(貢納)이나 진상 또한 농민들의 커다란 고통이었다. 방납까지 생겨 그 피해는 극심해졌다. 이런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사림의 이이(李珥)와 유성룡은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환곡 제도로 정부는 농민을 상대로 일종의 고리대를 하기도 했다. 환곡은 원래 의창이 담당하는 일이었으나 의창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자 상평창이 이를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농민 진휼 정책(賑恤政策)에서 발단했던 환곡은 점차 변질되었다.
특수직에 종사하는 직역(職役) 외에 양인에게 부과되는 신역(身役)은 주로 군역이었다. 군역 또한 신역의 포납화(布納化) 경향을 촉진하여 제도가 붕괴되었다. 초기에 군역의 대가로 바치는 포(布)는 상당히 고가(高價)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포 대역제(收布代役制)가 관행이 되면서 포납은 정남(丁男)에 대한 인두세(人頭稅)와 같이 되었으며, 평가도 절하되어 갔다. 그리하여 그 공정액이 당시 전세(田稅)의 약 3배에 해당하여 양인에게는 극히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원래의 신역은 붕괴되었다. 그 결과로 농민들의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해졌다. 많은 농민이 유민(流民)이 되어 농촌은 황폐하여 갔으며, 각지에는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임꺽정이 대표적이다.
정치 구도의 변화
중종은 1506년 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은 왕권 강화보다는 왕권의 안정을 이루는 데 주력하였는데, 그 방책으로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철저한 유교적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파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차츰 싫증을 내게 되었다. 결국, 중종은 1519년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 사림들을 실각시켰고, 조광조와 사림파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기묘사화). 그 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45년, 명종이 조선 13대 임금으로 등극하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했다. 이에 명종을 지지하는 소윤파가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파를 공격하면서 을사사화가 벌어졌다. 약 12년간의 섭정으로 정국은 상당히 문란해졌다.
1567년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황, 이이 등 사림을 대거 중용하였다. 선조는 사림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기묘사화 때 당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를 복권했으며, 훈구대신인 남곤, 윤원형 등을 대역죄로 단죄하여 관작을 추탈하고 삭훈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후에 사림이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인과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서인으로 분리되어 붕당이 형성되자, 선조는 어느 한 쪽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에 따라 정국이 단번에 교체되는 일이 잦았다.
거듭되는 사화 속에서도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발전하여 갔으며, 드디어 선조 때에는 재차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또다시 당쟁이 일어나게 되어 정쟁은 파노라마처럼 되풀이되었다.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과 김효원 양파의 전랑직(詮郞職)을 에워싼 암투에서 비롯되었다.
임진왜란(임진왜란+정유재란), 일본과의 7년 전쟁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20만 병력의 일본군을 조선에 대거 보내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초반 제승방략체제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고, 일본군의 신무기인 조총에 크게 고전하였다. 부산진성의 정발과 동래성의 송상현이 삽시간 만에 일본군에게 무너지고, 상주의 이일과 충주 탄금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신립장군의 군대도 일본군이 무장한 조총에 의해 궤멸당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변에 있는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일본군은 개전 20여 일 만에 한양에 무혈 입성하였고, 임진강 방어선도 간단히 뚫은 채 평양까지 손쉽게 점령하였다.
이 기세로 가면 의주도 점령될 것 같았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옥포·사천·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해버림으로써, 일본군은 수군을 통한 보급작전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고 더 이상 북진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삼남 지역에서도 조선 각지의 의병과 관군의 반격을 받았고, 조선군은 명나라의 지원군에 힘입어 일본군을 몰아내어 그 세력을 경상도 해안 일대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5년 간의 지리멸렬(支離滅裂)한 휴전협상이 실패하자,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병으로 죽음)로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고, 노량 대첩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도 막을 내렸고, 이때 노량 대첩에서 충무공 이순신장군께서도 일본군 장수에 의해 왼쪽 가슴 흉부에 총을 맞고 전사를 한다.
전후 복구 사업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매일 훈련해 국방을 강화하였고, 호적을 다시 정비했다. 임진왜란 초기 도성이 함락되어 노비문서와 군적 등이 불에 탔고, 이후에도 전란 중에 노비, 호적 등의 문서가 소각되어 많은 양의 도망 노비와 유랑민이 나타났고 이는 조선 후기의 신분제 붕괴를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에 조정에 곡식과 금전 등을 내고 관직을 사는 공명첩과, 선무군관 등의 임명장을 발행하여 조정의 재정을 충당하였다. 전란 중의 호적자료의 소실로 일부 부유한 상인들과 농민들은 가난한 양반의 족보를 사들이거나 위조하는 행태가 나타났다.
임진왜란 직후 전쟁 중 세운 공로로 벼슬을 받거나 노비에서 면제된 이들을 다시 노비로 환원시켜 불만이 일자 광해군은 임진왜란 전후에 대한 사료를 보강하고 공이 있는 노비와 양인에게는 역을 면제시키거나 관직을 제수하였다. 전쟁 직후의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백성 구휼과 부역 면제 등의 시책을 활용하는 한편 전쟁 기간에 불에 탄 사고를 재정비했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중립적인 외교를 새롭게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어 인조를 왕위에 옹립하였다(인조반정).
인조 반정과 호란
인조는 능창군의 친형으로 북인 정권의 광해군의 서형인 임해군 처형, 영창대군 사사, 진릉군 처형, 칠서의 변, 인목대비(인목왕후) 폐모론 등의 옥사를 명분으로 삼아 광해군을 연산군에 이어 패륜의 군주로 규정하고 1623년 3월 반정을 계획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반정 공신 내부에서도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이 발생하였다.
사림파의 지지를 받고 즉위한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후금, 여진족)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 치욕스럽고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라는 세 번 절하고 이마를 삼전도 앞 얼음(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해 있는 롯데월드 앞 석촌호수)에서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내리치는 만주족 식의 항복을 하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왕자들, 백성들까지 볼모로 끌려감으로써 조선은 청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게 되는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편 조선사회 자체의 모순과 분열 대립에, 임진왜란과 호란(정묘·병자)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북벌론과 북학론의 대두
병자호란이 종식되어 청나라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게 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였으나, 실제로는 은밀하게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나라에 복수할 생각으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 주전파를 중용하여 군대를 대량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 그렇게 하여 45,000명의 군사력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북벌론(北伐論)은 1659년 출병 직전 효종이 사망하자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현종과 숙종은 서인(산림, 山林)을 잠시 배척하기도 했으나 결국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과 정치를 하였다. 또한, 서인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살펴봐서 북벌 움직임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효종 때와는 달리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북벌은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속 보류되어 결국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후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에 자신들이 자초한 패전에 관한 책임을 져야 했던 서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남인들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한편, 전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초래하여 조선 사회의 낙후를 가속하였다.
반면, 당시 청나라는 중국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하였으며, 화포·자명종·만국지도 등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北學論)이 대두하였다.
후기 (1637~1897)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마침내 서인은 17세기 중반의 예송논쟁에서 남인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하지만 남인도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어 싸우다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에게 철저히 탄압당했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조정에는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몰아내는 일당 전제화 현상이 일어나고 환국이 자주 생기는 기이한 일이 반복되면서 영조와 정조는 당파의 균형을 고려한 인재기용(탕평책)을 실천하였다. 19세기의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 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지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이어 일본, 미국 등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1880년대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890년대에는 농민 수탈에 대한 저항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였고, 친일적인 갑오개혁이 있었다. 친일세력은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고 일본군이 의병 토벌을 하는 사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아관파천).
붕당 정치의 변질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의 정치력은 근본적으로 지주제에 토대하였기에, 그들의 개혁안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인 정권은 기층 사회의 움직임에 미봉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서인 정권의 위기는 겉으로는 남인 측의 도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에서도 남인은 꾸준히 진출하였다. 특히 현종의 스승이었던 윤선도가 남인 계열로서, 오랫동안 야당적 입장에 머물러온 남인의 지위를 부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남인들은 서인 정권이 추구한 개혁의 부당성과 북벌 운동의 무모함을 지적하면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더구나 예송논쟁이 정체(政體)문제와 관련되면서 두 정파 간에 심각한 갈등을 자아냈다. 예송논쟁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국상(國喪)에서 자의왕대비의 복제(服制)문제를 계기로 일어났는데, 차자로서 왕통을 이은 효종을 적통으로 보느냐 안 보느냐의 시비였다. 서인의 주장은 임금도 임금 이전에 사대부로서의 예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고, 남인의 주장은 임금은 사대부의 예가 아닌 다른 예가 가능하다는 주장으로서 결국 서인은 신권중시 사상을, 남인은 왕권중시 사상을 대표한다. 1659년(현종 원년)의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1674년(숙종 원년)의 2차 논쟁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의 정치적 지위가 신장하였다.
그러나 경신환국에 의하여 1680년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다시 수립되면서 붕당 사이의 대립양상은 크게 달라져 갔다. 즉 다시 집권한 서인은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의 재기를 막았다. 이때, 서인은 아예 남인을 완전히 축출하자는 노론과 남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소론으로 분열되었으며, 두 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의 반전이 거듭되었다. 이로부터 견제와 균형, 공론에 토대한 붕당정치의 기본 원리는 무너지고, 상대 세력의 존재 자체를 아예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대 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賜死)가 빈번하였고,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로 비화되는 등 붕당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때 숙종은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를 하는 환국을 일으켜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을 자주 교체하였다. 숙종의 잦은 환국은 경종 때에 이르는 동안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지경까지 발전하였고, 경종 때에는 왕세제가 된 연잉군의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동향은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났다.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 집단 사이에서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정치적 쟁점도 예론과 같은 사상적인 것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장악하는 것으로 옮겨갔다.
한편, 향촌 사회에서는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렵게 되어 붕당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다.
탕평 정치의 전개
영조가 즉위한 당시, 조정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그들을 몰아내고 다시 집권하려는 소론으로 나뉘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조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였다. 영조는 노론을 한 사람 기용하면 상대 자리에는 소론을 기용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를 실시하는 것으로 탕평책을 실천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탕평 정치는 그의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진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 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영조의 탕평 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이는 당시 대간을 이용하여 상대 당의 수뇌를 공격하는 파당의 전통적인 관행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당시 붕당 조성의 주요 통로였던 인사권에 임금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조정에서 당파의 영향력을 줄이고 임금과 정승들이 조정의 주도권을 확보해나갔다. 그리고 연좌법과 대역죄 적용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대역죄를 빙자하여 다수의 상대당 인물을 일시에 탄핵하는 관행을 철폐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조정에서 대신들이 당파를 지목하거나 당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금지함으로써 파당의식 자체를 없애고자 하였다. 정조의 치세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의 사색당파가 보편화되었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임금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였다. [12]
세도 정치의 전개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세도정치의 시작은 조선사회 쇠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어린 아들 순조(재위 1800~34년)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조 · 헌종(재위 1834~49년) · 철종(재위 1849~63년)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 한때 약화되었던 당쟁과 일당독재체제는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임금들이 연달아 등극함에 따라 절대적인 왕권이 사라지면서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었다. 이는 선조 이후 오랫동안 조선 정치권력의 기본 구조였던 붕당정치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순조 때에 정권을 잡았던 안동 김씨 세력은 헌종이 즉위하면서 풍양 조씨 집안에게 잠시 권력을 내주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정권을 잡아 세도를 떨쳤다.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은 한없이 나약해져서 백성은 물론 왕족들마저도 안동 김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이에 대항하는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1812년), 철종 때의 진주민란(1862년) 등이다.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도 하에 수많은 몰락한 농민들과 영세농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한때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민란은 계속 이어져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조선에서는 괴질이라고 불림)의 만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와 전후하여 천주교(天主敎)가 전래하였으나 박해를 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섭정기
조선 후기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둘째 아들 명복이가 조대비의 양자로 하여금 왕위에 올라 고종(재위 1863~1907년)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 제도를 사창제로 전환시켰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서원들을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시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경복궁의 중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로써 황폐해졌던 한양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당백전으로 물가가 2배 넘게 폭등)으로 인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 해서 경복궁 타령이라는 판소리가 이 때쯤에 나와 백성들의 고단함과 굶주림을 알 수가 있다.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프랑스인 성직자들과 천주교를 믿는 조선의 백성들을 처형하는 병인박해을 구실 삼아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 배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프랑스 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강화도 섬 여러 곳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결국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예로 들면 직지심체요절)과 의궤들을 모두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병인양요, 1866년)).
이로부터 5년 뒤, 이번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인들은 1866년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실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사과와 배상, 통상 교섭을 요구하여 왔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였고, 그들은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못 이겨 결국 물러가고 말았다(신미양요).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 적혀 있는 척화비(斥和碑)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1871년) 이후 강력한 통상수교 거부정책(쇄국 정책)으로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여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에는 외세가 침범하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일시적인 안정은 찾을 수 있었으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 때문에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게 되었다.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의 침략
1873년 음력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10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의 평화적인 교섭을 포기한 일본은, 1875년(고종 12년) 10월 18일(음력 9월 20일)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강화도 수비대와 교전을 벌인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러한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게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찬반 양론이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로써,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써오던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항을 개항하게 되었다. 이 조약을 체결한 뒤부터 일본 세력은 점차 국내에 침투하여 협박과 간계(奸計)를 일삼다가 1910년에는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13] 이어서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뒤이어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조정에서는 개화정책을 전담하기 위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두었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1880년 11월 13일(음력 10월 11일)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였으며,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들과 맺은 조약들은 모두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거의 취할 수 없게 규정된 불평등 조약들이었다.
개화정책에 대하여 보수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생층 가운데서도 일부 혁신적 인사들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 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4]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틀:본문 틀:참조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음력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인에 대한 정부의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구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윤치호·홍영식 등이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갑신정변이라 한다. 바로 개화파는 군사를 동원해 낙성식에 참여한 대신들은 물론 불참한 수구파 대신들을 처형하고 집권하였다. 그러나 이 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졌으며, 지나치게 대일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정변 주도자 중 홍영식과 박영교 등은 처형되었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김옥균 등은 해외로 망명하였으며 이들의 가족 친척들에게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갑오개혁과 동학농민운동
조선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청-일-러 3파전으로 대표되는 열강의 각축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인 침투(쌀 강제 수탈)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화의 욕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1894).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으로 패하고 지도부(전봉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15]
한편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청-일간에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에 동시에 파병가능이라고 적혀져 있음), 급기야 서로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청일전쟁). 그 와중에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인 성향을 띤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청나라가 간섭하지 못하게 막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시모노세키 조약).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고종 역시 일본의 영향력 증대를 막고자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친러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침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살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친일 내각이 구성이 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과 백성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살해 사건 을미사변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살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일본 나가사키 고등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판시하며 전원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는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며,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한양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고종은 1897년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몇달 후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서 국호로서의 조선은 더이상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등의 나라는 조선의 황제국 선포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이라 불렀다. 그런데 일본도 조선을 한국이라 부른 면도 있다.
정치
중앙 정치 체제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하였다. 중앙 정치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으로 구성하여 운영되었다. 기본 9품에 조와 종이 있어 모두 18품계를 이루었다. 또한 주요 직급자인 당상관과 실무진인 당하관으로 나누기도 한다.
조선 시대의 관직은 중앙 관직인 경관직과 지방 관직인 외관직으로 나뉜다. 경관직은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그밖에 여러 관직이 있으며, 외관직은 지방 행정 구역에 따라 정해졌다. 6조는 서로 업무를 나누어 맡았으며, 정책 회의 등에서 관서 사이의 업무를 조정하고 통일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운영하는 방법에 따라 6조 직계제와 의정부 서사제로 나뉜다.
왕권을 견제하는 언관이자 청요직이었던 3사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 있으며, 이 밖에 왕권 강화를 위한 국왕의 직속 수사기구인 의금부, 왕명을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하는 춘추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등이 있었다.
지방 행정 제도
조선 초기의 행정구역은 고려말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1413년 태종은 한반도를 여덟 개의 도, 팔도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를 두었다.[16] 조선은 고려와 달리, 모든 군현에 지방관인 수령을 파견하였다. 또 인구의 증가와 자연 촌락의 성장에 따라 현 아래의 단위를 정비하여 면리제가 정착되었으며, 특수 행정구역인 향, 소, 부곡이 소멸하였다. 수령에 대한 감찰을 위한 상설기구인 관찰사를 전국 8도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경재소를 설치하여, 유향소를 중앙에서 통제하였다. 또, 역원제와 봉수제, 조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적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고종 32년 (1895년)에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하였다가, 이듬해 8월 기존 팔도 중의 다섯 개의 도를 남·북도로 나누어 모두 13개의 도로 행정구역을 재개편하였다.[17]
과거 제도
조선시대의 관리등용제도에는 과거, 음서, 취재, 천거제, 특지가 있었다. 음서는 '문음 (門陰)'으로 불렸는데,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는 천시되어, 음서로 요직에 진출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과거의 종류에는 문과 (文科), 무과 (武科), 잡과 (雜科)[18]가 있었다. 그 중 잡과는 서얼이나 중인, 일반 상민들이 주로 치렀다. 과거는 대체로 정기적으로 치러졌으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열거나 왕의 재량으로 열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각종 부정이 늘어나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관리등용제도가 개편되면서 과거는 폐지되었다.
사법
본래 조선시대의 법은 신라 이후 적용된 중국의 당률(唐律) 영향 밑에서 발달되어 오다가,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이 규정한 조선경국전과 대명률에 근거한 법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제정된 경국대전과 그 후속 법인 대전회통과 속대전, 대전통편 등이 대명률과 함께 쓰였다.
법을 관장하고 죄인을 심문, 형벌을 구형하는 기관은 형조였고, 죄인을 체포, 추국하는 곳은 의금부였으나 죄인을 수사, 국문하는 기능은 형조, 의금부 모두 갖고 있었다. 그밖에 현대 한국의 서울특별시에 해당하는 한성부에서도 체포, 수사의 기능이 있었다.
한성부와 8도의 관찰사 이외에 각 지방의 부윤, 부사, 도호부사, 목사, 군수, 현감, 현령, 면장 등에게는 행정권 이외에 사법권한이 주어졌으며 이들 면장과 그 상급자인 현령, 현감, 군수, 부사, 목사, 도호부사, 부윤 이들의 상급자인 관찰사 등으로 형률 시행이 보고되었으며 관찰사는 최종적으로 의금부와 형조에 수사, 처벌 결과를 보고하였다. 관찰사의 판결에 이의가 있는 자는 한성부에 제소하기도 했다. 한성부는 한성부내의 사건 사고 외에도 각 타도의 사건 사고도 일부 관할하였는데 이는 송나라의 영향이었다.
지방관의 판결에 이의가 있었으나 조선 세종 때는 수령고소금지법이 제정되어 이의 제기가 불가능하였다. 이는 1455년 세조의 집권으로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법은 형법과 민법이었으며, 경국대전에 종합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의 법 조항이 소략하기 때문에 형법은 대명률이 주로 적용되었다. 대명률은 명의 기본 법전으로 태장도유사의 5형 형벌 체제인 당률을 계승하면서 자자(刺字)와 능지처사(凌遲處死) 같은 극형을 추가하였다. 민법에 관한 사항은 제반 소송의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관찰사와 수령 등 지방관이 관습법에 따라 처리하였다.
경제
사회
교육 기관
틀:참고 조선의 교육기관은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앙에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4학(四學)이 존재했다(→학당). 성균관의 입학자격은 소과인 생진과에 합격한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동학, 서학, 남학, 중학이 4학이다.
지방의 중등교육기관에는 향교(鄕校)가 존재했으며,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기능으로 했다. 각 부·목·군·현에 하나씩 있었는데,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
이 외에도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서당 (書堂)이 존재했는데,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나 평민의 자제를 대상으로 사설적으로 운영되었다.
문화
종교
조선은 기본적으로 주자학 중심의 유교 사회였다. 불교는 유교국가인 조선의 철저한 견제를 받았으나 왕실의 개인 신앙이나 민중들의 신앙으로 이어졌으며, 민간 신앙은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정감록(한 도참 예언가가 말했는데, 고려 말에 정몽주와 초기에 정도전, 조선 선조 때의 정여립 등을 통해서 정씨가 이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씨왕조를 세우는 예언서)을 들 수가 있다.
유교 종교 행사에는 신자들의 혈연적 차별이 있어서, 불교 종교 행사와 달리 그들만의 신앙 모임을 고착화시켜 유지하기가 수월하다. 종친회의 종손, 학파의 제자, 악공 등의 제사 직접 관련자 식으로 출입이 제한되는 편이다. 불교 종교 시설은 비교적 출입이 자유롭지만 유교 종교 시설은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다. 종교적인 폐쇄성은 국가의 폐쇄적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수 있다.
천주교는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등으로 탄압받았으나, 19세기 말부터 이러한 종교적인 탄압은 신분제 해방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다.
대외 관계
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해서는 사대 정책을 펼쳤다. 한편 남쪽의 일본이나 유구 왕국,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서는 교린정책을 펼쳤다. 교린책은 강온책을 동시에 펼쳤다.
그러나 여진족이 후금(청)을 세워 중국을 지배하자 조선에서는 한때 병자호란의 원한을 갚자는 북벌론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서양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조선에 들어서 아랍인이 아닌 서양인과의 접촉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들어온 서양 선교사와의 만남이었다. 그 뒤 접촉이 없다가 18세기부터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조금씩 늘어났으며, 19세기에 서세동점과 맞물려 조선도 서양과의 접촉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같이 보기
- 조선 시대 연표
- 조선의 역대 국왕
- 조선의 행정 구역
- 조선의 연호
- 고조선
-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강리도, 1402년) - 명나라의 대명혼일도 다음으로 동양에서 2번째로 오래된 세계지도로서 유럽과 아프리카도 그려져 있다
- 동국지도 (1463년)
- 조선방역지도(1557년~1558년)
- 지구전후도(1834년)
- 대동여지도(1861년)
- 대한제국
참고
- ↑ 1884년 10월 9일자로 재가된 전문 7장 46조로 되어 있는 우정 관련 규칙(대조선국우정규칙, 大朝鮮國郵征規則)을 보면 대조선국의 명칭이 나온다.
- ↑ 조선(朝鮮) 말살론(抹殺論)의 일면(一面) 동아일보 1면 정치 기사(1947.10.04, 칼럼/논단)
- ↑ 이씨조선(李氏朝鮮)은 일제(日帝)조어「조선(朝鮮)」으로 써야 옳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거주하는 동아일보 구독자 김복중 씨의 주장(1992.03.04)
- ↑ 태조실록 (1413)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년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1년〉7월 17일,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 ↑ 태조실록 (1413)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년 1번째기사
- ↑ 태조실록 (1413) 6권, 태조 3년 10월 25일 신묘 1번째기사
- ↑ 태조실록 (1413)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1년〉7월 17일,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 ↑ 태조실록 (1413)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1번째기사
- ↑ 태조실록 (1413) 6권, 태조 3년 10월 25일 신묘 1번째기사
- ↑ 태조실록 (1413)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1번째기사
- ↑ 태조실록 (1413)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1년〉7월 17일,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 ↑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127쪽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조선초의 대외관계〉
- ↑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334쪽.
- ↑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335쪽.
- ↑ 조선은 관찰사보다는 덜 억압적인 관직인 감사가 실질적인 대표 관직이었다. 대한민국은 도지사, 고려는 도병마사가 행정구역 도를 담당하는 최고 관직이다. 고려에서 8도는 군사 행정구역이었다.
- ↑ 칙령(勅令) 제36호,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地方制度官制改正件〕〉(《고종실록》33년 8월 4일)
- ↑ 잡과 과목은 외국어 분야의 역과 (易科), 천문학 분야의 음양과 (陰陽科), 의학 분야의 의과 (醫科), 법률 분야의 율과 (律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