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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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신미양요가 일어난 배경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조선 고종 3)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에 도착하였다. 조선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측에 회선을 요구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자신들이 평양성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 왔음을 밝히고 자신들이 가져온 무기들을 조선인들 앞에서 과시하였다. 그리고 이현익(李玄翼) 일행을 나포하고 억류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제너럴 셔먼호이현익 일행에 대한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을 요구하였다.[1]

이에 평양 주민들은 제너럴 셔먼호에 항의하였고 군민합동의 대규모 무력 시위로 전개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박규수의 화공 작전을 피하다가 모래톱에 좌초되어 기동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조선 군민들의 공격에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들은 미국 정부는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에 분노하여 군사적 조치를 취하였다.[2]

신미양요의 발발과 경과

미국 정부는 로저스(Rodgers, J.)에게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이끌고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면서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3]

다음 날인 6월 11일에는 덕진진(德津鎭)을 점거하였다. 광성보에는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잇었으나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4]

강화도 방어체계와 관계

미국 함대에 공격을 받은 는 바로 초지진광성보 그리고 덕진진 이다. 미국 함대는 초지진 상륙 작전을 단행 할 때 10개 중대 부대를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을 동원했다. 원래 미국의 의도는 초반 무력시위를 통하여 상대국에게 위협을 주고 이것을 이용하여 강화 및 개항을 원했던 것이다. 이런 방법의 무력시위를 포함외교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초지진등 여러 군사 요충지에서 계속 패배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저항의지를 나타내고, 싸움에서 이기는 협상에 나설 것이란 조선 조정은 싸움에서 패배에도 절때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군함 5척 병력 1,000명으로 이루어진 미군 함대는 사실상 한 국가와 전투를 벌일 군사력이 안되었다. 그리고 광성보 전투에서 이미 탄약을 50% 나 소비한 상황이었다. 결국 미국 함대는 싸움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귀환 했다.[5]

멀티미디어

스틸

파노라마

네트워크 그래프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너럴셔먼호사건, 김원모 편집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너럴셔먼호사건, 김원모 편집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미양요, 김원모 편집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미양요, 김원모 편집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미양요, 김원모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