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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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1987년 6월

대한민국의 1987년 6월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시기이다.
전두환4.13호헌조치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그리고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부터 노태가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발표하는 6.29선언이 이루어지기까지 6월민주항쟁이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결국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이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사회운동의 비약적인 상승 효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있다.
영화 "1987(영화)"은 박정희의 4.13 호헌조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한열열사의 죽음에 대해서 다뤘고,
영화 "남영동1985(영화)"은 같은 시대에, 박종철이 고문당했던 남영동대공분실에서의 김근태의 고문사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계기가 된 사건들

김근태 고문사건[1]

  • 내용

1985년 9월4일 새벽 5시30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 속해있던 김근태는 7명의 정사복 경찰에게 끌려가 차에 타게 됐다. 차는 30여분을 달려 남영동 전철역 주변의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닿았고, 김근태는 5층 15호실로 끌려들어갔다. 그는 발가벗겨진 뒤 발목·무릎·허벅지·배·가슴이 혁대로 묶인 채, 9월 20일까지 모두 10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고문자들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들이 누구인지를 대라면서,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고 집요하게 강요했다. 김근태는 지옥의 나락에서도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고, 고문이 잠시 멈추는 틈틈이 그는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다. 진술조서 끝에 쓰인 수사관 이름과 서명도 잊지 않았다.
고문실을 벗어난 9월26일, 서소문 검찰청 복도에서 아내 인재근을 만난 김근태는 스쳐지나가는 1분여 동안 그는 고문 내용을 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검찰이 구속영장을 비밀로 청구했고 법원도 영장 발부 사실을 철저히 감췄기 때문에 인재근은 남편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이야기를 들은 인재근은 며칠 뒤 민청련과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명의로 나온 고문 폭로 유인물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 를 통해 이런 과정을 세상에 알렸다. 김근태가 공개적인 육성으로 세상에 고문 사실을 알린 것은 12월19일의 첫공판 모두(冒頭)진술을 통해서였다.

  • 원인

민청련의 지도이념인 ‘민족적 민주주의’가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김태근을 잡아갔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민청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상임부의장 이을호를 비롯해 김희상·김종복·최민화·권형택 등 간부들을 구속 또는 수배했다. 아울러 학생운동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역시 민청련의 배후조종을 받는 단체로 규정했다. 2·12총선의 결과로 전두환 체제가 동요하면서 저항의 분위기가 대중적으로 고조되는 즈음에 당국은 가장 강력한 전위조직인 민청련을 맨 먼저 정치적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 결과

이 사건은 민주세력의 단결을 불러왔다. 재야와 야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리는데 의견을 모았다. 공대위는 11월8일 혜화동성당에서 보고대회를 갖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 작전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부분의 재야인사들은 가택연금됐으며 혜화동성당과 종로 일대에는 전투지역을 방불케 하는 경찰력이 배치됐다. 하지만 공대위는 야당을 회유하고 재야세력을 분쇄해버리는 작전을 구사하던 전두환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기구는 이듬해인 86년 3월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를 구성해 개헌투쟁 연대틀을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신민당이 재야의 반미반핵 논리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이 기구는 와해됐지만,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더욱 확대발전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는 큰 사령탑을 형성하는 모태가 됐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2]

  • 내용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하던 중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 원인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 결과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4.13 호헌 조치[3]

  • 내용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이다. 제5공화국의 대통령 간선제가 민주주의 원리를 위반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1987년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86년부터 직선제 개헌 요구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6년 1월 16일 국정연설을 통해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개헌을 유보하는 방침을 발표했고, 그에 대응해 신한민주당(신민당)은 1986년 2월 12일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여론화 작업을 진행했다.

  • 원인

여야 합의가 어려운 상황에서 대통령 간선제인 현행 헌법을 유지하고 1988년 3월에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것이다.

  • 결과

4·13 호헌조치는 장기집권을 우려하는 전국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대규모 집회를 성공적으로 주도하자 결국 6월 26일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조치를 철회했으며,

이한열 열사의 죽음[4]

  • 내용

1987년 6월 9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기로 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개최되었다. 전국에 갑호비상령이 떨어진 가운데 이한열도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교문을 사이에 두고 ‘백골단‘과 시위대가 공방을 나누는 가운데 충돌이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이한열은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SY-44 직격 최루탄에 뒷머리를 피격당하여 쓰러졌다.

  • 원인

호헌철폐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민주화실천을 위해 시위에 참가했다.

  • 결과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학생과 시민들의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6월 12일 ‘살인적 최루탄 난사에 대한 범연세인 규탄대회‘를 최루탄과 다발탄 페퍼포그가 난사됨에도 불구하고 비폭력 평화시위로 치뤘으며,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행진‘에 이어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가 전국민이 지켜보고 애도하는 가운데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 및 치사 사건은 이렇듯 6월항쟁을 임계점으로 끈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


TIME LINE

관련 영화

남영동1985(영화)

  • 포스터

<남영동 1985>는 故김근태님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김근태는 이 책에서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신이 당한 끔찍한 고문(拷問, torture)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영화 <남영동 1985>는 영문도 모른 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김종태가 간첩 활동에 대한 거짓 진술을 토해내는 고문의 과정 22일을 그리고 있다. 김근태 외에도 피해자는 수많았다. 당시 고문 피해는 학생 운동, 민주화 운동 관계자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언제든 들이닥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상이 의심되는 자는 여지없이 각 지역 고문실로 연행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스스로 빨갱이라고 진술한 뒤 반 송장이 되거나 죽어서야 고문실을 나갔다. 모든 것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일이었다.
정지영 감독은 주인공을 김근태 개인에게 한정시키지 않고 고문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김종태’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고문기술자 역시 시대가 만들어 낸 괴물이라는 의미로 실명 대신 ‘이두한’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남영동1985>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대변해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사실들을 덤덤하면서도 날카롭게 들이미는 한편, 고문공화국이라 불렸던 대한민국의 한 시기, 그 날 선 과거를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독재정권 하의 고문 실체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 배경

남영동대공분실

1987(영화)

  • 포스터

영화 <1987>은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스물두 살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다. 또 하나의 의문사로 덮일 수도 있었지만, 무고한 한 젊은이의 죽음을 접했던 모두가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충실했던 이들의 행동이 연쇄적으로 사슬처럼 맞물리면서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영화 <1987>은 이 젊은이의 죽음이 어떻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거대한 흐름으로 확장되었는지, 진실을 은폐하려는 경찰과 권력 수뇌부, 이에 맞서 각자의 자리에서 신념을 건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행동이 모여 광장의 거대한 함성으로 확산되기까지, 1987년을 뜨겁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 배경

남영동대공분실, 명동성당

노드 리스트

CLASS NODE
인물 이한열, 박종철, 김근태, 전두환, 노태우, 우현, 강동원, 여진구, 강민창, 박원상
장소 남영동대공분실, 대한성공회서울주교회대성당, 명동성당
영화 남영동1985(영화), 1987(영화)
사건 6월민주항쟁, 4.13호헌조치, 6.29선언, 12.12쿠데타
소속 신군부, 민주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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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기여

주석

  1. 경향신문, "김근태 고문사건"
  2.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박종철고문치사사건(朴鍾哲拷問致死事件)"
  3.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사일삼호헌조치(4.13護憲措置)
  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한열 열사 기념관"
  5. 영화 "남영동1985", 다음 영화
  6. 영화 "1987",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