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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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 현재 한글학회의 전신 [1]

내용

시대적 배경[2]

  • 1930~40 년대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탄압이 최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일본은 1929년에 경제 대공황을 겪은 이후, 1910년대에 사용한 무단통치 방식을 1930년대부터 다시 사용하며 민족 말살정치를 시작했다.
  • 일본은 황국 신민화라는 명목으로 내선일체일선동조를 강조, 조선의 민족성을 말살시키기 위해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을 강요하고,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어와 조선의 역사를 교육하는 것을 금지했으며,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창씨개명을 강요했다.
  • 일본은 나라의 말과 글에는 혼과 정신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말과 글을 없애는 일에 가장 공을 들였다.
  • 그리하여 용기있는 학자들이 뜻을 모아 조선어학회를 설립하게 된다.

설립[3]

  • 조선어 연구회(1921)에서 가갸날 제정(1926)
  • 마지막으로 이 두 단체를 계승한 조선어학회설립(1931)


활동[4]

  • 조선어학회는 조선 민중의 지지를 받아가며 민족어 3대 규범집(『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철자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하였다. 3대 규범집은 다가올 민족국가 즉 독립국가에서 곧바로 국어 규범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 조선어학회는 민족어 규범으로 된 『조선어대사전』을 기어코 출판하고자 하였다. 사전 편찬은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 오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앙양하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은 우리 말글이 침략자들에 의해 말살되는 것을 보고 목숨을 걸고 항쟁하였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의 사업은 일제의 조선 통치에 반하는 행위였다.


  • 이극로는 조선어사전의 완성을 통해 우리말과 조선의 혼을 영구히 유지하고자 하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완수해 놓으면, 때가 돌아오는 날 즉 조국이 광복되는 날에 민족어를 되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 민족 독립의 준비 차원에서 조선어사전 편찬이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이극로의 발언은 사전 편찬에 참여하고 있던 모든 전임위원의 인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 한징, 이극로를 포함하여 사전편찬에 관여한 사람들의 노고로 드디어 『조선어사전』의 원고가 나왔다. 우리말사전의 제목은 『조선어사전』으로 되어 있었다.


  • 조선어학회는 1940년 3월 7일에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조선어대사전 출판허가원을 제출하였다. 조선어대사전의 용어로 16만 어휘, 삽화 3천여 매를 완성하였다.
  • 『조선어사전』 원고는 많은 부분 일제로부터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1940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도서과의 출판 허가를 받았다.
  • 일제 침략자들이 일본어로 해설하여 간행한 『조선어사전』(1920)보다 약 3배가 많은 조선어 어휘를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 위원들이 수집·주해하였다는 사실에서 조선 문화의 우월성을 민족어사전 편찬을 통해 입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건[5]

  • 조선어학회 사건

42년 10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30여 명이 일제에 의해 검거, 투옥되었다. 해방 후 49년 한글학회로 다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글학회는 29년의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 6권의 <큰사전>을 완간했다.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네트워크 그래프

조선어학회가 사전을 만들기 위해 했던 노력들에 대한 영화인 말모이와 모티브가 된 조선어학회의 인물들과 단체 간의 관계를 나타낸 네트워크 그래프 입니다.

참고문헌

기여

주석

  1. 이동 네이버지식백과 참조
  2. 이동 네이버블로그를 참고
  3. 이동 네이버블로그를 참고
  4. 이동 네이버 캐스트 참고
  5. 이동 네이버 지식백과-한국근현대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