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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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의 국어학자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

내용

인물정보

[2]

  • 황해도 봉산 출생, 아버지는 주면석, 어머니는 전주이씨. 본관은 상주.
  • 조선 중기 풍기군수로서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13대손이다.
  • 둘째아들로 태어나 둘째 작은아버지인 주면진에게 입양되었다.
  •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1887년 6월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한 후에도 한문학을 배웠다.
  • 한학을 배우며 한문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 글이 있는데 왜 이토록 어려운 한문만을 배워야 하며, 우리말을 쉽게 적을 수 있는 우리글은 왜 쓰지 않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한글을 연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 1893년 6월 배재학당의 교수인 박세양과 정인덕을 찾아가 야학으로 신학문을 지도받기 시작하였다. 이들로 부터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기 나라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자국어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할 무렵에 회계사 겸 교보원(교정보는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시대적배경

[3]

  • 주시경은 개항되던 해인 1876년, 근대화 시기에 태어났다.(1876)
  • 근대화 시기의 왕실은 나름대로 근대화 조치를 강구하고, 보수적인 양반유생들은 위정척사사상으로 무장하여 조국을 수고했으며, 신진관료와 시민층은 개화와 개혁사상에 입각하여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 힘이 있는 자는 힘으로, 돈이 있는 자는 돈으로, 머리가 있는 자는 머리로,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으로, 노력하듯이 주시경은 한글 연구와 보급으로 역사적 과제 해결에 헌신했다.
  • 당시 외세의 침략으로 조국의 운명이 위태롭던 시기에 국어,국사 그리고 민족 문화는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담보물이었다. 민족은 공통의 언어 집단이고,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지닌 집단이며, 독자적 문화집단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 주시경은 "자기나라를 보존하며 자기 나라를 일으키는 길은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데 있고,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 길은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존중하여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어문 민족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한글연구

1895년 12월 26일 갑오내각의 주선으로 귀국한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창간을 준비하면서 배재학당의 만국지지학 강사로 출강하고있었다. 이때 주시경은 서재필을 만나게 된다. 둘의 만남은 필연적이자 운명적이었다. 서재필이 새로 창간할 독립신문은 일반 민중과 부녀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국문전용으로 발행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고, 주시경은 서재필이 귀국하기 전부터 국문법을 연구했던 당시 유일무이한 국문전용론자였기 때문이다.


주시경은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자 회계사무 겸 교보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서재필의 국민 계몽운동을 지원하면서 국문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를 실천해 갔다. 그 결과 서재필과 주시경의 국민 계몽적 논설은 일반 민중과 부녀자층에게도 광범위하게 전파될 수 있었다.


주시경은 그 해 5월 '국문동식회'를 <독립신문>사내에 조직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의 단초를 열었다. 국문동식회는 독립신문을 제작함에 있어 맞춤법을 정리하고 통일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주시경의 한글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07년 1월 설립된 지석영 중심의 국문 연구회 그리고 1908년 8월 주시경이 국어강습회 졸업생들과 함께 조직한 국문연구회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나아가 이 전통은 일제시기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와 1931년 1월 확대 개편된 조선어학회, 해방 이후 한글학회로 계승되면서 한글 연구, 정리와 보급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 우리말 문법 정립[5]

주시경은 우리말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했다. 그의 저술인 <<국문문법>>(1905),<<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말>>(1908?), <<고등국어문전>>(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등은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고, 국어에서의 독특한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겼다. 국어의 체계화, 표의주의 철자법,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혁신적 주장을 한 국어학의 선봉자였다. 주시경은 학교 및 강습소에서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특히 한글학의 후진으로 최현배, 김두봉, 장지영 등 수많은 학자가 있다. 그의 개척자적 노력으로 오늘날의 국어학이 넓게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 국문연구기관의 조직과 참여[6]

주시경은 이준의 추천으로 지석영이 설립한 국문연구회에 참여하여 한글 연구에 종사했다. 이와 함께 주시경은 세종대 언문청과 같은 국가적[ 차원의 국문연구 기관 설치를 주장하여 이를 관철한 뒤, 거기에 참여하여 왕성한 연구활동을 벌였다. 즉 주시경의 상소로 1907년 7월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자, 그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국문의 연원, 자체와 발음의 연혁, 철자법 등 11개 항목의 <국문연구안>을 냈고, 이를 토대로 <국문연구의정안>을 만들어 내각에 제출하는 등 뛰어난 연구 성과를 냈다. 그리고 1908년 8월 주시경은 상동 청년학원의 국어강습소 졸업생 및 유지들과 함께 국문연구회를 발족시켰다. 이는 한글연구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망 이후까지 내다보면서 결성한 민간 국문연구 단체였다.

독립운동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주시경은 여기에도 동참하여 활동하였다. 그것은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실제적으로 주도한 서재필과 선생이 관계로 보아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듬해 12월에는 약관의 나이로 일약 독립협회 지도부의 일원인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8년 5월 서재필이 제국주의 열강의 사주를 받은 수구파 정권의 탄압으로 재차 도미하고, 11월에는 이상재, 정교, 남궁억 등 독립협회의 간부 17명이 ‘헌의 6조’의 실행을 요구하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반 민중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종로 네거리에서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반정부, 반침략 투쟁을 펼쳤다.

이들은 피검된 독립협회 간부의 석방과 ‘헌의 6조’의 조속한 시행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외세의 침략과 수구파 정권의 실정을 규탄한 것이다. 이 때 주시경은 독립협회의 청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운동을 이끌어 갔다. 그러다가 그 해 12월 수구파 정부의 기습적인 무력 탄압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이 강제 해산되고, 그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가 시작됨에 따라 주시경은 부득이 향리로 피신하여 은신하게 되었다.


  • 은신 중 한글연구[8]

향리에 은신하면서도 주시경은 한글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때 그간 5년 동안의 연구를 정리한 <국어문법>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다시 상경한 선생은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까지 5년여 동안 한글의 연구와 교육, 그리고 국문 연구의 과학화를 위한 개인 학습에 온 힘을 쏟았다. 정동에 와 있던 미국 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으로부터는 영어와 자연과학의 이치를 배웠고, 수진동의 흥화학교에 입학해서는 측량술과 도해법을 익혔다. 그리고 한성외국어 학교에서 일어청국어 등을 청강하고, 습득한 지식을 응용하면서 한글 연구를 심화시켜 갔다.

하지만 이 시기 조국의 운명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 들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1]가 강제되었다. 일제는 일련의 침략 조약을 강제하여 한국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하여 갔으며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을 준(準)식민지 상태로 만들어 갔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에서 우리 민족은 각기 역량에 따라 일제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한편에서는 즉각적인 항일 무장투쟁인 의병전쟁으로 맞섰고, 다른 한편으로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인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국권회복을 지향하여 갔다. 선생 또한 국망의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의 역량을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집중하였다.

일화

  • '주보따리' [9]
여러 학교에서 늘 책 보따리를 들고 강의를 위해 동분서주한 주시경.

그 때문에 주시경은 ‘주보따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때의 상황을 제자 가운데 하나인 최현배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눈물을 머금은 '주보따리'는 언제나 동대문 연지동에서 서대문 정동으로, 정동에서 박동으로, 박동에서 동관으로 돌아다녔다. 스승은 교단에 서시매, 언제든지 용사가 전장에 다다른 것과 같은 태도로써 참되게, 정성스럽게, 뜨겁게, 두 눈을 부릅뜨고 학생을 응시하고, 거품을 날리면서 강설을 하셨다. 스승의 교수는 말 가운데 겨레의 혼이 들었고, 또 말 밖에도 나라의 생각이 넘치었다.”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 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국어문전음학(1908)] 중에서-


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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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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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대한국어문법』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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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국어문전음학』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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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말의 소리』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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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참고문헌

기여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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