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宋山里古墳群)
공주 송산리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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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사적 제13호 |
지정일 | |
지정 명칭 |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宋山里古墳群) |
한자 명칭 | |
영문 명칭 | Ancient Tombs in Songsan-ri, Gongju |
분류 | |
건립·제작 | |
주소 |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번지 |
위도 | 36.461378 |
경도 | 127.112803 |
웹사이트 |
목차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宋山里古墳群) 개관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宋山里古墳群)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고대 왕국 백제(百濟, B.C. 18~ A.D. 660)의 고분군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 지역에 소재하는 고분은 약 30여 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된 권역 내에 1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으며, 조사가 이루어진 고분은 무령왕릉(武零王陵)을 포함하여 모두 7기다. 이들은 송산(宋山)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분포되어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7호분)과 5‧6호분, 동북쪽에는 1‧2‧3‧4호분이 있다. 이 중 1971년에 발견‧조사된 무령왕릉을 제외한 6기의 고분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었다. 이외에 기타 석실분(石室墳)들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1927년 조사에서는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 막연하게 백제 왕릉군으로 추정되었다. 뒤이어 이루어진 1932~1933년 조사에서는 6호분이 발견되어 점차 백제 왕릉군이라는 주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고분군이 백제 왕릉군으로서 분명한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은 무령왕릉 발견 이후부터였다.
각 분묘 소개
1‧2‧3‧4‧5호분은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이다.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현실(玄室; 널방)에 연결되는 연도(羨道; 널길)가 현실 동쪽 벽에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벽돌을 이용하여 관대(棺臺; 널받침)를 만든 5호분과 달리 다른 4기의 고분은 자갈을 깔아 관대를 만들었다. 이렇게 분묘의 양식이 같으면서도 세부적인 요소에서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시기의 차이로 인한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5호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었지만, 1‧2‧3‧4호분은 조사 전에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고 한다. 미공개 상태인 4호분 벽면에는 진흙이 두껍게 발라져 있다.이것으로 보아 다른 무덤에도 진흙이 벽면에 발라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호분은 할석(割石; 깬돌)로 사방의 벽을 축조하였다. 바닥으로부터 약 1m 정도는 수직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로는 사면 모두 약 25° 정도 안으로 들여 쌓아올려 궁륭(穹窿;활 모양 천장) 천장을 만들었다. 최상부에는 1개의 대형 판석을 덮어 마감하였다. 원래는 4호분처럼 돌 사이로 진흙을 짓이겨 발라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도는 남벽으로 나 있는데 동쪽으로 치우쳐 동벽에 잇닿아 있다.
6호분은 전축분(塼築墳; 벽돌무덤)이다. 궁륭식 이중 연도와 직사각형 모양의 현실 구조로 되어 있다. 벽은 중국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새겨진 벽돌을 정연하게 쌓았으며, 7개의 등자리가 있고 사신도(四神圖)와 일월도(日月圖)가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6호분을 송산리 벽화고분이라고도 한다. 6호분 역시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조사되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 부부의 능이다. 역시 6호분과 같은 전축분으로,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만들었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다. 무령왕릉에서는 피장자의 신원을 알 수 있게 한 지석(誌石)을 비롯하여 금제관식(金製冠飾, 국보 154호)‧금제이식(金製耳飾, 국보 157호)‧용봉문환두대도(龍鳳文環頭大刀) 등 4,600여 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였다.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받들어 모셨다 이와 같이 기록한다(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 安爀登冠大墓 立志如左)”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이곳에 안치되었다.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5일, 6호분 내부로 물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배수로를 만들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도굴‧자연 붕괴 등의 피해 없이 발견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조사와 수습은 정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큰비가 계속 내렸던 데다, 각지에서 소식을 듣고 몰려온 기자와 구경꾼들로 현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하룻밤 만에 유적 조사와 유물 수습이 급박하게 진행되어 발굴조사의 기본 절차마저도 준수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조사가 진행되고 있던 중에 기자들이 출입하며 촬영하다가 유물을 훼손한 사고도 발생하였다.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당시 발굴조사의 주역이었던 김원룡(金元龍, 1922~1993)은 이때의 일을 평생 회한으로 품었다고 전해진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모두 궁륭형 현실과 짧은 궁륭형 연도, 긴 배수로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당시 중국 남조(南朝)의 묘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고구려(高句麗) 묘제의 영향으로 보인다. 1985년, 무령왕릉 모형전시관도 마련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이곳에 소재한 고분들은 지석이 발견된 무령왕릉을 제외하고 피장자의 신원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6호분에 대해서는 백제 성왕(成王, 재위 523~554)의 능으로 추정하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고분군의 연구 현황과 그 전망 및 가치
공주 송산리 고분군 내에는 무령왕릉 및 1‧2‧3‧4‧5‧6호분 등 대외적으로 공개되거나 정비된 고분 외에 조사 내용만이 전하는 고분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들에 대흔 조사는 대개 1927년부터 1930년대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 수는 대략 20여 기로 추정된다. 모두 석재를 쌓아 만들었고, 궁륭식석실분‧수혈식석실분(竪穴式石槨墳; 구덩식돌덧널무덤)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당시의 조사는 본격적인 학술조사라기보다는 고분의 외형 및 내부의 구조 파악과 유물의 수습만 이루어진 것에 불과했다. 현재는 그 고분들의 유형 및 형태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 고분군의 대체적인 윤곽만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당시에 조사되었던 고분들은 모두 외형이 감추어져 있으며, 송산리 일대에 아직 확인되지 않는 고분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고분들의 실체를 확인하려면 고분군을 비롯하여 송산리 전역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지석 등 각종 유물을 통하여 피장자(백제 무령왕)와 무덤이 축조된 시점을 확실히 알 수 있어서 고대 백제의 사회·문화상 및 고대 한반도와 중국 간 교류 양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활용되고 있다.
이곳 공주는 백제가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다시금 중흥을 도모한 곳이었다. |송산리 고분군은 공산성 유적과 함께 웅진시기 백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그 문화유산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인정되고 있다.
사진 및 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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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 李南奭, 「公州 宋山里 古墳群과 百濟 王陵」, 『百濟硏究』27, 1997.
- 이남석, 「공주지역 백제문화유적의 유산적 가치-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검토-」, 『백제문화』4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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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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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 | 이름 | 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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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서민교 | 한국사학 |
편집 | 김사현 | 인문정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