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 백자묘지석

song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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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_도자유물_메타아카이브
[지석]은 조상계보와 인적사항, 그리고 업적과 무덤의 위치를 꼼꼼히 기록한 생의 마지막 기록물이다. 본래 지석은 네모난 석제에 글자를 새겨 제작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새기는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석제 대신 제작 공정이 간편한 도자기 지석이 유행하였다.[1]

도자 지석은 사대부층에서 선호되다가 왕실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청화백자를 가장 고급으로 쳐주었다. 장방형의 판석이 일반적이지만, 조선후기에 접어들면 묵서를 써놓은 생활용기가 유행하기도 한다.
백자지석은 죽인 이의 기록을 담은 물품이기에, 묘주의 몰년과 지석의 제작시기가 동일한 편이다. 그렇기에 해당 백자지석은 무문, 청화, 철화 등의 시기별 백자의 유행양식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


청화기법은 초벌구이한 백자 위에 코발트 안료인 회청(回靑, 回回靑)으로 그림이나 문양을 그린 후 백자 유약을 시유하여 굽는 기법이다. 청화백자는 조선 전기부터 제작되었지만, 고급 안료였던 회회청 수입의 어려움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조선 중기가 되면 청화백자 제작량은 급감하게 되었다.


청화백자 제작이 어려워지면서회청 대신 석간주를 사용한 철화백자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청화백자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철화백자는 다시 생산량이 줄어들게 되었다.


백자청화 심지원 묘지석은 2008년 청송심씨 묘역 이장 및 발굴조사에서 발견되었다. 심지원 묘지석은 2008년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던 경기도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심지원은 조선시대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이었으며, 심지원 묘지석의 글은 그가 죽은지 29년 뒤에 박세채가 지었다. 16장의 심지원 묘지석은 정선된 상태의 흰색 바탕에 청화 안료로 글을 쓴 최고품질의 청화지석으로 평가된다. 16장의 묘지석에는 심지원의 생애를 상세하게 기록하면서, 동시대 인물인 김상헌과 장유의 평으로 그의 성정을 묘사하였다. 끝으로는 그를 찬하면서 글을 지은 날짜와 지은이를 기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백자지석에 새겨진 글은 묘주의 생애뿐만 아니라 글 안에 등장하는 인물과 묘주와의 직접적인 교우관계나 또는 가문 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주석

  1.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백자에 담긴 삶과 죽음 : 2019 경기도자박물관 기획전>, 광주: 한국도자재단 경기도자박물관,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