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DB:잡과 설행회수

sonamu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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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과 설행회수

조선시대 잡과는 사마시와 마찬가지로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설행되었다. 조선시대 식년시는 164회, 증광시는 67회(大增廣 포함)로 총 231회[1] 실시되었다.

조선시대 식년시·증광시 설행 회수
과거 식년시* 증광시 합계 비고
문과 163 67 230 1618년(광해군 10) 무오 식년시 문과 파방
무과 160** 66 226 1402년 처음 설행(조선초 식년시 3회, 증광시 1회 설행 안 됨)
생원시 163 67 230 1444년(세종 26) 갑자 식년시 생원 파방
진사시 148 64 212 1444년(세종 26) 갑자 식년시 진사 파방
* 조선시대 식년시는 164회 설행되었다.
** 1618년(광해군 10) 문과 파방으로 무과 파방까지 되었는지는 현재 알 수 없다.(파방이 되었다면 무과 식년시는 159회이다.)


잡과의 설행 회수는 229~231회이다.[2] 잡과의 최초 설행 기록[3]은 1397년(태조 6)이다. 이 기록을 참고하면 1393년(태조 2) 계유 식년시와 1396년(태조 5) 병자 식년시에는 잡과가 실시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1397년은 丁丑으로 式年은 아니지만, 병자 식년시의 退行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실록 기사가 있지만 고려시대에 雜業이란 이름으로 실시되었던 잡과가 조선으로 바뀌었다고 실시가 안 되었다고 볼 수도 없다. 이는 “入官補吏法”[4]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잡과 설행은 태조 때 2번의 식년시에 설행이 되지 않았다면 229회이다. 첫 번째 식년시에 설행되지 않았고 두 번째는 퇴행으로 실시되었다면 230회이다. 입관보리법을 근거로 조선 초부터 고려 때처럼 잡업의 형태로 잡과가 실시되었다면 231회가 잡과의 설행회수이다.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는 현재 알 수 없다. 다만 입관보리법에 근거하고, 또 고려의 과거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에 231회가 잡과 설행회수로 타당해 보인다.

조선시대 잡과 설행 회수
과거 식년시* 증광시 합계 비고
잡과 162 67 229 1393년(태조 2) 계유 식년시,
1396년(태조 5) 병자 식년시 실시 안함
잡과 163 67 230 1393년(태조 2) 계유 식년시 실시 안함
1397년 설행을 1396년 退行으로 간주
잡과 164 67 231 入官補吏法에 근거


▷ 1. 잡과 종합방목 및 단과방목
▷ 2. 잡과 단회방목
▷ 3. 잡과 설행회수
▷ 4. 잡과 합격자수


▷ 1. 문헌 자료 아카이브의 구현 목적
▷ 2. 과거의 由來
▷ 3. 고려문과방목 조사 분석
▷ 4. 문과방목 조사 분석
▷ 5. 무과방목 조사 분석
▷ 6. 사마방목 조사 분석
▷ 7. 잡과방목 조사 분석

  1. 이남희, 앞의 논문(1998), 10쪽과 앞의 책(1999), 14쪽에 잡과는 233회 설행되었다고 나온다.
  2. 李南姬는 『朝鮮後期 雜科中人 硏究』(이회문화사, 1999, 14쪽)에서 1397년(태조 6)부터 잡과를 시작하였다고 한다(『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1397) 2월 22일 기사. 태조 때 2번의 식년시에서 잡과는 설행되지 않았다. 그러면 설행 회수는 229회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시 회수를 233회로 詳定하고 있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 8월 2일 기사에 나오는 “入官補吏法”에 의하면 잡과를 태조 초부터 실시했다고 여겨지나, 崔珍玉은 「朝鮮時代 雜科設行과 入格者 分析」, 『朝鮮時代 雜科合格者 總覽』(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14~15쪽)에서 잡과가 처음 실시된 것은 1402년(태종 2)이라고 하였다. 이남희는 한국역대인물 사이트의 『雜科榜目 해제』(2005)에서 조선시대 잡과는 1399년(정종 1)에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체제로 정비되었다고 한다(체제 정비를 시험의 시작이라고 간주하였다).
  3.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1397) 2월 22일 을사. “잡과 시험을 쳐서 명의 8인과 명률 7인을 뽑다.” 조선시대 최초의 잡과 설행 기사이다.
  4.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 8월 2일 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