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DB:무과 급제자수

sonamu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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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 급제자수

조선전기 실록은 문과·무과 장원과 선발인원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러나 양란이후 조선후기 실록에서는 문과 장원과 선발인원은 나오는데, 무과 장원과 선발인원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조선전기 실록에서 卒記는 자세하게 인물의 傳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반하여 후기 실록에서는 간단하게 사망 기사만 실려 있다.
조선전기는 실록을 참조하고, 후기는 『무과총요』를 참조하여 무과 급제자수를 파악하였다. 조선후기 무과를 보면 일종의 특혜인 直赴[1]가 너무 많아서 『大典會通』에 직부자를 장원으로 선발하지 못하게 하는 법[2]이 생겼고, 직부를 제외한 原榜[3] 방목이 존재할 정도였다.

原榜만 수록한 무과방목
시험년 왕대년 간지 방목명 소장처 문과장원 선발 무과장원 선발 수록
1798 正祖 22 戊午 崇禎三戊午式年文武科殿試榜目 개인 李敬參 53 姜利八 429 30
1882 高宗 19 壬午 崇禎後五壬午慶科增廣文武科殿試榜目 국중도[일산古6024-13] 尹宖善 61 金思兢 384 31


1798년(정조 22) 무오 식년시 무과[4]는 장원이 姜利八이고, 429명을 선발하였다. 그런데 이 방목의 무과는 徐翼淳이 1위로 나오고, 30명만 수록하고 있다. 1882년(고종 19) 임오 증광시 무과는 장원이 金思兢이고, 384명을 뽑았다. 이 방목의 무과 1위는 具然泰로 기록되어 있다. 두 방목 모두 앞부분의 문과방목은 문과 장원 기록과 일치한다.
현재 무과장원과 선발인원이 밝혀진 시험은 800회 중 707회(1594년 단독무과 포함)로 약 140,170명이다. 이 합격 인원도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무과 선발인원은 자료에 따라서 선발인원이 다른 시험들이 있다. 차이가 생기는 시험의 선발인원을 적용하면 약 3,409명 정도 합격 인원이 줄어든다.

자료에 따라 선발인원이 차이가 나는 무과
시험년 왕대년 간지 시험명 무과 장원 선발 차이
1 1427 世宗 9 丁未 重試 洪師錫 12 10
2 1435 世宗 17 乙卯 式年試 薛孝祖 28 29
3 1460 世祖 6 庚辰 春塘臺試 朴仲善 51 50
4 1460 世祖 6 庚辰 別試 文孟孫 1,813 1,800
5 1468 世祖 14 戊子 式年試 鄭錫禧 28 20
6 1480 成宗 11 庚子 謁聖試 吉邵 3 5
7 1594 宣祖 27 甲午 別試 卞懷寶 107 170
8 1665 顯宗 6 乙巳 溫陽庭試 崔應逸 165 179
9 1666 顯宗 7 丙午 別試 金成吉 87 86
10 1676 肅宗 2 丙辰 庭試 尹就商 17,652 14,207
11 1679 肅宗 5 己未 式年試 朴亨 58 66
12 1680 肅宗 6 庚申 庭試 朴貴達 143 144
13 1693 肅宗 19 癸酉 謁聖試 黃軾 29 19
14 1696 肅宗 22 丙子 式年試 朴世棖 46 48
15 1700 肅宗 26 庚辰 春塘臺試 鄭斗暹 36 32
16 1734 英祖 10 甲寅 春塘臺試 金義淑 63 50
17 1747 英祖 23 丁卯 式年試 張泰績 129 126
20,450 17,041


그리고 현전하는 무과방목 중에 선발 인원과 방목에 수록된 인원이 서로 다른 방목들이 있다. 많게는 20명 이상 차이가 나는 방목도 있고, 11명 이하로 작은 차이가 나는 방목도 있다. “선발인원과 수록 인원이 다른 무과방목”이란 표를 만들어 위키 사이트에 올려놓았다. 이런 이유로 현전하는 방목만으로는 합격자수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장원명은 있지만 선발인원 미상은 58회이고, 장원과 선발인원 모두 미상인 시험은 36회이다. 총 94회 시험이 선발인원 미상이다. 이 시험의 선발인원은 전례를 따라 선발인원을 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앞에 나오는 동일한 시험 2~3회의 선발인원의 평균치를 내서 선발인원을 추정하기로 한다. 밝혀진 선발인원과 추정된 선발인원을 합한 총 합격 인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선발인원 미상인 94회 무과 시험의 선발인원 추정 인원은 약 22,050명이다. 그래서 무과 전체 시험의 선발인원은 약 162,220명으로 추정된다. 미상 선발인원의 추정치를 “선발인원 미상인 무과 시험의 추정 선발인원”이란 표로 만들어 위키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데, 이는 근사 값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시대 무과의 선발인원이 약 16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할 수 있다.(임진왜란 때 설행된 시험은 1회만 포함되었다.)

▷ 1. 무과 단회방목
▷ 2. 임진왜란 중 무과 설행
▷ 3. 무과 급제자수


▷ 1. 문헌 자료 아카이브의 구현 목적
▷ 2. 과거의 由來
▷ 3. 고려문과방목 조사 분석
▷ 4. 문과방목 조사 분석
▷ 5. 무과방목 조사 분석
▷ 6. 사마방목 조사 분석
▷ 7. 잡과방목 조사 분석

  1. 直赴: 初試, 覆試를 거치지 않고, 바로 殿試로 직행하는 특혜이다.
  2. 【補】 殿試의 壯元은 原榜 중에서 뽑는다. *補: 大典會通 편찬 시에 추가된 법문이다. 『大典會通』 「兵典」 참조.
  3. 原榜: 直赴者를 제외하고, 초시·복시를 거친 합격자만을 모아놓은 방목이다.
  4. 무오 식년시 무과: 姜利八이 甲科 1위[壯元], 李鳳采가 甲科 2위[亞元], 李萬淳이 甲科 3위[探花郞]를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