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나무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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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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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

Quote-left green.png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기 전 오른쪽 길가에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바로 김삿갓 소나무 안내판이다. 안내판에서 50m 정도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김삿갓 나무를 만날 수 있다. 김삿갓 소나무는 2009년 안동시에 의해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당시 수령은 약 400년, 높이는 10m, 나무 둘레는 3m로서 두 사람이 손을 맞잡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컸다고 한다. 거리를 두고 나무를 바라보면 수많은 가지들이 타원형을 그리며 서로 얽혀 늘어진 모습이 마치 삿갓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 아래로 발길을 옮기면, 하단의 뿌리쪽을 돌무덤이 덮어 감싸고 있어 대지를 꽉 움켜잡아 세찬 비바람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다. 이 나무에 김삿갓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마치 삿갓을 쓰고 있는 것 같은 나무의 외형도 한 몫을 하였지만, 그 전에 김삿갓이 이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탓이 더욱 크다.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라고 불리는 김병연(金炳淵)은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반역죄로 능지처사를 당하였고 집안이 멸문되었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김병하(金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그러나 김익순에 대한 문제는 본인에게만 묻고 가문을 폐문한다는 조정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모친과 함께 황해도 곡산을 떠나 할머니가 계시는 광주를 거쳐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걸쳐 영월에 정착하게 된다. 양반가의 기풍을 갖춘 김병연의 어머니 함평 이씨는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가문의 내력에 대한 소상한 진상을 알지 못한채 학업에 열중한 김병연은 훗날 영월도호부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김병연은 어머니로부터 집안내력에 대한 일들을 전해 듣고, 과문에서 자신이 비판한 김익순이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김병연은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긴 것이다. 그는 전국을 방랑하면서 곳곳에서 즉흥적으로 시를 지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김삿갓이 전국을 돌아다니던 가운데 이곳 인근의 석탑사를 가다가 나무 아래 잠시 쉬었다가 간 뒤로 소나무의 모양이 삿갓처럼 변했다는 것이 김삿갓 소나무의 구전 전설이다. 영월에서 안동의 소산마을로 향하던 김삿갓은 학가산 자락에 저녁 노을이 질 무렵 소백산 높은 고개를 넘어 영주 부석사에 도착했다. 다시 내성천의 맑고 깨끗한 모래톱을 두 발로 밟으며 안동 땅 석탑골로 접어들었다. 그는 학가산 북쪽 연화봉 기슭에 자리 잡은 석탑사(石塔寺)의 방단형적석탑(方壇形積石塔) 또한 둘러보았으리라.이어 고개를 넘어 신전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가운데 오른편에 자리한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났을 것이며, 마치 마을의 수호신과 같은 그 커다란 외형에 감탄사를 절로 터뜨렸을 것이리라. 김삿갓이 이 소나무 그늘에 앉아 숨을 고르며 쉬어간 뒤로 소나무의 모양이 삿갓처럼 변해서 ‘김삿갓’ 소나무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김삿갓은 이 곳에서 저 멀리 아스라히 바라보이는 학가산 유선봉(遊仙峰) 위의 구름을 바라보며 ‘유산음(遊山吟)’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한다.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신뢰할만한 근거가 매우 부족하기는 하나, 소나무의 모양과 함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묘한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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