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워커힐 하니비 쇼

red

〈워커힐과 박정희〉 데이터 목록으로 돌아가기


▲ 하니비쇼의 라인댄스


하니비쇼란?

  1. 하니비쇼 Honey Bee Show
    • 1962년 12월 26일 워커힐 호텔이 준공되면서, 준공기념공연이 개설되었는데 그 중 하나이다.
    • 외국쇼와 국내 연예인의 현대 및 민속을 곁들여 편성한 것이다.
    • 스테이지쇼가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던 당시로선 퍼시픽 나이트클럽의 입체감 있는 무대와 하니비쇼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 개관은 1963년 4월8일에 이루어졌는데 기념으로 당시에 세계적인 재즈의 거장으로 추앙받던 루이 암스트롱의 초청공연이 있었다.


둥근 무대가 발밑에서 기어오른다. 바로 그 앞에서 두서너 테이블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 되어 꿈쩍 안 할 수 없다. 다리통들이 쭉쭉 뻗은 것, 말같은 궁둥이에 닭털을 치뽑은 것, 머리에도 닭털, 새털로 감고 팬티만 살짝 입은 것이 모두 손을 치켜들고 한발을 꿇고 엎드리고 서고 한 자세를 만들어 치솟아 오르고 있는 거다. 지하실에서 지상으로 오르는 미녀도 이 정도로 살덩이를 노출시켜 놓으면 식상에 걸린다. 그것도 하나둘이 발가벗어야지 서른개나 발가벗고 보면 흥미고 나발이고 하기 전에 여자에 대한 공포가 생긴다. 훨씬 남자들보다 아니 나보다 완력들이 강해보인다. 한 대 맞으면 터질 것같이 팡팡하다. 그게 일제히 흔들흔들하기 시작한다. 원형무대가 빙글빙글 도는데 따라 손과 발의 흔들리는 속도가 빨라진다. 나중에는 발을, 다리를, 허벅지를 짝짝 올려 공간을 찬다. 하얀 구두가 번쩍인다...
[1]

목적

집권 이후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진 박정희 정권은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졌고, 정치 자금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무의미한 건설 사업을 벌여 공사비를 착복하는 것이었다. 공사판을 벌이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골몰하던 군사정권은 마침 당시 미군들이 휴가 때가 되면 휴양지를 찾아 대부분 일본으로 여행하는 것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엔 이렇다 할 윤락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휴가를 맞이한 주한 미군들은 한국에 남아 달러를 소비하는 대신 일본 등 해외로 나가 달러를 소비하였다. 미군은 미군 나름대로 비용이 많이 들었고 한국 정부도 정부 나름대로 미군의 달러가 자국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해외에서 소비되는 것에 못마땅해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외화벌이의 명분을 내세워 윤락시설을 구상한다. 윤락시설의 이름은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이름을 따서 워커힐로 정했다. 그러나 워커힐은 원래 목적인 미군 장병 유치에는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하며, 그 대신 박정희가 유흥 파티를 위해 자주 이용하게 된다.

입단 조건

하니비쇼단의 입단조건은 매우 까다로워서 우선 신체적인 조건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용모와 춤 기능에 뛰어난다 할지라도 입단할 수 없었다. 거의 같은 키와 몸매를 우선조건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조건 기준
신장 162cm 이상
학력 고등학교 졸업 이상
나이 18세~21세


  • 하니비는 선발과 함께 연구생이 돼 6개월에 걸쳐 발레, 고전무용, 국악 등 전반적인 부분을 모두 배우고 이것이 숙달되고 1년이 지나면 허니비 가무단에 편성돼 1시간 동안 민속, 라인댄스, 뮤지컬 등 다양한 쇼를 보여줬던 것이다. 이런 허니비 가무단은 연구생이 70여 명이고 무대에 서는 현역은 35명 정도 규모였다. 하니비쇼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단원의 질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동남아 순회공연을 시도하기도 했다.
  • 워커힐호텔의 나이트클럽에 출연한다는 것은 일급 연예인이라는 징표가 됐기에 한국의 연예인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펄시스터즈, 윤복희, 김상희, 패티김, 정훈희, 조애희, 쟈니브라더스 등도 워커힐호텔 무대를 이용해 자신의 몸값을 높여나갔다.

하니쇼의 쇠퇴

  •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워커힐쇼는 사실상 쇠퇴기에 접어든다. 단체 외래관광객과 중장년층 내국인에 편중된 고객구조의 취약성은 개관 이래 전통적인 민속쇼와 레뷔쇼라는 혼합쇼의 질적 한계와 함께 지속적인 성장발전과 경쟁력 확보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2]. 게다가 2002년 오페라의 유령 오리지널 내한팀의 한국 초연을 시작으로 태양의 서커스의 한국 공연,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 시장 확대와 국내 대형 창작 뮤지컬 제작으로 워커힐쇼의 질적 수준과 예술성을 능가하는 공연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소형 극장들의 건립 확대와 뮤지컬 전용극장이 오픈되는 상황은 워커힐쇼의 내국인 관객이탈을 더욱 가속화했다.[3]
  • 워커힐쇼는 만성적인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보였다. 2006년에는 드라마 대장금을 모티브로 한 대향연이 제작되었고, 2009년에는 사물놀이, 승무, 탈놀이, 오고무 등 한국의 전통무용으로 구성된 동방의 빛을 선보였다. 그러나 동방의 빛 역시 흥행에 실패했고, 워커힐은 2010년 꽃의 전설을 통해 대대적인 변화를 꾀하였다.
  • 2010년 초연된 꽃의 전설은 워커힐에서 자체 기획, 제작한 워커힐쇼 최초의 단독 민속공연이었으며, 한국 전통무용과 연희에 마샬아츠와 비보잉 등을 접목한 공연이었다. 이후 내용을 개편한 꽃의 전설 2가 2011년부터 공연되었지만 여전히 관객 수는 증가하지 않았다. 결국 누적된 적자와 관객 감소로 인해 2012년 3월 꽃의 전설2는 막을 내렸고, 이것이 워커힐쇼의 마지막이 되었다.

출처

  1. 박승희, 『서울의 밤』, 라이온북스, 271p
  2. 이상연, 『공연관광 효시 워커힐쇼의 사적 변천과정 고찰』, 중앙대학교, 2015, 109p
  3. 위의 논문, 111p


기타 추가 참고자료

워커힐 호텔 하니비쇼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