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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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1924년 인근의 줄포로 이사하여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 졸업했다. 1929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11월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로 연행된 뒤 풀려난 적이 있다. 이듬해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감화돼 빈민 운동에 투신, 당시 아현동에서 살고 있던 좋은 하숙집에서 나와 빈민굴에서 생활하다 장티푸스에 걸렸었다. 같은 해인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 기념 학생 운동을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한다.

1931년 고향 쪽의 고창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 동맹 사건을 주동해 그해 가을 권고 자퇴를 당하게 된다. 당시 서정주는 만주나 러시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의 돈 30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서울에 눌러앉는 것으로 그쳤는데, 이때 많은 책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서정주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승려 석전 박한영을 비롯해 작가 김동리, 함형수, 이상 등과 만나 교유했고 특히 오장환과는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1935년에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당시 교장을 지냈던 박한영의 권유로 입학했으나 1년 뒤 자퇴했다.

해방 이후 1946년 김동리, 조지훈, 곽종원, 박목월, 조연현 등과 함께 좌파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대응키 위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설해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고, 현실 참여 문학 대신 순수시를 택했다. 이후 동아일보 문화부장,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을 거쳐 1949년 초대 한국문학가협회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문총구국대 활동을 하며 전쟁 초기 한강을 간신히 건넜으나,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탓에 조현증이 발병해 요양하여 그 영향 탓인지 시 세계가 확장되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업적

1933년 <그 어머니의 부탁>이라는 시를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기고 형식으로 발표하다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된다. 이 등단 과정이 좀 특이한데, 서정주의 회고에 따르면 <벽> 역시 여느 작품처럼 신문에 투고한 것인데 담당자의 실수였는지 신춘문예 원고로 바뀌어서 당선까지 된 것이라고 한다. 같은 해인 1936년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함형수 등과 함께 <시인부락>을 창간했고, 1938년 방옥숙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1941년에는 <자화상>, <화사>, <문둥이> 등의 시가 수록된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해 문단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서정주는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 1948년 <화사집>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견우의 노래>, <귀촉도>, <푸르른 날> 등이 수록된 두 번째 시집 <귀촉도>를 출간했고, 이어 1956년 <무등을 보며>, <국화 옆에서>, <추천사> 등이 수록된 세 번째 시집 <서정주시선>을 출간해 해방 이전에 이어 시인으로서 또다시 크게 주목받았다.

1961년에는 <꽃밭의 독백>, <고조>, <무제> 등이 수록된 네 번째 시집 <신라초>를, 1968년에는 <동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선운사 동구> 등이 수록된 다섯 번째 시집 <동천>을 출간하면서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게 된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독특한 언어 구사력으로 표현한 서정주의 시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이전까지 단명한 시인이 많았던 한국 시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발표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큰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고은, 박재삼 등 여러 뛰어난 시인을 발굴하고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으면서 많은 시인 지망생들을 가르치는 등 시인 양성에 노력을 쏟기도 했다. 시 이외의 다른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남겨 자서전인 <도깨비 난 마을 이야기>와 <천지유정>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산문집과 평론집을 내기도 했다. 특히 평론 중에서 <한국의 현대시>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를 다룬 글은 지금 읽어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진보 문학계 시각으로 보면 그의 순수시는 '우파적인 경향을 띤 문학'이라고 비판받는다.

1975년에는 <신부>, <상가수의 소리>,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등이 수록된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를, 1976년에는 <시론>, <낮잠> 등이 수록된 일곱 번째 시집 <떠돌이의 시>를 출간했다. 이후의 시들은 서정주의 후기 시에 속하는데,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별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1977년에는 신문사의 후의로 세계여행을 다녀와 1980년 기행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을 냈고, 1982년에는 한국의 역사를 시로 표현한 시집인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를 냈다. 같은 시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1977~1979)도 맡았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 등 친독재적인 행보를 저질러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3년 자신의 생애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들을 소재로 한 시집 <안 잊히는 일들>을, 1984년 노래로 쓰이도록 만든 시들을 묶은 시집 <노래>를 출간했고, 1988년 자서전적 성격의 담시들을 쓴 시집 <팔할이 바람>을 냈다.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매일 1600여 개의 세계의 산 이름을 외웠는데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이를 바탕으로 1991년 시집 <산시>를 냈다. 말년까지 공부와 시쓰기를 활발하게 하여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러시아 유학을 떠나기도 했고, 90년대 중반 <세계 민화집>과 동화집 <우리나라 신선선녀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1993년 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를, 1997년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를 출간했다.

황순원과의 관계

서정주와 황순원은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1915년과 2000년으로 똑같은데, 각각 시와 소설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정치적인 행보에 있어서는 거의 천양지차의 차이를 보여 대조적인 물로 자주 언급된다. 두 작가의 사후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이 함께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