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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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이 되어가는데 믿기지 않네."[3]

  • 황순원은 2000년 9월 14일 오전 8시 서울 동작구 사당동 자택에서 향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사인은 노환(자연사)이다.
  • 황순원의 빈소는 서울대병원이었으며, 발인은 9월 18일 오전 8시였다.[4]


황순원의 죽음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시설배치[5]
구분 시설내용
3층 분향실 1호실 (150평)
부대시설 안내데스크, 상가 안내판
2층 분향실 2호실(68평), 3호실~6호실(45평)
부대시설 라운지, 공중전화, 화장실
1층 분향실 7호실(41평), 8호실~10호실(30평)
행사장
(영결식장)
1실
매점 1개소
로비 안내 데스크, 상가 안내판, 차량호출, 현금지급기
부대시설 상담실, 사무실, 공중전화, 화장실
지하 1층 분향실 11호실 ~ 14호실(31평)
안치실 1실
입관실 1실
장의용품
전시실
1실(수의, 목관 등 장의용품 일체 전시판매)
부대시설 주방, 공중전화, 화장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이용요금[6]
구분 요금 선택요금
안치료 72,000원 / 1일(3,000원/1시간)
빈소
임대료
30평A 500,000원 / 1일(20,833원/1시간) 접객실 사용요금
포함 금액임
30평B 450,000원 / 1일(18,750원/1시간)
31평 500,000원 / 1일(20,833원/1시간)
41평 710,000원 / 1일(29,583원/1시간)
45평 960,000원 / 1일(40,000원/1시간)
68평 1,510,000원 / 1일(62,917원/1시간)
150평 3,550,000원/1일(147,917원/1시간)
염습실 450,000원/1회 (소아 200,000원/1회) 18:00~08:00
입관시에는 550,000원
자체입관시에는 300,000
영결식장(예식실) 임대료 200,000원 / 1회
청소 / 쓰레기
수거료
1호실 60,000원 / 1일
2호실 ~ 7호실 30,000원 / 1일
8호실 ~ 14호실 20,000원 / 1일


황순원의 죽음 관련 인터뷰

서덕순, 황순원 관련 인터뷰 (2020.05.27)

서덕순: 지금 내가 이렇게 여러 가지 얘길 하지만, 사실은 얘기하라면 밤새도록도 할 수 있어. 그게 몇 해에 걸쳐서 선생님을 옆에서 쭉 봤고, 또 평소에도 선생님 소설을 늘 읽고 얘기를 많이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도현(*인터뷰어)이한테 얘기를 하다가 생각을 하니까,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이 되어가는데 믿기지 않네. 20년 넘었네. 내가, 선생님 돌아가신(*돌아가신 지가). 선생님이 주무시는 것처럼(*주무시는 것처럼 돌아가셨다), 저녁때 방에 나는 들어가겠다고 주무시러 들어가고, 그러고 나서 새벽에 가보니까 돌아가셨다던가? 새벽에 조금 이상해서 선생님이, 사모님이 이렇게 들어가셨다가, 두 분이 (같이) 사셨거든, (*황순원의 죽음 이후로) 사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혼자 사셨고. 그래서 자다가 주무시듯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우리가 굉장히, 80(세)에 돌아가셨으니까 당시로도 오래 사셨던 거고, 장수하신 거였어요. 그런데 장례식 때 빈소에 모여서 우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조세희 선생님이, 조세희 선생님은 영문과 출신이에요. 경희대학교. 영문과 출신인데, 선생님의 제자니까. 그래도. 선생님이 아끼던 사람이고 그러니까, 오셔서 조세희 선생님이, 아닌가? 조세희 선생님도 국문과 출신인가? 야, 진짜 기억이 이러냐…. 아, 조세희 선생님이 국문과 출신이고 한수선 선생님이 영문과 출신이었네. 한수선이라고 또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도 오시고 그래서 그때 거기 빈소에는 진짜 유명한 작가님들 다 왔었어요. 어, 그리고 유명하지 않은 작가들도 다 오고. 그래서 선생님이 이제 안 계시니까 선생님을 모시고 밥을 먹는 그 모임은 더는 할 수 없는데 그 때 조세희 선생님이, '그러면 내가 원래 그런 걸 좋아하진 않지만 내가 조금 힘이 돼서 같이 후배들하고 계속 경희 문인들이 모일 그런 기회를 마련해 보면 좋겠다. 그렇게 하자.' 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셨어요.


황순원의 죽음 관련 글

최인호, 「황순원 추도사」[7]

선생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순간 우선 죄책감 때문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4년전이었던가요, 정초에 선생님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린 이후 한번도 선생님을 뵈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 깔끔하시어 자신의 노추를 드러내 보이기 싫다고 은둔생활을 하시던 선생님때문에 찾아뵙기 전에 선생님에게 누가 될 것만 같아 망설이다가 그만 돌아서곤 했습니다. 3넌 전 가을, 다혜가 결혼할 때 사모님이 오셔서 제가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더니 "괜찮아, 괜찮아. 이따금 전화라도 하라구" 하셨지만 어떻게 전화로만 안부인사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하여 선생님 정말 죄송하고 송구스럽습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저의 스승님에다 아버지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막내 아들과 저는 고등학교때 절친한 친구였으며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할 때 선생님은 심사위원이셨습니다.

조선일보의 신춘문예 당선에서도 선생님은 심사위원이셨으며 제 결혼식의 주례를 서주셨습니다.

첫딸을 낳았을 때 선생님께 작명을 부탁드렸더니 선생님은 서슴지 않고 '일월(日月)'에 나오는 다혜(多惠)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소설 주인공 '다혜'가 제 딸 '다혜'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저는 선생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선생님과 저는 같은 평안도 출신의 피난민이었으므로 선생님을 뵈오면 같은 고향 출신이 느낄 수 있는 혈육 같은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이야 우리나라 현대문학에서 최고봉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선생님은 항상 문단에서 초탈해 계셨습니다.

치열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평생동안 잡문 한편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를 키우는 데에도 엄격하셔서 저는 선생님의 제자로 인정받고 싶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지만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재데뷔를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항상 선생님의 제자라는 것을 내세우고 있었으며 그것이 제 문학의 유일한 자존심이자 프라이드임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드문 선비이자 문학의 선객(禪客)이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이셨으므로 말년에는 스스로 세속으로부터 초월하여 은둔생활을 하셨습니다. 틈틈이 사모님의 손을 잡고 산책을 즐기실 뿐, 세상 일에 스스로 벗어나셔서 숨어 사신다는 말씀을 전해 들을 때마다 저는 과연 선생님답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니요. 일제가 보기 싫어 쓰시는 작품마다 장독에 묻어 두었다가 해방이 되자 발표하셨다는 선생님의 선비정신처럼 노추를 보이기 싫어 스러져가는 생명을 은둔 속에 묻어 두셨다가 죽음이 가까워오자 비로소 나타내 보이신 것인가요.

아아, 선생님. 어쨌든 낯선 세상에 오셔서 낯선 문학으로 낯설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선생님. 그리고 아버님. 정말 낯선 세상에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는 별과 함께 사십시오.


하종오, 「[기자의 눈] "心友를 잃어 서러워"」, 한국일보, 2000.09.19.

"서럽습니다... 오래 살 만한 사람이었는데..."고 황순원 선생의 부음을 듣고 두 차례 미당 서정주 선생을 찾아뵀다. 미당은 황선생과 동갑. 1915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여든 여섯이다. 그는 황선생의 부음을 전하자 "서럽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꺼칠한 수염에 깡 마른 얼굴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국소설사의 검고이 떠난 마당에 살아있는 한국시사의 어른에게서 추모시를 받아보려던 기자의 부탁에 미당은 "이제 시가 안써져"라며 완곡하게 거절 아닌 거절을 했다. 그러면서 " '황고집'은 내 심우였어, 깨끗한 사람이었어"라고 덧붙였다.

18일 오전 황선생의 영결식이 서울대병원에서 있었다. 피천득, 구상 시인등 문단의 원로들을 비롯해 150여 명의 후배 문인들이 참석한 영결식에서 박이도 시인은 추모시를 낭송했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빛지지 않고/ 떠나시는, 단아하고 고고한 모습이/.../스승께서는 보여줄 수 없는 참 자유의 정신을/ 문학으로 일깨워 주셨습니다."

평소 소설과 시 쓰는 것 이외에는 잡문 한 편 허투루 쓰거나. 언론과의 인터뷰에 나서는 것조차 꺼려했던 고인이 구음으로 다시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것은 그가 남긴 이런 말이다. "나 자신의 편안함이나 금전을 위해서 내 마음속에 있는 독자에게 실망을 준 작품을 쓴 적은 없다 앞으로 다시 소설을 쓰게 되더라도 그런 타협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남기고 싶은 한 마디 말이 있다면 각자 모두 한눈 팔지 말고 열심히 살라는 말 뿐이다." 고인의 '마음 속에 잇는 독자'인 우리는 과연 그 기대에 값할만큼 생을 살고 들 있(뒷내용 없음)


오성찬, 「고가도로 위에서 나부끼던 두루마기 고름」, 제민일보, 2000.09.16

황순원 선생님 영전에 20대후반 문청 시절 숨막히는 긴장 속에서 읽던 작품…술자리서 조차 흐트러짐 없는 꼿꼿하면서도 소탈했던 선생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계신지, 신문이나 잡지에 가끔씩 나는 동정만 살피는 새 6 ~ 7년을 버텨 오셨는데, 어제 저녁 TV 뉴스를 보다가 선생님의 부음을 접했다. 선생님의 작품 중 「나무들 비탈에서다」의 첫회가 「사상계」에 연재가 될 무렵, 나는 20대 후반의 문학청년으로 전장에 투입된 주인공이 진격해 나가며 ‘건드리기만 하면 파삭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긴박한 상황을 작품으로 읽으며 숨이 막힐 정 같은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 후 이 작품을 통독한 것은 물론 그 후 발표된 「일월」은 물론 창우사판 문학전집을 구해서는 언더라인을 그어가며 그 고결한 문장들을 익혔다. 주인공들 감정까지도 극히 절제된 「소나기」 속의 여러 상황과 문장은 마땅히 문학을 하고자 하는 후배들이 귀감으로 삼을만 하다. 그 후 나도 문단의 말석을 차지하고 앉았을 때 선생님은 그야말로 태산같은 어른이셨다. 그런데 상경하는 기회에 소설 쓰는 동료와 함께 만나뵌 선생님은 그리도 소박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건 우리에게 물으셨다. “너희들 있는 데가 어디냐?”고. 그리곤 선생님께서 계신 곳과 우리가 있는 거리의 중간쯤에 장소를 정해 놓고, 지금부터 움직여서 거기서 만나자고 약속하셨다. 얼마 후 우리는 그 장소에서 오늘 사진에서 뵌 것과 마찬가지 베레모를 쓰신 선생님을 될 수 있었고 그날 처음 만났지만 아주 친숙한 것처럼 소탈하신 성격의 선생님과 음식도 나누고, 술도 마셨다. 그때 인상으로 선생님은 술을 많이 드시지는 않았지만 퍽 즐기시는 것 같았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제주도 사람들이 내가 「비바리」를 쓴 때문에 혼을 내려고 한다면서?” 사실 나도 선생님의 「비바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었으나 그런 내색을 바로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평안도 출신의 선생님이 한차례와 보고 쓰신 작품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덮어두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두 번째도 처음과 꼭 같은 방법으로 만났는데, 그때도 그 말씀을 하셨다. 나는 선생님께서 그 작품을 쓰시고 나서 제주도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이라고 속으로 치부했다. 그런 때문인지는 모르나 선생님은 그 후로 한번도 제주엘 오시지 않았다. 대학의 제자고 원정이 선생님의 염결성에 대해 증언하거니와, 선생님의 그런 점에서도 성격을 선생님은 그런 성격을 느끼게 한다. 어느 신문이 선생님의 인품에 대해 “정결한 문장… 꼿꼿한 인품”을 제목으로 달고 있는데, 사실 그는 술자리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우리가 마지막 만나던 날은 아마 정초 무렵이었는지 그날 선생님은 검은 두루마기에 베레 모. 차림이셨다. 늦도록 마시고 우리와 헤어져 가실 때 가도로 위를 건너 가실 때 나부끼던 두루마기 자락과 고름은 이제도 나의 망막에 남아 있는 매우 아름다운 영상이다. 그리고 그 후 이 몽매한 제자는 다시 선생님을 찾아 뵙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늘 부음을 접하다니…. 다만 엎드려 명복을 빌 따름이다.


김명인, 「[문학칼럼]한 노작가의 죽음 앞에서...」, 한겨레, 2000.09.25

황순원 선생이 타계했다.떠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사람의 일이지만 모든 떠남이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황순원 선생의 부음을 접하고 나는 스치듯 흘러나오는 짧은 탄식을 어찌할 수 없었다. 고인의 생전에 무슨 개인적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고인과 일면식도 없었다. 나의 탄식은 그의 삶과 문학과 관련하여 한 사람의 후인이자 어쩌면 넓은 의미의 동시대인으로서 느낀, 연민과 존경이 착종하는 복잡한 심사의 한 표현일 뿐이다.

황순원 선생의 타계에 즈음하여 도하 각 신문의 문화면은 일제히 그의 삶과 문학을 돌이키는 기사를 실었는데 약속이나 한 듯 '염결한 삶' '학 같이 살다간 삶' 등으로 고인의 삶을 표현했다. 작품세계에 관해서도 순수문학의 화신인 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저 그렇게만 평가될 사람일 뿐이었을까.

나는 수년 전 고인의 해방기 소설작품들을 검토해 볼 기회를 가진 적이 있다. 1945년부터 49년, 이른바 해방공간 혹은 좌우대립기라 일컬어지는 그 시기에 쓰여진 (술), (황소들), (아버지), (목넘이 마을의 개) 등 적지 않은 수의 단편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주로 분단 이후 작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인에 대한 평가들, 이를테면 개인주의적이라거나 실존주의적이라는 평가들이 대단히 피상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읽은 이 해방기의 작품들을 쓴 작가 황순원은 당시 주어진 '해방'과 그 이후의 전개과정이 지닌 반민족성과 반민중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진보적 리얼리스트이자 점차로 반동화되어 가는 남한 현실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용납할 수 없었던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물론 그의 한국전쟁 이후의 작품세계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격동의 시기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당시에 단지 한 사람의 작가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는, 그리고 결국은 결코 그가 바라지 않았던 세계에서 눌러앉아 살게 되기까지 그가 겪었을 정신적 물리적 곤욕에 관해서도 어렴풋이나마 알려주는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생전에 선생은 그 무렵에 관한 그 어떤 진술도 완강히 거부해왔다고 한다.

경희대 교수직과 예술원 회원직 외의 어떤 직함도 거부했고, 시와 소설 이외의 일체의 잡문을 쓰지 않았고 정부가 주는 알량한 훈장의 서훈을 거부한 고인의 결벽증이 내게는 '순수'로 읽히기보다는 침묵의 저항이나 혹은 그가 어쩌면 평생 시달렸을 마음의 빚을 갚는 행동으로 읽힌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한 노작가의 가슴 속 깊은 심연에 빗장처럼 가로세로 질러놓였을 분단의 질곡을 본다. 이 반성 없는 시대를 말없이 거부하며 살아내면서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짧은 글을 쓴 술잔 삼아 고인의 영전에 삼가 바친다.


각주

  1. 사진 출처: 김효정,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왜 비싸나 했더니」, 연합뉴스, 2012.01.31.
  2. 사진 출처: [https://imnews.imbc.com/replay/2000/nwdesk/article/1867964_30735.html 김현주, 「뉴스데스크 원로 작가 황순원씨 별세」, MBC, 2000.09.14.]
  3. 서덕순, 황순원 관련 인터뷰, 2020.05.27.
  4. 「소설‘소나기’작가 황순원씨 별세」, 경남신문, 2000.09.15.
  5. 출처: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장례식장 소개> 시설현황
  6. 출처: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이용안내> 장례식장 요금안내
  7. 최인호, 「인간사랑에 천착…문단의 정신적사표 /타계한 소설가 황순원」, 한국일보, 2000.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