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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7일 (수) 00:23 판
2022년 4월 20일
경희궁 역사에 대한 기본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서울시역사박물관'에서
서궐도안을 메인으로
경희궁의 모든 건물 + 남아있는 건물 5개 위주의 스토리텔링
경성중학교- 서울고등학교-서울역사박물관
- 다음주(4/27)까지 각자 맡은 파트 세부목차 짜서 위키페이지에 올리기
- 시험 차주부터 내용 입력 시작
<역할분담>
목차
개요-박하은
건물 소개- 박하은
- 건물들 역할/용도/건축적 특징
- 외곽의 특징과 내부 특징
- 건물의 소실시기/복원시기/(현재 존재여부)
외전과 궁성문 : 흥화문/금천교/건명문/숭정문/숭정전/자정전/태녕전/개양문/흥원문
내전과 후원 : 광달문/흥정당/융복전/회상전/집경당/회경문/융무당/광명전/장락전/영화정
동궁과 궐내각사 : 경형문/경현당/빈청/승정원/약방/도총부/옥당/예문관/내각/상의원
방공호/반달형 석조
(현재 남아있지 않은 건물도 일단 다 기록)
(추후에 하위카테고리로 소실된 건물 분류)
경희궁 역사 -손유진(~정조), 최맑은샘(정조~) 고종이후(일제강점기/경성중학교-서울고등학교-서울역사박물관)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그 이후
정조
- 영종이 훙(薨)하고, 6일 만인 신사일(辛巳日)에 왕이 경희궁(慶熙宮)의 숭정문(崇政門)에 즉위하였다.
- 경희궁(慶熙宮)의 태령전(泰寧殿)을 혼전(魂殿)으로 하고, 혼전 수리 도감을 두어 선조(先祖)의 어제 봉안각(御製奉安閣)을 영건하게 하되, 구윤옥(具允鈺)·정일상(鄭一祥)을 영건 도감의 당상으로 삼아 수리에 관한 소임을 겸하여 살피도록 하였다.
- 정조는 경희궁에 많은 시간 머물렀다.
- 태평관(太平館)에 행행하여 다례를 행하고 경희궁(慶熙宮)에 환어하였다.
- " 경희궁(慶熙宮)에 도둑이 들었는데 잡지 못하여 처소를 창덕궁(昌德宮) 으로 옮겼다.
순조
- 왕대비(王大妃)가 승전색(承傳色)을 통해 언서(諺書)로 하교하기를,"구기(拘忌)되는 일이 있어서 주상(主上)을 받들고 잠시 경희궁(慶熙宮)으로 피해 가 있고자 하나, 주상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날짜가 지체되고 있다. 내일로 정하여 가순궁(嘉順宮)과 함께 일체 거처를 옮기고자 하니, 이 뜻을 대신에게 전하여 대전(大殿)에 아뢰게 하고 처분을 기다려 거행하라."하였다.
- 왕대비전과 가순궁을 모시고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 전궁(殿宮)을 받들고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 왕세자의 서연(書筵) 처소는 존현각(尊賢閣)으로 하고, 합문(閤門)은 대전(大殿) 합문으로 하며, 앉는 방향은 선조(先朝) 춘저(春邸) 때의 예에 따라 하라고 명하였다. 춘저(春邸) 세자(世子)의 별칭.
현종
- 태묘(太廟)의 각실(閣室)을 경희궁(慶熙宮)의 광명전(光明殿)과 장락전(長樂殿)에 나누어 봉안하였는데, 태묘의 증수(增修) 때문이었다.
철종
- 경희궁(慶熙宮)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고종
- 병조(兵曹)에서, ‘경희궁(慶熙宮)의 염초를 굽는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경희궁(慶喜宮) 숭정문(崇政門)에 화재가 났다.
-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희궁(慶熙宮) 전각을 수리하는 등의 절차를 궁내부(宮內府)에서 빨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순종
- 경희궁(慶熙宮) 토지와 건물 전부를 총독부(總督府)에 인계(引繼)하였다.
그 이후
-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된 후 경희궁은 학교 및 대중 집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다수 이주하였고, 거류민단립중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 거류민단립중학교는 1925년 경성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으며 1910년 전후 경희궁 자리를 침범하였다. 해방 뒤에는 경성중학교 자리에 서울공립중학교가 들어섰으며 1971년 서울고등학교만 남게 되었다가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빈 터로 남았다. 그 후로 2000년까지 경희궁의 복원이 조금씩 추진되어 숭전전과 회랑, 자정전, 태녕전 등이 다시 지어졌다. 이후 서울특별시는 2002년 경희궁 터 일부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어 개관하였다.
오늘날의 경희궁 -김시연,Trang Lou
경희궁의 역사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이미 1907년 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 궁이 국유로 편입되어 1915년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내의 건물은 철거되어 없어지거나 다른 곳에 이전되기도 하였고, 궁역(宮域)도 주변에 각종 관사 등이 들어서면서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사용되면서 주변 대지 일부가 매각되어 궁터가 더욱 줄어들었다.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를 서초구로 이전하고 전체 부지는 민간기업에 매각하였다가, 1984년 이곳에 시민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여 이듬해 궁터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으며,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1]
오늘날의 경희궁
경희궁 건물별 관람법
- 과거의 경희궁
- 경희궁 흥화문 01.JPG
흥화문[2]
- 경희궁 숭정전 01.JPG
숭정전 전경
- 경희궁 숭정전 02.JPG
숭정전 정면
- 경희궁 숭정전 03.JPG
숭정전 측면
- 경희궁 숭정전 석계 01.JPG
숭정전 석계 정면
- 경희궁 숭정전 석계 02.JPG
숭정전 석계 측면
- 경희궁 숭정전 내부 01.JPG
숭정전 내부
- 오늘날 경희궁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떼어갔었습니다. 광복 이후 박문사가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남아있었습니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습니다.[3]
금천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들어서면 궁내의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흐르던 금천에 놓여진 돌다리입니다.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는 것입니다. 1619년(광해군 11)에 건립되었던 것을 일제가 매몰시켰지만, 서울시에서는 2001년 발굴을 통하여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습니다.[4]
숭정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입니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숭정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습니다.[5]
자정전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입니다.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습니다. 1617~20년(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훼손하였습니다. 서울시에서는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자리에 <서궐도안>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습니다. 자정전 서쪽에는 발굴을 통하여 행랑의 바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돌이 발견되었기에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여 복원하였습니다.[6]
태령전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던 태령전을 서울시에서는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습니다.[7]
서암
경희궁 터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이용한 시설들도 많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암과 영렬천만이 그 흔적을 말해줍니다.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습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습니다.[8]
경희궁 행사
경희궁 관람코스 기획
기획안1(김시연)
경희궁-> 경희궁 뒷길 산책로-> 서울역사박물관 -> 등..
기획안2
잃어버린 경희궁을 찾아서 (?)
기획안3
[기타]
- 구체적인 부분은 자료조사 후 수정보완
- 출처는 통일해서 처음부터 기재(각주 형식 미리 통일하기)
- 자료조사/자료수집 단계에서도 위키에 기재하기
(다같이 보고 공유할 수 있도록)
조사
경희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대안로에서 위치하고 있다.조선후기 왕의 피우를 위한 이궁으로 건립된 궁궐이다.사실 경희궁은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궁이라고도 한다.경흭궁은 가장 흥성하는 데 100여동의 건물을 갖추고 거대한 궁굴이었다.경희궁은 5대 궁궐 중에 가장 많은 재난을 겪으면서 대부분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유실하게 되었다.일부분 건물은 복원을 통해서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과 민접한다.
경희궁은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에서 시작하였으며 1623년에서 이궁이 되었으며 궁내에는 이색적인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건립한 후에 10여 명의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면서 왕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그러나 경희궁은 재난을 겪으면서 훼손이 가장 심하게 되었다.경희궁은 경사진 지형을 기반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건축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웅장한 규모를 자한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이다.일제 강점기에는 궁내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져 신라호탤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복원 과정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이궁은 1충 구조로 정궁 궁전의 웅장함이 없지만 부드러운 차마선우로 한국 목조건출물의 대표적인 특징을 잘 표현하였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각종 국가의식이 거행되었던 장소로 조선왕조에서는 모두 세 명의 왕은 등극 대전을 거행하였다.대신조회,사신접대,연희 등 왕실의 각종 전례행사도 이 곳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1987년에어 복원을 완성하였다.송정전의 원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사찰로 매각되었고 현재 동국대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다.
경희궁의 편전 저정전이다.저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정무를 보고 나랏일을 논의하는 곳이었다.'저정’뜻은 ‘정사를 돕는다'이다.숙종(조선 제19대 왕) 붕어한 후에 빈전으로 하였다.(왕이나 왕비의 관재를 놓는 전각) 경사진 지형이 많기 때문에 자정전은 정전 숭정전보다 더 높은 지역에 위치한다.
태녕전은 최초에 특정한 용도가 없는 건물이었다.1744년에 영조는 태녕전이 자기의 초상을 보관하는 곳으로 삼았다.특히 주의할 만하는 것은 영조는 자신이 붕어한 뒤가 아니라 재위할 때부터 자신의 초상을 배치해 놓았는데 이것이 왕들과는 다른 점이다.이에 따르면 이 건물은 영조 시절에서 권력과 위엄을 상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생각한다.태녕전도 일제 강점기에서 해체되었으며 서울시 복원 공사를 할 때까지 재건을 할 수 있었다.
서암이다.태녕전 뒤쪽에는 괴상한 모양의 암석이 있다.암석 내부에는 '암천’이 있다고 하였고 오래전부터 경희궁의 보물이라고 불렀다.당시에는 서암도 왕암이라고 불렀으며 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화화되어 있었는데 그래서 광해군이 경희궁을 이곳에 세우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잉어가 롱먼을 뛰어오르다’-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활동
조선시대에 사람들이 남보다 뛰어나고 싶으면 과거 시험을 참석해야 한다.경희궁 매년 가을에서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활동을 거행한다.한번 급제하면 응시자가 괸직을 얻을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로 출세하기 때문에 응시자마다 가족들의 부탁을 받고 시험을 보러 간다.그 날은 축하 공연도 열리고 전통 음악과 무용 공연을 감상할 수 있고 관원과 무사의 복장을 입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화살과 무예체험 행상도 함께 즐길 수 있다. 대형 가무극은 경희궁에서 거행하곤 한다.
경희궁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이다. 광해군 시대 1617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희궁의 첫 명칭은 바로 경덕궁이었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알려진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했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금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