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회의록
위키 규칙
1. 직접인용시 언급되는 건물명: 밑줄 적용, 파란색 적용 (경희궁)
2. 사진 크기(단독) 500px, 사진 크기(단체) : 합 1000(1/n)
3. 동영상 크기 width="640" height="400", 가운데 정렬
4. 각주-> 교수님께 문의
5. 목차구성 -> 목차 건물명 (한자) 삽입, 스토리텔링 추가되면 재논의
6. 본문 -> 직접인용 제외 한자 삭제
7. 링크삽입 -> 어려운단어(각주,링크) -> 민족문화백과사전1순위, 위키실록2순위
2022년 4월 20일
경희궁 역사에 대한 기본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서울시역사박물관'에서
서궐도안을 메인으로
경희궁의 모든 건물 + 남아있는 건물 5개 위주의 스토리텔링
경성중학교- 서울고등학교-서울역사박물관
- 다음주(4/27)까지 각자 맡은 파트 세부목차 짜서 위키페이지에 올리기
- 시험 차주부터 내용 입력 시작
<2022.4.27.수>
1. 역할분담 - 개요 및 건물 소개 : 박하은, 김지현
2. 개요 및 건물 소개 부분 - 전체적인 개요 : 박하은, 김지현 논의 후 자료조사 역할 분담 - 건물 소개 : '경희궁의 건축물' 파트 재분배 (김지현), '경희궁의 구조적 측면에서 궁궐로서 미흡한 부분'(박하은 담당)
3. 경희궁 역사 - 기존 왕별로 정리 -> 전체적인 개괄 설명하는 방식. 경희궁 관련 인물, 인물 간의 사건에 대한 카테고리를 줄이고 건물 카테고리에 담길 내용을 같이 구성, 특징적인 몇 가지 사건 + 건물소개에 필요한 인물 설명 - 목록 : 1.경희궁의 성립(어떻게 지어졌는지) 2. 왕실 사용 관습의 변천사 3. 이괄의 난과 경희궁(인조의 피난) 4. 경복궁 복원과 경희궁(고종이 자재를 가져다 쓴 이야기) 5. 경성중학교-서울고등학교-서울역사박물관 - 1,3(최맑은샘), 4,5(손유진)
4. 스토리텔링 파트 추가
- 건물 소개 시 스토리테리링에 대한 내용 짧게 언급, 해당 내용은 내부 링크로 연결하여 스토리텔링 파트에서 좀 더 세부적으로 설명
<2022.5.2 월>
1. 차주(5/9)수업시간까지
- 최맑은샘 : 스토리텔링 페이지 3개 제작(이괄의 난과 경희궁(인조의 피난) 4. 경복궁 복원과 경희궁(고종이 자재를 가져다 쓴 이야기) 5. 경성중학교-서울고등학교-서울역사박물관)
- 박하은 : 동궁, 생활기거공간 자료 조사 후 입력, 스토리텔링 페이지 제작
- 김지현 : 외전과 궁성문 페이지 제작
- 김시연 : 오늘날의 경희궁 페이지 제작
- 손유진 : 스토리텔링 페이지 제작(광해군, 경덕궁을 건설하다, 영조,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다, 19세기 중엽 이후 궁궐의 지위를 상실한 경희궁)
2. 다음 주 회의시간에 위키 내부 규칙(강조, 사진 규격, 정렬 등)통일하기
3. 추가/참고
- 개요 : 대략적인 역사 설명(스토리텔링 항목과 겹치는 부분은 내부문서로 연결), 위치 소개 시 카카오맵/네이버맵 활용
- <궁궐지> 참고 : 궁궐 건물 및 이야기 소개 시
- 건물 자료 조사 중 추가적으로 다룰 만한 스토리텔링 주제 발견 시 다음 회의시간에 제안
4. 세부 역할 분담
- 외전, 궐내각사, 후원 : 김지현
- 내전, 동궁, 생활기거공간 : 박하은
- 오늘날의 경희궁, (+스토리텔링 1개) : 김시연
<2022.5.11.월>
1. 공통(다음주까지)
!개인 파트 정리!
필요한 사진 교수님께 요청
필요없는 문 삭제
서궐도 사진 편집 - 권역별로 자르기, 이름 붙이기(교수님께서 추가)
문단 나누기
위치 관계 설명문 삭제
현재 복원 사업 부실한 이유 과정(논문, 7-80년대 신문기사, 계약서 참고) 적기 - 스토리텔링으로 빼기
조선고적도보 등 사진 출처 각주로 기입
외규장각 의궤
- 서궐중건(영건)도감의궤 : 문체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사진 및 내용
- 규장각 사이트 -> 검색 -> [그림] 다운로드(현재 면 출력-pdf로 인쇄-포토샵 잘라내기 편집 -> 교수님)
이름 유래 정확히 찾고 주석 달기 - 궁궐의 현판과 주련2 책 참고!!
2. 외전 영역
흥화문 매일신보 기사 - 사진 인용 출처 매일신보 1941년 0월 0일 기사(교수님)
숭정전 - 기사, 사진, 유튜브, 더이상 추가x(내용 살짝만 줄이기)
숭정전 - 스토리텔링으로 빼서 자세한 내용 적기 - 정각원, 건물양식(법당으로 사용), 복원 과정(왜 새로 만들었는지), 사진/기사 참고
정각원 사진 찾기
3. 질문
왕들이 지은 시 추가? - 현판 이름을 지을 때 지은 시, 축제 때 지은 시
경희궁 연표 추가 - 문화유산포털, 자료 어디서?
<역할분담>
목차
개요-박하은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경희궁 사진 첨부
- 경희궁으로 들어가며
사적 271호로 지정된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이었습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습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습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입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하였습니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서울시에서는 1987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1]
오늘날의 경희궁에 영상이 적절한 것 같아 삭제 예정입니다
개요 구성 방식 : 소재지, 전반적인 주요 사건 서술, 현재 모습 설명
건물 소개- 박하은
서궐도안 첨부
경덕궁은 규모가 있는 완비된 궁궐은 아니었음. 인경궁의 규모가 600간 정도였던 데 비해 경덕궁 아문의 규모는 200간 남짓이었으며, 인경궁의 정문인 명화문은 창덕궁 돈화문처럼 2층으로 조성한 데 비해 경덕궁의 정문은 단층으로 조성함.
인조대 이후 이궁으로 쓰이면서 점차 궁궐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를 갖춰나갔고, 한창 때 이름 있는 전각만 해도 120채가 넘을 정도였음.
경희궁의 건축물
각 건물들의 모습을 송규태의 서궐도안에서의 사진 잘라 첨부 예정
세부 설명에 첨부할 내용 : 건물의 역할, 용도, 건축적 특징, 외곽의 특징과 내부 특징관련 얽힌 역사, 건물의 소실 시기와 복원 시기, 현재 존재 여부
- 외전과 궁성문
- 흥화문(굵은 글씨는 현재 복원된 건물을 의미, 이에 대한 세부 설명 첨부 예정, 서궐도안과 현재 모습을 사진을 통해 비교 시각화)
- 금천교
- 건명문
- 숭정문
- 두 개의 숭정전 : 정각원과 복원된 숭정전
- 자정전
- 태녕전
- 개양문
- 흥원문
- 궐내각사
- 빈청, 전설사, 내구
- 방림원(상림원)
- 승정원
- 약방
- 도총부
- 옥당
- 예문관
- 내각
- 상의원
- 동궁
- 경형문
- 경현당
- 일중각
- 문헌각
- 집희당
- 중서헌
- 경선당
- 내전
- 광달문
- 흥정당
- 회상전
- 융복전
- 집경당
- 회경문
- 융무당
- 생활기거공간
- 장락전
- 광명전
- 회상전
- 후원
- 영취정
- 춘화정
- 황학정
- 기타
- 방공호
- 반달형 석조(춘화정)
연도, 시기별 건물들의 역사를 표로 다시 한 번 정리
경희궁의 구조적 측면에서 궁궐로서 미흡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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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역사 -손유진(~정조), 최맑은샘(정조~) 고종이후(일제강점기/경성중학교-서울고등학교-서울역사박물관)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그 이후
정조
- 영종이 훙(薨)하고, 6일 만인 신사일(辛巳日)에 왕이 경희궁(慶熙宮)의 숭정문(崇政門)에 즉위하였다.
- 경희궁(慶熙宮)의 태령전(泰寧殿)을 혼전(魂殿)으로 하고, 혼전 수리 도감을 두어 선조(先祖)의 어제 봉안각(御製奉安閣)을 영건하게 하되, 구윤옥(具允鈺)·정일상(鄭一祥)을 영건 도감의 당상으로 삼아 수리에 관한 소임을 겸하여 살피도록 하였다.
- 정조는 경희궁에 많은 시간 머물렀다.
- 태평관(太平館)에 행행하여 다례를 행하고 경희궁(慶熙宮)에 환어하였다.
- " 경희궁(慶熙宮)에 도둑이 들었는데 잡지 못하여 처소를 창덕궁(昌德宮) 으로 옮겼다.
순조
- 왕대비(王大妃)가 승전색(承傳色)을 통해 언서(諺書)로 하교하기를,"구기(拘忌)되는 일이 있어서 주상(主上)을 받들고 잠시 경희궁(慶熙宮)으로 피해 가 있고자 하나, 주상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날짜가 지체되고 있다. 내일로 정하여 가순궁(嘉順宮)과 함께 일체 거처를 옮기고자 하니, 이 뜻을 대신에게 전하여 대전(大殿)에 아뢰게 하고 처분을 기다려 거행하라."하였다.
- 왕대비전과 가순궁을 모시고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 전궁(殿宮)을 받들고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 왕세자의 서연(書筵) 처소는 존현각(尊賢閣)으로 하고, 합문(閤門)은 대전(大殿) 합문으로 하며, 앉는 방향은 선조(先朝) 춘저(春邸) 때의 예에 따라 하라고 명하였다. 춘저(春邸) 세자(世子)의 별칭.
현종
- 태묘(太廟)의 각실(閣室)을 경희궁(慶熙宮)의 광명전(光明殿)과 장락전(長樂殿)에 나누어 봉안하였는데, 태묘의 증수(增修) 때문이었다.
철종
- 경희궁(慶熙宮)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고종
- 병조(兵曹)에서, ‘경희궁(慶熙宮)의 염초를 굽는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경희궁(慶喜宮) 숭정문(崇政門)에 화재가 났다.
-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희궁(慶熙宮) 전각을 수리하는 등의 절차를 궁내부(宮內府)에서 빨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순종
- 경희궁(慶熙宮) 토지와 건물 전부를 총독부(總督府)에 인계(引繼)하였다.
그 이후
-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된 후 경희궁은 학교 및 대중 집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다수 이주하였고, 거류민단립중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 거류민단립중학교는 1925년 경성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으며 1910년 전후 경희궁 자리를 침범하였다. 해방 뒤에는 경성중학교 자리에 서울공립중학교가 들어섰으며 1971년 서울고등학교만 남게 되었다가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빈 터로 남았다. 그 후로 2000년까지 경희궁의 복원이 조금씩 추진되어 숭전전과 회랑, 자정전, 태녕전 등이 다시 지어졌다. 이후 서울특별시는 2002년 경희궁 터 일부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어 개관하였다.
오늘날의 경희궁 -김시연,Trang Lou
경희궁의 역사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이미 1907년 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 궁이 국유로 편입되어 1915년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내의 건물은 철거되어 없어지거나 다른 곳에 이전되기도 하였고, 궁역(宮域)도 주변에 각종 관사 등이 들어서면서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사용되면서 주변 대지 일부가 매각되어 궁터가 더욱 줄어들었다.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를 서초구로 이전하고 전체 부지는 민간기업에 매각하였다가, 1984년 이곳에 시민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여 이듬해 궁터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으며,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2]
오늘날의 경희궁
경희궁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이다. 광해군 시대 1617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희궁의 첫 명칭은 바로 경덕궁이었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알려진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했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금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3]
경희궁 건물별 관람법
- 과거의 경희궁
-> 급하게 옮기느라 사진 업로드 못했는데 제가 빠른 시일내로 수정보완하겠습니다! ㅠㅠ
여기에 사진 올리지 마세요
- 오늘날 경희궁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떼어갔었습니다. 광복 이후 박문사가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남아있었습니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습니다.[4]
금천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들어서면 궁내의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흐르던 금천에 놓여진 돌다리입니다.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는 것입니다. 1619년(광해군 11)에 건립되었던 것을 일제가 매몰시켰지만, 서울시에서는 2001년 발굴을 통하여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습니다.[5]
숭정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입니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숭정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습니다.[6]
자정전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입니다.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습니다. 1617~20년(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훼손하였습니다. 서울시에서는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자리에 <서궐도안>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습니다. 자정전 서쪽에는 발굴을 통하여 행랑의 바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돌이 발견되었기에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여 복원하였습니다.[7]
태령전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던 태령전을 서울시에서는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습니다.[8]
서암
경희궁 터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이용한 시설들도 많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암과 영렬천만이 그 흔적을 말해줍니다.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습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습니다.[9]
건축물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bf1400><bgcolor=#bf1400><width=25%> {{{#gold 사진 }}} ||<bgcolor=#bf1400><width=75%> {{{#gold 설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width=100%}}} ||흥화문(興化門)[br]경희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식 단층기와집에 단층 구조로 다른 궁과는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1932년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뜯어갔었다. 광복 이후 박문사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엉뚱한 곳의 정문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width=100%}}} ||숭정문(崇政門)[br]경희궁 숭정전의 정문으로 높은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었고 왕궁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숭정문(崇政門)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봉황을 새긴 답도를 만들어 왕궁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width=100%}}} ||숭정전(崇政殿)[br]경희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에 세워졌으나 1926년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했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width=100%}}} ||자정전(資政殿)[br]경희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되었으며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1910년 사이에 경희궁의 몇 안남은 전각들조차 훼손될 때 덩달아 헐렸다가 해방 후 경희궁지 발굴을 통해 복원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width=100%}}} ||태령전(泰寧殿)[br]경희궁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영조 당시 중수되어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고 영조가 붕어한 후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경희궁 전각 중 하나였으나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 매각할때 같이 매각되었다가 해방 후 발굴, 복원되었다. 복원 이후에는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반영해 영조 어진 모사본을 봉안했다. 이 전각의 뒤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큰 바위가 있는데 서암(瑞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다. 원래는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해서 왕암(王巖)이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광해군이 이 자리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현재 이름인 서암은 숙종이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왕암을 서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width=100%}}} ||방공호[br]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3년 말경[* 당시 경성중 학생이던 최준희의 2003년 증언([[1]])] 경성중앙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 전신국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만들었다고 하며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의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발파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했고, 작업이나 실무 행정은 전부 체신국에서 담당했다고 한다. 서울특별시는 2003년에 방공호를 폭파철거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전시(戰時)기념관이나 박물관으로 개조하려고 했고, 명지대학교에 연구용역을 의뢰했다. 2004년에 연구용역팀이 역사현장으로 보존하자고 피력하여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협의를 했으나 예산 문제 등으로 수년간 미루다가 뜻을 못 이뤘다.([[2]]) 2013년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을 발표하며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라 밝혔다가, 돈이 많이 든다며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을 계획했다. 그러나 현재는 그냥 방치된 상태. 대중에게는 MBC 느낌표의 위대한 유산 744434를 통해 처음 알려졌으며, 해당 시설에 방문한 시민의 블로그 게시물을 보면 대충 만든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3]]|| [각주]
경희궁 행사
궁궐 배경의 뮤지컬을 실제 궁궐에서 관람하는 이색 경험을 즐길 수 있는 고궁뮤지컬 ‘명성황후’도 페스티벌 기간에 특별 공연한다.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그린 국내 대표 창작뮤지컬로 우리 궁의 아름다운 자태와 분위기를 그대로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5월 4~12일 저녁 8시부터 9시 40분까지. 관람료 3~5만원. 문의 1544-1555
경희궁 권역의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에 난전이 들어선다. 내로라하는 서울의 16개 박물관이 참여하여 조선시대 저잣거리를 재현, 조선시대 서민의 삶을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문화체험 교실을 마련한 것. 서울의 역사를 오감으로 체험하고 느끼는 오감쾌락(五感快樂) 특별 체험전이다.
조선 시대 떡과 술, 한방 약재 맛보기, 대장간 체험, 옹기와 문방가구, 만화부채, 화폐 만들기 체험, 옛 여인의 속옷 알아보기, 한방차 시음, 짚을 이용한 생활용품 만들기, 옹기만들기 등 청각, 미각, 후각, 촉각, 시각을 이용한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경희궁 관람코스 기획
기획안1(김시연)
경희궁-> 경희궁 뒷길 산책로-> 서울역사박물관 -> 등..
기획안2(응웬티짱)
경희궁의 건축물-> 경희궁 행사-> 경희궁의 계속되는 훼손-> 등..
계속되는 훼손
광복 이후에 특히 서울특별시에 의한 훼손이 현재진행형이다. 정부에서 유적이 발굴된 때에 한해서라도 해당 사유지를 매입해 보존했어야 하나, 어떠한 보존조치도 이뤄지지도 않았고 조선 전기 유적까지 사라져버렸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유적 위에다가 원래 전각을 복구하면서 유구 파괴가 생긴 것도 아니고, 다른 용도로 건물을 신축하며 기존의 유구를 모두 폐기한 것이다.
현재 경희궁 터에는 서울특별시교육청, 기상청(일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서울복지재단 등의 공공기관과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 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등의 민간 건물이 들어서 있다.
특히 서울시는 경희궁 터가 사적으로 지적된 1980년 이후에도 경희궁 터에 서울특별시교육청(1981년), 서울시립미술관(1988년), 서울역사박물관(2002년[* 개관 기준. 준공은 1997년에 했다.]), 서울복지재단 등을 짓는 만행을 자행했고 이 과정에서 기존 경희궁 유적과 유구에 대한 발굴과 보존 조치를 거의 취하지 않아 유적지가 파괴되는 믿기 어려운 짓을 저질렀다.
1980년 드디어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했으나, 서울시는 곧바로 경희궁 터 서쪽부지를 서울특별시교육청에게 떼내주었다. 서울특별시교육청은 경희궁 터 서쪽에 청사 및 부속 건물들을 신축한 후 1981년 이전해 왔고 현재까지 사용 중에 있다.
서울특별시는 경희궁 터 한복판에 지어진 서울고등학교의 본관을 경기고등학교처럼 동문들의 압력 때문인지 철거하지 않고 있다가 1988년 개축하여 서울시립미술관을 개관했다.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이 서소문 본관으로 이전하면서, 경희궁 내 미술관은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6년 말에야 미술관 분관이 철거되었고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희궁 유적 발굴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서울시는 경희궁 터 내에 서울역사박물관 건축을 추진했다. 아직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부지에 건물을 올려 2002년 완공되었다.
1998년 9월 ~ 11월 신문로2가 1-107, 108번지에 "서울 교원복지회관 신축공사"가 진행되었다. 공사에 앞서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가 진행한 조사에서 남서쪽 지역에서 적심석 총 14기, 북쪽 끝부분 중앙에서부터 서쪽으로 지정석으로 보이는 잡석군과 적심석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석재 1기, 그리고 장대석 6기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유적의 보존도 이뤄지지 않았고 공사를 허용해 경희궁 유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서울교총빌딩이 건축되었다.
2003년 10월 신문로2가 1-335에 "서울 신문로2가 근린생활시설 신축공사"가 진행되었고,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 와편 및 전 등이 출토된 건물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역시 유적은 파괴되었고 출판사 일조각 사옥이 건축되었다.
2005년에는 사직동 9-1 일대에 사직1구역 도심재개발사업이 추진되었다. 경희궁 관련 궁장, 우물 등이 확인되었으나 산지형까지 깎아 원지형을 훼손하면서까지 아파트 건축이 진행되었고 현재 광화문풍림스페이스본 단지가 위치하고 있다. 복토보존 후 사업시행을 했다고는 하나 지형 자체가 파괴되었고, 고층 아파트가 건립되어 원형은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에 위치한 다른 공동주택 시설인 파크팰리스, 경희궁의 아침 아파트 단지는 경희궁의 궁역이 아니지만 풍림스페이스본의 경우 경희궁의 직접적인 궁역이며 유적까지 확인됐으나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그대로 공사가 진행됐다. 현재 풍림스페이스본 106동 일부, 104동 일부가 경희궁 궁역이다.
2008년 8월 ~ 12월 재단법인 한울문화재연구원에서 신문로2가 1-176번지 일원 발굴조사 진행했다. 조사결과,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문화층과 조선 전기 문화층이 중첩되어 확인되었다. 조선 전기의 유구는 건물지 1동이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문화층의 유구는 건물지 1개소와 주거지 또는 여막 등으로 추정되는 수혈 6기, 그 밖의 수혈 40여 기가 확인되었다. 역시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아산정책연구원이 건축되었다.
2009년 10월 ~ 12월 재단법인 고려문화재연구원에서 신문로2가 1-158번지 내 유적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조사결과, 유구는 건물지 1동, 구상유구 1기, 방형전 유구 1기, 축대 및 배수로 등이 조사되었다. 또한 와전류와 자기류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그러나 안내판 하나만 만들고 유적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통일교 재단 사옥이 건축되었다.
2013년 신문로2가 1-124번지 어린이집 건축 부지에서 조선전기 건물지가 출토되었으나, 완전히 파괴한 채 건물이 신축되었고 현재 현대해상어린이집이 운영중이다. 특히 현대해상은 외부에 유적이 출토되었다는 안내판을 설치하겠다고 했으나 말만 그랬을 뿐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기획안3
[기타]
- 구체적인 부분은 자료조사 후 수정보완
- 출처는 통일해서 처음부터 기재(각주 형식 미리 통일하기)
- 자료조사/자료수집 단계에서도 위키에 기재하기
(다같이 보고 공유할 수 있도록)
조사
경희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대안로에서 위치하고 있다.조선후기 왕의 피우를 위한 이궁으로 건립된 궁궐이다.사실 경희궁은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궁이라고도 한다.경흭궁은 가장 흥성하는 데 100여동의 건물을 갖추고 거대한 궁굴이었다.경희궁은 5대 궁궐 중에 가장 많은 재난을 겪으면서 대부분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유실하게 되었다.일부분 건물은 복원을 통해서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과 민접한다.
경희궁은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에서 시작하였으며 1623년에서 이궁이 되었으며 궁내에는 이색적인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건립한 후에 10여 명의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면서 왕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그러나 경희궁은 재난을 겪으면서 훼손이 가장 심하게 되었다.경희궁은 경사진 지형을 기반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건축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웅장한 규모를 자한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이다.일제 강점기에는 궁내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져 신라호탤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복원 과정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이궁은 1충 구조로 정궁 궁전의 웅장함이 없지만 부드러운 차마선우로 한국 목조건출물의 대표적인 특징을 잘 표현하였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각종 국가의식이 거행되었던 장소로 조선왕조에서는 모두 세 명의 왕은 등극 대전을 거행하였다.대신조회,사신접대,연희 등 왕실의 각종 전례행사도 이 곳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1987년에어 복원을 완성하였다.송정전의 원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운영했던 사찰로 매각되었고 현재 동국대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다.
경희궁의 편전 저정전이다.저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정무를 보고 나랏일을 논의하는 곳이었다.'저정’뜻은 ‘정사를 돕는다'이다.숙종(조선 제19대 왕) 붕어한 후에 빈전으로 하였다.(왕이나 왕비의 관재를 놓는 전각) 경사진 지형이 많기 때문에 자정전은 정전 숭정전보다 더 높은 지역에 위치한다.
태녕전은 최초에 특정한 용도가 없는 건물이었다.1744년에 영조는 태녕전이 자기의 초상을 보관하는 곳으로 삼았다.특히 주의할 만하는 것은 영조는 자신이 붕어한 뒤가 아니라 재위할 때부터 자신의 초상을 배치해 놓았는데 이것이 왕들과는 다른 점이다.이에 따르면 이 건물은 영조 시절에서 권력과 위엄을 상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생각한다.태녕전도 일제 강점기에서 해체되었으며 서울시 복원 공사를 할 때까지 재건을 할 수 있었다.
서암이다.태녕전 뒤쪽에는 괴상한 모양의 암석이 있다.암석 내부에는 '암천’이 있다고 하였고 오래전부터 경희궁의 보물이라고 불렀다.당시에는 서암도 왕암이라고 불렀으며 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화화되어 있었는데 그래서 광해군이 경희궁을 이곳에 세우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잉어가 롱먼을 뛰어오르다’-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활동
조선시대에 사람들이 남보다 뛰어나고 싶으면 과거 시험을 참석해야 한다.경희궁 매년 가을에서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활동을 거행한다.한번 급제하면 응시자가 괸직을 얻을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로 출세하기 때문에 응시자마다 가족들의 부탁을 받고 시험을 보러 간다.그 날은 축하 공연도 열리고 전통 음악과 무용 공연을 감상할 수 있고 관원과 무사의 복장을 입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화살과 무예체험 행상도 함께 즐길 수 있다. 대형 가무극은 경희궁에서 거행하곤 한다.
2022년 4월 27일
-삭제무관-
- 요약
[목차]
1. 개요
- [대략적인 위키문서 압축 (역사 등), 카카오맵/네이버맵 지도 첨부, 대표사진 첨부 등]
2. 건물소개
-[오늘날의 경희궁과 연결]
(1) 건축물 (외전, 궐내각사, 후원, 내전, 동궁, 생활기거공간)
(2) 궁궐로서 미흡한 부분
3. 역사
-[스토리텔링과 연결]
(1) ~정조
(2) 정조~
4. 오늘날의 경희궁
-[건물소개와 연결, 관람법 위주로 간략히 진행]
5. 스토리텔링
- [역사랑 연결되면 링크연결해놓고 밑에 한 번에 정리]
- 이괄의 난과 경희궁_인조의 피난
- 경복궁 복원과 경희궁_고종이 자재 가져다가 쓴 이야기
- 경성중_서울고_서울역사박물관
- 광해군_경덕궁을 건설하다
- 영조_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다
- 19세기 중엽 이후 궁궐의 지위를 상실한 경희궁
[역할분담]
박하은-개요, 건물소개(내전, 동궁, 생활기거공간)
김지현-개요, 건물소개(외전, 궐내각사, 후원)
최맑은샘-스토리텔링 3개, 역사
손유진-스토리텔링 3개, 역사
김시연-오늘날의 경희궁, (+스토리텔링 1개)
[위키 내부규칙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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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굵은 글씨 적용 ->
3. 색깔 적용 (예시) (1) 빨간색-> (2) 파란색 -> (3) 주황색 ->
4. 사진 크기 및 정렬
5. 동영상 크기 및 정렬
6. 각주 양식
7. 목차 구성(세부목차 제목, 세부목차 구성, 강조? 등)
8. 링크 연결하는 경우 :
9. 지도 연결(카카오맵, 네이버지도 등)하는 경우:
10. 인용시 그대로 인용하지 말고 2~3개 정도의 출처 혼합하여 간접인용할 것(반드시 출처 표기, 교수님이 수업때 언급하신 내용)
11. 기타 양식
-> "회의록에 위키 규칙 수립 내용 있어서, 규칙 설정할 만한 내용들 미리 선정해봤습니다. 회의시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 김시연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