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김시연
목차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인문학을 전공한 4학년인 필자도 누군가 디지털 인문학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한 마디로 딱 떨어지게 대답하기 쉽지 않다.
인문학의 범주도 고전과 현대는 명백히 다르고 또 여기에다가 디지털로 이루어진 학문이기 때문이다.
학술적인 개념의 디지털 인문학이란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활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문학의 주제를 계승하면서 연구 방법면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연구, 그리고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시도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성격의 인문학 연구를 포함한다.
순수 인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디지털 인문학은 인문지식의 사회적 확산을 돕는 길이고, 인문콘텐츠학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문화산업에 응용할 방대한 인문학 지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획득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일이다. 미국과 유럽, 심지어는 가까운 일본과 대만의 상황을 보더라도 디지털 인문학의 육성은 범인문학계(인문학+인문콘텐츠학)의 자연스러운 발전 궤도상에 있는 과제이다.[1]
이런 측면에서의 디지털 인문학 연구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을까? 김민규의 논문에 따르면, "국내외에서 디지털인문학은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과 프랑스 등 해외에서는 인프라 구축 등 디지털인문학 활성화를 위한 디지털인문학 지원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디지털인문학의 다양한 활동에 비해 정책은 다소 미흡하다. 디지털인문학에 대한 지원 사업은 있지만, 해외에서는 디지털인문학을 별도의 정책 영역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국내 디지털인문학 정책은 인문학 진흥정책의 일환으로 설정되어 있다. 인문학 진흥 정책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정책적 대응이라는 점에서 디지털인문학 지원 사업도 그 맥락 하에 있다고 하겠다. 즉 디지털인문학을 새로운 연구 경향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인문학의 사회적 효용성을 증명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국내 디지털인문학이 한층 더 진화하기 위해서 디지털인문학에 대한 담론 확대와 함께 보다 적극적인 정책 수립이 요구된다. 디지털인문학 정책의 수립을 위해서 디지털인문학의 정책적 위상 제고, 디지털인문학의 매핑, 지원 사업의 다양화, 디지털인문학 인프라의 재개념화, 별도의 조직과 재원의 확보 등이 필요하다. [2]"고 했다.
위의 두 경우처럼, 좁은 범위에서 보면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정의를 한정할 수 있으며, 그 흐름과 맥락,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개념을 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이해하고 있다.
위의 경우처럼, 디지털 인문학을 학술적인 개념으로 다룰 수도 있지만, 대중적인 범위에서, 보다 넓은 범위에서 바라보면,
디지털 인문학은 우리의 실생활에 밀접하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등하굣길 혹은 출퇴근길에 스마트폰을 통해 간간히 접하는 콘텐츠들,
웹드라마
웹툰
등을 모두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웹툰, 웹드라마, 블로그 일기, 기타 콘텐츠 등은 모두 디지털기술을 활용한 온라인 네트워크 상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은 모두 ‘이야기’ 즉 스토리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인문학은 사람에 의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웹툰은 사람에 의한 작품이다. 사람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와 그림을 접목해 생성해 낸 콘텐츠이다.
웹드라마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드라마, 영화, 연극은 대본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토대로 창작되는 작품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웹드라마와 같은 것들 또한 디지털 인문학의 한 분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평소에 온라인에서 접하는 모든 콘텐츠들을 다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을 전공한 나는 디지털 인문학을 어떻게 나의 실생활에, 그리고 미래에 녹여낼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대학생활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나의 진로는 전공과는 아예 다른 길을 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문학 전공자로서 디지털 인문학의 양상과 흐름에 대해서는 항상 파악하고 성찰하는 자세를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경우 우리가 평소에 온라인에서 접하는 모든 콘텐츠들을 다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생각하므로,
평소에 이런 콘텐츠들을 접할 때 어떤 소재를 가지고 어떤 스토리를 구성했는가,
이 콘텐츠는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어떤 맥락에서 이와 같은 콘텐츠들이 대중들에게 유행이 되었는가,
콘텐츠를 단순히 일시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콘텐츠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성찰하는 자세를 가질 것이다.
나아가 인문학적인 입장에서 디지털 인문학을 기반으로 생성된 콘텐츠의 함의와 영향력 등에 대해서 숙고하는 삶을 살 것이다.
경희궁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경희궁이란?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이다. 광해군 시대 1617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희궁의 첫 명칭은 바로 경덕궁이었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알려진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했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금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3]
경희궁의 역사
이 궁이 창건된 것은 1617년(광해군 9)으로,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 궁을 세우고자 하여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결국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인조가 즉위하였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덕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즉, 제19대 숙종은 이 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고, 승하한 것도 역시 이 궁의 융복전(隆福殿)에서였다. 제20대 경종 또한 경덕궁에서 태어났고, 제21대 영조는 여기서 승하하였다. 제22대 정조는 이 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제23대 순조가 회상전에서 승하하였으며, 제24대 헌종도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1760년(영조 36)경덕궁이던 궁명을 경희궁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원종의 시호가 경덕(敬德)이므로 음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창건 때 정전·동궁·침전·제별당·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다. 그 창건 공역은 1617년에 시작되어 4년 뒤인 1620년에 끝마쳤는데, 이 공사를 위하여 전국에서 공장(工匠)과 자재가 동원되었다. 그 뒤 1693년(숙종 19) 수리가 있었으며, 1829년(순조 29) 큰불이 나 회상전·융복전·흥정당(興政堂)·정시각·집경당·사현각 등 궁내 주요 전각의 절반 가량이 타 버렸다. 이듬해서궐영건도감(西闕營建都監)을 설치하여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였다. 1860년(철종 11) 전각의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1902년(광무 6) 일부 전각의 수리가 있었다. 이렇게 궁궐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이미 1907년 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 궁이 국유로 편입되어 1915년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내의 건물은 철거되어 없어지거나 다른 곳에 이전되기도 하였고, 궁역(宮域)도 주변에 각종 관사 등이 들어서면서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사용되면서 주변 대지 일부가 매각되어 궁터가 더욱 줄어들었다.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를 서초구로 이전하고 전체 부지는 민간기업에 매각하였다가, 1984년 이곳에 시민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여 이듬해 궁터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으며,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
경희궁건물의 배치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건물의 배치가 외전과 내전이 좌우에 나란히 놓이고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 있어, 정궁(正宮)인 경복궁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즉, 경복궁은 남향으로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구성되었는데 그것과 다르며, 또한 궁의 정문이 바른쪽 모퉁이에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이런 점은 처음 이궁으로 지어졌던 창덕궁에서도 보이는 현상으로, 의도적으로 경복궁보다는 격식을 덜 차린 결과로 보인다. 각 건물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외전에 있어서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은 궁의 서쪽에 동향하였고, 주위는 행각으로 둘러싸고 사방에 문을 두었다.숭정전 뒤에는 후전인 자정전(資政殿)이 있고, 주변에 수어소(守御所)인 태령전(泰寧殿)이 있다. 숭정전의 오른편, 즉 북쪽으로는 왕이 신료(臣僚)들을 접견하고 강연(講筵)을 여는 곳인 흥정당이 있고, 주변에 왕이 독서하는 곳으로 존현각(尊賢閣)·석음각(惜陰閣)이 있다. 이상 외전을 구성하는 중심 전각들의 우편에 내전이 있는데, 그 정침이 회상전이다. 그 서쪽에 융복전, 동서에 별실이 있고 주변에 연못과 죽정(竹亭)이 있다. 융복전의 동편에는 대비를 모시는 장락전(長樂殿)이 있고, 주변에 용비(龍飛)·봉상(鳳翔)이라는 누각과 연못이 있으며, 동편에 연회장소인 광명전(光明殿)이 있다. 궁의 외부 출입문은 모두 다섯인데, 정문은 동북 모서리에 있는 흥화문(興化門)이다. 결국, 경희궁은 정문이 동북 모서리에 있어서, 정문을 들어서서 내전 앞을 지나 서쪽 끝의 외전 정전 일곽에 도달하게 되는 특수한 배치와 구성을 보여 준다. 경희궁에는 수많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궁 자리에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지고, 일부는 다른 곳에 이건되어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우선, 현존하는 건물을 보면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인 흥화문,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黃鶴亭) 등이 있다. 숭정전은 1926년 조계사(曹溪寺)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을 한 주심포양식의 건물이다. 1618년에 창건된 이래 건물 자체가 재해를 입은 일은 없었으므로,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간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포는 외부 이출목이고, 내부는 양봉(梁奉)형식으로 보를 받치고 있으며, 주칸에 화반이 있어 장여를 받쳤다. 흥화문은 역시 1618년에 세워진 건물로 창건 때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왔으나, 1932년에 이전되어 일본인 절인 박문사(博文寺)의 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경희궁복원계획의 일환으로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 기와지붕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정문이 모두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하여 이 건물만은 단층으로 되었는데, 그 이유는 궁의 창건 때 이 궁이 피우처로 마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학정은 1890년(고종 27) 회상전의 북쪽에 지었던 정자로, 1923년 민간인에 매각되었다가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공원 뒤편에 옮겨져 있다. 본래 무인들의 궁술 연습장으로 세운 건물인데 갑오경장 이래 궁술이 폐지되는 바람에 민간에서 유기화(遊技化)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궁내에 세웠던 건물이다. 이 밖에 경희궁의 중요한 건물로는 회상전·융복전·집경당·흥정당 등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자취를 잃었는데,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을 통하여 그 규모만을 살펴보면, 대내(大內)의 정전인 회상전은 정면 7칸의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창경궁의 통명전과 같이 지붕에 용마루를 두지 않은 건물이었다. 융복전은 정면 6칸으로, 왼쪽에 건물이 연접되어 ㄱ자형 평면을 이루었다. 그리고 집경당·흥정당은 각각 정면 5칸, 정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두 건물 모두 일종의 누각과 같이 건물 일부에 누하주(樓下柱)가 있고 높은 계단을 갖추었다. 현재 궁터에는 용비천(龍飛泉)이라는 샘터가 남아 있고, 숭정전 등 주요 전각의 기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지역은 한동안 학교로 이용되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주변의 조경이 변모되고 지하 방공시설이 구축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옛 건물의 기단이 일부 남아 있고 전체적으로 궁궐의 지형이 잘 남아 있으며,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아직도 궁궐의 자취를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경희궁은 일명 ‘야주개 대궐[夜照峴大闕]’로 불렸는데, 그것은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고 해서 이 일대를 야주개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4]
경희궁의 오늘날
-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떼어갔었습니다. 광복 이후 박문사가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남아있었습니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습니다.[5]
- 금천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들어서면 궁내의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흐르던 금천에 놓여진 돌다리입니다.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는 것입니다. 1619년(광해군 11)에 건립되었던 것을 일제가 매몰시켰지만, 서울시에서는 2001년 발굴을 통하여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습니다.[6]
- 숭정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입니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숭정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습니다.[7]
- 자정전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입니다.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습니다. 1617~20년(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훼손하였습니다. 서울시에서는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자리에 <서궐도안>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습니다. 자정전 서쪽에는 발굴을 통하여 행랑의 바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돌이 발견되었기에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여 복원하였습니다.[8]
- 태령전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던 태령전을 서울시에서는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습니다.[9]
- 서암
경희궁 터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이용한 시설들도 많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암과 영렬천만이 그 흔적을 말해줍니다.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습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습니다.[10]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환관(내시)
- 어떤 사람이 환관(내시)이 될 수 있었을까?
환관, 즉 내시가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은 바로 거세한 남성이다. 환관(내시)의 경우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파악할 수 있다. 고려시대 때 환관은 궁에서 일하는 거세한 남성이라면, 조선시대 때 내시는 국왕을 측근에서 시종하는 남성을 의미한다. 다만 고려시대 말기에 환관들이 내시직에 많이 진출하면서 이후에는 의미 차이가 많이 없어졌다.
선천적 환자(고자를 의미)가 아닌 이상 음경이나 고환이 있었는데 없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 대한 자세한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논문[11]을 보면 고려시대의 환자(고자)는 크게 네 가지의 경우에서 선발했다고 한다. 첫째, 특수사정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거세한 자이다. 둘째, 우연적 사고로 인해 환자가 된 자이다. 셋째, 선천적인 환자인 자이다. 넷째, 스스로 자르거나 남의 종용으로 자른 자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는 스스로 거세했다는 사료가 없으며, 조선 건국 직전에 명나라에서 고려 조정에 강제로 거세해 명나라로 환관을 차출하는 방식을 금하라는 명령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때는 후천적으로 거세를 한 자보다는 선천적으로 혹은 사고로 환자가 된 자를 환관으로 임명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왜 환관(내시)는 반드시 환자(고자)여야 했을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황제의 후궁을 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음과 양의 관점의 이유도 있다. 음은 여성성을 상징하고 양은 남성성을 상징한다. 황제는 강력한 양의 기운을 가졌으므로, 음과 양의 조화를 위해 황제를 보좌하는 자들은 음의 기운을 충만하게 가지고 있도록 했던 것이다.
- 환관들은 결혼을 하여 가족을 꾸릴 수 있었을까?
한 논문[12]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환관 2명 중에 1명 이상은 혼인을 했다고 한다. 물론 환자(고자)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부부생활은 어려웠으나, 그럼에도 혼인을 했던 이유는 환관이 궁궐업무를 볼 때 집안일을 할 집안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연려실기술 별집 제 10권 <관직전고>의 <환관>에 따르면, 환관은 선천적 환자를 데려다 양자를 삼기도 했는데 이 경우 환자는 친족과 연을 끊어야 했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 1.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사이트 첫 화면에 자동으로 영상이 재생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현재 첫 화면에는 영상이 아닌 사진이 슬라이드 되어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 부분에 사진 대신에 국채보상운동을 묘사한 영상이나 남아있는 영상 등을 제시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꼭 영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첫 페이지가 조금 더 접속자들의 흥미를 유발할 만한 콘텐츠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 2.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검색을 할 때 이미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현재는 NO IMAGE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접속자의 입장에서NO IMAGE라는 문구를 봤을 때는 사이트의 완성도가 떨어져 보이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사진과 같은 시각적 자료가 현재 없다고 할지라도 묘사한 이미지나 일러스트 등을 탑재하는 것이 사이트의 완성도에 좋을 것 같다.
- 3. 아카이브 설명이 조금 더 구체적이었으면 좋겠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살펴봤을 때 ‘아카이브 검색’이 정확히 무엇을 검색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안내가 부족한 것 같다. 물론 사이트를 잘 살펴보면 관련한 설명을 찾을 수 있지만, 이 부분은 접속자가 주의를 기울여서 찾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조금 더 명확하고 편리하게 설명을 배치하면 좋을 것 같다.
- 4. 과거와 달리 현재 대부분의 학생들은 한문에 익숙하지 않다. 물론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를 감안하여 원문과 해석본을 동시에 탑재하고 있다. 하지만 원문을 하나하나 해석하기 위해서는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원문 한자에 마우스 커서를 가져다 대면 한글로 변환하여 보여주거나, 해석된 한글에 마우스 커서를 가져다 대면 원문한자를 보여주는 식으로 비교할 수 있도록 개선하면 좋을 것 같다.
- 5. 사이트의 글자들이 지나치게 큰 감이 있다. 이 사이트를 모바일로 접속하면 글씨가 크게 써져 있는 것이 편리할 수 있으나, 노트북이나 컴퓨터로 접속할 때는 과한 측면이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의 활용은 대부분 모바일보다는 컴퓨터를 통해 접속할 것 같기 때문에 글씨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각주
- ↑ 김현, “디지털 인문학_인문학과 문화콘텐츠의 상생 구도에 관한 구상”, 2013, 4쪽
- ↑ 김민규, “국내 디지털인문학 정책 수립을 위한 제언”, 2018, 3쪽
- ↑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 ↑ 경희궁 [慶熙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 ↑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 ↑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 ↑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 ↑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 ↑ 경희궁전각소개_경희궁_서울역사박물관
- ↑ 이우철. "고려시대의 환관에 대하여." 사학연구 1 (1958): 18-44.
- ↑ 신명호. "조선시대 환관가족의 구성과 기능." 古文書硏究 26 (2005): 123-142.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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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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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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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