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 조사 (2019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onthedh
이동: 둘러보기, 검색
(표석 목록)
(표석 목록)
9번째 줄: 9번째 줄:
 
| 광진구 || [[뚝섬 나루터]] || 이곳은 강남 송파와 청숫골을 잇던 나루터 || 자양동 126-1(도로명주소 없음) || 1989 || 김지선
 
| 광진구 || [[뚝섬 나루터]] || 이곳은 강남 송파와 청숫골을 잇던 나루터 || 자양동 126-1(도로명주소 없음) || 1989 || 김지선
 
|-
 
|-
 +
| 금천구 || [[강희맹 살던 곳]] || 조선 초 문인화가로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1424~1483)이 살면서 농업 전반에 관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저술하던 곳 || 독산로32나길 36(시흥동 807-14) || 1996 || 
 +
|-
 +
| 금천구 || [[시흥향교 터]] || 조선시대에 공자(孔子)등 성현을 봉안하고 유생들을 교육하던 곳으로 1944년 일제가 과천향교(果川鄕校)에 통합시켰음 || 금하로 745(시흥동262-6) || 1996 || 
 +
|-
 +
| 금천구 || [[흥선대원군 별장 터]] ||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지은 별장 터. 현재는 철거되었으나 1985년까지 서울 대가(大家)의 전형적인 정원과 담장이 특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했었다. || 탑골로3길 50(시흥동 220-2) || 2000 || 장동룡
 +
|-
 +
| 동대문 || [[성동역 터]] || 성동역은 일제강점기 1939년 7월 25일 경춘철도회사가 부설한 사설철도(私設鐵道)인 경춘선의 출발역이었다. 이 역에는 30여 년간 경기도북부와 강원도 일대의 임산물, 농산물이 많이 운반되었다. 광복 후 경춘선 사설철도는 국유화 되었으며 1970년 청량리역으로 이전하자 헐렸다. || 왕산로 109(제기동 892-71) || 2004 || 김지선
 +
|-
 +
| 동대문 || [[전영택 집터 ]] || 목사이고 소설가이며 한국 신문학 운동의 개척자인 늘봄 전영택(1894~1968)이 살던 곳이다. 그는 1919년 최초 문예잡지 <창조>의 동인이며 작품으로는 소설 <화수분(1925년)>,<소(1964년)>,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등이 있다. || 이문로21길 7(이문동 327-15) || 2009 || 장동룡
 +
|-
 +
| 동대문 || [[휘경원 터]] || 휘경원은 조선 23대 임금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 박씨(1770~1822)의 무덤이다. 1823년(순조 23) 조성되었다가 1863년(철종 14)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옮겼다. || 망우로18나길 20(휘경동 286-66) || 2001 || 장동룡
 +
|-
 +
| 동작구 || [[노강서원 터]] || 노강서원은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다가 혹독한 국문(鞠問)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사망한 박태보(朴泰輔, 1654~1689)를 배향한 서원으로 1695년(숙종 21) 그가 사망한 장소 인근에 건립되었다.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으며 1969년 경기도 의정부시에 중건되었다. ||  노량진로23가길 23(본동 494) || 2000 || 장동룡
 +
|-
 +
| 동작구 || [[노량진 터]] || 노량진은 용산과 마주한 한강 남쪽 기슭의 나루이다. 서울과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잇는 수상 교통의 요지였으며,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철교가 놓인 곳이기도 하다. || 노량진로 247(본동 258-1) || 1989 || 김지선
 +
|-
 +
| 동작구 || [[사충서원 터]] || 사충서원은 경종을 폐하고 연잉군(후의 영조)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1722년(경종 2) 사형된 노론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배향한 서원으로 1725년(영조 1) 건립되었다. 1927년 보광동으로 옮겨졌으나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으며, 1968년 경기도 하남시에 중건되었다. || 노량진로 135(노량진동 60-19) || 1993 ||
 +
|-
 +
| 동작구 || [[장승백이]] || 장승배기는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헌륭원에 참배하러 가면서 쉬었던 곳이다. 당시 이곳은 인가도 없고 행인마저 적었는데 정조가 장승을 만들어 세우라고 지시한 이후 장승배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 장승배기로 94(노량진동 310-150) || 1987 ||
 +
|-
 +
| 동작구 || [[주교사 터]] || 주교사는 임금이 행차할 때 한강에 부교(浮橋)를 놓는 일과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조운(漕運)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정조 13년(1789)에 설치되었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후 업무가 금위영(禁衛營)에 이관되었다. || 노량진로32길 10(본동10-23) || 2002 ||
 +
|-
 +
| 마포구 || [[공세청 터]] || 공세청은 조선시대에 서강나루로 들어오는 선박에서 세금을 거두던 관청이다. 서해로 통하는 길목으로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 수송선의 집결지였던 서강나루에는 공세청과 함께 점검청(點檢廳), 광흥창(廣興倉)도 있었다. || 창전로 10(신정동 145-7) || 2001 || 장동룡
 +
|-
 +
| 마포구 || [[담담정 터]] ||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였으나 세조 때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별장이 되었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시회(詩會)를 베풀었다. 신숙주는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세조는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그 후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麻浦莊)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 마포대로 4길 122(마포동 419-13) || 2003 || 장동룡
 +
|-
 +
| 마포구 || [[무쇠막 터]] || 무쇠막은 정부에 무쇠솥이나 농기구를 만들어 바친 철공장이 모여 있던 곳이다. 일찍부터 무쇠막 또는 무수막 터로 알려졌는데, 무수막에서 수철(水鐵)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수철리에서 신수동이라는 동 이름이 유래하였다. || 독막로 189(신수동 112-1) || 2001 ||
 +
|-
 +
| 마포구 || [[박세채정승 살던 곳]] || 박세채(1631~1695)는 조선후기 숙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관리이며, 유학자로 소론(少論)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사회규범으로써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에 전념하여 '예학의 대가'라고 칭하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의 아호인 현석(玄石)을 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 신수로3길 23(현석동 220) || 2003 ||
 +
|-
 +
| 마포구 || [[삼개포구]] || 황해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던 물화(物貨) 집산(集散)의 포구 || 토정동 136-1(도로명주소 없음) || 1989 || 김지선
 +
|-
 +
| 마포구 || [[서강 나루터]] || 삼개 나루(용호,마호,서호)의 하나. 삼남 지방과 서해안으로부터 곡물과 어물이 들어오던 나루터. || 창전로 10(신정동 145-7) || 1994 || 김지선
 +
|-
 +
| 마포구 || [[서활인서 터]] || 전염병자를 격리 치료하던 의료기관이 있었던 곳 || 마포대로 247(아현동 267-1) || 1987 || 장동룡
 +
|-
 +
| 마포구 || [[양화진 나루터]] || 서울과 제물포, 강화 방면을 잇던 나루터 || 합정동 353-4(도로명주소 없음) || 1989 || 김지선
 +
|-
 +
| 마포구 || [[토정 터]] || 조선중기 저명한 역학자(易學者)였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집터. || 토정길32길 11(토정동 138) || 1992 || 장동룡
 +
|-
 +
| 서대문 || [[복주우물]] || 복주우물은 복주 즉, 귀인(貴人)이 이용하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이 우물 뒤쪽의 금화산은 공기와 물이 맑아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다. 그래서 복수산(福壽山)이라고도 하였는데 후에 음이 와전되어 복주산으로 불렸다. 이에 따라 산 아랫마을을 복주산동, 그 마을의 우물을 복주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 북아현로140(북아현동 1-1616) || 2001 || 김지선
 +
|-
 +
| 서대문 || [[연희궁 터·서잠실 터]] || 연희궁은 조선 초기에 지은 이궁(離宮)의 하나이다. 1420년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해 고쳐지었으며, 세종 자신도 1426년에 이 곳에 잠시 머물렀다. 또한 세종은 이 궁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하였으며, 그 뒤 세조는 서잠실(西蠶室)이라고 하였다. 1505년에는 연산군이 이를 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 연세로 50(신촌동 134) || 2002 || 장동룡
 +
|-
 +
| 서대문 || [[의령원 터]] || 의령원은 영조의 세손 의소(懿昭)의 묘원(墓園)이다. 의소는 영조 26년(1750) 사도세자의 장자로 태어나 세손으로 책봉되고 다음 해 죽어 이곳에 장사되었다. 세손이었기에 장례 절차며 치장에 격식을 갖추어 속칭 '애기능'이라 불렀으며 1948년 서삼릉으로 옮겨갔다. || 북아현로11가길 7(북아현동 190-1) || 2001 || 장동룡
 +
|-
 +
| 서대문 || [[초리우물 터]] || 초리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가우며, 물이 꼬리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 넘쳐서 아무리 추운 한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달고 차가운 물이 염색하기에 좋아서 염색을 하는 사람들이 이 근처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 부근 마을을 미정동(尾井洞)이라고 했던 것도 이 우물 때문이다. || 통일로 97(미근동 209) || 2001 || 김지선
 +
|-
 +
| 서대문 || [[홍제교 터]] || 조선시대 도성에서 의주로 통하는 길목인 홍제천에 놓였던 돌다리터. 일명 서석게다리 || 통일로 483(홍은동 217-27) || 1997 ||
 +
|-
 +
| 서대문 || [[홍제원 터]] || 여기서 약 50m 골목 안 홍제동 138번지 일원은 홍제원(1394~1895) 터 || 통일로 416(홍제동 137-25) || 1987 ||
 +
|-
 +
| 서초구 || [[동재기 나루터]] || 수원 이남 삼남(충청,영남,호남) 지방과 서울(漢陽)을 이어주던 나루터 || 신반포로11길 40(반포동 115-5) || 1988 || 김지선
 +
 +
 
|}
 
|}
  

2019년 4월 20일 (토) 02:16 판

표석 목록

자치구 표석명 표석문안 주소 설치년도 조사자
광진구 광나루 터 서울과 강원지방을 이어주던 나루터, 원래 너븐나루 아차산로78길 90(광장동 112) 1988 김지선
광진구 낙천정 터 태종(太宗)이 왕위를 세종(世宗)에게 물려주고 지은 '이궁(離宮) 낙천정(樂天亭)'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세종은 태종과 의논하여 대마도(對馬島) 정벌군을 파병하였고, 이기고 돌아온 정벌군의 환영식을 베풀었다. 뚝섬로 58길 101(자양동 671) 2009
광진구 뚝섬 나루터 이곳은 강남 송파와 청숫골을 잇던 나루터 자양동 126-1(도로명주소 없음) 1989 김지선
금천구 강희맹 살던 곳 조선 초 문인화가로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1424~1483)이 살면서 농업 전반에 관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저술하던 곳 독산로32나길 36(시흥동 807-14) 1996
금천구 시흥향교 터 조선시대에 공자(孔子)등 성현을 봉안하고 유생들을 교육하던 곳으로 1944년 일제가 과천향교(果川鄕校)에 통합시켰음 금하로 745(시흥동262-6) 1996
금천구 흥선대원군 별장 터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지은 별장 터. 현재는 철거되었으나 1985년까지 서울 대가(大家)의 전형적인 정원과 담장이 특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했었다. 탑골로3길 50(시흥동 220-2) 2000 장동룡
동대문 성동역 터 성동역은 일제강점기 1939년 7월 25일 경춘철도회사가 부설한 사설철도(私設鐵道)인 경춘선의 출발역이었다. 이 역에는 30여 년간 경기도북부와 강원도 일대의 임산물, 농산물이 많이 운반되었다. 광복 후 경춘선 사설철도는 국유화 되었으며 1970년 청량리역으로 이전하자 헐렸다. 왕산로 109(제기동 892-71) 2004 김지선
동대문 전영택 집터 목사이고 소설가이며 한국 신문학 운동의 개척자인 늘봄 전영택(1894~1968)이 살던 곳이다. 그는 1919년 최초 문예잡지 <창조>의 동인이며 작품으로는 소설 <화수분(1925년)>,<소(1964년)>,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등이 있다. 이문로21길 7(이문동 327-15) 2009 장동룡
동대문 휘경원 터 휘경원은 조선 23대 임금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 박씨(1770~1822)의 무덤이다. 1823년(순조 23) 조성되었다가 1863년(철종 14)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옮겼다. 망우로18나길 20(휘경동 286-66) 2001 장동룡
동작구 노강서원 터 노강서원은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다가 혹독한 국문(鞠問)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사망한 박태보(朴泰輔, 1654~1689)를 배향한 서원으로 1695년(숙종 21) 그가 사망한 장소 인근에 건립되었다.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으며 1969년 경기도 의정부시에 중건되었다. 노량진로23가길 23(본동 494) 2000 장동룡
동작구 노량진 터 노량진은 용산과 마주한 한강 남쪽 기슭의 나루이다. 서울과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잇는 수상 교통의 요지였으며,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철교가 놓인 곳이기도 하다. 노량진로 247(본동 258-1) 1989 김지선
동작구 사충서원 터 사충서원은 경종을 폐하고 연잉군(후의 영조)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1722년(경종 2) 사형된 노론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배향한 서원으로 1725년(영조 1) 건립되었다. 1927년 보광동으로 옮겨졌으나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으며, 1968년 경기도 하남시에 중건되었다. 노량진로 135(노량진동 60-19) 1993
동작구 장승백이 장승배기는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헌륭원에 참배하러 가면서 쉬었던 곳이다. 당시 이곳은 인가도 없고 행인마저 적었는데 정조가 장승을 만들어 세우라고 지시한 이후 장승배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장승배기로 94(노량진동 310-150) 1987
동작구 주교사 터 주교사는 임금이 행차할 때 한강에 부교(浮橋)를 놓는 일과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조운(漕運)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정조 13년(1789)에 설치되었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후 업무가 금위영(禁衛營)에 이관되었다. 노량진로32길 10(본동10-23) 2002
마포구 공세청 터 공세청은 조선시대에 서강나루로 들어오는 선박에서 세금을 거두던 관청이다. 서해로 통하는 길목으로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 수송선의 집결지였던 서강나루에는 공세청과 함께 점검청(點檢廳), 광흥창(廣興倉)도 있었다. 창전로 10(신정동 145-7) 2001 장동룡
마포구 담담정 터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였으나 세조 때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별장이 되었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시회(詩會)를 베풀었다. 신숙주는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세조는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그 후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麻浦莊)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마포대로 4길 122(마포동 419-13) 2003 장동룡
마포구 무쇠막 터 무쇠막은 정부에 무쇠솥이나 농기구를 만들어 바친 철공장이 모여 있던 곳이다. 일찍부터 무쇠막 또는 무수막 터로 알려졌는데, 무수막에서 수철(水鐵)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수철리에서 신수동이라는 동 이름이 유래하였다. 독막로 189(신수동 112-1) 2001
마포구 박세채정승 살던 곳 박세채(1631~1695)는 조선후기 숙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관리이며, 유학자로 소론(少論)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사회규범으로써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에 전념하여 '예학의 대가'라고 칭하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의 아호인 현석(玄石)을 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신수로3길 23(현석동 220) 2003
마포구 삼개포구 황해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던 물화(物貨) 집산(集散)의 포구 토정동 136-1(도로명주소 없음) 1989 김지선
마포구 서강 나루터 삼개 나루(용호,마호,서호)의 하나. 삼남 지방과 서해안으로부터 곡물과 어물이 들어오던 나루터. 창전로 10(신정동 145-7) 1994 김지선
마포구 서활인서 터 전염병자를 격리 치료하던 의료기관이 있었던 곳 마포대로 247(아현동 267-1) 1987 장동룡
마포구 양화진 나루터 서울과 제물포, 강화 방면을 잇던 나루터 합정동 353-4(도로명주소 없음) 1989 김지선
마포구 토정 터 조선중기 저명한 역학자(易學者)였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집터. 토정길32길 11(토정동 138) 1992 장동룡
서대문 복주우물 복주우물은 복주 즉, 귀인(貴人)이 이용하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이 우물 뒤쪽의 금화산은 공기와 물이 맑아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다. 그래서 복수산(福壽山)이라고도 하였는데 후에 음이 와전되어 복주산으로 불렸다. 이에 따라 산 아랫마을을 복주산동, 그 마을의 우물을 복주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북아현로140(북아현동 1-1616) 2001 김지선
서대문 연희궁 터·서잠실 터 연희궁은 조선 초기에 지은 이궁(離宮)의 하나이다. 1420년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해 고쳐지었으며, 세종 자신도 1426년에 이 곳에 잠시 머물렀다. 또한 세종은 이 궁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하였으며, 그 뒤 세조는 서잠실(西蠶室)이라고 하였다. 1505년에는 연산군이 이를 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연세로 50(신촌동 134) 2002 장동룡
서대문 의령원 터 의령원은 영조의 세손 의소(懿昭)의 묘원(墓園)이다. 의소는 영조 26년(1750) 사도세자의 장자로 태어나 세손으로 책봉되고 다음 해 죽어 이곳에 장사되었다. 세손이었기에 장례 절차며 치장에 격식을 갖추어 속칭 '애기능'이라 불렀으며 1948년 서삼릉으로 옮겨갔다. 북아현로11가길 7(북아현동 190-1) 2001 장동룡
서대문 초리우물 터 초리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가우며, 물이 꼬리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 넘쳐서 아무리 추운 한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달고 차가운 물이 염색하기에 좋아서 염색을 하는 사람들이 이 근처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 부근 마을을 미정동(尾井洞)이라고 했던 것도 이 우물 때문이다. 통일로 97(미근동 209) 2001 김지선
서대문 홍제교 터 조선시대 도성에서 의주로 통하는 길목인 홍제천에 놓였던 돌다리터. 일명 서석게다리 통일로 483(홍은동 217-27) 1997
서대문 홍제원 터 여기서 약 50m 골목 안 홍제동 138번지 일원은 홍제원(1394~1895) 터 통일로 416(홍제동 137-25) 1987
서초구 동재기 나루터 수원 이남 삼남(충청,영남,호남) 지방과 서울(漢陽)을 이어주던 나루터 신반포로11길 40(반포동 115-5) 1988 김지선


표석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