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U정다연
창경궁 개괄
창경궁 소실과 재건의 역사
- 창건 시 창경궁 내전에는 정전인 통명전(通明殿) 외에 정희왕후(貞熹王后)를 위한 수녕전(壽寧殿), 소혜왕후(昭惠王后)를 위한 경춘전(景春殿), 안순왕후(安順王后)를 위한 환경전(歡慶殿)이 마련되어 있었다. 궁궐이 미처 완성되기 전에 정희왕후가 사망하면서 수녕전은 주인을 잃게 되었고 이 건물은 곧 사라졌다. 수녕전의 남쪽에는 주로 왕실 가족들이 연회를 열던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다. 1486년(성종 17) 인양전에서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인혜대비(仁惠大妃)가 잔치를 열 때 참석자가 100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이곳에서는 자주 활쏘기를 했고 가면을 쓴 사람들이 악귀를 쫓는 놀이를 하는 나희(儺戱)가 벌어졌다(『성종실록』 17년 10월 16일).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창경궁[1]은 1616년(광해군 8)에 옛 모습으로 복구되었다([1]). 이때 궁궐이 동향인 점과 문정전이 네모기둥으로 지어진 점을 두고 이를 바꾸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창건 시의 의도를 존중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두었다. 이때 인양전도 지어졌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내전 대부분이 불에 탔다. 복구는 1633년(인조 11)에 있었는데, 인왕산 아래 지었던 인경궁 건물을 철거해서 그 자재를 이용하여 지었다. 이때 인양전은 복구되지 않고 대신 그 자리에는 함인정(函仁亭)이 지어졌다.
정조는 즉위하던 해에 통명전 북쪽 언덕 위에 자경전(慈慶殿)을 세웠다. 이 건물은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를 위해서 지은 것이며 건물 맞은편으로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바라다 보였다.
1830년(순조 30)에도 내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복구는 [2]에 이루어졌으며 현재의 내전 건물은 이때 지어진 것이다. 왕이 공부하는 건물인 숭문당(崇文堂)도 이때 다시 지어졌다.
19세기 말까지 전각이 잘 유지되던 창경궁 https://map.naver.com/v5/entry/place/11571740?c=14136923.2211688,4520191.7332654,15,0,0,0,dh&placePath=%3Fentry=plt%26from=nx은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에 의해 크게 훼철되었다. 1909년(융희 3)에는 춘당대 앞쪽에 서양식 건물 형태로 식물원이 들어섰으며 뒤를 이어 진기한 동물을 전시하는 동물사(動物舍)가 들어섰다. 이후에 창경궁은 시민에게 개방되어 공원이 되었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이 사이에 자경전을 비롯해서 문정전 등 많은 전각이 헐리고 통명전을 비롯한 내전 주변의 행각들도 모두 사라졌다. 1989년 과천에 서울대공원을 만들면서 창경원의 동물들을 옮겼고 이를 계기로 창경궁을 제 모습으로 복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경내를 가득 메우던 벚나무를 제거하고 소나무 등 전통 수종을 심었으며 문정전이 복구되고 자경전 곁에 있었던 일본풍의 벽돌 건물들도 철거하였다.
창경궁 전각 소개 간단히
창경궁 건물과 역사
- 정조와 사도세자
- 인현왕후
- 대장금
창경원
각주
- ↑ 『광해군일기』8년 8월 4일
- ↑ 1834년(순조 34)
연습
이름 | 시대 | 저서 |
---|---|---|
좌구명 | 주 | 국어(國語) |
공자 | 춘추시대 | 춘추(春秋) |
사마천 | 전한 | 사기(史記) |
반고 | 후한 | 한서(漢書) |
구분 | 목록 | 한자 |
---|---|---|
본기 | 오제본기 | 五帝本紀 |
하제본기 | 夏帝本紀 | |
은본기 | 殷本紀 | |
표 | 10권 | |
서 | 8권 | |
세가 | 30권 | |
열전 | 70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