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U이나영
개요
이름 | 시대 | 저서 |
---|---|---|
한자 | 한문 | 가나다 |
좌구명 | 주 | 국어(國語) |
공자 | 춘추시대 | 춘추(春秋) |
사마천 | 전한 | 사기(史記) |
반고 | 후한 | 한서(漢書) |
궁궐 | 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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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창덕궁의 정궁 지위
- 경복궁의 동편에 있으며 도성 전체로 보면 중앙의 약간 북쪽에 위치한다. 조선초기 풍수가 중에는 주산인 백악(북악산)이 북서쪽에 치우쳐 있는 점을 결함으로 치고 남쪽 산인 목멱산(남산)과 마주하는 응봉(鷹峰) 아래를 명당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창덕궁이 바로 응봉 아래 궁궐이었다.
- 이런 주장은 임진왜란 이후 궁궐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창덕궁이 우선적으로 선택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 이런 주장은 임진왜란 이후 궁궐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창덕궁이 우선적으로 선택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 종묘는 창덕궁과 언덕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었다. [1] 그 때문에 왕들은 궐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종묘에 갈 수 있었다. 왕이 궐 밖으로 나가는 일은 복잡한 절차와 많은 수행 인원을 대동해야 하는 번잡한 일이었으므로 이런 점에서도 창덕궁은 편리한 점이 있었다.
- 17세기 이후 경복궁을 대신해서 창덕궁이 정궁의 역할을 맡자 공간의 부족을 곁에 있는 창경궁을 함께 사용하면서 해결했다. 그 결과 두 궁궐을 통칭해서 동궐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에 상응해서 도성 서쪽의 경희궁을 서궐(西闕)로 칭하여 조선후기의 역대 왕들은 두 궐을 오가며 정치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동궐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21년(경종 1)이며(『경종실록』 1년 11월 2일) 서궐은 1760년(영조 36)에 나타난다(『영조실록』 36년 10월 8일). 뒤에 경복궁이 중건되자 북궐(北闕)이란 호칭을 붙였다(『고종실록』 37년 3월 23일).
정도전 내부링크
각주
창덕궁의 공간
문화유산
궁문
궐내각사
외전
내전
동궁
= 낙선재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맨 좌측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 석복헌과 수강재가 연이어져 있으며, 이들 뒤편에는 화초·석물·꽃담 굴뚝 등으로 가꾸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한정당·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원래 왕의 연침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낙선재가 지어지고 이듬해에 빈의 처소를 위하여 석복헌을 짓고 수강재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 안에 사대부주택형식으로 지은 건물로는 낙선재와 연경당뿐이다.
낙선재는 헌종 13년(1847)에 왕이 왕비와 대왕대비를 위해 마련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하고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 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여사가 기거하였다. 낙선재는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석복헌과 수강재는 상당 부분이 변형되어 있다.
낙선재는 남행각에 나있는 정문인 장락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에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로 자리 잡고 그 좌측에 서행각이 남행각과 직교로 연접해 있다. 맨 좌측에 앞으로 돌출한 1칸이 주형 초석 위에 놓여 누마루가 되면서 시선을 끈다. 누마루 뒤로는 온돌방 1칸을 두고 그 우측으로 대청2칸, 온돌방 2칸, 다락방 1칸을 배열하였으며, 다락방 배면에도 흔치 않은 온돌방을 돌출되게 두었다. 2칸 대청과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어 있고,건물 뒤에는 쪽마루가 길게 깔려 있어 공간 간 이동이 편리하다. 이 건물에는 궁궐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다양한 문양의 창호들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누마루와 그 뒤 온돌방 사이의 만월문은 단연 돋보이는 백미로 누마루 공간의 위계를 읽게 한다.
구조양식은 잘 다듬은 화강석 바른 층 쌓기 한 기단 위에 방형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물익공 겹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물익공은 당초문양으로 세련되게 초각하고 보머리와 보아지도 같은 수법으로 품위 있게 장식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했다. 주간은 소로로 수장하고, 누마루의 머름대 아래에는 아름답게 초각한 낙양이 장식되어 있어 누 부분이 더욱 돋보인다. 상부가구는 몸채는 5량가, 누마루는 3량가로 가구하고 미려하게 다듬은 대량 위에 당초문양을 양각한 화려한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했다.
낙선재는 궁궐 내의 침전건축과는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사대부주택형식으로 건축되었으나, 궁궐침전형식이 응용되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이 특히 주목되며, 조선 후기 건축 장인(匠人)들의 축적된 기량을 엿볼 수 있어 건축적인 가치가 높다. 또한 조선왕가의 실제 침전으로 사용된 역사성도 중요한 건물이다.
[1]
후원 지역
기타 지역
화장실
창덕궁의 역사
세기 | 년도/사건 |
---|---|
1400년대 |
1494년(연산군 즉)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후원 꾸밈 1468년(예종 즉) 창덕궁 수강궁 중문에서 즉위 1462년(세조 8) 민가 73가구를 철거하여 후원 확장 1461년(세조 7) 각 전당들에 이름을 지어 붙임 1456년(세조 2) 사육신 사건 1412년(태종 12) 돈화문 건립 1411년(태종 11) 금천교 건립 1406년(태종 6) 후원 조성 1405년(태종 5) 조선의 이궁으로 건설 |
1500년대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에서 피난길을 떠나 의주로 파천, 경복궁과 창덕궁 등 모든 궁궐이 소실됨 |
1600년대 |
1674년(숙종 즉)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659년(현종 즉)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649년(효종 즉)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647년(인조 25) 인조반정으로 소실된 건물 중건(선정전,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등) 1636년(인조 14) 옥류천 주변에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건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의 대부분 궁궐전각들이 소실됨 1610년(광해군 2) 창덕궁 중건을 완료하여 법궁으로 삼음 |
1700년대 |
1776년(정조 즉) 2층 누각을 세워 위층에는 주합루, 아래층에는 규장각이라 함 1749년(영조 25) 대보단 중수 1724년(영조 즉)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704년(숙종 30) 후원에 대보단 건설 |
1800년대 |
1884년(고종22) 창덕궁 관물헌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남 1882년(고종20) 창덕궁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남 1863년(고종 즉)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849년(철종 즉)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833년(순조 33) 대조전, 희정당 등 소실, 1834년 재건 1803년(순조 3) 인정전 소실, 1804년에 재건 1800년(순조 즉)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
1900년대 |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1990년~1999년 대규모 복원 사업(돈화문 월대, 낙선재 일대, 진선문, 숙장문 등) 1926년(순종20) 마지막 황제 순종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 1920년(순종14) 경복궁 일부건물을 옮겨 창덕궁 건물 재건 1917년(순종11) 대 화재로 침전 건물 소실 1910년 경술국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