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M임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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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2021102760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임연주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제출 내용입니다.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생각

김현(2013)의 논문에서 정의된 바에 따르면 디지털 인문학은 ‘정보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다양한 연구, 교육활동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 바야흐로 인터넷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보력이 역설적이게도 매우 중요한 자원이자 능력으로 자리잡았다. 여기서 정보력이란 문자 그대로 ‘정보를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정보를 얼마나 능숙히 향유할 수 있는가’의 의미가 되겠다.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그야말로 정보의 바다에서 유효하며 시의적절한 정보를 찾아내는 일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가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몇 글자 입력할 줄 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쓸모있는 무언가의 발견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쓸모있는 정보란 무엇인가. 다소 추상적이고 광범위하며, 사람에 따라서는 아날로그하다고까지 느낄 수 있는 인문학은 어떻게 최신의 최신을 달리는 정보기술과 융합되는가. 사실 이는 질문 자체에 해답이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 인문학이란 워낙 광범위하므로 그에 대한 관점과 활용방식도 수백 수천 가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됐건 간에 변하지 않는 점 하나는 ‘인문학은 철저히 인간의 학문’이라는 점이다. 문학이든 철학이든 예술이든, 심지어 과학의 일부까지도, 인간의 본성과 자기표현에 대해 심구하는 수단으로써 사용 가능하다면 전부 인문학이라고 불려도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정보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 또한 자기표현이다. 인간의 두뇌는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간다. 때문에 인간은 표현의 동물이자 판단의 동물이고, 모든 생각에서 ‘나’를 제거할 수 없다. 디지털인문학은 어쩌면 이를 토대로 뻗어 나간다. 모두가 ‘나’를 부르짖고 그 표상이 숨막히도록 다채로운 매체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게 된 환경 속에서, 디지털인문학은 ‘나’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창덕궁 서술

개요

창덕궁은 조선전기 이궁[2]으로 지어졌다가 17세기 이후 250여 년 동안 법궁[3]으로 쓰인 궁궐이다.

개설

태종이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정궁이던 경복궁에 들지 않고 경복궁 동편에 새로 이궁離宮을 세워 이름을 창덕궁이라고 하였다(『태종실록』 5년 10월 25일). 역대 왕들이 다른 궁보다 이곳을 좋아하였으며 17세기 이후에는 경복궁을 대신해서 정궁으로 사용했다. 동쪽에는 담을 사이에 두고 창경궁이 있어서 창덕궁의 부족한 공간을 채워 주었다. 조선후기에는 두 궁을 합해서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도성 북쪽 응봉에서 내려오는 경사진 지형을 살려 지세에 맞추어 건물들을 지었다. 따라서 전체 건물 배치는 좌우 대칭을 피하고 크고 작은 건물과 마당들이 불규칙하면서도 서로 연속성을 갖고 이어지도록 구성하였다. 넓은 숲으로 이루어진 후원은 인공을 최소화하고 자연 상태의 언덕과 골짜기로 만들어졌으며 곳곳에 정자와 샘물이 마련되었다. 후원은 창경궁에서도 함께 이용했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의 동편에 있으며 도성 전체로 보면 중앙의 약간 북쪽에 위치한다. 조선초기 풍수가 중에는 주산인 백악(북악산)이 북서쪽에 치우쳐 있는 점을 결함으로 치고 남쪽 산인 목멱산(남산)과 마주하는 응봉鷹峰 아래를 명당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창덕궁이 바로 응봉 아래 궁궐이었다. 이런 주장은 임진왜란 이후 궁궐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창덕궁이 우선적으로 선택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종묘는 창덕궁과 언덕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왕들은 궐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종묘에 갈 수 있었다. 왕이 궐 밖으로 나가는 일은 복잡한 절차와 많은 수행 인원을 대동해야 하는 번잡한 일이었으므로 이런 점에서도 창덕궁은 편리한 점이 있었다.
17세기 이후 경복궁을 대신해서 창덕궁이 정궁의 역할을 맡자 공간의 부족을 곁에 있는 창경궁을 함께 사용하면서 해결했다. 그 결과 두 궁궐을 통칭해서 동궐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에 상응해서 도성 서쪽의 경희궁을 서궐西闕 칭하여 조선후기의 역대 왕들은 두 궐을 오가며 정치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동궐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21년경종 1이며(『경종실록』 1년 11월 2일) 서궐은 1760년영조 36에 나타난다(『영조실록』 36년 10월 8일). 뒤에 경복궁이 중건되자 북궐北闕이란 호칭을 붙였다(『고종실록』 37년 3월 23일).

변천 및 현황

이궁으로 출발한 창덕궁은 곧 건물이 비좁고 부족한 사태를 맞아 건물을 증축하고 영역을 넓혀 나갔다. 정전은 당초 정면 3칸으로 지었으나, 10여 년이 지난 1418년세종 즉위에는 5칸으로 증축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부속 전각들이 신축되었는데, 조선전기에 가장 이름난 건물은 연회를 베풀기 위해 지은 광연루廣延樓였다. 이 건물은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에 대비될 수 있는 창덕궁의 누각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 내 궁궐이 모두 소실된 후에 경복궁은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창덕궁이 가장 먼저 복구되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정전 등이 갖추어졌고 1611년광해군 3에는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이때는 복구를 통해 소실 이전 모습을 그대로 되살렸다고 전한다(『광해군일기』 3년 10월 4일).
이후 창덕궁은 잦은 화재와 재건을 거듭하였고 새로운 전각의 수요에 따라 신축되는 건물도 적지 않았다. 우선 화재에 따른 변화를 보면,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편전과 내전이 모두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이때는 인경궁의 전각들을 철거해서 그 재목을 활용했다.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光政殿 재목은 선정전宣政殿 복구에 활용했는데, 광해군대에 광정전 지붕에 청기와를 얹었기 때문에 선정전도 청기와 건물이 되었다. 1803년순조 3에는 인정전仁政殿이 불에 타 이듬해에 다시 지었다(『순조실록』 3년 12월 13일). 1834년(순조 34)에는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한 내전 대부분이 소실되어 그해에 복구하였다. 마지막 큰 화재는 1919년 내전 일곽이 불에 탄 것이며 경복궁의 전각을 철거해서 대조전, 희정당熙政堂 등을 다시 지었다. 이때 희정당은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새로운 용도에 따른 변화도 적지 않았다. 1658년효종 8에는 왕대비 처소를 새로 마련하기 위해서 만수전萬壽殿을 새로 지었는데, 동쪽에 대비전을 둔다는 전례를 깨고 인정전 서쪽의 도총부都摠府 자리에 세웠다(『효종실록』 8년 4월 2일). 만수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숙종은 만수전 별당인 춘휘전春輝殿을 개조해서 왕의 초상화를 모시는 선원전으로 사용했다. 그때까지 창덕궁 안에는 왕의 초상화를 모신 건물이 없었는데, 이때 처음 나타났다. 이것은 왕의 위상을 높이려는 숙종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조는 동궁 정당이던 시민당時敏堂이 소실된 것을 계기로 새로 동궁전을 지어 중희당重熙堂이라 이름 지었다. 중희당 주변에는 왕세자의 서고와 부속 건물이 들어섰다. 이전에 시민당이 남쪽 후미진 곳에 있었던 데 비해 중희당은 창덕궁의 중앙에 위치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정조의 의도가 엿보이는 조처였다.
헌종은 시민당 일곽이 있던 곳에 낙선재樂善齋를 지어 자신의 별당으로 삼고 그 곁에는 새로 맞은 후궁 경빈김씨慶嬪金氏가 머물 석복헌錫福軒을 지었다. 낙선재의 외관은 사대부 살림집 모습이었지만 내부는 헌종의 중국 문화 취향을 반영하여 만들었다.
후원도 크고 작은 변화가 따랐다. 인조는 후원 가장 깊은 곳에 옥류천을 개척해서 후원의 경역을 넓혔다. 1704년숙종 30에는 후원 서쪽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숙종실록』 30년 12월 21일). 임진왜란을 도운 명나라 황제의 은혜를 갚는다는 의도였는데, 청나라를 반대하는 서인들의 정치적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다. 정조는 후원 내 옛 서총대 일대에 왕실 도서와 서화 등을 보관하는 주합루宙合樓, 열고관閱古觀, 서고 등을 지어 후원을 단지 휴식처가 아니고 왕실의 유품과 서책을 보관한 곳으로 바꾸었다. 1827년순조 27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순조와 왕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벌이고 연회를 여는 장소로 연경당延慶堂을 지었고 주변에는 세자의 독서처인 의두합儀斗閤이 만들었다. 연경당은 나중에 왕의 초상화를 모시는 데 쓰였다. 이 건물들은 1865년고종 2 효명세자의 부인이며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이던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전면 개축되어 연경당은 사대부 살림집 모습으로 고쳐지고 퇴락한 의두합도 다시 지어졌다. 이 과정에서 효종이 송시열宋時烈과 담화를 나누었던 전각인 어수당魚水堂이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창덕궁은 크게 달라졌다. 진선문進善門 등 중요한 출입 시설이 사라지고 진선문 북쪽의 관청들도 철거되었다. 관람객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분이었다. 편전 주변도 건물이 철거되고 중희당도 사라졌다. 대보단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신선원전新璿源殿이 들어섰다. 아울러 관람객들이 후원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진입로도 열렸다.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창덕궁은 단지 시민들의 휴식처로 인식되어 후원 영화당暎花堂 앞으로 관람의 경계를 나타내는 담장을 새로 쌓고 자동차 도로를 설치하는 등 훼손이 이어졌다. 1979년에 와서 일차적으로 궁궐의 정비가 이루어졌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주요 전각의 복구가 추진되어 진선문과 주변 행각이 재건되고 궐내 각사도 복구되었다.

형태

1827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동궐도(東闕圖)」는 19세기의 창덕궁 전모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창덕궁은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전체 궁장의 형태나 진입 방식, 중심 전각의 배치 등은 창건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의 궁장은 경복궁처럼 네모난 형태를 취하지 않고 지형에 따른 불규칙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응봉에서 내려오는 산기슭과 남쪽의 종묘 언덕 사이 동서로 펼쳐진 좁은 평탄 지형을 이용해 궁의 중심부가 들어서 있다. 궁의 정문은 서남쪽 모서리에 치우쳐 있으며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진입 방향이 꺾이면서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 안으로 들어서고 다시 왼쪽으로 꺾여서 정전으로 향하게 된다. 남북 일직선상에 중심 전각이 놓이고 정북 방향으로 진입이 이루어진 경복궁과 대조적이다. 이처럼 정문에서 정전까지 두 차례 직각으로 꺾이는 진입 방식은 개경에 지었던 고려의 궁궐과 유사한 점이 있다. 조선시대에 만월대로 불리던 고려의 궁궐은 동남 모서리에서 시작된 진입이 한 차례 오른쪽으로 꺾여 나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통상적인 정전 영역으로 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중심 전각의 배치는 정전의 측면에 편전인 선정전이 놓이고 다시 그 동편에 침전이 놓이는 방식이다. 이것도 정전, 편전, 침전이 남북 일직선상에 놓이는 경복궁과 다르다. 정전의 바로 뒤에는 언덕이 자리 잡고 있어서 남북 일직선에 건물을 배치하기 위해서는 산을 깎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대신에 건물을 지형에 맞추어 배치한 결과이다. 진선문 안의 행각은 들어가는 쪽은 폭이 넓고 반대쪽 나가는 쪽은 폭을 좁혀서 행각이 직사각형이 아니고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행각이 직사각형을 이루지 않는 예는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 주변이나 경희궁 숭정전崇政殿 행각에서도 볼 수 있다. 직사각형 행각이 경직되고 정적인 느낌을 줄 것을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행각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미묘한 운동감을 주려고 한 것으로 풀이된다.
후원 역시 자연 지세에 맞추어 정자나 연지, 누각 등을 불규칙하게 조성해 놓았다. 창덕궁은 전체적으로 동일한 형태의 건물을 반복하지 않고, 언덕이 많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지형 안에 건물이 적절히 자리 잡도록 세심하게 고려하여 전체 궁궐 공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형태상 특징을 가진다.

창덕궁 [4] [5] [6]
구분 이름 사진
정전 인정전(仁政殿)
창덕궁 인정전.jpg
편전 선정전(宣政殿)
창덕궁 선정전.JPG
침전 대조전(大造殿)
창덕궁 대조전.jpg

관련 사건 및 일화

창덕궁의 후원은 넓었지만 정전이나 침전 구역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비좁았다. 특히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은 넓은 공간이 없었다. 그 때문에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앞에서 치르던 행사들이 규모가 축소되거나 폐지되는 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 사신이 도성에 오면 궁궐 정문 앞에서 산대를 설치하고 나희儺戱 등 유희를 펼치는 것이 관례였다. 산대는 큰 것은 길이가 20m가 넘었는데 돈화문 앞에는 이런 공간이 없었다. 1620년광해군 12 에 사신이 왔을 때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상태였기 때문에 창덕궁에서 사신을 맞게 되었는데 결국 왕은 산대를 설치하지 말도록 했고 이후로 궁궐 문 앞의 산대는 사라지게 되었다. 비슷한 사례는 궁궐 문 앞에서 하던 무과 시험에서도 볼 수 있다. 무과 시험은 말을 부리는 능력이나 활쏘기 등이 있으며 조선전기에는 광화문 앞의 육조 대로에서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돈화문 앞은 장소가 비좁아 응시자들이 충분히 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대궐 문 앞의 무과 시험은 사라지고 대신 모화관慕華館 등 다른 곳에서 치러졌다. 신문고는 조선초기 경복궁에 설치한 적이 있지만 오랫동안 폐지되었다가 1771년영조 47 에 창덕궁 진선문 앞에 다시 설치했다(『영조실록』 47년 11월 23일). 신문고가 다시 등장하자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시골에서 올라와 북을 울렸는데, 그 수가 너무 많고 대개는 사소한 개인적 일을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번잡스러워졌다. 그 때문에 북을 치는 사람을 제한하거나 함부로 북을 치면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창덕궁의 신문고를 울린 기사가 영조에서 정조 때까지 빈번하게 나오다가 이후에는 잘 나오지 않고 1827년에 마지막으로 보인다.

참고 사이트

스토리텔링_을미사변

개요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고종32년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이 경복궁景福宮에 난입하여 건청궁 옥호루 곤녕합 일대에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를 칼로 찔러 암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준비

살해계획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세부 계획이 세워진 때는 10월 3일이었고, 장소는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이었다. 그때 미우라의 참모는 시바 시로였는데,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고급 지식인이었다. 그는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의 극우 낭인 단체인 천우협과 현양사 일인들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미우라를 보좌하였다. 일본의 낭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동경제국대학 출신 등 고급 지식인들이 많았다.

그날 모의에 참여한 사람은 공사관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 濬와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으로서 평소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운 소좌 출신 오카모토 류노스케,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 그리고 공사관 무관이자 포병 중좌인 구스노세 유키히코였다. 그밖의 직원들에게는 기밀 유지를 위해 일체 알리지 않았다. 우치다 사다쓰치内田 定侈搥 일등영사도 이 모의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모의한 내용은, '첫째 시해의 범행은 일본 낭인들이 맡고, 외관 상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이 일은 청일전쟁 직후 갑오경장 때 일본 군인의 궁궐 점령을 지휘했던 오카모토에게 맡겨졌다. 둘째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들로 구성한다. 이때 낭인 자객들의 동원은 한성에서 발행하는 일본 신문 한성신보의 사장 아다치 겐조가 맡았다. 구마모토와 후쿠오카 등 규슈 출신 낭인 30여 명과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 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사사키 마사유키, 기쿠치 겐조 등의 민간인들을 동원하였다. 셋째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다. 그래서 황후 시해에 구스노세 유키히코 등이 참여한다. 넷째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미우라는 황후 시해를 위한 음모를 “여우사냥”이라고 불렀으며, 예상보다 일찍 훈련대가 해산되자 거사 일시를 10월 8일 새벽 4시로 앞당기게 된다. 그러나 바뀐 계획도 차질이 생긴다. 새벽 4시에 작전을 끝내려면 늦어도 새벽 3시까지는 흥선대원군과 낭인들이 경복궁에 진입해야 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을 떠난 때는 새벽 3시였고, 경복궁에 도착한 때는 새벽 5시가 넘었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된 때는 6시 경이었다. 그래서 많은 목격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1896년 4월 15일 고등재판소 판사 권재형이 법부에 제출한 〈권재형 보고서〉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입궐하던 날 간사한 무리를 몰아낸다는 요지의 유시를 내렸다. 《한국통사》에서는 대원군이 입궐하는 일본인들에게 “오늘의 일은 단지 왕실을 호위하는 것뿐이다. 궁중에서 폭거를 행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서기관 스기무라가 4개조 약조문을 초안하고, 10월 6일(음력 8월 18일) 오카모토가 이를 가지고 공덕리에 가서 대원군의 서약을 받았다. 주된 내용은 대원군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선인 협력자들

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교동에 유폐된 이래 불만을 품고 공덕리의 별장 아소정我笑亭에 칩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 오카모토가 대원군을 찾아 설득하였다.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최고 지휘자로 지목했다.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유길준은 민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였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으며,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편지에서 유길준은 또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 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7]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윤치호는 암살의 협력자이자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쓰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8]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군 1대대장 우범선·2대대장 이두황·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 공사관 통역관 박선, 문신 구연수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이 민비 시신을 소각하는 걸 도왔다.

한편 1895년고종 32년 7월 박영효는 별도로 왕비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개화 이후로 고종은 밖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고 안으로는 군국기무처가 마음대로 하여 한 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명성황후는 이를 분하게 여겨 점차로 군권軍權을 회복하기를 계획하여 러시아와 결탁하니, 박영효는 이를 우려하였다. 명성황후는 군국기무처의 일부 급진개화파가 독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박영효는 단독으로 계략을 세워 왕비 암살을 계획하였다.

박영효는 왕후의 권모와 계략을 두려워 하여 암살을 감행하지 않으면 화근을 근절할 수 없다 생각하고, 1895년 7월 마침내 날짜를 잡아 계책을 정하고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그는 유길준이 자기와 친근하다고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그런데 유길준은 바로 박영효의 왕비암살 계획을 임금에게 밀고했다. 박영효는 유길준에 의해 일이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바꿔 입고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을 빠져 나와 용산에서 기선을 타고 도주하였다. 그의 일당 신응희, 이규완 등도 따라 도주하였다.[9]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음모를 폭로한 유길준은 그무렵 따로 대원군과 이준용의 왕비 암살 모의에 가담한 상태였다.


진행

궁궐 진입

오카모토가 이끄는 일본인 낭인들이 공덕리에 도착한 때는 자정 쯤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이 교여를 타고 떠난 때는 새벽 3시 경이었다. 대원군은 그들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담을 넘어 가서 별장 경리警吏를 모두 포박하여 가두고 옷을 빼앗아 일본인 순사들이 덧입었는데, 조선군으로 위장하려 함이었다.

일행이 서대문에 이르렀을 때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 제2대대와 합류했다. 그들은 그때까지는 황후를 시해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잠시 뒤에 집결장소를 잘못 알아 엉뚱한 곳으로 갔던 140여 명의 일본 수비대 제1중대가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때 경복궁에서는 일본 수비대 제3중대가 광화문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수비대 제2중대장은 훈련대 제2대대를 인솔하고 춘생문(경복궁 동북문) 부근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새벽 2시경부터 미리 와서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다가 광화문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사방에서 궁궐 담을 넘고 외전의 근정전 일원을 지나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 쪽으로 돌진했다.[10]

새벽 2시 경에 별군관에게 고종의 호위경관 2명이 달려와 삼군부(광화문 앞 경비실)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운집해 있다고 보고하자, 현흥택 정령은 즉시 궁궐 경비병 여럿을 광화문으로 급히 보내 상황을 확인했다. 시간이 지나 새벽 4시 무렵에 조선군 훈련대 대대가 춘생문(春生門, 경복궁 동북문)과 추성문(秋成門, 경복궁 서북문)을 포위하였다고 현흥택 정령은 증언했다. 이때 경복궁은 경회루와 수정전 일대를 제외하고 근정전 일대를 포함해 광화문까지 총격전이 벌어져 광화문과 근정전을 포함해 총격전으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 이때를 기회로 노린 일본군은 경복궁 곳곳을 뒤지다가 건청궁 일대에서 명성황후를 찾은 것이다.

윌리엄 다이 장군과 아파나시 사바틴은 이학균 부령으로부터 보고받자마자 일어나 별군관실로 갔으나 2명의 부령과 최소한 6~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하고 있어야 함에도 그곳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고 사바틴은 증언했다. 고종은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를 받고 이범진에게 시간을 다투어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에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이범진은 일본인 순찰을 피해 높이가 4~5미터인 담에서 뛰어내려 궁궐을 탈출하였다. 미국 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대궐 쪽에서 첫 총성이 들려왔다고 이범진은 증언했다. 이범진은 미국 공사관을 거쳐서 러시아 공사관을 찾아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었음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11]

사바틴의 증언을 보면 사건 전날(10월 6일) 밤에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군이 대궐 앞에 모여 소란을 피웠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는 당일 밤에는 음모가 있으리라는 정보도 중국인으로부터 사전에 입수했다. 그런데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결국 대궐이 포위되는 지경에 이른다.[12]

경복궁 침입

당일 새벽 4시 30분경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300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인솔을 받으며 뭔가 상의하였다. 그 뒤 한 조선인이 큰소리로 대문을 열어 달라고 몇 번 외쳤다. 광화문을 지키던 경비병과 순검들이 저항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 새벽 5시 무렵 흥선대원군 일행이 광화문 앞에 이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 제3중대가 미리 준비한 긴 사다리를 건네고, 일본 순사들이 담을 넘어 빗장을 풀었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과 조선인 근위대 병력이 소리를 지르며 경복궁을 향해 돌진했다. 일본 낭인들과 조선인들은 광화문을 넘어 경복궁 앞에 이르렀다.

담을 넘은 일본인 폭도들이 궁궐 경비병에게 발포하자, 경비병은 무기와 군복상의를 벗어던져 버리고 초소를 떠나 어디론가 달아나기도 했다. 한편 폭도들은 남쪽의 광화문, 동북쪽의 춘생문, 서북쪽의 추성문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하였다.[13]

경복궁 입구에는 미국인 지휘관 윌리엄 다이가 지휘하는 조선인 경비대 500여명이 지키고 있었으나, 이들의 존재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일본인 낭인들과 조선인 병력은 쉽게 경비대를 격퇴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다이는 경비대를 이끌고 도망쳤고, 낭인들과 조선인 길안내자들은 쉽게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근정전까지는 쉽게 들어갈수 있었으나 근정전을 지키는 병사들과의 총격전을 벌이는 끝에 근정전이 뚫려버려 건청궁 까지 갈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 사바틴은 궁궐 안에서 수비하던 도중 폭도와 환관(宦官), 벼슬아치, 궁노(宮奴) 등에게 떠밀렸다가 일본인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호위를 요청했다. 그 뒤 그곳에서 서서 사건을 목격 중 명성황후 시해 직전 두들겨 맞고 현장에서 쫓겨난다.[14]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이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궁전 뜰에서 일본인의 행패를 목격했다. 윌리엄 다이도 시위대를 지휘하면서 궁 안에서 이 참상을 목격했다.

법부 협판 권재형의 보고서(흔히 〈권재형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흉도들의 주의를 따돌려 명성황후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흉도들이 잘 보이는 방 문앞에 나와 서 있었는데, 흉도들은 칼날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15] 또한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16]

건청궁 진입

경복궁에 왕비가 없음을 안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은 경복궁 북쪽인 건청궁으로 향한다. 일본인들을 막으려고 나왔던 홍계훈과 시위대는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이들의 화승총은 일본의 개량된 총을 당해내지 못했다. 일설에는 홍계훈이 일본인에게 호통을 치다가 일본 수비대가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고도 한다.

3백~4백여 시위대가 연대장 현흥택(玄興澤)과 교관 다이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총격전을 벌였으나, 갑오경장 때 우수한 무기를 빼앗겨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건청궁까지 다가온 흉도들은 대오를 지어 합문(閤門)을 포위하고 파수를 보았다.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흥선대원군은 근정전 뒤 강녕전 옆에서 기다렸다. 훈련대 군인들은 건청군 앞마당에서 쉬며 황후 시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17]

명성황후 살해

흉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고 윽박지르는 등 난폭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궁녀들은 두들겨 맞고 내던져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건청궁 동쪽 곤녕합 옥호루에서 황후를 찾아냈는데,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두 팔을 벌려 황후 앞(또는 황후가 있는 방문 앞)을 가로막고 나서다가 권총을 맞고 쓰러졌으며, 이어 신문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가 다시 칼로 두 팔을 베었다.그러나 버둥대며 일행을 방해하던 이경직은 낭인들에 의해 허리가 베여 죽게 된다.

곤녕합에 진입한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은 궁녀와 상궁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누가 왕후인지 색출하던 중 변복한 왕후를 찾아내자 살해한다.

낭인들은 궁녀들 사이에 숨었다가 도망치는 명성황후를 쫓아가 그녀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려 내동댕이친 뒤 맨발로 계속밟고 일본군 4명이 칼로 찔렀다. 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이자 조선 주재 특파원인 프레더릭 매켄지에 의하면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방 한 구석에 숨은 여인을 발견하고 머리채를 붙잡고 왕후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왕후는 이를 부인하고 몸을 피해 마루 아래로 달아나려는 순간 일격을 당했다고 한다. 한편 일본인 낭인과 조선인 앞잡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선의 국모라고 호통쳤다는 공식 기록과는 달리 암살 직전 목숨을 구걸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현은 낭인들이 왕비의 정체를 확인하자 '살려달라고 애걸했으나 일본인들이 칼로 내리쳤다.[18]'고 하였다.

명성황후가 절명한 시각은 사바틴이 현장을 떠난 지 20~30분 뒤인 새벽 5시50분 이후인 10월 8일 아침 6시 직전이나 직후로 여겨지나,[19] 절명한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방 안에서 황후의 시신을 보았다는 증언은 많다. 또한 낭인들은 황후를 죽인 뒤에도 그들이 죽인 사람이 황후임을 알지 못하여 용모가 비슷한 궁녀를 세 명 살해하였다. 흉도 가운데 황후를 죽인 사람으로 자주 지목되는 사람은 데라자키 다이키치(寺崎泰吉)이다.[20]

사건 이후

이 사건은 당초 그들의 계획과 기대, 즉 반일적이며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고 일본 세력을 물리침) 정책을 취하는 민비를 제거하여 일본세를 다시 회복하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국제적 비난과 압력은 물론 조선의 조야(朝野)에 반일운동을 유발시켰고,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지배의 정략이 도리어 수포로 돌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열강의 견제로 일본세는 더 이상 조선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10월 30일에는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훈련대가 해산되고 새로 친위대(왕궁)와 진위대(지방)가 설치되었다. 11월 26일에는 왕비를 복위하고, 시해사건에 관계한 군부대신 조희연과 경무사 권형진을 파면하였다. 대원군도 스스로 은퇴하고, 이준용(李埈鎔)은 일본에 유학의 명목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12월 1일에는 왕후시해 사실과 국상을 공표하여 시해 사건의 뒷수습은 일단락되었다.[21]

사건 이후 명성황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인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뒤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었다. 구연수는 한일 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에 관여된 것을 알게 된 고종은 나중에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참고 사이트

을미사변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개선점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메인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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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국채보상운동 메인화면의 최하단으로 스크롤하면 나오는 유관사이트 탭 중'국채보상운동영문홈페이지' 항목으로 접속해 스크롤을 한 번 내리면 우측에 뉴스 카테고리가 있다. 그런데 보다시피 가장 최근의 게시물들이 전부 17년 1월 18일인데다 작성자도 무작위로 입력한 거의 똑같은 이름들이다. 제목도 전부 거의 일치할 뿐만 아니라, 게시글들을 클릭해보면 파일이 하나씩 첨부되어있기는 하나 내용란에는 전부 제목이 그대로 여러 번 복사되어있는 게 다다. 주기적으로 관련 뉴스를 업로드 하지 않을 거라면 어째서 메인 항목에 해당 카테고리가 보이도록 디자인했는지 의문이다. 만약 실제로 파일 내부에 유용한 정보가 있고,게시글이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첨부파일을 다운로드하는 사람은 있을까말까인데 일반인 사용자가 장난쳐놓은 것 같이 보이는 페이지의 파일을 눌러 다운받아서 내용을 볼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각주

  1. 김현 (2013). 디지털 인문학 - 인문학과 문화콘텐츠의 상생 구도에 관한 구상. 인문콘텐츠, 29, 9-26.
  2. 왕이 정궁에서 옮겨 지낼 목적으로 지은 궁궐.
  3. 왕이 정규적으로 임어(臨御)하는 도성 내의 궁궐들 중에서 으뜸이 되는 궁궐.
  4. [1]
  5. [2]
  6. [3]
  7. 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한국> (정용화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4) 93페이지
  8.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7) 585페이지
  9. 황현, 《역주 매천야록 (상)》 (임형택 외 역, 문학과 지성사, 2005) 448 페이지
  10.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50~53쪽.
  11. 박종효 교수 (2002년 1월 1일). “[자료발굴|베베르의 시해 보고서와 증언서”]. 신동아. 472~485쪽면. 2008년 9월 5일에 확인함.
  12. 박종효 교수 (2002년 1월 1일). “[자료발굴|베베르의 시해 보고서와 증언서”]. 신동아. 472~485쪽면. 2008년 9월 5일에 확인함.
  13. 박종효 교수 (2002년 1월 1일). “[자료발굴|베베르의 시해 보고서와 증언서”]. 신동아. 472~485쪽면. 2008년 9월 5일에 확인함.
  14. 박종효 교수 (2002년 1월 1일). “[자료발굴|베베르의 시해 보고서와 증언서”]. 신동아. 472~485쪽면. 2008년 9월 5일에 확인함.
  15. 기쿠치 겐조, 《근대조선사》 하권(1939년, 鷄鳴社, 京城), 406~407쪽.
  16.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58~60쪽.
  17. 한영우, 54쪽 ~ 58쪽에서.
  18. 신봉승, 《조선왕조 500년:24. 왕조의 비극》 (금성출판사 , 2010) 390페이지
  19. 박종효 교수 (2002년 1월 1일). “[자료발굴|베베르의 시해 보고서와 증언서”]. 신동아. 472~485쪽면. 2008년 9월 5일에 확인함.
  20. 그밖에도 나카무라 다테오(中村楯雄), 후지카스,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등의 낭인과 미야모토 소위, 마키 등의 일본 군인들이 황후의 침실에 난입하여 칼을 휘둘렀기 때문에 누가 범인인지 지목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21. 『(신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