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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의 정의

디지털 인문학이란 정보통신기술 (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문학의 주제를 계승하면서 연구 방법 면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연구, 그리고 예전에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시도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성격의 인문학 연구를 포함한다. 단순히 인문학의 연구 대상이 되는 자료를 디지털화 하거나, 연구 결과물을 디지털 형태로 간행하는 것보다는 정보기술의 환경에서 보다 창조적인 인문학 활동을 전개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소통시킴으로써 보다 혁신적으로 인문지식의 재생산을 촉진하는 노력 등이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조어의 함의라고 할 수 있다. [1]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

디지털 인문학은 이전에는 비전공자(혹은 비전문가)는 알 수 없었던 세세한 정보, 지식들을 그들도 알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디지털 기술을 통해 지식 소통의 장벽을 해소해 주었다. 그리고 인문학적 정보와 자료들을 공개적인 곳에 아카이브할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이에 나는 디지털 인문학을 완전히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내가 배운 지식들을 아카이브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창덕궁 개요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 [2]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창덕궁 역사

조선전기

창덕궁 조선 전기 연표
연대 내용
1394년 태조 3 한양 천도 결정, 종묘, 경복궁 조성 시작
1405년 태종 5 창덕궁 조성 시작[3]
1406년 태종 6 창덕궁 후원 조성[4]
1411년 태종 11 금천교 건립[5]
1412년 태종 12 돈화문 건립[6]
1462년 세조 8 후원 본격 확장[7]
1494년 연산군 즉위 후원 꾸밈[8]

조선중기

창덕궁 조선 중기 연표
연대 내용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소실[9]
1610년 광해군 2 창덕궁 중건
1623년 인조 즉위 인조반정으로 창덕궁 전각 대부분 소실[10]
1636년 인조 14 후원 옥류천에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건립
1647년 인조 25 선정전, 대조전, 희정당 등 소실된 건물 중건[11]

조선말기

창덕궁 조선 말기 연표
연대 내용
1704년 숙종 30 후원에 대보단 조성[12]
1776년 정조 즉위 후원에 규장각 설치[13]
1803년 순조 3 인정전 소실[14]
1804년 순조 4 인정전 재건
1833년 순조 33 대조전, 희정당 등 소실
1834년 순조 34 대조전, 희정당 등 재건
1882년 고종 19 임오군란, 성난 군중 창덕궁에 침입[15]
1884년 고종 21 갑신정변, 개화파가 고종을 관물헌에 모심[16]
1907년 순종 1 순종,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김[17]

근현대

창덕궁 근현대 연표
연대 내용
1917년 대화재로 대조전 소실[18]
1920년 경복궁의 일부 건물을 헐어 대조전, 희정당 등 재건[19]
1926년 대조전에서 순종 승하[20]
1989년 낙선재에서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별세
1990년~1999년 인정전 내행각ㆍ외행각 정비 및 복원
1997년 창덕궁,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창덕궁 주요 건물

돈화문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돈화(敦化)’라는 말은 원래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여기에서는 의미가 확장되어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 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1412년 5월에 세워졌으며, 1609년에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돈화문에는 원래 현판이 없다가 성종 때 서거정에게 분부하여 이름을 지어서 걸게 하였다.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이 있어 정오(正午)와 인정(人定), 파루(罷漏)에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남향 건물이고, 좌우 협칸을 벽체로 막아 3문형식이다. 중앙은 어문으로 왕의 전용 문이고, 좌우문은 당상관 이상 높은 관료가 드나들던 문이지만, 3사 [21]의 언관은 관직은 낮아도 좌우 문을 드나들게 한 특별한 혜택이 있었다.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다.인정(仁政)어진정치라는 뜻이며,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法殿)이 된다. 법전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이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 순조 3년(1803)에 일어난 화재로 인한 재건, 그리고 철종 8년(1857년)에 보수공사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부른다.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문무관으로 각각 18품계를 새겼다. 그러나 정(正)4품부터는 종(從)을 함께 포함시켰으므로 정1품에서 시작하여 정9품으로 끝나며 각각 동, 서로 12개씩 있다.

희정당

희정당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임금님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건물을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숭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1920년에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11칸·옆면 4칸으로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앞면 9칸·옆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는 복도로 사용하였다. 앞면 9칸 중 3칸은 응접실이며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응접실에는 김규진의 금강산총석정절경도,금강산 만물초승경도의 벽화가 걸려있다.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생겼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설비되었다. 이는 마차나 자동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채택된 서양식 구조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시대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부용정

부용정은 궁궐지에 따르면 조선 숙종 33년(1707)에 이곳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는데, 정조 때에 이를 고쳐 짓고 이름을 부용정(芙蓉亭)이라 바꾸었다고 한다.『동국여지비고』에는 “주합루 남쪽 연못가에 있다. 연못 안에 채색하고 비단 돛을 단 배가 있어, 정조 임금께서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던 곳이다”라고 하여 이곳에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으며, 신하들과 어울려 꽃을 즐기고 시를 읊기도 하였는데, 1795년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정조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한다. 기둥에는 이곳의 풍광을 읊은 시를 적은 주련(柱聯)10개가 걸려 있다.
부용정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누각으로 연못 남쪽 위에서 봤을 때 열 십(十)자 모양을 기본으로 구성되었으며, 남동과 남서쪽에 반칸을 덧대서 소통을 원활히 하였다.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할 때 동쪽과 서쪽이 좌우대칭이다. 연못 안에 2개의 팔각 석주를 세운 다음 그 위에 가느다란 원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비례에 맞게 앙증맞은 2익공(二翼工)공포를 짜 올렸다. 정자안은 네 개의 방을 배치했는데, 배면의 방이 다른 방들보다 한 단계 높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이다. 외관을 보면 북쪽은 간결하고 남쪽은 화려한 형식을 취하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며, 풍부한 형태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난간과 창호도 위치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난간은 평난간과 계자난간(鷄子欄干) [22]을 두었는데, 특히 북쪽 연못 부분의 난간은 다른 곳보다 한단 높게 하여 변화를 주었다.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 초입에 천원지방의 조형원리에 따라 조성한 대표적 연못인 부용지에 지은 마루식 정자로 연못에 인접하여 자연의 선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풍류를 통해 수양을 하는 한국 정자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다.
열십(十)자 모양의 독특한 평면 형태, 공간구성, 건물의 장식 등이 뛰어난 비례와 대비로 건물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으로 보존가치가 높다.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경복궁 이름 유례

큰 복을 누리라(景福)는 의미이다.
경복궁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가장 첫 번째로 만들어진 궁궐이다. 그래서 경복궁을 조선왕조의 법궁, 또는 정궁이라고도 부른다. 경복궁의 이름은 태조4년에 태조가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정도전이‘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시경(時經)’의 ‘주아(周雅)’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누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는 시구를 따서 ‘큰 복을 누리라’는 경복(景福)을 따서 지었다.[23]

창덕궁 이름 유례

창덕궁 조성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개경에 환도했던 조선왕조는 다시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안군 이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올라 자주 한양환도문제를 의논하였다. 태종은 개성에 남고자 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무릅쓰고 태종 4년(1404) 10월 한양환도를 결정하고 먼저 왕이 정사를 수행할 궁궐을 새로 지을 것을 계획하였다. 10월에 들어 태종은 하륜의 말에 따라 무악 부근에 도읍할 만한 곳을 찾아보고, 6일 한성에 들어와 이궁을 향교동(鄕校洞)[24] 즉 지금의 창덕궁 터에 궁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 이어 10월 20일 왕이 신궁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날은 한경(漢京) 환도와 신궁 낙성의 축하행사를 겸하였고 이때 신궁을 창덕(昌德이라 이름하니, 덕을 쌓아 크게 이루어 교화(敎化)에 힘쓰라는 뜻으로 왕도정치를 이루는데 이를 교훈 삼고자 한 것이다. 이때 찬성사 권근은 화악시(華嶽詩)를, 좌정승 하륜은 한강시(漢江詩)를 지어 환도와 신궁 낙성을 축하하였다.

창덕궁 이름 의미

창덕궁 낙성 때 궁궐의 이름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나, ‘궁궐지’에 10세기에 순조가 지은 창덕궁명병서(昌德宮銘幷序)가 있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저 창(昌, 창성할 창)은 성(盛, 성할 성∙많을 성∙클 성)이요, 덕(德)은 도(道, 사람이 지켜야 할 근본 이치-길)이다. 성(盛)은 성(聖, 통할 성-크게 통하여 사람을 교화함, 지극할 성)이요, 도 또한 성(聖)이다. 성(聖)이 있은 연후에 도가 있고, 도가 있은 연후에 반드시 덕이 있으며, 덕이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창성하게 할 수 있다. 창성하고자 하면 옛 삼로(三老) 동공(董公;董仲舒)이 한무제(漢武帝)에게 고한 말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람은 인(仁, 인자∙자애∙사랑)하다. 임금이 되어서는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이 창덕궁의 명(銘)이 어찌 단순한 궁의 이름일 뿐이겠는가. 인군(人君)은 창덕(昌德)에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옛날 신하가 대부분 전각의 이름으로써 임금의 덕을 힘쓰게 하였으니, 전각의 이름이 어찌 금판(金板)에 새겨 단청으로 장식하여 한갓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도구일 뿐이겠는가. 이에 명(銘)한다. 창(昌)은 창성하게, 성(盛)은 왕성하고 크게 하라는 뜻이다. 창의 뜻이 크니, 이 건물 이름의 교훈에 힘써야 한다. 한양의 남쪽이요, 왕도의 근본이라. 덕으로 이름하는 것은 덕의 근본을 밝히라는 뜻이니, 성(聖)을 본받고 덕에 힘써야 한다. 덕에 힘쓰면 국운이 길고, 국운이 길려면 오직 덕에 맞아야 한다. 큰 덕은 반드시 오래가며, 그 영향이 만방에 미칠 것이다.[25]

경희궁 이름 유례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친 것이다.[26]

덕수궁 이름 유례

덕수궁은 원래 조선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8년 광해군이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아 즉위한 뒤 1611년 ‘경운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로 퇴위한 뒤 제위를 이어받은 아들 순종은 선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덕수궁’이란 새 이름을 붙여 지금까지 써왔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은 “경운궁이 17세기부터 300여년 간 써온 역사적 명칭이며, 후대 개칭된 덕수궁은 일제 압력으로 물러난 전 황제 고종의 거처라는 의미로 왜곡된 명칭”이라고 주장해왔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1.홈페이지 디자인이 너무 정신없다

누리집에 처음 들어가니 구성하는 글씨 크기가 너무 커서 사용자들이 누리집을 원활하게 사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글씨 크기가 너무 크다 보니 마우스커셔로 선택하고 가고자 하는 페이지로 움직이기도 힘들다. 또한 자료들을 한번에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 또한 목록이나 글자 자간의 경우에도 하나도 통일되어 있지 않고 정돈되어 있지 않다 보니 자료를 검색하고 페이지를 이용하는데 불쾌감이 든다.

2.이미지 파일이 없는 자료들이 너무 많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가장 큰 장점이자 중요한 부분이 문서의 해당 이미지를 저장하고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의 경우 신문이나 광고, 기사와 같은 구할 수 있고 이미지로 시각화할 수 있는 자료들의 이미지 파일이 업로드 되어 있지 않은 항목이 많다. 그래서 디지털 아카이브의 장점을 최대한 사용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3.인물을 검색하면 정보가 인물에 대한 정보가 자세하지 않다.

인물 아카이브에 들어가서 인물에 대해 검색하면 국채보상운동에 어떤 식으로 얼마만큼의 도움을 줬는지,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나와야 하는데 그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4.통계자료가 보기 힘들게 배치되어 있다.

5.콘텐츠의 순서가 알맞지 않다.

현재 이 홈페이지에 준비되어 있는 콘텐츠는 5가지인데 순서가 알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국채보상운동의 정의가 마지막 콘텐츠로 구상되었는데 사용자의 수월한 이해를 위해서라면 이 부분이 더 앞쪽으로 배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 위키 실록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서울타임스[1]
    • 김현, “디지털 인문학: 인문학과 문화콘텐츠의 상생 구도에 관한 구상”, 『인문콘텐츠』 29 (2013)

각주

  1. 김현, “디지털 인문학: 인문학과 문화콘텐츠의 상생 구도에 관한 구상”, 『인문콘텐츠』 29 (2013)
  2. 특별히 따로 지은 궁전.
  3. 『태종실록』 10권, 1405년(태종 5) 10월 25일
  4. 『태종실록』 11권, 1406년(태종 6) 4월 9일
  5. 『태종실록』 21권, 1411년(태종 11) 3월 18일
  6. 『태종실록』 23권, 1412년(태종 12) 5월 22일
  7. 『세조실록』 27권, 1462년(세조 8) 1월 30일
  8. 『연산군일기』 63권, 1506년(연산 12) 9월 2일
  9. 『선조수정실록』 26권, 1592년(선조 25) 4월 14일
  10. 『인조실록』 1권, 1623년(인조 1) 3월 15일
  11. 『인조실록』 48권, 1647년(인조 25) 11월 12일
  12. 『숙종실록』 40권, 1704년(숙종 30) 12월 21일
  13. 『정조실록』 2권, 1776년(정조 즉위) 9월 25일
  14. 『순조실록』 5권, 1803년(순조 3) 12월 16일
  15. 『고종실록』 19권, 1882년(고종 19) 6월 10일
  16. 『고종실록』 21권, 1884년(고종 21) 10월 18일
  17. 『순종실록』 1권, 1907년(순종 즉위) 11월 13일
  18. 『순종실록부록』 8권, 1917년(순종 10) 11월 10일
  19. 『순종실록부록』 11권, 1920년(순종 13) 10월 29일
  20. 『순종실록부록』 17권, 1926년(순종 19) 4월 25일
  21. 三司: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22. 계자각(鷄子脚)을 세운 난간.
  23. 『태조실록』8권, 태조 4년 10월 7일
  24. 고려시대 향교가 있던 곳
  25. 창덕궁명병서(昌德宮銘幷序)
  26. 『영조실록』 95권, 영조 36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