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M마정윤
목차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국어국문학과 2019101381 마정윤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이란 디지털과 인문학을 활용하는 모든 연구, 활동 분야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굉장히 포괄적인 정의인데 이렇게 디지털 인문학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립할 수 없는 이유는 디지털 인문학의 역사가 아직 짧고, 디지털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수도 적을뿐더러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학문 존재 자체에 대한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 빅데이터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의사소통 매개 수단이 늘어나고 정보의 형태가 이미지. 영상 등으로 확대됨에 따라 아날로그 형태의 정보들을 ‘디지털화’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전통적으로 ‘인문학’은 언어로 된 자료를 바탕으로 사유와 성찰, 반성을 통한 세상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문학 연구는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검색과 접근이 쉽도록 그 기초 자료를 디지털 매체에 저장하고, 연구 결과를 디지털화하여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디지털 인문학’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인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단지 인간의 언어로 기술되었던 인문학 자료들을 디지털화하거나 연구 결과물을 디지털 형태로 간행하는, ‘인문학 자료의 전산화’의 수준에서 그 해석이 머무르게 된다.
실제로 많은 인문학 연구의 기초 자원이 되는 자료들이 전자적인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여러 디지털 아카이브가 구축되었다. 특히 인문학의 토대가 되는 고문서 자료들이 디지털 매체에 현재까지 많이 축적되었고, 우리 수업에서 자주 사용하는 중요한 디지털 아카이브인 조선왕조실록, 위키실록사전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수백 년 전의 역사 자료들까지 편리하게 확인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찾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디지털적인 데이터 분석 및 서술이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찾은 자료들을 해석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다시 아날로그의 과정을 거쳐야 했고, 결국 디지털 아카이브에 축적된 내용들은 ‘디지털화’된 개별적인 ‘기초 자료’의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최근 많은 ‘디지털 인문학’ 연구자들과 이를 배우는 학생들이 디지털 환경에서 디지털 기술의 활용을 통해 새로운 연구, 연구 결과들을 도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출판과 지식의 생산, 고전문학과 디지털인문학, 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등의 강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단순히 디지털화된 자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유, 분석, 해석 등의 인문학 연구를 통해 찾아낸 결과들을 다시 확장된 데이터로 축적해 나아갈 수 있게 함으로써, ‘자료’의 아카이브에서 ‘지식’의 아카이브로의 진화[1]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각각 다른 사람, 연구, 분야, 시대 등에 의해 디지털 매체에 축적된 해석과 분석의 결과들이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큰 지식 체계로 확장해가는 것이 ‘디지털 인문학’의 궁극적인 의미이자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디지털 인문학’이란 단순히 인문학 자료의 전산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서 축적된 인문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보다 창조적인 인문학적 해석,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서로 공유하면서 디지털 아카이브에 하나의 큰 인문학적 지식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디지털 인문학을 배우는, 관심 있는 학생이라면 조금 더 자기주도적으로 디지털 세상에서 더 다양한 인문학적 사유를 하도록 노력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문학의 사회적 기여를 촉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창경궁 개요
창경궁은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2]로, 성종이 즉위하였을 때 생존해 있던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덕종 비 소혜왕후(昭惠王后), 예종 비 안순왕후(安順王后)를 모시기 위해 1484년(성종 15)에 지은 궁이다. [3] 그 터에는 고려 말에 남경 천도를 계획하면서 궁을 세웠던 것으로 전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자 세종이 상왕의 거처로 다시 궁을 지어 수강궁(壽康宮)이라 했으며 성종 대 다시 궁을 지어 창경궁이라 이름 지었다. 이곳에서는 왕실의 공식적인 의례인 조하 의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은 거의 치러지지 않았고 왕이나 왕비, 왕대비 및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활용되었다. 즉,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기에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특징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터를 잡아 필요한 전각을 지었기에 좀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동편에 담장을 마주해서 자리 잡고 있는데, 남쪽은 종묘 담장과 면해 있고 북쪽에는 창덕궁과 함께 사용하는 후원이 있다. 동쪽에는 도로 사이에 언덕을 끼고 왕실의 정원인 함춘원(含春苑)이 자리하였다.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앞 도로는 남으로는 지금 종로 4가에 해당하는 이현(梨峴)과 만나고, 북쪽은 혜화문(惠化門)과 통한다. 창경궁은 정문을 통해서 출입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 창덕궁 쪽으로 난 문을 통해서 왕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조 때는 함춘원 자리에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을 세우면서 왕이 홍화문 북쪽 월근문(月勤門)을 통해 자주 왕래하였다.
중종이 이 궁에서 승하하면서 인종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에서 즉위한 일이 있고[5], 영조가 자주 창경궁을 찾아 조하 의례를 치르고 정전에서 과거시험과 양로연을 연 일이 있지만 다른 왕들은 창경궁의 침전이나 부속 전각에서 머무는 데 그쳤다. 창덕궁은 왕실에서 생활하는 사람 모두를 수용하기에는 비좁았기 때문에 후궁을 비롯해서 상궁이나 내인 등이 창경궁을 거처로 삼았다. 이렇듯 창경궁은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변천사
시대 | 내용 |
---|---|
1418 | 수강궁 |
1482 | 수강궁 수리 |
1484 | 주요 전각 완공하면서 공사 마무리. 창경궁 |
1592 | 임진왜란으로 불타면서 소실 |
1616 | 중건 완료 |
1624 | 이괄의 난으로 소실 |
1633 | 창경궁 수리 |
1790 | 통명전 소실 |
1830 | 화재로 인해 내전 소실 |
1834 | 통명전, 환경전, 경춘전, 숭문당, 함인정, 양화당, 영춘헌, 오행각 등 중건 |
1907 | 순종 즉위 후 일제로 인해 일부 전각 소실 |
1909 | 동물원과 식물원 개원 |
1911 | 일제로 인해 창경원으로 이름 바뀜. 자경전 터 없애고 일본풍 박물관 건립 |
1912 | 율곡로 개설로 창경궁과 종묘 단절시킴. 대표적 유원지로 활용 |
1984 | 창경궁으로 복원 공사 |
1986 | 명정전 회랑과 문정전 등 일부 전각 복원 |
1989 | 과천 서울대공원에 창경원 동물들 옮기면서 창경원 복구 작업 |
1992 | 자경전터 박물관(장서각) 헐고 녹지로 |
관련사건 및 일화
통명전; 인현왕후와 희빈장씨
1652년(효종 3)에 창덕궁과 창경궁의 지붕과 온돌 바닥 등을 수리하기 위해 기와를 걷어 내고 아궁이 주변을 뜯어냈는데, 이때 기와 밑이나 아궁이 주변에서 불에 태운 쥐, 머리카락, 오색 옷을 입힌 인형 등 상대방을 저주하기 위한 목적으로 몰래 묻어 두는 흉물들이 여러 점 나왔다. 흉물은 주로 후궁들이 거주하는 전각에서 나왔지만 대조전 지붕 아래에서도 발견되었다. 공사를 맡은 관리가 놀라서 이를 숙종에게 보고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숙종은 흉물들을 신속히 제거하고 깨끗한 흙으로 빈 곳을 채우되 소문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당부만 내리고 일을 조용히 마무리하였다. 이 사건은 여성들이 주로 거주하는 창경궁에서,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한 후궁들 간의 시샘과 상대방을 저주할 목적의 주술이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은 사도세자의 비극이나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몰아내고 왕비 자리까지 올랐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희빈장씨(禧嬪張氏) 사건의 무대도 창경궁이었다.
3, 4년 전에 민 상궁(閔尙宮)과 숙영(淑英)이 와서 말하기를, ‘희빈이 금단(錦段)을 내보내어 옷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그 모양은 네 살 먹은 아이가 입는 옷과 같고, 납장의(衲長衣) 2벌, 납여의(衲女衣)·송화색여의(松花色女衣)·생초여의(生綃女衣)·사여의(紗女衣)·초록사여의(草綠紗女衣) 각각 1벌, 다홍대단(多紅大段) 치마·남대단(藍大段) 치마·다홍대사(多紅大紗) 치마 각각 1벌, 사폭면주(四幅綿紬) 바지·백릉(白綾) 바지 각각 1벌 등 비록 그 이름을 능히 다 기억할 수가 없으나, 합하면 옷이 15, 6벌이었고 치마는 10여 벌이었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3일 병진 3번째기사-
문정전; 영조와 사도세자
문정전이 영조의 비(妃)인 정성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을 때, 이곳 앞마당에서는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극적인 사건. 바로 1762년의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 문정전은 혼전이 되면서, ‘휘령전(徽寧殿)’으로 잠시 명칭이 바뀌었다. 영조는 휘령전을 지날 때, 죽은 왕비 정성왕후의 혼령이 자신에게 와서 사도세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일렀다고 했다. 사도세자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혼전에서 혼령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으로 정당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扣頭]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신만과 좌의정 홍봉한, 판부사 정휘량(鄭翬良), 도승지 이이장(李彛章), 승지 한광조(韓光肇) 등이 들어왔으나 미처 진언(陳言)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 대신 및 한 광조 네 사람의 파직을 명하니, 모두 물러갔다. 세손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金聖應) 부자(父子)에게 수위(守衛)하여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영조실록』99권, 영조 38년 윤5월 13일 을해 2번째기사-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궁녀의 성적 욕망, 억압과 분출>
조선시대 궁녀
궁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왕족을 제외한 궁중의 모든 여인들에 대한 총칭으로서 궁중 안 각 처소의 안살림을 담당했던 전문직 여성을 일컫는다. 조선 건국 이후 궁녀 제도는 태조 때부터 정비되기 시작하고 갈수록 그 명칭과 품계가 세분화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왕의 궁녀가 내명부(內命婦) 조항에, 세자궁의 궁녀가 세자궁 조항에 나뉘어 규정되어 있다. 내명부의 규정에 의하면 궁녀는 5품을 상한선으로 하는 궁인직이고, 4품 이상은 궁녀가 아니라 내관(內官) 즉 후궁이었다. 이는 내명부가 양반 관료의 조직에 대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는 궁녀에 관하여 대원칙만 세워놓았을 뿐 구체적인 운영에 관하여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 이는 『경국대전』의 궁녀에 관한 규정이 다분히 선언적이었기 때문이다. 궁녀에 관한 내용을 세밀하게 규정하는 것은 왕의 내밀한 사생활을 일일이 규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곧 왕권을 침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왕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므로 명분상 궁녀의 조직, 업무, 품계 등을 『경국대전』에 규정하기는 했지만 실제 운영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왕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기 위해 구체적인 운영에 관한 규정을 생략했던 것이다.
궁녀들은 각 처소의 안살림을 효과적으로 꾸리기 위해 지밀(至密), 침방(針房), 수방(繡房), 세수간, 생과방, 소주방, 세답방 등에 나뉘어 배속되었다. 지밀은 침실로서 이곳에서 근무하는 궁녀들이 지밀여관이었다. 만약 지밀의 주인인 왕비나 후궁 또는 세자빈이 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양육도 지밀여관이 담당하였다. 침방은 바느질 담당, 수방은 자수 담당, 세수간은 세숫물 담당, 생과방은 과일이나 간식 담당, 소주방은 음식 담당, 세답방은 빨래와 불 때기 담당으로서 이곳들은 모두 궁중 각 처소의 일상생활에 관련되었다.
조선시대 궁녀들은 대체로 10세 전후에 입궁하였으며 출신은 기본적으로 내수사의 여자종이었다. 하지만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양인 여성이 궁녀가 되기도 하였으며, 또는 자신의 세력을 궁중에 부식시키려는 양반들에 의해 양반 신분의 여성이 궁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외에 왕비나 세자빈이 입궁할 때 친정에서 유모나 몸종을 데리고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친정에서 데려왔다고 하여 본방내인이라고 하였다. 정식 궁녀인 내인이 되기 위해서는 약 15년 정도의 수습 기간이 필요했는데 이 시기에는 각시로 불렸다. 내인이 된 후 궁녀로서 최고 직위인 상궁이 되려면 또 3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궁녀는 한번 입궁하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근무하는 종신직이었다.
궁녀의 성적 욕망
궁녀는 궁중에 소속된, 궁극적으로는 왕의 여자라는 이유로 사랑이 금지되었고, 어떠한 성적 접촉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허용된 사랑은 오직 왕이나 세자의 승은을 입는 경우 뿐이었다. 승은은 매우 가능성이 희박한 선택지였지만 젊은 궁녀들은 모두 가슴 한 편에 승은이라는 큰 꿈을 품고 살았다. 그들은 궁 안에서는 당연하고 출궁한 궁녀도 성관계를 가질 수 없는 법적 제약을 안고 살았다. 평생동안 인간 본성의 성적 욕망을 억누르고 법을 지키기란 쉽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에 실제로 목숨을 담보로 한 궁녀들의 연애 사건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내시나 관인 등 이성 교제는 물론이고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 ‘대식(對食)’도 은밀하게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성 교제
조선시대에는 궁녀들의 이성교제를 단호하게 금지하였는데 <수교집록>, 영조 22년에 편찬된 법전인 <속대전>, 고종 2년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 등을 보면 “궁녀가 바깥사람과 간통하면 남녀 모두 때를 가리지 않고 참형을 가한다”고 규정한 것을 알 수 있따. 이처럼 궁녀가 국왕 이외에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성범죄’로 규정하고 참형을 가하도록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도는 궁녀와 남성의 성적 접촉을 궁극적으로 봉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본능을 억제하기 힘든 일부 궁녀들은 임금 이외의 남자들과 접촉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때 궁녀들의 연애 상대는 주로 내시와 별감이였으나 종친이나 관인들과의 스캔들도 종종 일어나곤 했다.
조선시대 발생한 궁녀의 성적 스캔들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현종 8년(1667)에 불거진 ‘귀열이 사건’이다. 대비전의 시녀인 귀열이는 궁녀에게 강요되는 이성교제 금지를 불복종하고 형부 이흥윤과 은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아이가 생겼고, 결국 관계가 발각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종은 매우 화가 나 귀열이를 참수형에 가하고 귀열이의 부모에게 ‘불고지죄’로 유배형을 내린다. 그러나 귀열이와 관계를 맺었던 형부 이흥윤은 발각된 뒤 아내와 처제를 모두 버리고 도망을 가버려 어떤 형벌도 받지 않고 목숨을 보전하게 된다.
궁녀 귀열(貴烈)이 복주되었다. 이에 앞서 귀열이 왕대비전의 궁녀로서 자기 형부인 서리(書吏) 이흥윤(李興允)과 몰래 간통하여 임신했는데, 일이 발각되자 상이 내수사에 가두라고 명했다. 이때 이르러 옥중에서 아들을 낳고는 사실대로 실토했다. 상이 내수사에서 출옥시켜 해조에 회부하고는 법률을 적용하게 했다. 형조가 교수형에 처해야 된다고 아뢰자, 상이 등급을 높여 참수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해조가 법을 인용하여 간쟁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즉시 형을 집행하라고 명했다. 정원도 역시 법이 한번 잘못 시행되면 뒤 폐단에 적지 않게 관련되니 해조의 논의대로 행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또 듣지 않아 드디어 참수했다. 그녀의 아비 광찬(光燦)과 어미 숙지(淑只)도 역시 사실을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울러 형신을 받고 정배되었다. 흥윤은 도망했는데 수색했으나 잡지 못했다. -『현종실록』13권, 현종 8년 5월 20일 계해 1번째기사-
한편, 전직 궁녀에게도 이성과의 접촉을 엄격하게 금하였는데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세종 때의 ‘이영림 사건’이 있다. 세종 21년(1439), 이영림이라는 장교는 전직 궁녀와 성관계를 맺는데 이 사건이 발각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사헌부가 이영림을 참형에 처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세종의 배려로 2단계보다 낮은 형벌을 받았지만, 전직 궁녀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었던 것을 보면 관행대로 사형 수준의 형벌을 받았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즉, 전직 궁녀에게도 현직 궁녀 못지않은 성적 욕망에 대한 엄격한 제한이 있었던 것이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별시위(別侍衛) 이영림(李英林)이 궁(宮)에서 나간 시녀(侍女)를 간통(奸通)하였으니, 율에 의하여 처참(處斬)하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두 등(等)을 감하도록 하였다. -『세종실록』85권, 세종 21년 5월 15일 임술 2번째기사
흥미로운 것은 궁녀와 내시도 은밀한 관계를 가지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숙종 27년(1701) 방자라는 비정규직 궁녀였던 월금이와 영업이는 내시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이 사실이 밝혀지자 정식 궁녀와 동일한 가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이 함께 성관계를 가진 내시들에게는 사형 대신 유배형을 가하지만 월금이와 영업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을 볼 때 기존 관례처럼 사형 수준의 형벌을 받았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전 사직(司直) 이의충(李義忠)이 처남(妻娚) 김계경(金繼卿)의 비첩(婢妾)인 월금(月今)을 간음한 죄와, 종[婢] 월금(月今)이 이의충을 따라 도망한 죄는, 이의충은 율(律)이 중한 데 따라 결장(決杖) 1백 대에 고신(告身)424) 을 모두 수탈(收奪)하는 데 해당하고, 월금은 장(杖) 1백 대에 거의 수형(去衣受刑)425) 하는 데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르되, 명하여 이의충은 먼 지방에 귀양보내게 하였다. -『성종실록』66권, 성종 7년 4월 20일 계사 7번째기사
이렇듯 조선 시대에는 궁녀에게 엄격한 이성 교제 금지의 압박이 주어졌고, 아직 정규직 궁녀가 아닌 이들이나 궐을 떠난 궁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궁녀와 성적 관계를 맺은 상대 남성에게는 상대적으로 약한 형벌을 내리는 반면, 궁녀에게는 더욱 무거운 형벌을 내렸던 것을 보면 궁궐에서 궁녀의 삶은 매우 가혹했음을 느낄 수 있다.
동성애
궁녀들은 이성교제 금지라는 억압된 환경 속에서 궐 안에서 동성 상대방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는데, 궁녀들의 동성애는 국가의 공식 역사서에도 자주 기록될 정도로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아래 기록을 보면 궁녀들의 동성애 실태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궁녀들 상호간에 ‘대식’이라는 행위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식’이란 문자 그대로 하면 ‘서로 마주보고 식사를 하다’, ‘함께 밥을 먹다’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단순히 밥만 함께 먹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것, 동성애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예전부터 궁인(宮人)들이 혹 족속이라 핑계하여 여염(閭閻)의 어린아이를 금중(禁中)에 재우고 혹 대식(對食)398) 을 핑계하여 요사한 여중이나 천한 과부와 안팎에서 교통합니다. -『영조실록』 12권, 영조 3년 7월 18일 임신 1번째기사-
한편 궁녀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동성애 문화가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궁녀들 사이에서 동성애 쌍방의 의리를 유지하기 위해 ‘친구’를 의미하는 ‘붕(朋)’을 팔에 새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이렇게 동성애 문화가 형성될 정도로 궁 내에서 동성애가 상당히 자주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내가 듣건대, 선왕(先王) 때부터 붕당(朋黨) 맺는 풍속을 고치려 하였으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범하는 자가 많으며, 혹은 팔에 붕(朋)자를 새겨 끊어지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 11월 8일 甲午 4번째기사-
물론 이러한 궁녀들의 동성애를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중 한가지는 궁녀들의 몸에 ‘위법교붕(違法交朋)’, 즉 ‘법을 어겨 벗을 사귀었다’는 글자를 몸에 새기도록 하였다. 다른 방법으로는 같은 처소의 궁녀들끼리 한방을 쓰지 않고 서로 다른 처소의 궁녀들끼리 한방을 쓰게 함으로써 친밀해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으려고 하였다.
동성애에 대한 역사적 사실 중 가장 잘 알려진 사실은 문종이 세자 시절 둘째 빈 봉씨(奉氏)가 궁녀인 소쌍(召雙)과의 동성애 관계가 밝혀지면서 폐위된 사건이다.[6] 기록에 따르면 봉씨가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부터 외간 사람을 엿보았다는데 이를 통해 봉씨의 관음증적이고 동성애적인 성적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봉씨는 소쌍을 사랑하였으나, 자신이 우월한 지위라는 이유로 소쌍을 강제로 자신의 옆에 두고 성관계를 맺는 등 일방적인 관계였다. 한편 소쌍은 사실 문종의 세 번째 빈인 권 승휘(權承徽)의 사비(私婢) 단지(端之)와 진심으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권승휘는 봉씨와 달리 문종의 아들을 낳아 봉씨가 질투하는 인물이기도 하였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소쌍이 권승휘의 사비와 성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은 더욱 분노케해 소쌍과 단지의 사이를 방해하였다. 이러한 여성 동성애자간의 삼각관계는 결국 봉씨의 세자빈 폐위로 이루어졌고 소쌍과 단지 역시 뚜렷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세종이 궁녀들 간의 대식 행위에 대해 곤장 70-100대의 형벌로 다루었던 것을 바탕으로 그들 역시 무거운 형벌을 받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요사이 듣건대, 봉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召雙)이란 사람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 ’고 하였다. 어느날 소쌍이 궁궐 안에서 소제를 하고 있는데, 세자가 갑자기 묻기를,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 ’고 하니, 소쌍이 깜짝 놀라서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듣건대, 봉씨가 소쌍을 몹시 사랑하여 잠시라도 그 곁을 떠나기만 하면 원망하고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나는 비록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였고, 소쌍도 다른 사람에게 늘 말하기를,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매우 무섭다.’ 하였다. 소쌍이 또 권 승휘의 사비(私婢) 단지(端之)와 서로 좋아하여 혹시 함께 자기도 하였는데, 봉씨가 사비 석가이(石加伊)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라 다니게 하여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실록』75권, 세종 18년 10월 26일 무자 2번째기사-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 ‘아카이브 검색하기’에 들어가면 형태, 유형, 연도, 원본소장처에 따라 분류되어 있는 자료들을 원하는 방식으로 검색할 수 있다. 그러나 형태, 연도, 원본소장처 항목은 하나만 지정해도 검색이 가능한데 ‘유형’의 경우 다른 항목과 이중으로 분류를 해서 검색해야만 검색이 되고, ‘취지서’, ‘발기문’ 등 유형만 선택해서는 내가 원하는 유형으로만 분류되어 검색이 되지 않는다. ‘유형’ 항목만 설정해도 활성화되도록 수정이 필요하다.
- '인물별 아카이브'에서 보통 내가 원하는 인물의 기록을 찾기 위해 사용할 것 같은데, 인물 소개에 대한 부분이 설명은 적으면서 페이지를 차지하는 크기만 너무 크다. 인물 소개란의 크기를 줄이고 하단의 인물에 대한 기록 목록의 비중을 늘리는 것이 보는 데 더욱 편리할 것 같다.
- ‘아카이브 통계보기’ 상단에 신문유형, 신문사, 원본소장처를 색깔과 함께 분류해놓고 그래프의 항목 옆에도 써놓기는 했으나 너무 촘촘해 확인이 어렵다. 그래프 항목에 마우스 커서를 올려두면 개별적으로 선택되면서 색깔과 건수가 나오는 것은 편리하다. 그러니 항목 이름을 그래프 옆에 써두지 말고 커서를 올려두면 색깔, 건수와 함께 항목의 이름이 같이 나오도록 수정하면 보기 더욱 깔끔하고 편리할 것 같다.
- ‘의연금 검색’에 처음 들어가면 지역과 인물 두 가지 항목으로 검색할 수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들어가면 실제로는 지역, 인물과 함께 직업으로 검색하기, 해외 의연금 검색하기, 통계 확인하기의 5가지 검색 선택지가 있다. 물론 가장 크고 자주 쓰는 항목인 지역과 인물이 잘 보이게 해놓은 것은 좋으나 직접 들어가보지 않으면 모르니, ‘의연금 검색’ 첫 페이지에 다섯 가지 항목이 한 번에 나와서 선택이 가능하면 편리할 것 같다.
- ‘1907 KOREA’ 항목을 눌러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다시 홈(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로 돌아오기가 번거롭다. 다른 항목의 경우 상단의 ‘국채보상운동’ 제목을 누르면 다시 홈으로 돌아오는데 ‘1907 KOREA’에 들어가면 제목이 ‘1907 KOREA’이고 연결 페이지 또한 달라서 뒤로 가기를 누르지 않는 이상 다시 홈으로 돌아오기 번거롭다. ‘1907 KOREA’ 페이지 왼쪽 상단 아이콘에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홈페이지 뿐 아니라 원래 홈이었던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로 연결되는 바로가기 아이콘을 추가하면 편리할 것 같다.
- 홈페이지 가장 하단에 ‘Follow us’ 항목에 인스타그램이랑 유튜브 아이콘이 있는데, 인스타그램 아이콘을 선택하면 링크가 잘못되었거나 페이지가 삭제되었다는 페이지가 떠서,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다면 아이콘을 지우고 빨리 인스타 계정을 개설하거나 링크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참고문헌
- 김현, 안승준, 류인태, 데이터 기반 인문학 연구 방법의 모색: 문중 고문서 아카이브와 디지털 인문학의 만남, 2018, 횡단인문학 No.1
- 김용수, 한국의 디지털인문학: 위기, 희망, 현실, 2017, 비평과이론, Vol.22 No.2
- 조의연, 박명관, 디지털 인문학의 위상과 전망, 2017, 한중인문학회 국제학술대회, Vol.2017 No.11
- 강문종, 전통시대 同性愛 연구, 2015, 영주어문, Vol.30
참고사이트
각주
- ↑ 김현, 안승준, 류인태, 데이터 기반 인문학 연구 방법의 모색: 문중 고문서 아카이브와 디지털 인문학의 만남, 2018, 횡단인문학 No.1
- ↑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3번째
- ↑ 『성종실록』 15년 9월 27일
- ↑ 창경궁 배치도 ① 홍화문 ② 옥천교 ③ 명정문 ④ 명정전 ⑤ 문정전 ⑥ 숭문당 ⑦ 함인정 ⑧ 환경전 ⑨ 경춘전 ⑩ 통명전 ⑪ 양화당 ⑫ 집복헌·영춘헌 ⑬ 선인문 ⑭ 월근문 ⑮ 집춘문 ⑯ 관덕정 ⑰ 식물원 ⑱ 춘당지 ⑲ 성종대왕 태실비 ⑳ 관천대
- ↑ 『중종실록』 39년 11월 20일
- ↑ 강문종, 전통시대 同性愛 연구, 2015, 영주어문, Vol.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