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욱 연습
목차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인문"이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및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말한다. … "인문학"이란 인문에 관하여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언어학·문학·역사학·철학·종교학 등의 학문과 직관·체험·표현·이해·해석 등 인문학적 방법론을 수용하는 제반 학문 및 이에 기반을 둔 융복합 학문 등 관련 학문분야를 말한다[1].
'대한민국의 법'이 규정하는 인문학은 위와 같다.
인문학을 뜻하는 영단어 ‘Humanities’는 라틴어의 '후마니타스(humanitas)[2]'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인간다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3]는 사실에 주목해보았을 때,
'그냥 인간에서 비롯된 모든 것들'과 그것들을 다루는 '모든 학문'이 사실상 큰 범주에서의 '인문학'으로 구분돼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요즘 들어서는 그러한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들 중 자연 수치화 해 계산으로 증명할 수 없는 문학, 예술 혹은 철학적 '사유'가 동반된 것들만을 '인문학'으로 구분하고,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사회학'이나 '공학' 등과 같이 가능한 한 구별해내는 추세로 바뀌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4].
고로 인문학이란 '인간다운 것.' '인간다운 것'이란 즉 '인간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비로소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인간을 정의하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로는 '사유'가 있고, 그러한 '사유'는 곧 인류 발전의 뿌리가 되어왔다.
때문에, 우리의 역사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사유 없는 행위'에 대한 경계를 기반으로 굴려져 왔다.
전 세계 어딜 가도 들어볼 수 있는 '넌 왜 그리 생각이 없니?'와 같은 표현들이 그 말을 증명해준다.
사유가 있어야만 인간의 '지식'은 비로소 '지혜'가 되고, 단순한 '분류'와 '암기'는 이윽고 세상을 구성하는 '진리'로 이어진다.
"A man choose, A slave obeys." "인간은 선택하고, 노예는 복종한다."[5]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명작 게임 중 하나인 'Bioshock' 안에서 따온 대사이다.
선택이란 오로지 사유에서 비롯된다.
사유하지 못하는 자는 노예와도 같다.
자동, 전산화의 시대에 사유하지 못하고 오로지 몸에 익은 기술만을 행하는 노예는 곧 사회의 '부품'이요, 교체하면 그만인 단순한 '로봇'일 뿐이다.
사유만이 사유를 낳고, 사유는 선택을 낳는다.
그 선택은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때문에 인문학이란, '사유에서 비롯된', '선택을 낳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서두에 인용한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서의 정의에 따르면
'인문학'에 기반을 둔 융복합 학문 역시 인문학에 포함된다, 하였으니 그 역시 단순히 '인문학'의 한 종류를 칭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테고,
혹은 이미 존재하는, 또 앞으로 탄생할 모든 아날로그 상태의 인문학 요소들을 완벽히 디지털화하여,
그 기반을 온전히 가상화하는 것이 디지털 인문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디지털 세상' 속의 인간이 그 '풍경 속에서' 자아내는 모든 인문학적 창조만을 일컫는, 새로운 학문의 명칭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이 동시에 복합-중의적으로 엮여 뜻하는 것이야말로 '디지털 인문학'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아날로그 환경을 넘은, 디지털 환경에서의 '사유' 결과물, 또 과거의 그것들이 위치한 환경의 오롯한 이전(移轉), 나아가 그러한 '사유들'로부터 탄생하는 새로운 사유들-
그 모든 것들의 통칭이 바로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류의 유산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디지털 아카이브화도, 그 영감에서 탄생하는 수많은 창작물들도.
사실, '의도'라는 단어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듯, 본 수업에서 최우선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은,
앞으로의 새로운 '디지털 사유'의 바탕이 될 귀중한 아날로그 자료들을 '어떻게 해야' 훌륭한 디지털 아카이브로 추려낼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어떻게 해야 그간의 자료들을 단순한 '암기', '정렬'의 결과물로서가 아닌,
'과연 이것이 정말로 나와 타인으로 하여금 새롭고 유익한 사유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하는 '사유의 결과물'로서 다룰 수 있는 지에 대한 고찰이 아니었을까 한다.
'소비만 하지 말고 올바르게 생산할 줄 아는' 능력의 필요성에 대해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다.
사유 없는 행동은 노예와도 같다. 매체의 양방향 소통이 당연해진 오늘날, 사유 없는 소비는 사유 없는 생산을 낳고,
그것은 곧바로 또 다른 쓸모없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꼭 한 번, 다 같이 사유해보도록 하자.
"인간은 선택하고, 노예는 복종한다."
지금, 디지털 인문학과 마주하고자 하는 나는, 그리고 당신은 과연 인간인가? 아니면 노예인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창덕궁, 조선전기에 이궁으로 지어졌다가 17세기 이후 250여 년 동안 정궁으로 쓰인 궁궐의 명칭이다.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총 258년)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이기도 하다.
태종이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정궁이던 경복궁에 들지 않고 경복궁 동편에 새로 이궁(離宮)을 세웠는데, 이곳을 창덕궁이라고 하였다[6].
동쪽에는 담을 사이에 두고 창경궁이 위치하는데, 조선후기에는 두 궁을 합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전소되자, 경복궁보다 먼저 복원이 시작[7]되었으며, 광해군 때 마무리 되었다[8].
그 후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고,
1647년에 복구되었으나 크고 작은 화재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창덕궁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도성 북쪽 응봉에서 내려오는 경사진 지형을 살려, 지세에 맞춰 지어졌다.
따라서 전체 건물 배치는 좌우 대칭을 피하고 크고 작은 건물과 마당들이 불규칙하면서도 서로 연속성을 갖고 이어지도록 구성하였다.
넓은 숲으로 이루어진 후원은 인공을 최소화하고 자연 상태의 언덕과 골짜기로 만들어졌으며 곳곳에 정자와 샘물이 마련되어있는데, 창경궁에서도 함께 이용했다[9].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은 것도 특징이다.
이렇듯 탁월한 배치를 통해 자연과 조화를 이룬 한국식 궁궐이 그 원형을 비교적 가장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힘입어,
1997년 한국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10].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궁중의 무속(巫俗)
그러나 아무리 호색(好色)의 군주(君主)라도 그 많은 궁녀(宮女)들을 다 돌볼 수는 없다. 그리하여 대다수(大多數)의 궁녀(宮女)들은 꽃 같은 청춘(靑春)을 외로움 속에서 헛되이 보내고 부모(父母)를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 효종(孝宗) 5年 9月, 궁녀(宮女) 하나가 우물에 투신(投身)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왕(王)은 이를 가엾이 여겨 휼전(恤典)을 베풀고 궁녀(宮女) 30名을 방송(放送)해 주었다. 그때의 말이 "唐太宗(당태종)은 3千名을 놓아주었는데 나는 고작 30名을 풀어준다."[11]
농경국가인 조선에서 농사일을 방해하는 '홍수', '가뭄' 등의 자연재해는 '국왕'의 덕성과 자질에까지 직통하는 큰 문제였기에,
그러한 재해로 인한 피해가 크다거나, 그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된다든가 하는 것은 나라에 있어 대단히 큰 사태이자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궁에는 '국왕의 잠재적 잉첩(媵妾)'으로 여겨진 수많은 '여관(女官)', 즉 궁녀들이 존재했고,
그 거처가 궁이 되었든, 궁외 자택에서 통근을 했든, 이들 역시 일반 서민들과 마찬가지로 원 없이 사랑하고,
자손을 보고 싶어 하는 인간적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금남(禁男)'의 공간인 궁내, 내전의 업무를 담당하던 그들에게 그러한 기본적 욕망은 당연히 보장될 수 없었고,
외려 그 틈을 노려 발생하는 수많은 범죄 등에 있어서도 '정절' 등의 덕목을 근거로 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이룰 수 없는 '원(願)'은 자연히 갈 데 없는 '원(寃)'과 한이 되니,
당대 남녀 차별사회의 정점이었던 궁중에서도 마냥 무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일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오늘날까지도 전해지는 관용어이다.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이다, 하는 풍속을 더러 오늘날보다 몇 배는 더 따져보았을 과거의 조선에서는 더욱이나.
때문에 인간의 힘이 닿지 않는 재해가 잦을 때는, 여원(女寃)의 탓이라 하여 젊은 궁녀들을 궁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많았다, 한다.
그 중에서도, 영조 때 궁녀 45명을 풀어준 일이 가장 규모가 큰 방송(放送)이었다[12].
위 내용을 통해, 우리는 '민간'에나 흔히 퍼져있을 법한 미신, 내지는 풍속(민속)이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는 곳'일뿐인 궁중에서도 그 힘을 발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미신, 신앙은 자연히 곧 그런 것들에 일평생을 마친 무당들의 풍속, 곧 '무속'에 연결되기 마련이었고,
표면적으로는 사문난적이라 하여 그런 것들을 경멸해 마지않았던 유학자들이 정치를 논하던 궁 외전,
나아가 그들 유학자의 머리를 담당하는 국왕과 그 일가가 거처하는 내전과 동궁전 등
그 삶의 공간 자체인 궁중 곳곳에 그 모습과 영향력을 드러냈다.
그러나 개인적인 견해로, 그러한 모순이 결코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 생각되는 것이,
'실제로 행하는 것만이 곧 무엇인가의 유일한 증명'이라 여겼던 당시 유학자들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유학(유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중대사'에 임함에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과거부터 이어져 온' 누군가(주로 백성, 가족)를 위해 벌이던 국왕일가의 의례적 행사'로써의 무속에 의지함은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던 행태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물론, 조광조와 중종 사이의 일화 등을 보아 알 수 있듯, 모든 이가 그것을 마냥 좋게만 받아들이지만은 않았으리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각설하고, 이러한 궁중무속이란 것은, 국무당(國巫堂)이라 하여,
전속무당이 궁중에 드나들고 명산대천에 궁녀, 내시를 보내어 기도하던 고려 때의 기은(祈恩) 풍습이 자연스럽게 조선왕조에도 이어진 것이라 본 것이 김용숙 선생의 견해이다.
궁중 무속행위의 대표적인 예시 인물로, 민비(閔妃)가 있다.
'민비같이 무당, 판수를 좋아한 왕비도 없다'고 전해지는데,
일개 무녀가 왕비의 총애를 입어 재상 부럽지 않는 영화와 권세를 누려 이를 지탄하는 상소문까지 나올 판이었다 한다.
민비가 행한 무속의 내용과 그 비용은 「위축발기(爲祝件記)」에 보다 자세히 전해지는데,
거의 대부분이 민비가 아들 순종을 위하여 명산대천을 비롯해 온갖 당주(堂主)와 성황당(城隍堂)에 대고 축도를 드렸다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어디 축도뿐이랴, 전속 무당에게 '진령군'이란 '군호(君號)' 역시 하사했다[13].
한 번 기축에 전문(錢文)만도 25,000냥(兩)이 넘으니 그것을 오늘날 돈으로 환산(換算)하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1年에 탄일(誕日)말고도 명절(名節) 및 절일(節日), 정월(正月), 사월파일(8일) 단오(端午), 칠석(七夕), 추석(秋夕), 동지(冬至)와 또 비빈(妃嬪)에게 태기(胎氣)가 있을 경우도 같다. 출산(出産)까지 얼마나 아들 낳기를 축원(祝願)했을 것이며, 출산(出産) 후에도 그 전정(前程)을 위하여 장성(長成)하기를 얼마나 빌었을 것인가. … 서울 장안(長安)에 무당(巫堂) 판수가 우글거리던 한말사회(韓末社會)의 어두운 일면(一面)을 엿볼 수 있고 서울 근교(近郊)에서만도 한 번에 적지 않은 재물(財物)을 소비(消費)했음을 볼 때, 이것의 전국적(全國的)인 규모(規模)를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인물에 대한 세세한 평가가 어찌됐든,
세간에 있어 민비는 곧 대원군과 대적한 '여걸'과 같은 인물로 알려져 있는 편이니,
이렇듯 큰 재산(국고)을 들여 굿에 빠진 모습이 쉽사리 납득되지 않기도 하나,
왕비라 하여도 결국 한 사람의 '어미'였기에,
어릴 때부터 유달리 몸이 약했던 순종을 그다지도 사랑했다는 증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구한말 민비에 관한 이야기를 제하고도, 다양한 사례들을 기록을 통해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허나, 그 중 상당수를 직접 찾아내 궁궐 내외 장소에 기반, 소개하기에는 시간관계상 아직 미처 다 찾아 검증해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때문에, 하단에 소개할 여러 사례들은 상기 인용문과 더불어 오로지 '김용숙' 선생의 논문에서만 발췌해 정리한 것으로,
반드시 추후 다양한 내용을 추가, 교차 검증해야하는 것임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국무(國巫), 당주(堂主)
궁중에서 무속을 행하는 무당을 더러 "국무", 혹은 "당주"라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광해군 대의 「계축일기(癸丑日記)」 속에는 대비전(大妃殿 / 인목대비)과 대전(大殿 / 광해군) 사이 적대관계가 절정으로 치달아,
결국은 대비가 왕을 저주했다는 혐의로 폐모위기에까지 몰리는 대목이 있다.
그 중 수란개(水蘭介)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대비의 단골무당이며, 궁 전속이었기에 국무녀(國巫女)라 일컬어진 듯하다.
대비가 자신이 아닌 '잡 무녀(雜巫女)'를 따로 부르는지는 몰랐다고 선을 긋는 모습이 나오는데,
대비가 자신을 시켜 왕을 저주한 것이 아니냐는 문초에 대한 답으로 나온 말로 보인다.
저주지사(詛呪之事)같은 것은 잡 무녀나 한다는 것인데,
오늘날 사극 등의 소재로써 유명한 숙종 대 배경의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에서
궁내에 신당을 꾸며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이 사주한 무녀는 국무녀가 아닌 한낱 잡 무녀였다, 하는 해석도 가능하겠다.
한편, 영-정조 대의 「한중록(閑中錄)」에 내려와서는 세자가 몸이 아플 때의 무속을 담당했던 '당주'란 존재가 드러나는데,
세자가 어릴 적 「경문잡서(經文雜書)를 좋아하여, 당주복자(堂主卜者) 김명기(金明基)에게 경(經)을 써오게 하곤 그걸 공부해 외웠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의 당주(堂主)는 남자다.
물론, 이러한 기록들만으로 궁중에 대대로 국무'녀'가 따로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알 순 없으나,
조선 말 민비 때에 이르러선 무녀에게 군호를 바치는 지경이었으니,
적어도 이때부턴 국무(國巫)니, 당주(堂主)니 하는 것의 성별 구분이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김용숙 선생의 관점이다.
1872년생인 김명길(金明吉) 상궁이나 다른 상궁들의 말에 의하면,
무당의 굿판을 좋아해 곧잘 벌이던 민비와는 달리, 독경(讀經)을 선호하던 엄비(嚴妃)가 있던 덕수궁(德壽宮)시절에는
국무녀(國巫女)라는 명칭은 없고 그저 경을 읊는 당주(堂主)만 있었다 하는데,
이를 통해 영조 대까지만 해도 사실상 국무'남' 격이었던 당주(堂主)라는 존재가 후기에 가선,
민비가 무녀에게 진령군(眞靈君)이니 현령군(賢靈君)이니 하는 남성의 호를 하사한 후로부터 남녀 구분이 흐려져
'국무녀'와 구분되지 않고 '당주'로 일원화된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포(大砲)와 축귀(逐鬼)
궁중에서 대포를 쏴 귀신을 쫓았다는 일화도 찾아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계축일기(癸丑日記)」에 기록된 것으로, 또 광해군과 인목대비 사이의 일이다.
광해군이 명례궁(明禮宮)을 향해서 대포를 쏘게 했다는데,
실록이 아닌 「명륜록(明倫錄)」에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기사가 있다.
광해 7년 2월 9일에 있었던 일로,
왕이 관원더러 화포장(火砲匠) 이십 명(二十 名)을 인솔하고 와, 10일부터 연 2일간 대궐과 동궁에 총포를 쏘도록 명령했고,
이에 신하들이 '왕의 성덕 앞에 사귀(邪鬼)같은 것이 침범할 리가 없으니 헛되이 백성을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며 반대했다는 내용이다.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아 예민했던 인목대비의 입장에서는, 광해군이 귀신을 자기 쪽으로 쫓는다고 느꼈을 것이다.
김용숙 선생이 이 논문을 집필할 때 까지만 해도,
나이가 지극하게 든 시골 어르신들 중 일부는 "기차가 생기고 나서부터 귀신이 도망갔다"고 믿었다 하는데,
이러한 믿음이 곧 시끄럽게 총을 쏘아 축귀(逐鬼)하겠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한 것이 아닐까, 하는 떠오름이 있었다 한다.
국혼(國婚)과 여탐 굿
'여탐'이라 하는 흥미로운 굿도 존재했다.
이는 왕가의 혼례가 진행되기 전, 별궁(別宮)에서 거행하는 일종의 '살풀이굿'에 해당했다.
왕비나 세자빈으로 간택된 처녀가 삼간택(三揀擇)후 별궁으로 들어가,
국혼(國婚)날 가례(嘉禮)에 이르기까지 왕비로서의 교육을 받는 "별궁살이" 기간 동안에 진행되는 것으로,
날을 받아 나랏당주(국무)를 포함한 5명의 무녀들이 행했다.
김명길 상궁의 말에 따르면,
안동별궁(安洞別宮)에서 자신이 목격한 여탐 굿이 그야말로 "기절할 만큼 망측하고 무서웠다"고 한다.
대청(大廳)에서 굿을 벌이는데, 홍두깨에 가발과 족두리를 씌우고,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혀 사람같이 세워두곤,
5명의 무녀들이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함께 춤을 추었다.
이날 본궁의 궁녀들이 모두 나오고, 종친과 외척, 양반 부녀까지 모두 구경하러 참석했다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아주 큰 굿이었음에 분명한데, 그 주관은 제조상궁(提調尙宮)이었다 한다.
이 굿은, 새 식구를 궁중으로 맞이하기에 앞서 '살풀이'와 함께 조상신령들에 대한 인사를 겸하는 목적으로 행한 것으로,
유교적 제례와도 그 뜻을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 숨은 목적은 그것이 세자의 재혼이었기에, 그 전빈이었던 민 씨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 굿이 진행되는 동안 굿의 당사자였던 처녀 윤비(尹妃)는 그저 자기 방에 앉아서 공부만 할 뿐, 일절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다.
여담이지만, 이 윤비는 매우 열렬한 불교 신봉자였는데, 그 심복궁녀 중 고상궁(高尙宮)이란 자가 창덕궁 근처에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했을 만큼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때문에 윤비(尹妃) 이후, 일절의 무속은 창덕궁에서 종적을 감췄고, 고사(告祀) 한번 지낸 적이 없었기에, 저 때 벌어진 굿 판이 사실상 궁에서의 마지막 무속 행위였던 셈이다.
독경(讀經)과 세초위축(歲初爲祝)
세초에 경을 읽히는 날, 금성위(金星尉)[14]도 들어오고 마침 날이 늦어 독경하는 배설(排設)이 늦으니, 궁녀들이 본디 공순치 않은 인물로 서로 앉아 무엇이라 하였던지 선희궁(宣禧宮)도 노하여 하고 영조도 그 눈치를 스쳐 알고…
다시 한중록이다.
세초 궁중에서 위축의 독경을 가졌다는 기록인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위축의 수단이 신사(神祀) 굿이 아닌 독경이었다는 것과,
여인들뿐만이 아닌 군주와 세자까지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것이 단순한 무녀들의 굿들과는 격이 다른 종류의 것으로,
왕은 물론이거니와 왕대비, 왕비, 세자빈 등에 더해 아직 옹주와 약혼(約婚)사이었던 부마(駙馬)[15]까지 참석했다는 사실에서,
실상 축제와도 같은 연례행사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흔히 궁중의 무속이라 하면 주로 왕대비, 왕비 등 여성들에 의해 행해져 온 것으로 여겨지지만,
의외로 남성들도 종종 참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장과 팥죽
여기서부터는 서론에서 언급한 '궁녀들의 방송' 사례와도 같은,
무속이 아닌 민속(民俗)으로 분류해야 마땅할지도 모르는 내용들이나,
'궁중의 민속' 이란 말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으니,
대신 '일반 궁중풍속'으로서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사례들을 소개한다.
섣달 그믐날 새벽, 궁중에서 왕과 왕비를 위시하여 상궁, 내인들까지 마시는 것이 있었다 한다.
'무장'이라 하는 일종의 메주 국물인데,
백 항아리에 소금물 끓인 것을 담아 식히고, 거기에 메주를 뚝뚝 떼어 넣어 우린 물을 마시는 것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기에 앞서, 벽사(辟邪)의 뜻을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명길(金明吉) 상궁은 그 항아리 속을 한 번 들여다 본 뒤로부터는 결코 마시지 않았다고 하는데,
메주 향이라 함은 필시 고약했을 것이고, 그것을 물에 풀었으니 아마 비위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한다.
(사담이지만, 오늘날 민간에서도 제사-차례-를 지낸 뒤 물 대접에 밥알 푼 것을 마시면 무서움이 없어진다 하여,
가족끼리 돌려 마시는 풍습이 있는데, 혹시 이와 어떤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민간에서 팥죽은 보통 동짓날에 쑤지만,
궁중에서는 동지뿐만 아니라 여름 삼복마다 쑤어 온 궁중이 다 먹었다고 한다.
그 팥죽을 쑤던 솥은 지금 창덕궁 대조전[16] 층계 위 양편에 장식같이 놓여 있는데,
청동으로 된 솥으로 이것을 부견주라 하였다.
화로 비슷한 생김새인데, 양 편에 고리손잡이가 있고 발이 없다.
사자(使者)밥
오늘날에도 민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속(喪俗)으로, '사자(使者)밥'이 있다.
말 그대로, 망자의 혼을 모셔가는 ‘저승사자’를 대접하는 밥이다.
궁중에서도 왕이 승하했을 때에 차려놓는데, 민간과는 다른 격식이 있었다.
왕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 뒤뜰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화문석(花紋席)을 깔고,
그 위에 다리가 긴 제상(祭床)을 남면(南面)으로 놓고,
그 앞에 모란병(牡丹屛)[17]을 친다.
상 위에는 좌우로 와룡(臥龍) 촛대에 불을 밝히고(밤에만),
우측에는 큰 놋 양동이에 흰밥을 가득 담아 놓고, 좌측에는 술 한 동이를 놓아
일직사자(日直使者)[18]와 월직사자(月直使者)[19]에게 대접했다.
제상 아래 화문석 위에는 미투리[20] 일곱 켤레를 두었다.
또, 병풍 위에는 좌우로 호피, 왕의 주의(周衣/두루마기)를 걸쳐 놓았는데,
이때 호랑이 가죽은 아마도 벽사의 의미로 두었을 것이라는 게 김 상궁의 의견이다.
이렇게 차려진 사자밥은 입재궁(入榟宮), 즉 입관할 때까지 두었다고 한다.
한편, 모란병은 상제(喪祭)에 한해서만 쓰였으며, 대궐 안 약식사당인 선원전(璿源殿) 내부의 병풍들에도 모두 이 모란 꽃이 그려져 있었다 한다.
솥뚜껑 꼭지 밟기
조선의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풍속으로,
신부가 처음 시가에 들어올 때 솥뚜껑을 밟고 들어오던 것이 있었다 한다.
논문의 저자인 김용숙 선생 역시, 어릴 적 서울에서 목격한 적이 있다 밝혔다.
그런데 이를 궁중에서도, 간택(揀擇) 때 여러 처녀들을 대상으로 일제히 행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창덕궁을 정궁으로 사용하던 시절,
처녀를 간택하는 장소는 희정당(熙政堂)의 넓은 대청이었고,
그들 처녀들의 출입문은 단봉문(丹鳳門)이었는데,
이때 궁 안쪽으로 문지방 바로 앞까지 큼직한 가마솥 뚜껑을 엎어놓아,
처녀들은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그 솥뚜껑 꼭지를 딛고 대궐 문지방을 넘어들어 갔다고 한다.
이 역시 김 상궁의 증언에 따른 내용이다.
보완사항
앞서 짚고 넘어온 바 있듯, 위 내용들은 모두 김용숙 선생의 논문만을 참조, 작성한 것으로,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몹시 흥미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으나,
비교 대조군이 적은 탓에 아직 검증하고 보완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이다.
한편, 그 대부분의 내용이 구한말 김 상궁의 기억을 되짚어낸,
물증이 없는 경험담 위주로 구성되어있다는 한계가 있다 지적될 수도 있겠으나,
'풍속'이란 것의 특성상,
사람 대 사람 사이에 구전되거나, 으레 마땅히 하던 행위로서 자연스럽게 전해지기 마련이라
그 '세세함'이 실록 등과 같은 공문서에 온전히 남기는 힘들었을 궁중의 풍속,
그리고 무속의 일면을- 비록 말기이긴 하나, 그 당대를 살아가던 이의 기억이란 형태로 전해 받아,
후에도 이렇게 나름의 교차검증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매우 큰 의의가 큰 값진 자료가 아닌가,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학기에 내가 참여하고 있는 창덕궁과 관련된 내용이 많은 것 같아
장소와 관련된 스토리의 연계를 짜고자 할 때 큰 도움이 될 성 싶은 것이, 소소한 기쁨이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이상 작성하시오.
최대한 순수하게, 해당 사이트를 처음 방문한 이용자의 시선에서만 보려고 노력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비판을 위한 비판이 있지 않았나, 또 그로인해 문투가 조금 과격해지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있다.
이에 앞서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메인 페이지의 화면 구성이 몹시 난해하다.
좀 속된 말로 얘기해서, 속 터져 죽을 것 같은 구성이다.
상업적 미니멀리즘의 극을 추구한 결과물로서 나타난 '애플 사 제품' 등의 상품 소개 페이지가 이런 식으로 수직구조를 띈 것이 많으나,
이는 간결하고도 강렬한 시각적 자료 단 몇 장만으로 브랜드의 가치를 오롯이 전달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홍보용으로나 적합한 것이며,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익숙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포탈에 유리한 모습은 아니다.
'네이버', '다음', 혹은 '나무위키', '디시인사이드' 등,
한국인에게 익숙한 포탈의 구조는 최대한 한 눈에 모든 구성요소를 살펴볼 수 있는,
또, 그것에서 연결되는 모든 자료로의 하이퍼링크가 전면적으로 노출되어있는 수평면적인 구조이다.
최초의 검색을 위해 스크롤을 내려야하는 사이트는 경쟁력이 없다.
국가예산을 들였다는 티를 내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메인 배너의 화려한 이동효과 등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둔 채 실속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말하지만, 이른바 수평개방 형태의 자유로운 접근 후,
수직폐쇄 형태의 내용몰입이 한국인에게 익숙한 포탈의 기본 구조이다.
초대면에, 한 눈에 이용자가 원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
상기 문제점에 이어지는 것으로,
각 항목들이 기능별로, 실용적으로 일목요연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난잡하다.
이를테면, 우리가 특정 정보를 얻기 위한 백과사전 페이지를 열었거나,
물건 구입을 위해 구매 사이트를 방문했다면,
메인 웹사이트의 로딩이 끝나는 동시에 바로 눈에 들어오는 매뉴얼 탭을 통해,
다른 창으로 이동하지 않고도 대분류로 접혀있는 목차를 펼쳐
필요한 중분류, 소분류를 거쳐 대상을 세분화한 뒤 검색을 시작할 수 있다.
(Ex / 삼성 노트북을 구매하고자 할 때 : 가전 -> 노트북/PC -> 브랜드 명 "삼성")
그런데, 이 페이지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검색하기 위해서는,
첫 메인 페이지의 탭이 아닌 다음 창으로 몇 단계를 옮겨 들어가야만 한다.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고, 검색의 의욕을 떨어뜨린다.
하이퍼링크가 전혀 활성화 돼있지 않다.
본 수업의 교수님께서도 몇 차례 강조하신 바 있듯,
하이퍼링크가 없는 디지털 문서는 앙꼬 없는 찐빵이나 진배없다.
해당 사이트 개발진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창피해야 할 이야기이기도 한데,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전문 인맥이 전혀 없는 개방형 위키인 나무위키 등에 등재된 문서들이
오히려 그러한 접근성 면에서는 무척이나 편리하게, 완벽에 가깝게 짜여있다.
(물론, 그 편집 특성 상 자연히 절대 다수 보편의 시선에 불편하지 않게끔 지속적으로 다듬어지니, 어쩌면 그 가독성과 편리성에 있어서는 모든 아카이브의 도착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들도 딱히 찾아볼 수 없다.
원하는 사항에 대해 검색해 입장하기 전까지는 완벽히 개방적 수평구조이며,
그 상세 내용에 입장해서 부터는 몰입을 이끌어내는 수직구조이다.
그 수직구조 특유의 폐쇄성을 해결하기 위해,
문서 사이사이 등장하는 관련 단어(사람에 따라 생소할 수 있는)들이나, 인물, 이어지는 개념들은
그 내용이 설명돼있는 개별 문서로 곧장 이어지는 하이퍼링크로 작동하게끔 만들어져 있어,
'수직구조 안에서의 수평이동'도 가능한 바, 검색의 쾌적함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문서에 있어 불편함을 전혀 느낄 수 없게끔 되어있다.
허나 이 페이지는 정반대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수직구조로, 애초부터 수평이동이 어려운 구조인데,
그 수직구조가 제공하는 정보들 속엔 단 하나의 하이퍼링크도 찾아볼 수 없다.
가령, 문서를 읽다 의연금이 뭐지? 하면, 그 단어를 설명해줄 개별문서로 이어지는 하이퍼링크가 없다.
하물며 각주조차도!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상기 언급한 '나무위키' 등을 통한 검색이 특히나 보편화된 오늘날에 있어,
이러한 하이퍼링크가 활성화되지 않은 단어, 대상은 이용자들에게 있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단어로 여겨지는 현상도 존재함을 필히 염두에 두어야한다.
중요하지 않으니까 부가설명이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콘텐츠 보기"의 배치가 참으로 실용적이지 못하고, 구성 역시 매우 부실하다.
자꾸만 '나무위키'와의 비교를 하게 되어 어찌 보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몰입과 관심을 유도하는 틀을 짜는 단계의 문제이기도 해 언급을 피할 수가 없다.
나무위키와 같은 디지털 아카이브의 최대 장점은, '지식을 빨아들이는 연계를 멈출 수가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령, 궁금하던 'a'에 관해 검색해 알게 되면,
그 'a'를 설명하고 있던 'b'라는 항목의 개별 문서 역시 읽게 되고,
또 그것을 설명하는 'c'를 읽게 되고 하는 것이 하이퍼링크가 잘 구성된 디지털 문서의 힘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계'가 이어지게 하려면, (하이퍼링크 구성에 앞서) 그것이 시작될 만한 '기반'이 존재해야 한다.
그 기반이라 함은 필시 호기심일 터.
아무런 '호기심'도 솟아나질 않는데 검색을, 지식활동을 이어나가는 이는 세상천지에 아무도 없다.
금전적 보상이라도 주어지지 않는 이상.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은,
우리 모두가 본 수업에서도 열중하고 있는 '이야기', 이른바 스토리텔링이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감각적이고 흥미로운 스토리!
혹은 간결하지만 시선을 훔치는 전제(개요)!
오로지 그것이야말로, 이용자로 하여금 본 사이트를 헤엄치며 온갖 지식을 파고들게끔 하는 시발점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본 사이트에서, 그러한 스토리텔링을 담당해야 할 부분이 바로 '콘텐츠 보기' 항목이다.
헌데 이 항목, 위치가 몹시 맘에 들지 않는다.
온갖 쓸데없는 특수효과는 다 제쳐두더라도,
필히 가장 처음으로 등장해야하는 것이, 스크롤 다운을 하고도 첫째가 아닌 어중간한 셋째에 자리해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궁금하지도 않고 몰입도 안 되는데 검색을 지속할 이용자는 없다.
그 내용도 한 번 살펴보자.
총 다섯 꼭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이야기의 끝 부분엔 퀴즈가 자리하고 있고,
이 퀴즈의 내용이나 연출은 또 몹시 부실하다.
그저 ‘누르기만 하면 뿅 나오는 쉬운 답안’은 대체 왜 만들어 둔 걸까?
(위에서도 언급했듯, 그저 '비용이 소요됐다는 데에 걸맞아 보이려는' 겉멋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샘솟는다.)
사실, 이런 퀴즈들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자리에 본디 다른 것이 위치해야 자연스러울 뿐.
세상천지 모든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이 있다.
내가 지금 이 사이트의 이용자로서 기를 접했으니, 마땅히 승으로 넘어가고 싶다 치자.
헌데, 그러기 위해선 문서의 최상단으로 다시 올라가, (그 와중에 가독성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승이란 문서의 탭을 눌러줘야 한다.
맥이 탁, 끊긴다는 것이다. 누가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하겠는가?
차기 문서가 존재하는 항목의 경우, 내용을 다 읽고 나면 자동으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게끔 만들어두거나,
얼른 넘어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버튼이 하나 더 존재하게 해두는 것이 구성의 기본일 것이다(시중에 창궐하는 온갖 싸구려 웹툰들만 보더라도 그렇게 구성돼있다).
그런데, 퀴즈를 넘겨 마주한 자리에는 생뚱맞게도 아카이브 검색 버튼이 자리한다.
이는 반드시 고쳐야 할 사안으로 보인다.
사담이지만, 굳이 꼭 퀴즈를 넣고 싶다면,
그 퀄리티를 좀 더 올려, 마지막 꼭지에만 등장하게 해두면 더 좋을 것 같다.
"콘텐츠 보기"의 다섯 번째 꼭지 구성이 이상하다.
다섯 번째 꼭지는 이른바 총정리 대목인데,
(마찬가지로 부실한 내용의 충실도는 미뤄두고) 그 구성이 한눈에 봐도 무엇인가 이상하다.
2번 챕터는 누가 참여했나요?로, 운동의 주축이 된 이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고,
3번 챕터는 국채보상운동은 어떻게 끝났나요?로, 운동이 실패로 끝났다는 무지 짧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다음 4번 챕터는 곧바로 국채보상운동을 왜 기억해야 하나요?이다.
이게 굉장히 어이가 없는 구성인 것이,
금 모으기 운동 등 '국채보상운동의 진행'이란 내용의 과정, 허리가 일체 사라졌기에,
이용자로서의 나에게 남은 이 운동에 대한 유일한 인상이란,
일단 시작해서,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데 끝이 났고,
잘은 모르지만 기억해야 하는 것이 돼 버린다.
참으로 기가 막힌 총 정리가 아닐 수 없다.
모바일 환경에 대한 배려가 마련돼 있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에 비하면 사소한 것인데,
모바일 환경에서 접속한 이용자들에 대한 배려, 최적화가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다.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어떤 오프라인 자료, 혹은 타 매체를 통해 그것을 접한 뒤,
본 사이트를 즉석에서 찾아보는 이들도 많을 텐데,
모바일을 통해 해당 사이트에 접속하면, 사이트를 구성하는 통계 그래프나 도표와 같은 주요 자료들의 폰트가 죄다 겹치고 깨져 보이는 등,
이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마련돼있지 않은 모습이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밤까지 소형 디지털 기기를 달고 사는, 모바일 친화의 세대가 주류로 자리 잡아가는 오늘날,
더군다나 그것이 더욱 가속화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이러한 결점은 운영에 있어 다소 치명적이지 않나, 생각한다.
각주
- ↑ 국가법령정보센터 中‘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
- ↑ 본교의 '교양학부'를 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 ↑ 두산백과사전 中 '인문과학(humanities,人文科學)'
- ↑ 그런데, 기계공학에 있어 어떠한 철학적 사유가 동반된다면 그 역시 인문학으로 구분돼야 마땅하지 않을까?
- ↑ Irrational Games 作 게임「Bioshock」, 2007 中 '앤드류 라이언'의 대사
- ↑ 태종 5년 10월 25일(1405)
- ↑ 선조 40년(1607)
- ↑ 광해군 2년(1610)
- ↑ 조선왕조실록 전문사전 위키
- ↑ 국가문화유산포탈
- ↑ 김용숙 「구한말의 궁중 풍속」 中, 孝宗實錄(효종실록) 권 1143면(面) 우(右) / 이하 인용문 출처 모두 동일
- ↑ 영조 26년 9월(1750)
- ↑ 일반적으로 양민 여성이 하사받을 수 있었던 최대의 호는 '당호'로, 결코 '군호'가 아니었다. 하물며 천민 계층인 무당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 ↑ 화평옹주의 남편(부마), 박명원
- ↑ 왕의 사위를 이르는 말
- ↑ 현재는 '대조전' 뿐만 아니라 '인정전' 앞 층계 위에도 놓여있다.
- ↑
- ↑
- ↑
- ↑ 마로 만든 고급 짚신
참고문헌
- 논문
- 김용숙, 「구한말의 궁중 풍속」,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