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두선

North Korea Humanities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박선경(KNU2024)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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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명(한자명)
최두선.png
출처 : 나무위키
 
한글명 최두선 한자명 崔斗善 영문명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894년 몰년 1974년 출신지 서울 전공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제8대 국무총리로 재임하였다. 본관은 동주. 호(號)는 각천(覺泉)이다. 한성부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강원도 철원을 거쳐 경상남도 창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제8대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유엔총회 한국대표,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육당 최남선의 동생이다.[1]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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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성장

1894년 11월 1일 한성부 남부 명례방 동현계 사정동[3]에서 아버지 최헌규(崔獻圭)와 어머니 진주 강씨 사이의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바로 위의 형이 최남선이다.

휘문의숙(3회)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7년 와세다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8년 김성수를 알게 되어 그가 운영하던 중앙학교의 학감으로 초빙되었다.

1919년에는 송진우 등이 피체되면서 중앙학교장을 맡게 되었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 이사회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8.15 광복 후 교육계를 떠나 경성방직주식회사 사장을 맡았고, 1946년에는 김구, 김성수, 조소앙 등의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동참하였다.

1947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선임되었다.

1948년 3월 미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63년에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동년에 출범한 박정희 정권에 부정적이었으나 박정희의 포용정책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민정당 등 야당의 한일기본조약 비준 반대로 사퇴하였다.

1968년에 모교인 와세다대학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1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고 1972년에 남북적십자회담을 이끌어 냈다.[2]


학력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기관를 졸업 후 일본 와세다 대학교기관에서 철학과 학사를 취득하고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 대학원기관로 독어독문학과 문학 석사를 취득한다. 이후 독일 예나 대학교 대학원기관에서 철학과 철학석사를 취득했다. 또한, 독일 베를린 대학교 대학원기관에서 철학과 철학박사를 취득했다.[3]


명예 박사 학위

1963년, 고려대학교기관에서 명예 철학박사를 취득하고, 196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교기관에서 명예 철학박사를 취득한다.[4]


상훈

청조소성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는다.[5]


제목5





연구


1940년 말 중앙집행위원, 동아일보사 사장,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다.

해방 후인 1946년 10월 한국민주당이 기구를 개혁하고 김성수가 위원장이 되었을 때,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7년 1월 24일 우익진영의 42단체가 연합해 결성한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7년 2월 동아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1948년 3월 5·10선거를 앞두고 조직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6]


1950년대 상무집행위원, 전국대의원회 부의장, 중앙상무집행위원회 부의장, 부의원장으로 활동하다.

1949년 10월부터 민주국민당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51년 10월 전국대의원회 부의장, 1952년 10월 중앙상무집행위원회 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53년 11월 23일 민주국민당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7]


1960년대 국제연합한국협회 부회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총리로 활동하다.

1955년 민주당 발족을 계기로 정계를 떠났으며, 1956년에는 유엔가입전국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1월 10일 조경규(민의원 부의장),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박영출(민의원 외무위원장)과 함께 유엔 민간대표로 선출되어 유엔총회 한국대표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60년 6월 국제연합한국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8월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선출되었다. 9월 17일 유엔총회 파견대표단의 대표로 10월 20일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유엔 가입을 위해 활동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후 군사정부는 미국의 이해와 지지를 촉구하기 위해 민간사절을 파견했는데, 이때 김활란(학계 대표), 한경직(종교계 대표) 등과 함께 언론계 대표로 선출되어 민간사절단으로 6월 20일 미국으로 건너가 미 정부당국자, 민간지도자, 교포들과 접촉해 활동을 전개하고 7월 18일 귀국했다.

1963년 7월 31일 재임 만 16년 6개월 만에 동아일보 사장직에서 퇴임했다. 1963년 8월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재선되었으며 1963년 12월 제3공화국 초대 내각의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발족 당시부터 ‘방탄내각(防彈內閣)’이라는 혹평을 받으며 당과 행정부 사이의 갈등, 대일굴욕외교반대 등 난국에 부딪쳐 집권 5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1964년 5월 9일에 사퇴했다.[8]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최남선(崔南善) Person: 최두선 A hasBrother B
Person: 최두선 Institution: 고려대학교 A graduates B
Person: 최두선 Institution: 동아일보 A worksAt B
Person: 최두선 Group: 제3공화국 내각 A isMemberOf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임송자 "최두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두선" 『나무위키』online "최두선" 『위키백과』online





주석


  1. 최두선-위키백과
  2. 최두선-나무위키 중 생애
  3. 최두선-위키백과 중 학력
  4. 최두선-위키백과 중 명예 박사 학위
  5. 최두선-위키백과 중 상훈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두선 내용 부분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두선 내용 부분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두선 내용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