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재와 그 학문 -조선유학사의 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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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재와 그 학문-조선유학사의 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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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李晦齋와 그 學問-朝鮮儒學史의 一節-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6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6년11월
시작쪽 132쪽 종료쪽 147쪽 전체쪽 016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


나는 본 학보 제4권에 있어 송도구경(●●●●)사람(●●)으로 일생을 순처사(○○○)순사색적(○○○○) 생활(○○)로 보냈던 화담(花潭) 서 선생에 대하여 소개한 바 있거니와 이번에는 화담과 동시대 거의 동년배의 사람으로 (그 사이에 종종의 재미있는 대비Contrast를 현출한) 경주고도(●●●●)()하여 다년(○○) 관계에(○○○) 출입(○○)하고 변론저술(○○○)에 왕성하였던 회재(晦齋) 이 선생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화담과 회재는 당시 경기와 영남을 각각 대표한 학자라고 할 수 있는 독예정진(獨詣精進)의 학인으로 공히 조선이학의 전성기를 인도한 직접 선구자이며 화담은 후일 기호학의 조종(祖宗)인 이율곡(李栗谷, 한양인)의 사상에 영향한 바가 많았음에 대하여, 회재는 영남학파의 종장(宗匠)이 이퇴계(李退溪, 예안인)를 자극함이 많았었다. 그리하여 이퇴계는 늘 회재의 학을 칭송하여 마지아니하였다. 마치 율곡이 화담에 대하여 그는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묘를 보았다 혹은 독창자득의 견이 있다고 창양함과 같이 퇴계는 회재를 정예(精詣)의 견, 독득(獨得)의 묘가 있다하여 더욱 그의 ‘입언수후(立言垂後)’의 일사로써 동방희유(東方稀有)의 유자(儒者)로 추인하여 저 일두 정여창(鄭汝昌, 세종 32년 경오생 연산군 십년갑자졸)•한훤 김굉필(金宏弼, 단종 2년 갑술생 연산군 십년갑자졸)•정암 조광조(趙光祖, 성종 13년 임인생 중종14년 기묘졸)의 삼현(三賢)과 아울러 칭하는 동방사현(東方四賢)의 일인이 되게 하였었다. 이 점은 이율곡의 화담에 대한 칭양에 비할 바가 아니니 회재의 조선유학사상에 처한 지위를 또한 알 것이며, 따라서 이에 특히 그의 생애 및 학문의 대강을 소개하려는 바이다.
쪽수▶P132-1나는 本學報第四卷에 있어 松都舊京의(●●●●●) ()으로 一生을 純處士(○○○)純思索的生活(○○○○○○)로 보내든 花潭 徐先生에 對하야 소개한바 있거니와 금번에는 花潭과 同時代 거의 同年輩의 人으로 (그 사이에 種種의 滋味있는 對比Contrast를 現出한) }慶州古都에 生(●●●●●●)하야 多年(○○) 官界에(○○○) 出入(○○)하고 辯論著述(○○○○)()하였든 晦齋 李先生에 對하야 紹介하려고 한다. 花潭과 晦齋는 當時 京畿와 嶺南을 各各 代表한 學者라고 할 수 있는 獨詣精進의 學人으로 共히 朝鮮理學의 全盛期를 引導한 直接 先驅者이며 花潭은 後日 畿湖學의 祖宗인 李栗谷(漢陽人)의 思想에 影響한바가 많헜음에 對하야, 晦齋는 嶺南學派의 宗匠이 李退溪(禮安人)를 刺戟함이 많헜었다. 그리하야 李退溪는 늘 晦齋의 學을 稱頌하야 마지아니하였다. 마치 栗谷이 花潭에 對하야 그는 理氣不相離의 妙를 보았다 혹은 獨創自得의 見이 있다고 彰揚함과 같이 退溪는 晦齋를 精詣의 見, 獨得의 妙가 있다하여 더욱 그의 「立言垂後」의 一事로써 東方稀有의 儒者로 追認하야 저 一蠹鄭汝昌(世宗三十二年庚午生燕山君十年甲子▶P133-1卒)•寒喧 金宏弼(端宗二年甲戌生燕山君十年甲子卒)•靜菴 趙光祖(成宗十三年壬寅生中宗十四年己卯卒)의 三賢과 아울러 稱하는 東方四賢의 一人이 되게 하였었다. 이 點은 李栗谷의 花潭에 對한 稱揚의 比가 아니니 晦齋의 朝鮮儒學史上에 處한 地位를 또한 알 것이며, 따라 이에 特히 그의 生涯 及 學問의 大綱을 紹介하려는 바이다.





































본문2: 2


회재는 이조 성종 22년 신해(서기 1491년) 11월 25일 경주부 양좌촌(주북 40리)에서 생하여 명종 8년 계축(서기 1553년) 11월 23일에 강계적소에서 향년 63세로 졸하였나니, 서화담과는 2년 후생이요 7년 후졸이었다. 성은 이씨(여주) 초명은 적(迪)이라 하더니 후에 중종의 명으로 언(彦) 자를 가하여 언적(彦迪)이라 개하고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 외에 또 자계옹(紫溪翁)이라고도 하였다. 부는 성균 생원번이요 모는 손 씨인데 유시(10세 혹은 9세라 함)에 부를 상하고 외숙 손우재(孫愚齋, 명은 중돈이니 점필문인)에게 종학(從學)하여 학문에 뜻하게 되고 일로부터 자분자여(自奮自勵)하여 중종9년 갑술(24세)에 등제(登第)하여 이어 취사(就仕)하였다. 동왕 기묘14년 간에는 아직 어떠한 사람인지 잘 널리 알려지지 아니하였으나 그의 학문의 정도는 이미 대가를 능할 만하였으니 28세에 동향의 노대가 조망기당(曹忘機堂, 명은 한보)과 왕복변론한 무극태극(無極太極)의 서(書)와 같은 것은 충분히 이를 증명하여준다. 회재는 기묘사화 후에는 능히 제현(諸賢)의 뒤를 이어 강관•교관•법관•언관에 천탁되어 크게 함이 있으려다가 동왕 26년 김안로(金安老, 소위 삼흉의 일인)의 당로(當路)함에 미쳐서 전리(田里)에 파귀되고 이듬해에 주북 자옥산 하에 당(堂)을 구하고 도서(圖書)를 좌우에 쌓고 연정담사(硏精覃思)하기 5~6년에 이르렀다. 중종 32년 김안로가 패사하매 회재는 재기되어 홍문•춘추의 관직에 보(補)하고 미구(未久)에 전주 부윤(府尹)으로 전임하여 34년에는 유명한 일강십조목(一綱十條目)의 소(疏)(강(綱)왈 인주심술(人主心術)이라 하고, 목(目)을 일엄가정(一嚴家政), 이양국본(二養國本), 삼정조정(三正朝廷), 사신용사(四愼用舍), 오순천도(五順天道), 육정인심(六正人心), 칠광언로(七廣言路), 팔계치욕(八戒侈欲), 구수군정(九修軍政), 십심기징(十審幾徵)에 분설) 무려 수천 언을 진(進)하여 개연히 세도를 만회할 뜻을 보였었다. 중종은 이를 보시고 가장(嘉獎)하사 “古之眞德秀 無以過也”라 하시고 탁배(擢拜)하여 병예양조(兵禮兩曹)의 참판 대사성 대사헌 등을 차제로 개제하시고 경히 이조판서•의정부좌찬성을 배(拜)하였으나 회재는 그간에 있어서 별로 뜻을 펴지 못하고 일시 관(官)을 해(解)하고 양(養)에 취하더니 중종이 승하하시고 인종이 즉위하심에 또 소명의 은을 입어 역질부조(力疾赴朝)하였었다. 우미구(又未久)에 인종이 승하하시고 이모제(異母弟) 명종이 사위하시니 외척 윤원형(尹元衡)이 국병을 잡아 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 등을 우익(羽翼)으로 삼아 인종의 구(舅) 윤임(尹任) 이하의 선유(善類)를 제거하려 하여 궐내 충순당(忠順堂)에서 왕급모후(문정왕후)에게 면대무고(面對誣告)하여 소위 을이(명종즉위의 년)의 사화(士禍)를 일으키었다. 이때 회재는 음히 사류(士類)를 구하려 하여 충순당 입시(入侍)의 제(際)에 애로라지 왕을 간(諫)함이 있었으나 직언극간(直言極諫)의 정도에는 달치 못하였고 드디어 권간(權奸)의 핍박으로 추관(推官)이 되어 선유(善類)를 고신(考訊)하여 소위 정난공신(靖難功臣)의 녹훈(錄勳)에 열(列)할 새 이는 원래 회재의 본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깊이 후회하여 녹훈을 역사(力辭)하였다. 그러나 이때 회재의 처사는 좀 불미하다하여 그 전기(傳記)상의 하나의 하점으로 여기어 왔으니 후일 이율곡이 회재의 출처 및 대의에 대하여 매양 비난한 것도 그 이유가 여기 있었다. 율곡은 회재의 학문은 크게 인정(認)하였지만 경제정치의 재(才)는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명종 2년 정미(57세)에 양재역(과천) 벽서사건(혹자가 역벽(驛壁)에 방국(謗國)의 문자를 게시하여 왈 ‘女主執政於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이 일어남에 미처 권신(權臣) 이기(李芑) 등은 이러한 사건의 출처는 다 사류(士類)에 있다고 인(認)하여 또 많은 선류(善類)의 문신을 찬육(竄戮)하니 회재도 이 화에 걸리어 강계에 찬유(竄流)됨을 면치 못하였다. 그의 우국애군의 마음(心)은 비록 적재(謫在) 중이라도 권권불망(拳拳不忘)하여 명종 5년(60세)에는 역경에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의(義)를 취하여 「진수팔규(進修八規)」를 연저(衍著)하여 상(上)에게 신달(申達)하려 하다가 과(果)치 못하고 마침내 그곳에서 병졸(病卒)하였다.
쪽수▶P133-2晦齋는 李朝成宗二十二年 辛亥(西紀一四九一年) 十一月二十五日 慶州府良佐村(州北四十里)에서 生하야 明宗八年癸丑(西紀 一五五三年) 十一月 二十三日에 江界謫所에서 享年 六十三歲로 卒하였나니, 徐花潭과는 二年 後生이요 七年 後卒이었다. 姓은 李氏(驪州) 初名은 迪이라하더니 後에 中宗의 命으로 彦字를 加하야 彦迪이라 改하고 字는 復古, 號는 晦齋 外에 또 紫溪翁이라고도 하였다. 父는 成均生員蕃이요 母는 孫氏인대 幼時(十歲或은 九歲라 함)에 父를 喪하고 外叔 孫愚齋(名은 仲暾이니 佔畢門人)에게 從學하야 學問에 뜻하게 되고 일로부터 自奮自勵하야 中宗九年甲戌(二十四歲)에 登第하야 이어 就仕하였다. 同王己卯十四年間에는 아직 어떠한 사람인지 잘 널리 알려지지 아니하였으나 그의 學問의 程度는 이미 大家를 凌할 만하였으니 二十八歲時에 同鄕의 老大家 曹忘機堂(名은 漢輔)과 往復辯論한 無極太極의 書와 같은 것은 充分히 이를 證明하여준다. 晦齋는 己卯士禍後에는 能히 諸賢의 뒤를 이여 講官•敎官•法官•言官에 遷擢되야 크게 함이 있으려다가 同王二十六年 金安老(所謂 三凶의一人)의 當路함에 미쳐서 田里에 罷歸되고 翌年에 州北 紫玉山下에 堂을 構하고 圖書를 左右에 싸코 硏精覃思하기 五六年에 至하였다. 中宗三十二年 金安老가 敗死하매 晦齋는 再起되야 弘文•春秋의 館職에 補하고 未久에 全州府尹으로 轉任하야 三十四年에는 有名한 一綱十條目의 疏(綱曰人主心術이라 하고, 目을 一嚴家政, 二養國本, 三正朝廷, 四愼用舍, 五順天道, 六正人心, 七廣言路, 八戒侈欲, 九修軍政, 十審幾徵에 分說) 無慮數千言을 進하야 慨然히 世道를 挽回할 뜻▶P134-1을 보였었다. 中宗은 이를 보시고 嘉獎하사 「古之眞德秀 無以過也」라 하시고 擢拜하야 兵禮兩曹의 叅判 大司成 大司憲 等을 次第로 改除하시고 更히 吏曹判書•議政府左贊成을 拜하였으나 晦齋는 其間에 있어서 別로히 뜻을 펴지 못하고 一時 官을 解하고 養에 就하더니 中宗이 昇遐하시고 仁宗이 卽位하심에 또召命의 恩을 입어 力疾赴朝하였었다. 又未久에 仁宗이 昇遐하시고 異母弟 明宗이 嗣位하시니 外戚 尹元衡이 國柄을 잡아 李芑•林百齡 等을 羽翼으로 삼아 仁宗의 舅 尹任以下의 善類를 除去하려하야 闕內 忠順堂에서 王及母后(文定王后)에게 面對誣告하야 所謂 乙已(明宗卽位의 年)의 士禍를 일으키었다. 이때 晦齋는 陰히 士類를 救하려하야 忠順堂入侍의 際에 애로라지 王을 諫함이 있었으나 直言極諫의 程度에는 達치못하였고 드디어 權奸의 逼迫으로 推官이 되야 善類를 考訊하야 所謂 靖難功臣의 錄勳에 列할새 이는 元來 晦齋의 本意가 아니였기 때문에 그는 깊이 後悔하야 錄勳을 力辭하였다. 그러나 이때 晦齋의 處事는 좀 不美하다하야 그 傳記上의 一瑕點으로 여기어 왔으니 後日 李栗谷이 晦齋의 出處 及 大義에 對하야 매양 非難한 것도 그 理由가 여기 있었다. 栗谷은 晦齋의 學問은 크게 認하였지만 經濟政治의 才는 認하지 아니하였다. 明宗二年丁未(五十七歲)에 良才驛(果川)壁書事件(或者가 驛壁에 謗國의 文字를 揭示하야 曰 女主執政於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이 일어남에 미처 權臣 李芑 等은 이러한 事件의 出處는 다 土類에 있다고 認하야 또 많은 善類의 文臣을 󰜅戮하니 晦齋도 이 禍에 걸리어 江界에 竄流됨을 免치못하였다. 그의 憂國愛君의 心은 비록 謫在中이라도 拳拳不忘하야 明宗 五年(六十歲)에는 易經에서 進德修業의 義를 取하야 「進修八規」를 衍著하야 上에게 申達하려하다가 果치 못하고 마침내 그곳에서 病卒하였다.
적거(謫居) 7년에 회재는 오로지 마음을 연찬(硏讚) 저술에 기울여 대학장구보유급속혹문•봉선잡의•구인록 및 중용구경연의(미완성) 등의 제 서(書)를 저술하였다. 이들은 다 회재 만년의 역저이니 그중에 중용구경연의(●●●●●●)는 송의 진서산(덕수)의 대학연의의 체(體)를 방(倣)하여 중용 제20장에 보이는 구경(曰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候也)의 의(義)를 주로 연술(기별집에는 체천도•외천명•계만영 등의 제 편이 있음)할 목적으로 저술한 것인데 고(稿)가 겨우 구경 중 「수신」 「존현」 「친친」의 3편에 끝이고 「경대신」 이하는 마치지 못하고 졸하였으며 책 수는 별집을 합하여 범 9책의 유고(세상에는 간본이 행함)가 있음을 보면 그 완성일에는 방대한 저술이 될 뻔하였다. 그 다음 구인록(●●●)(1책)은 어맹제경(語孟諸經)에 산견(散見)되는 인체에 관한 어(語)를 유취(類聚)하여 편을 삼고 경히 제유(諸儒)의 주해 중 요절한 자를 취하여 부록한 것이며, 봉선잡의(●●●)(1책)는 주자의 가례를 위본하여 사마씨•정씨의 제례와 및 본방시속(本邦時俗)의 마땅한 자를 참작손익(叅酌損益)하여 넣고 별히 예경의 문(文)과 제 성현의 말씀 중 보본추원(報本追遠)의 의(義)가 있는 것을 채취하여 후부(後附)한 것이니, 이는 실로 사가(私家)의 예전(禮典)이라고 할 만한 자로 또한 조선예학발달의 선구가 되는 예서(禮書)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음 대학장구보유(●●●●●●) () 속대학혹문(●●●●●)(병 1책)은 이상 만년 제 서 중에 가장 먼저 되고(명종 4년) 가장 치력하고 또 가장 특색 있는 명저이므로 다음에 좀 더 상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쪽수▶P134-2謫居七年에 晦齋는 오로지 마음을 硏讚著述에 기울려 大學章句補遺及續或問•奉先雜儀•求仁錄 및 中庸九經衍義(未完成) 等의 諸書를 著하였다. 이들은 다 晦齋晩年▶P135-1의 力著이니 其中에 中庸九經衍義(●●●●●●)는 宋의 眞西山(德秀)의 大學衍義의 體를 倣하야 中庸 第二十章에 보이는 九經(曰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候也)의 義를 主로 衍述(其別集에는 體天道•畏天命•戒滿盈 等의 諸篇이 있음)할 目的으로 著한 것인데 稿가 겨우 九經中 「修身」 「尊賢」 「親親」의 三篇에 끝이고 「敬大臣」以下는 마치지 못하고 卒하였으며 冊數는 別集을 合하야 凡九冊의 遺稿(世上에는 刊本이 行함)가 있음을 보면 그 完成日에는 尨大한 著述이 될 뻔하였다. 그다음 求仁錄(●●●)(一冊)은 語孟諸經에 散見되는 仁體에 關한 語를 類聚하야 篇을 삼고 更히 諸儒의 註解中 要切한 者를 取하야 附錄한 것이며, 奉先雜儀(●●●●)(一冊)는 朱子의 家禮를 爲本하야 司馬氏•程氏의 祭禮와 및 本邦時俗의 마땅한 者를 叅酌損益하여 넣고 別히 禮經의 文과 諸聖賢의 言中 報本追遠의 義가 있는 것을 採取하야 後附한 것이니, 이는 實로 私家의 禮典이라고 할만한 者로 또한 朝鮮禮學發達의 先驅가 되는 禮書라고 認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음 大學章句補遺(●●●●●●) 及續大學或問(●●●●●●)(竝一冊)은 以上 晩年 諸書 中에 가장 먼저 되고(明宗四年) 가장 致力하고 또 가장 特色있는 名著이므로 다음에 좀더 詳說할 必要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3: 3


억(抑) 대학(大學)이란 서는 중용과 한 가지 원래 예기 중에 편입되어 있는 것인데 송유(宋儒) 더욱 정주(程朱)에 이르러 양서의 가치를 절대시하여 특히 이를 거기서 표출하여 어맹(語孟)과 아울러 유교 입문의 사서를 삼은 것이거니와, 정자(程子)는 대학을 공 씨의 유서(遺書)라고 칭함에 대하여 주자는 그중 경 1장만은 공자의 말씀으로 증자(曾子)가 이를 술하고 기여 전(傳) 10장은 증자의 말을 그 문인이 기술한 것이라고 하였으며(그러나 정주의 이 설은 다 무슨 확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박대한 지식으로 공문의 유서(遺書)를 탐구하여 추정한데 불과하다) 또 그 구본에는 착간과 단결이 있다하여 이미 이정(二程)을 위수하여 주자의 그에 대한 절차의 고정이 있는바 특히 주자는 대학 구본에 「석격물치지전(釋格物致知傳)」이 일망되었다 하여 이에 정자의 뜻을 취하여 대신 보전(즉 보망장)을 작(作)하였으니 이후 유행하는 사서 중의 대학은 즉 주자의 개정한 장구에 불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자의 개선 장구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학자 간에 이의가 있어 송(이종(理宗))의 동괴(董槐)는 대학의 격물치지전은 실상 결망(缺亡)된 것이 아니라 특히 편간이 착란하여 고정자(考定者)가 그 차서(次序)를 실(失)함이라 하여 드디어 경문 중 「지지(知止)」 이하 「즉근도의(則近道矣)」까지의 42자를 “子曰聽訟吾猶人也” 일절의 위에 이치(移置)하여―즉 「지지(知止)」 「물유(物有)」 「청송(聽訟)」의 삼절을 특념하여 전(傳) 4장인 격치전을 삼았으매 자계 황씨(진)―이를 취하고 (필자소장 대학집람 건권)이와 동시(송리종시(宋理宗時))인 왕노재(백)도 이를 쫓되 “物有本末云云”의 일절만은 취하지 아니하였으며(위와 같음, 송사왕백전(宋史王栢傳) 및 권근입학도설(權近入學圖說)) 명(효무종시(孝武宗時))의 채허재(청)는 역시 동황이씨의 설을 찬동하되 단 “知止云云”의 일절과 「物有云云」의 일절에 대하여 선후를 바꾸었을 뿐이었다.(대학집람) 그런데 우리 회재 이 선생에 있어서도 또한(亦然) 주자의 개정 장구에 대하여는 불만을 느껴 「지지」 「물유」의 양 절을 채 씨와 같이 선후를 바꾸어―다시 말하면 “物有云云”의 절을 「知止云云」의 일절 위에 전치하여――경히 차 양절로써 “此謂知本此謂知之至也”의 위에 접속케 하여 소위 격치(格致)의 전(傳)을 삼고, 그 다음 “子曰聽訟云云”의 절은 정이천과 같이 단연히 이를 경 1장의 말단에 옮기어 놓고 경 1장은 “증자가 공자의 뜻(意)을 술하여 입교(立敎)한 것인 고로 장말에 공자의 말(言)을 인하여 결(結)한 것이라”하였고 또 「물유본말」 상에는 “所謂 致知在格物者”의 팔(八) 자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지금에는 없어진 것 같다고 하였다. 회재의 「대학장구보유」는 즉 이 고정에 의하여 간간히 안설(按說)을 삽입하여 편저한 것이며 「속 대학혹문」은 주자의 대학혹문을 방(倣)하여 자기의 장구보유 및 기안설의 미진한 바를 (누누장언으로) 부연 설명한 것이니, 양서는 곧 일서(一書)와 표리로 볼 것이다. 회재는 다시 자설의 수립(樹立)한 요령과 및 그 확신을 보유서문 중에 피로(披露)하려 왈
쪽수▶P135-2抑 大學이란 書는 中庸과 한 가지 元來 禮記 中에 編入되여있는 것인데 宋儒 더욱 程朱에 이르러 兩書의 價値를 絶對視하야 特히 이를 거기서 表出하야 語孟과 아울러 儒敎入門의 四書를 삼은 것이어니와, 程子는 大學을 孔氏의 遺書라고 稱함에 對하야 朱子는 其中 經一章만은 孔子의 言으로 曾子가 이를 述하고 其餘 傳十章은 曾子의 言을 그 門人이 記述한 것이라고 하였으며(그러나 程朱의 이 說은 다 무슨 確據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博大한 知識으로 孔門의 遺書을 探究하야 推定한데 不過하다) 또 그 舊本에는 錯簡과 斷缺이 있다하여 이미 二程을 爲首하야 朱子의 그에 對한 節次의 考定이 있는바▶P136-1特히 朱子는 大學舊本에 「釋格物致知傳」이 佚亡되였다 하야 이에 程子의 意를 取하야 대신 補傳(卽補亡章)을 作하였으니 爾後 流行하는 四書 中의 大學은 卽 朱子의 改定한 章句에 不外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朱子의 改先章句에 對하여는 일즉부터 學者間에 異議가 있어 宋(理宗)의 董槐는 大學의 格物致知傳은 실상 缺亡된 것이 아니라 特히 編簡이 錯亂하야 考定者가 그 次序를 失함이라하야 드듸어 經文中 「知止」以下 「則近道矣」까지의 四十二字를 「子曰聽訟吾猶人也」 一節의 右에 移置하야―卽 「知止」 「物有」 「聽訟」의 三節을 特拈하야 傳四章인 格致傳을 삼었으매 慈溪黃氏(震)―이를 取하고 (筆者所藏大學集覽乾卷)이와 同時(宋理宗時)인 王魯齋(栢)도 이를 쫓되 「物有本末云云」의 一節만은 取하지 아니하였으며(同上, 宋史王栢傳及權近入學圖說)明(孝武宗時)의 蔡虛齋(淸)는 역시 董黃二氏의 說을 贊同하되 但 「知止云云」의 一節과 「物有云云」의 一節에 對하야 先後를 박구었을 뿐이었다.(大學集覽) 그런데 우리 晦齋李先生에 있어서도 亦然 朱子의 改定章句에 對하여는 不滿을 늣기어 「知止」 「物有」의 兩節을 蔡氏와 같이 先後를 박구어―다시 말하면 「物有云云」의 節을 「知止云云」의 一節 우에 轉置하야――更히 此兩節로써 「此謂知本此謂知之至也」의 右에 接續케하야 所謂格致의 傳을 삼고, 그 다음 「子曰聽訟云云」의 節은 程伊川과 같이 斷然히 이를 經一章의 末段에 옴기어 노코 經一章은 「曾子가 孔子의 意를 述하야 立敎한 것인 故로 章末에 孔子의 言을 引하야 結한 것이라」하였고 또 「物有本末」上에는 「所謂致知在格物者」의 八字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지금에는 없어진 것 같다고 하였다. 晦齋의 「大學章句補遺」는 卽 이 考定에 依하야 間間히 按說을 揷入하야 編著한 것이며 「續大學或問」은 朱子의 大學或問을 倣하야 自己의 章句補遺 及 其按說의 未盡한 바를 (累累長言으로) 敷衍說明한 것이니, 兩書는 곧 一書와 表裏로 볼 것이다. 晦齋는 다시 自說의 樹立한 要領과 및 그確信을 補遺序文 中에▶P137-1 披露하야 曰

(上略) 愚嘗讀至於此 每嘆本文之未得見 近歲(●●) 聞中朝有大儒得其闕文於篇中(●●●●●●●●●●●●●) 更著章句(●●●●) 欲見之而不可得(●●●●●●●) 乃敢以臆見取經文中二節 以爲格物致知章之文 旣而反覆叅玩 辭足義明 無欠於經文 有補於傳義 又與上下文義脉絡貫通 雖晦菴復起(●●●●●●) 亦或有取於斯矣(●●●●●●●) 又按聽訟一節 今在傳三章之後 文義不屬 有可疑者 乃依程子所定 置於經文之下 詳味其義 與中庸卒章 「予懷明德 不大聲以色 子曰聲色之於以化民 末也」 「奏假無言 時靡有爭 不賞而民勸 不怒而民威於鈇鋮」 之意合 此盖聖人端本化民之要道也 故曾子於經文章末引孔子之言以明之 程子於此 豈無所見乎云云(大學章句補遺序文)

쪽수▶P137-2

(上略) 愚嘗讀至於此 每嘆本文之未得見 近歲(●●) 聞中朝有大儒得其闕文於篇中(●●●●●●●●●●●●●) 更著章句(●●●●) 欲見之而不可得(●●●●●●●) 乃敢以臆見取經文中二節 以爲格物致知章之文 旣而反覆叅玩 辭足義明 無欠於經文 有補於傳義 又與上下文義脉絡貫通 雖晦菴復起(●●●●●●) 亦或有取於斯矣(●●●●●●●) 又按聽訟一節 今在傳三章之後 文義不屬 有可疑者 乃依程子所定 置於經文之下 詳味其義 與中庸卒章 「予懷明德 不大聲以色 子曰聲色之於以化民 末也」 「奏假無言 時靡有爭 不賞而民勸 不怒而民威於鈇鋮」 之意合 此盖聖人端本化民之要道也 故曾子於經文章末引孔子之言以明之 程子於此 豈無所見乎云云(大學章句補遺序文)

이라고 하였는데 위의 글 중 “近歲聞中朝有大儒云云”은 하인을 지운(指云)함인지 분명치는 못하나 아마 상기 채허재의 이야기를 듣고 한 말인 것 같다. 그러나 「欲見之而不可得」이라 함을 보면 채씨의 설의 내용은 채 얻어 보지 못하고 고정하였던 모양이며(즉 우연히 채씨 설의 일부와 암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또 이에 “雖晦菴復起 亦或有取於斯矣”라 한 것을 보면 회재가 얼마나 자설을 확신하였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하여간 회재의 대학장구고정은 확실히 일가의 특색을 나타낸 견해로서 저 동씨 왕씨 채씨 등의 그것에 비하면 일단의 진보를 보였다고 아니할 수 없으며 또 그 「知止」 일절 중의 려자(慮字)의 의(義)를 (주자의 처사정상(處事精詳)이란 훈해를 버리고) 사자(思字)로 훈하여 공자의 “學而不思則罔”(논어 위정편), 맹자의 “思則得之 不思則不得”(맹자고자 장구상), 주자의 “思者聖功之本”(통서), 정자의 “不深思則不能造於道 不深思而得者 其得易失”(이정전서정자수언) 등의 사자와 같다는 것을 인증함과 상서의 「允執厥中」의 중으로써 지선(至善)을 해(解)함과 기타 말단에 이르러 인(仁)을 치국평천하의 근본이라 하여 반복원인 누천백언을 비(費)함과 같은 것은 다 전현(前賢)의 미발한 설명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퇴계, 이율곡과 같은 정주의 학을 전신하는 파는 회재의 대학설에 대하여는 물론 썩 동의를 표하지 아니하여 퇴계는 그 문인 이담(자(字)중구 호(號)정존(靜存))에게 답하는 서 중에(퇴계집 권11), 율곡은 「회재대학보유후의」라고 제(題)한 논문에(율곡전 서권14), 각기 회재의 설을 좇기 어려운 양으로 상술하였지만(단 율곡의 평은 전부가 반대는 아니지만) 어떻든 회재는 정주의 설이라면 다 시인하고 다 준봉하려고 하는 교주적 학자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라도 자기의 두뇌를 통하여 생각해보고 그리하여 전현의 미진미발한 점이 있으면 거기서 일보를 내키려고 하는데 사양치 아니하였다. 요컨대 회재의 대학장구보유 및 속혹문의 서는 조선인으로써 일가의 특색을 보인 저술이므로 오인(吾人)이 이에 있어 특히 표창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쪽수▶P137-3이라고 하였는데 右文中 「近歲聞中朝有大儒云云」은 何人을 指云함인지 分明치는 못하나 아마 上記 蔡虛齋의 이야기를 듯고 한말인 것 같다. 그러나 「欲見之而不可得」이라 함을 보면 蔡氏의 說의 內容은 채 얻어 보지 못하고 考定하였든 모양이며 (卽 偶然히 蔡氏說의 一部와 暗合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또 이에 「雖晦菴復起 亦或有取於斯矣」라 한 것을 보면 晦齋가 얼마나 自說을 確信하였는가를 想像할 수 있다. 何如間 晦齋의 大學章句考定은 確實히 一家의 特色을 나타낸 見解로서 저 董氏 王氏 蔡氏 等의 그것에 比하면 一段의 進步를 보였다고 아니할 수 없으며 또 그 「知止」 一節 中의 慮字의 義를 (朱子의 處事精詳이란 訓解를 버리고) 思字로 訓하야 孔子의 「學而不思則罔」(論語爲政篇), 孟子의 「思則得之 不思則不得」(孟子告子章句上), 周子의 「思者聖功之本」(通書), 程子의 「不深思則不能造於道 不深思而得者 其得易失」(二程全書程子粹言) 等의 思字와 같다는 것을 引證함과 尙書의 「允執厥中」의 中으로써 至善을 解함과 其他 末段에 이르러 仁을 治國平天下의 根本이라하야 反覆援引 累千百言을 費함과 같은 것은 다 前賢의 未發한 說明이라고 하여도 過言이 아니다. 李退溪 李栗谷과 같은 程朱의 學을 專信하는 派는 晦齋의 大學▶P138-1說에 對하여는 勿論 썩 同意를 表하지아니하야 退溪는 그 門人 李湛(字仲久號靜存)에게 答하는 書 中에(退溪集卷十一), 栗谷은 「晦齋大學補遺後議」라고 題한 論文에(栗谷全書卷十四), 각기 晦齋의 說읕 좇기 어려운 양으로 詳述하였지만(但 栗谷의 評은 全部가 反對는 아니지만) 어떠튼 晦齋는 程朱의 說이라면 다 是認하고 다 遵奉하려고 하는 膠柱的學者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라도 自己의 頭腦를 通하야 생각해보고 그리하여 前賢의 未盡未發한 點이 있으면 거긔서 一步를 내키려고 하는데 辭讓치 아니하였다. 要컨대 晦齋의 大學章句補遺 及 續或問의 書는 朝鮮人으로써 一家의 特色을 보인 著述이므로 吾人이 이에 있어 特히 表彰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본문4: 4


회재의 유서(遺書)로는 이상 제(諸) 서 외에 또 그 시문을 집한 문집 13권이 있어 세상에 행하여오며 문집 제5권 잡저에 소수(所收)된 「답망기당서」 4-5편은 회재의 27, 8세(중종12•3년) 때에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曹漢輔)를 상대로 하여 (4-5회에 걸쳐) 무극태극을 논한 서찰로서 국초 이래 처음 보는 이학(철학)적 대논문이요 겸하여 조선유학사 상에 나타나는 초유의 대논변(논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퇴계의 말과 같이 거기서 그의 정예의 견•독득의 묘를 역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그 논변의 시말, 거기 나타나는 회재의 무극태극관 즉 그 철학적 사상의 일단을 규득하려 한다.
쪽수▶P138-2晦齋의 遺書로는 以上 諸書外에 또 그 詩文을 集한 文集 十三卷이 있어 世上에 行하여오며 文集 第五卷 雜著에 所收된 「答忘機堂書」 四五篇은 晦齋의 二十七八歲(中宗十二三年) 時에 忘機堂曹漢輔를 相對로하야 (四五回에 걸쳐)無極太極을 論한 書札로서 國初以來 처음 보는 理學(哲學)的 大論文이요 兼하야 朝鮮儒學史上에 나타나는 初有의 大論辯(論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退溪의 말과 같이 거긔서 그의 精詣의 見•獨得의 妙를 역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그 論辯의 始末, 거긔 나타나는 晦齋의 無極太極觀 즉 그 哲學的思想의 一端을 窺得하려 한다.
회재와 망기당 간의 논쟁의 기인(起因)은 중종 12년(27세) 회재의 외숙 손망재(명 숙돈(叔暾))와 조망기당 간에 왕복한 무극태극의 논을 회재가 얻어 보고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라고 제(題)한 비판적 논문을 발표함으로 비롯하였다. 손망재의 명은 숙돈이니 손우재의 제(弟)요 망기당 조한보는 망재 회재와 한 가지 경주인으로서 회재보다는 훨씬 선배였었던 것 같으나 손조양 씨의 전기는 자세치 못하고 또 그 유저(遺著)도 오늘날 전하여 오지 아니하므로 양 씨의 무극태극설의 내용을 상세히 검색해 얻지 못함은 매우 유감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회재의 서 중에 나타나는 바를 종합하여 생각해보면 손망재는 육상산학파에 속하여 태극의 극자(極字)를 중자(中字)의 의(義)로 훈석한 것 같고 망기당은 일층 고원(高遠)한 도가적 또는 선학적(禪學的) 사상에 영향되어 “무극대허의 체(體)는 본래 적멸하고 영묘한 것인즉 거기다 무유(無有)를 논하고 내외를 분(分)함은 억기말(抑其末)이며 또 대본달도(大本達道)란 것도 본시 혼연한 일체니 다시 거기에 무극태극•유중무중의 분간을 세울 필요는 없다”함이 그의 근본사상인데 그는 수양의 극치에 있어서도 “無極太虛之體 作得吾心之主” “使天地萬物朝宗於我而運用無滯”라고 하여 일종 돈오적 공부를 주장한 것 같았다. 회재는 이에 대하여 망재의 설은 육상산에서 출(出)하고 상산의 설은 주자가 이미 이를 상변하였으므로 감히 췌언할 것이 없으나 망기당이 망재에 답한 설은 렴계(濂溪)에 근본한 듯 하고도 그 논견이 매우 고원(高遠)에 지나쳐 오유(吾儒)의 설과 등짐이 있으므로 변치 아니할 수 없다하고 이에 순주자학적 견해(특히 주자의 육상산에 답한 서)에 입각하여 망기당의 설을 평론하되
쪽수▶P138-3晦齋와 忘機堂間의 論爭의 起因은 中宗 十二年(二十七歲) 晦齋의 外叔孫忘齋(名叔暾)와 曹忘機堂間에 往復한 無極太極의 論을 晦齋가 얻어 보고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라고 題한 批判的論文을 發表함으로 비롯하였다. 孫忘齋의 名은 叔暾이니 孫愚齋의 弟요 忘機堂曹漢輔는 忘齋 晦齋와 한 가지 慶州人으로서 晦齋보다는 훨신 先輩였었든 것 같으나 孫曹兩氏의 傳記는 仔細치 못하고 또 그 遺著도 오늘날 傳하여 오지 아니하므로 兩氏의 無極太▶P139-1極說의 內容을 詳細히 檢索해 얻지 못함은 매우 遺憾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晦齋의 書中에 나타나는 바를 綜合하야 생각해보면 孫忘齋는 陸象山學派에 屬하야 太極의 極字를 中字의 義로 訓釋한 것 같고 忘機堂은 一層高遠한 道家的又는 禪學的思想에 影響되야 「無極大虛의 體는 本來寂滅하고 靈妙한 것인즉 거긔다 無有를 論하고 內外를 分함은 抑其末이며 또 大本達道란 것도 본시 渾然한 一體니 다시 거긔에 無極太極•有中無中의 分揀을 세울 必要는 없다」함이 그의 根本思想인데 그는 修養의 極致에 있어서도 「無極太虛之體 作得吾心之主」 「使天地萬物朝宗於我而運用無滯」라고 하야 一種頓悟的 功夫를 主張한 것 같았다. 晦齋는 이에 對하야 忘齋의 說은 陸象山에서 出하고 象山의 說은 朱子가 이미 이를 詳辯하였으므로 敢히 贅言할 것이 없으나 忘機堂이 忘齋에 答한 說은 濂溪에 根本한듯 하고도 그 論見이 매우 高遠에 지나처 吾儒의 說과 등짐이 있으므로 辯치 아니할 수 없다하고 이에 純朱子學的 見解(特히 朱子의 陸象山에 答한 書)에 立脚하야 忘機堂의 說을 評論하되

無極而太極이란 것은 이 도(道)의 “未始有物而實爲萬物之根柢”됨을 형용함이다. 상천지재(上天之載)ㅡ무성무취(無聲無臭)하므로 이를 적(寂)이라 하여도 관계치 않겠지만 그 지적한 가운데에는 어목불기(於穆不己)의 리(理)가 있어 화육유행(化育流行)하여 상하에 소저(昭著)한 것인즉 다시 멸자(滅字)를 적자(寂字) 아래에 착(着)하여 적멸(寂滅) 운운이라 할 것이 무어있으며 또 대본달도(大本達道)로 말하더라도 본래 이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는 체용•동정•선후•본말을 가리어 말할 것이 있다. 하고로 혼연하다하여 윤서(倫序)의 논할만한 자를 분별치도 않고 한갓 멸무(滅無)의 지(地)에 이르러야만 이 도의 극치를 본다고 할 수 있으랴? 이 같은 돈오적 공부는 마치 한울에 오르려다가 계제가 없음을 생각지 않고 바다를 건너려다가 그 다리(橋) 없음을 헤아리지 않고, 마침내 허원(虛遠)의 역(域)에 빠짐과 같을 것이니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은 필연한 일이다.(회재집 권5, 잡저)

쪽수▶P139-2

無極而太極이란 것은 이 道의 「未始有物而實爲萬物之根柢」됨을 形容함이다. 上天之載―無聲無臭하므로 이를 寂이라하여도 關係치 안켓지만 그 至寂한 가온대에는 於穆不己의 理가 있어 化育流行하야 上下에 昭著한 것인즉 다시 滅字를 寂字下에 着하야 寂滅云云이라 할 것이 무어있으며 또 大本達道로 말하더래도 本來 二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其中에는 體用•動靜•先後•本末을 가리어 말할 것이 있다. 何故로 渾然하다하야 倫序의 論할만한 者를 分別치도 안코 한갓 滅無의 地에 이르러야만 이道의 極致를 본다고 할 수 있으랴? 이 같은 頓悟的 功夫는 마치 한울에 오르려다가 階梯ㅡ 없음을 생각치 안코 바다를 건느려다가 그 다리(橋) 없음을 헤아리지 안코, 마츰내 虛遠의 域에 빠짐과 같을 것이니 아무 所得이 없을 것은▶P140-1 必然한 일이다.(晦齋集卷五, 雜著)

라고 하였다. 이것이 곧 회재의 “書忘機堂無極太極說後”의 요점이다. 망기당은 이 평설을 얻어 보고 크게 반박하는 서를 작하여 회재에게 보냈는데 그 서의 내용은 다음에 보이는 회재의 답서를 통하여보면 무극적멸(無極寂滅)의 지(旨)와 존심상달(存心上達)의 요를 피력하여 “무는 무가 아니라서 영원독립(靈源獨立)하여있고 유는 유가 아니라서 도리어 시진(澌盡)에 돌아 간다” 또는 “遊心於無極之眞 使虛靈之本體 作得吾心之主” “聖人復起不易吾言”이라는 말을 발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여기에 더욱 불학적 색채와 도가(특히 장자)의 사상을 드러냈으니 그 소위 "遊心於無極之眞云云"은 확실히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적 사상에 물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시(於是)에 회재는 「답망기당서(答忘機堂書) 제1」을 초(草)하여 보내니 당당한 장논문이었다. 그 대요를 들어 의역하면
쪽수▶P140-2라고 하였다. 이것이 곧 晦齋의 「書忘機堂無極太極說後」의 要點이다. 忘機堂은 이 評說을 얻어 보고 크게 反駁하는 書를 作하야 晦齋에게 보냇는데 其書의 內容은 다음에 보이는 晦齋의 答書를 通하여보면 無極寂滅의 旨와 存心上達의 要를 披瀝하야 「無는 無가 아니라서 靈源獨立하여있고 有는 有가 아니라서 도리어 澌盡에 도라간다」 또는 「遊心於無極之眞 使虛靈之本體 作得吾心之主」 「聖人復起不易吾言」이라는 말을 發하였든 모양이다. 그는 여기에 더욱 佛學的色彩와 道家 (特히 莊子)의 思想을 들어냈으니 그 所謂 「遊心於無極之眞云云」은 확실이 莊子의 「逍遙遊」的思想에 물들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於是에 晦齋는 「答忘機堂書第一」을 草하야 보내니 堂堂한 長論文이었다. 그 大要를 들어 意譯하면

무릇 이른바 태극은 곧 사도(斯道)의 본체요 만화(萬化)의 영요(領要)로 자사(子思)의 소위 ‘천명지성(天命之性)’이란 것이다. 대개 그 충막무짐(冲漠無朕)한 가운데 만상이 삼연이구(森然已具)하니 천의 복(覆)한 소이, 지의 재(載)한 소이, 일월의 조(照)하는 소이, 귀신의 유(幽)한 소이, 풍뇌의 변(變)하는 소이, 강하의 류(流)하는 소이, 성명(性命)의 정한 소이, 윤리의 저(著)한 소이라 본말 상하가 일리를 꿰뚫어 실연(實然)치 아니함이 없어 가히 역치 못하는 자이다. 주자가 무극이라 한 소이는 “정히 그것이 방소(方所)가 없고 형상(形狀)이 없어 무물(無物)의 전에 있으되 일찍이 유물의 후에 있지 아니함이 없고 또 음양 외에 있으되 일찍이 음양 중에 행치 아니함이 없어 전체에 관통하여 무호불재(無乎不在)한즉 또 처음부터 성취영향을 말할만한 자도 없는 것이다.”(「」내의 일절은 주자의 육상산에게 답한 서에서 인용한 듯) 지금 내교(來敎)에 이른 바대로 “無則不無而靈源獨立 有則不有而還歸澌盡”이라 하면 이는 오로지 기화(氣化)로써 차리(此理)의 유무를 말함이니 어찌 도를 안다고 하리요. 소위 영원(靈源)이란 자는 기(氣)이니 리(理)로써 말할 것은 아니며 지무(至無)한 가운데 지유(至有)한 것이 있으므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 하고 리가 있은 후에 기가 있으므로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라 하였다. 그런즉 리가 비록 기를 떠나지는 못하되 실상은 또한 기에 잡(雜)치 아니하는 것이니 하필 영원의 독립을 본 연후에야 비로소 이 리의 불무함을 말할 수 있게 되랴? 연비어약(鳶飛魚躍)의 리, 상하에 소저(昭著)하고 고금을 긍하여 우주에 충색(充塞)하여 일호(一毫)의 공궐(空闕)과 일식(一息)의 간단이 없으니 어찌 다만 만화(萬化)의 시진(澌盡)함만 보고 드디어 무극의 체(體)를 가리켜 적멸하다고 하랴? (중략) 인물이 생하여 능히 영구치 못하고 마침내 시진(澌盡)에 돌아가는 것은 대개 인물은 유형유질하고 차리(此理)는 무형무질함이요 유형유질자는 생사시종(生死始終)이 없지 못하되 그 생사시종의 소이는 실로 이 무형무질자의 소위이니 무형무질자가 일찍이 때로 식멸(息滅)한 적이 있었느냐? (중략) 또 사람(人) 심리로써 말하더라도 사람은 천지의 중을 수(受)하여서 생한 자인즉 그 심(心)은 천지의 음양이 있음과 같아서 태극의 진이 여기도 있나니 그 미감물시(未感物時)에 (심은) 담연허정(湛然虛靜)하여 일물(一物)도 없는 것 같음이 곧 소위 무성무취(無聲無臭)의 묘로서 내교의 이른바 적(寂)이란 자이나 그 지허지적(至虛至寂)한 중에는 차리(此理)의 혼연함이 부소불비(無所不備)한 고로 (역(易)에) “感而遂通天下之故”라 한 것이다. 만일 적하고 또 멸한다 하면 이는 적연한 목석일 따름이니 그 천하의 대본되는 소이가 어디 있을까 운운(위와 같음)

쪽수▶P140-3

무릇 이른바 太極은 곧 斯道의 本體요 萬化의 領要로 子思의 所謂「天命之性」이란 것이다. 대개 그 冲漠無朕한 가온대 萬象이 森然已具하니 天의 覆한 所以, 地의 載한 所以, 日月의 照하는 所以, 鬼神의 幽한 所以, 風雷의 變하는 所以, 江河의 流하는 所以, 性命의 正한 所以, 倫理의 著한 所以라 本末上下가 一理를 꾀뚤어 實然치 아니함이 없어 可히 易치 못하는 者이다. 周子가 無極이라 한 所以는 「正히 그것이 方所가 없고 形狀이 없어 無物의 前에 있으되 일즉이 有物의 後에 있지 아니함이 없고 또 陰陽外에 있으되 일즉이 陰陽中에 行치 아니함이 없어 全體에 貫通하야 無乎不在한즉 또 처음부터 聲臭影響을 말할만한 者도 없는 것이다.」(「」內의一節은 朱子의 陸象山에게 答한 書에서 引用한 듯) 지금 來敎에 이른 바대로 「無則不無而靈源獨立 有則不有而還歸澌盡」이라 하면 이는 오로지 氣化로써 此理의 有無를 말함이니 어찌 道를 안다고 하리요. 所謂 靈源이란 者는 氣ㅡ니 理로써 말할 것은 아니며 至無한 가온대 至有한 것이 있으므로 無極而太極이▶P141-1라 하고 理가 있은 後에 氣가 있으므로 太極生兩儀라하였다. 그런즉 理가 비록 氣를 떠나지는 못하되 실상은 또한 氣에 雜치 아니하는 것이니 何必 靈源의 獨立을 본 然後에야 비로소 이 理의 不無함을 말할 수 있게 되랴? 鳶飛魚躍의 理, 上下에 昭著하고 古今을 亘하야 宇宙에 充塞하야 一毫의 空闕과 一息의 間斷이 없으니 어찌 다만 萬化의 澌盡함만 보고 드듸어 無極의 體를 가리처 寂滅하다고 하랴?(中略) 人物이 生하야 能히 永久치못하고 마침내 澌盡에 도라가는 것은 대개 人物은 有形有質하고 此理는 無形無質함이요 有形有質者는 生死始終이 없지 못하되 其生死始終의 所以는 實로 이 無形無質者의 所爲이니 無形無質者가 일즉이 때로 息滅한 적이 있었느냐?(中略) 또 人의 心理로써 말하더래도 人은 天地의 中을 受하야써 生한 者인즉 其心은 天地의 陰陽이 있음과 같아서 太極의 眞이 여긔도 있나니 其未感物時에 (心은) 湛然虛靜하야 一物도 없는 것 같음이 곧 所謂無聲無臭의 妙로서 來敎의 이른바 寂이란 者이나 其至虛至寂한 中에는 此理의 渾然함이 無所不備한 故로 (易에) 「感而遂通天下之故」라 한 것이다. 만일 寂하고 또 滅한다 하면 이는 寂然한 木石일 따름이니 그 天下의 大本되는 所以가 어대 있을가 云云(同上)

무릇 도는 다만 이 인사(人事)의 리다. 인사를 떠나 도를 구하면 공허의 경(境)을 밟지 아니할 수 없다. 인사를 하학(下學)하는 것이 문득 천리에 상달하는 방법이니 근사의 학을 하지 아니하고 한갓 심을 공묘(空妙)에 달린(馳)다고 하면 그 해(害)는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우황(又况) 허령(虛靈)은 본시 오심의 체요 무극의 진은 본시 허령 중 소구의 물이라 다만 이를 존하는 공만 가하고 인욕의 사로써 폐치 말고 그리하여 그 광대고명(廣大高明)의 체를 이루는 것이 옳을 것이다. ……… 지금 가로대 “遊心於無極”이라 “作得吾心之主”라 하면 이는 무극태극으로써 심 외의 물을 삼아 별히 심을 가지고 그간에 유(遊)케한 연후에 심의 주가 된다는 말과 같으니 이들 의논이 심히 미안하다 운운(위와 같음)

쪽수▶P141-2

무릇 道는 다만 이 人事의 理다. 人事를 떠나 道를 求하면 空虛의 境을 밟지 아니할 수 없다. 人事를 下學하는 것이 문득 天理에 上達하는 方法이니 近思의 學을 하지 아니하고 한갓 心을 空妙에 달린(馳)다고 하면 그 害는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又况 虛靈은 본시 吾心의 體요 無極의 眞은 본시 虛靈中所具의 物이라 다만 이를 存하는 功만 加하고 人欲의 私로써 蔽치 말고 그리하야 그 廣大高明의 體를 이루는 것이 올흘 것이다. ……… 지금 가로대 「遊心於無極」이라 「作得吾心之主」라 하면 이는 無極太極으로써▶P142-1 心外의 物을 삼아 別히 心을 가지고 其間에 遊케한 然後에 心의 主가 된다는 말과 같으니 이들 議論이 甚히 未安하다 云云(同上)

하였다. 이 역시 순연한 주자학적 견지에서 망기당의 무극적멸의 설과 내지 그 수양론를 논박한 것인데, 위의 제2항 말단의 논설에는 미상불 노련한 망기당도 압축이 되어 전서(前書) 중에 소위 “遊心於無極”의 유심(遊心) 두 자와 “其體至寂滅”의 멸(滅) 한 자를 삭거할 지(旨)를 자백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상 그의 수사(修辭) 상의 산멸(刪滅)에 불과하고 그 근본 사상에는 하등의 큰 변동을 일으키지 아니 하여 그는 오히려 “虛無寂滅”이니 “存心上達”이니 하는 어구를 반복하여 회재에게 답변하였던 것은 다음에 보이는 회재의 「답망기당(答忘機堂)」 제2서 중에 인용된 바를 보아 알 수 있다. 회재는 이를 어디까지든지 불순한 비정통적 사상으로 인정하여 재차 서를 초(草)한 것이니 거기 가로대
쪽수▶P142-2하였다. 이 역시 純然한 朱子學的 見地에서 忘機堂의 無極寂滅의 說과 乃至 그 收養論를 論駁한 것인데, 右第二項 末端의 論說에는 未嘗不 老練한 忘機堂도 壓縮이되야 前書中에 所謂 「遊心於無極」의 遊心二字와 「其體至寂滅」의 滅一字를 削去할 旨를 自白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상 그의 修辭上의 刪滅에 不過하고 그 根本思想에는 何等의 큰 變動을 이르키지 아니 하야 그는 오히려 「虛無寂滅」이니 「存心上達」이니 하는 語句를 反覆하야 晦齋에게 答辯하였든 것은 다음에 보이는 晦齋의 「答忘機堂」第二書 中에 引用된 바를 보아 알 수 있다. 晦齋는 이를 어대까지든지 不純한 非正統的思想으로 認定하야 再次 書를 草한 것이니 거긔 가로대

지금 또 허영무극(●●●●) ()을 들어 “허무는 곧 적멸이요 적멸은 곳 허무라”하면 이는 유자(儒者)의 말을 빌어 이단을 문채(文彩)내주는 설(說)됨을 면치 못하니 소자의 혹이 자심(滋甚)이라 선유(先儒)가 네 자(허무적멸)에 있어 일찍이 분석하여 왈 차(유(儒))의 ()는 허하되 유하고 피(이단(異端))의 ()는 허하고 무하며 차의 ()은 적하되 감하고 피의 적은 적하고 멸한다 하였다. 그런즉 피차의 허적은 같으되 그 귀착은 절리하니 인(因)하여 변이 없을 수 없으며 지어(至於) ‘무극’지 운하여는 이는 다만 차리(此理)의 묘가 영향도 없고 성취도 없음을 형용하여 이를 뿐이요 피의 소위 무와 같은 것은 아니다. (중략) 내교에 우(又) 왈 主敬存心而上達天理(●●●●●●●●●)라 함은 본래 좋은 말이나 그러나 “上達天理” 상에 “下學人事” 네 자를 결함은 성문(聖門)의 교(敎)와 다르다. 천리는 인사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님으로 인사를 하학하면 자연히 천리에 상달할 수 있고 만일 하학공부를 존치 않고 곧 상달하려고만 하면 이는 석씨(釋氏)의 돈각(頓覺)하는 설이니 어찌 휘(諱)하지 아니하랴. 대개 인사는 형이하이나 그 사(事)의 리는 천의 리요 또 형이상이다. 시사(是事)를 학(學)하여 그 리를 통하고 형이하에 즉하여 형이상을 득하면 문득 이것이 상달경계(上達境界)며 이에 종사하여 적구관통(積久貫通)하여 가히 혼연의 극에 달할 수 있고 궁신지화(窮神知化)의 묘에 지(至)함도 또한 이에서 순치됨에 불과할 뿐이다.(위와 같음)

쪽수▶P142-3

지금 또 虛靈無極(●●●●) ()을 들어 「虛無는 곧 寂滅이요 寂滅은 곳虛無라」하면 이는 儒者의 言을 빌어 異端을 文彩내주는 說됨을 免치 못하니 小子의 惑이 滋甚이라 先儒ㅡ四字(虛無寂滅)에 있어 일즉이 分析하야 曰 此(儒)의 ()는 虛하되 有하고 彼(異端)의 ()는 虛하고 無하며 此의 ()은 寂하되 感하고 彼의 寂은 寂하고 滅한다 하였다. 그런즉 彼此의 虛寂은 가트되 그 歸着은 絶異하니 因하야 辨이 없을 수 없으며 至於 「無極」之云하여는 이는 다만 此理의 妙가 影響도 없고 聲臭도 없음을 形容하야 이를 뿐이요 彼의 所謂 無와 같은 것은 아니다. (中略) 來敎에 又曰 主敬存心而上達天理(●●●●●●●●●)라 함은 본래 조흔 말이나 그러나 「上達天理」上에 「下學人事」 四字를 缺함은 聖門의 敎와 다르다. 天理는 人事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님으로 人事를 下學하면 自然히 天理에 上達할 수 있고 만일 下學工夫를 存치 안코 곧 上達하려고만 하면 이는 釋氏의 頓覺하는 說이니 어찌 諱하지아니▶P143-1하랴. 대개 人事는 形而下이나 其事의 理는 天의 理요 또 形而上이다. 是事를 學하야 其理를 通하고 形而下에 卽하야 形而上을 得하면 문득 이것이 上達境界며 이에 從事하야 積久貫通하야 可히 渾然의 極에 達할 수 있고 窮神知化의 妙에 至함도 또한 이에서 馴致됨에 不過할 뿐이다(同上)

운운하고 오히려 종(終)에 “痛去寂滅之見而又能主敬存心 一於下學做工夫以達天理 則尊伯之於斯道 可謂醇乎醇矣”라고 맺었다. 그런데 망기당은 조금도 이에 양보치 않고 ‘적멸(寂滅)’의 어(語)는 세인이 환형(幻形)을 집(執)하여 견실이라고 함을 깨트리려고 한 말이며 또 하학상달(下學上達)은 동몽초학지사(童蒙初學之士)의 일이요 호걸지사(豪傑之士)에는 그렇지 않다하는―거의 점점 선학적 의미에 가까운― 의미의 문(文)을 지어 회재에게 반답하였다.(이 역시 다음에 인(引)할 회재의 서(書) 중에 보임). 그리하여 회재는 또 이에 대하여 제1서만한 장논문을 초(草)하여 보내니 소위 「답망기당서(答忘機堂書) 제3」이 그것이다. 이 제3서 중에는 횡설수설 거의 전서(前書)의 것과 동양(同樣)의 말을 반복 혹은 부연한 것도 있으므로 이에는 특히 망기당의 말에 대한 변박문자에만 한하여 들어 보이려고 한다.
쪽수▶P143-2云云하고 오히려 終에 「痛去寂滅之見而又能主敬存心 一於下學做工夫以達天理 則尊伯之於斯道 可謂醇乎醇矣」라고 맺었다. 그런데 忘機堂은 조금도 이에 讓步치 안코 「寂滅」의 語는 世人이 幻形을 執하야 堅實이라고 함을 깨트리려고 한 말이며 또 下學上達은 童蒙初學之士의 일이요 豪傑之士에는 그럿치 안타하는―거이 점점 禪學的 意味에 가까운― 意味의 文을 지어 晦齋에게 返答하였다.(이 역시 다음에 引할 晦齋의 書中에 보임). 그리하야 晦齋는 또 이에 對하야 第一書만한 長論文을 草하여보내니 所謂 「答忘機堂書第三」이 그것이다. 이 第3書 中에는 橫說竪說 거이 前書의 것과 同樣의 말을 反覆 或은 敷衍한 것도 있으므로 이에는 特히 忘機堂의 言에 對한 辨駁文字에만 限하야 들어 보이려고 한다.

내교에 우(又) 왈 “爲破世人執幻形爲堅實 故曰寂滅”이라 하니 이 말이 또 매우 리를 해한다. 대개 인(人)의 이 형체를 가짐은 막비천(莫非天)의 소부(所賦)로 지리(至理)가 (거기)붙이어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성인(聖人)의 교(敎)가 매양 용모형색 상의 공부를 가하여서 천의 아(我)에 부여한 법칙을 궁진하여 그 허영한 명덕의 본체를 보수하도록 함이니 그렇게 하면 ‘인심유위(人心惟危)’의 지(地)에 빠질 리(理)가 만무하며 일찍이 맹자도 말하기를 “形色天性也 惟聖人然後可以踐形”이라 하였으니 어찌 형상을 환망이라 하여 외상(外相)을 단제하고 독히 허영(虛靈)의 체를 지켜야만 가히 도에 달하게 되겠느냐. 도는 형기(刑器)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형이 있으면 곧 사람된 소이의 리가 있고 물의 형이 있으면 곧 물된 소이의 리가 있는 것이다. (중략) 만일 그 형을 가지고 능히 그 도를 진(盡)치 못한다 하면 이는 형을 헛되게 갖추어 그 형되는 소이의 리를 실(失)함이요 그와 반대로 형기를 버리고 그 도만을 구한다하면 어찌 소위 도라는 것이 있을 수 있으랴. 적멸의 교는 공허탄만의 경(境)에 함(陷)하는 소이로 위천멸리(違天滅理)의 죄를 도(逃)할 수 없다. 금(今) 왈 “下學上達 乃指示童蒙初學之士 豪傑之士不如是”라 하니 우(愚)는 청컨대 공자로써 말하리라. 자생민 이래로 생민의 성(聖)은 공자만 할 이가 없는데 그도 일찍이 하학을 일삼아 그 말에 “吾十(有)五而志于學 五十而知天命”이라 하고 또 "不如丘之好學"이라 하였으니 연칙(然則) 공자는 호걸지사도 되지 못하고 그 소위도 또한 족히 법 받을 바 되지 못하랴(중략). 무릇 생지(生知)의 성(聖)으로 동몽(童蒙)이 아닌 이도 오히려 하학의 사(事)가 없지 못하거든 하물며 공자에 불급하고 거연(遽然)히 하학을 돈제(頓除)하고 아무 힘도 쓰지 않고 천리에 상달할 수가 있으랴. 이는 분명히 석씨 돈오의 교이니 어찌 이를 숭상할 수 있으랴.(위와 같음)

쪽수▶P143-3

來敎에 又曰 「爲破世人執幻形爲堅實 故曰寂滅」이라 하니 이 말이 또 매우 理를 害한다. 대개 人의 이 形體를 가짐은 莫非天의 所賦로 至理가 (거긔)붗이어 있는 것이다. 이럼으로 聖人의 敎가 매양 容貌形色上의 工夫를 加하야써 天의 我에 賦與한 法則을 窮盡하야 그 虛靈한 明德의 本體를 保守하도록 함이니 그러케 하면 「人心惟危」의 地에 빠질 理가 萬無하며 일즉이 孟子도 말하기를 「形色天性也 惟聖人然後可以踐形」이라 하였으니 어찌 形相을 幻妄이라하야 外相을 斷除하고 獨히 虛靈의 體를 직혀야만 可히 道에 達하게 되겠느냐. 道는 刑器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人의 形이 있으면 곧 人된 所以의 理가 있고 物의 形이 있으면 곧 物된 所以의 理가 있는▶P144-1 것이다. (中略) 만일 그 形을 가지고 能히 그 道를 盡치 못한다 하면 이는 形을 헛되게 갖추어 그 形되는 所以의 理를 失함이요 그와 反對로 形器를 버리고 그 道만을 求한다하면 어찌 所謂 道라는 것이 있을 수 있으랴. 寂滅의 敎는 空虛誕謾의 境에 陷하는 所以로 違天滅理의 罪를 逃할 수 없다. 今曰 「下學上達 乃指示童蒙初學之士 豪傑之士不如是」라 하니 愚는 請컨대 孔子로써 말하리라. 自生民以來로 生民의 聖은 孔子만 할 이가 없는데 그도 일즉이 下學을 일삼아 그 말에 「吾十(有)五而志于學 五十而知天命」이라 하고 또 「不如丘之好學」이라 하였으니 然則 孔子는 豪傑之士도 되지 못하고 그 所爲도 또한 足히 法바들배 되지 못하랴(中略). 무릇 生知의 聖으로 童蒙이 아닌 이도 오히려 下學의 事가 없지 못하거든 하물며 孔子에 不及하고 遽然히 下學을 頓除하고 아무 힘도 쓰지 안코 天理에 上達할 수가 있으랴. 이는 分明히 釋氏頓悟의 敎이니 어찌 이를 崇尙할 수 있으랴.(同上)

최후의 변론인 「답망기당서 제4」에 “且去寂滅二字而存下學人事之功 迪之蒙許深矣 受賜至矣 更復何言”이라고 한 것을 보면 망기당은 회재의 제3서에 인(因)하여 크게 양보타협한 바가 있었든 모양인데 같은 서(제4서)에 오히려
쪽수▶P144-2最後의 辯論인 「答忘機堂書第四」에 「且去寂滅二字而存下學人事之功 迪之蒙許深矣 受賜至矣 更復何言」이라고 한 것을 보면 忘機堂은 晦齋의 第三書에 因하야 크게 讓步妥協한바가 있었든 모양인데 同書(第四書)에 오히려

然 然 其辭意之間 未免有些病 而至於物我無間之論 則依舊墜於虛空之敎 小子惑焉(中略)愚請姑即衣網之說白之 盖衣必有領而百裔順 網必有綱而萬目張 此語固善 然衣而徒有其領 斷其百裔 網而徒有其綱 絶其萬目 則安得爲衣網而其所有之綱領 亦奚所用哉 天下之理 體用相須(●●●●) 動靜交養(●●●●) 豈可專於內而不於外體察哉(위와 같음)

쪽수▶P144-3

然 其辭意之間 未免有些病 而至於物我無間之論 則依舊墜於虛空之敎 小子惑焉(中略)愚請姑即衣網之說白之 盖衣必有領而百裔順 網必有綱而萬目張 此語固善 然衣而徒有其領 斷其百裔 網而徒有其綱 絶其萬目 則安得爲衣網而其所有之綱領 亦奚所用哉 天下之理 體用相須(●●●●) 動靜交養(●●●●) 豈可專於內而不於外體察哉 (同上)

라 하고 또
쪽수▶P144-4라 하고 또

伏覩來敎 有曰主敬存心(●●●●) 則於直內工夫有矣 而未見義以方外․ 省察工夫 豈非但得衣之領而斷其百裔 但得網之網而絶其萬目者哉 (中略) 又曰先立其體然後下學人(●●●●●●●●●)▶P145-1}事() 此語亦似未當 下學人事時 固當常常主敬存心 安有斷除人事 獨守其心 必立其體然後 始可事於下學乎 所爲體旣立則運用萬變(●●●●●●●●) 純乎一理之正而(●●●●●●●) 縱橫自得者(●●●●●)固無背於聖經賢傳之旨, 然其所謂純乎一理 縱橫自得者 乃聖人從容中道之極致 體旣立後有多少工夫 恐未易遽至於此 伏惟更加精察 且如萬物生於一理 仁者純乎天理之公而無一毫人欲之私 故能以天地萬物爲一體 然其體一之中 親疎遠近是非好惡之分 自不可亂(위와 같음)

쪽수▶P144-5

伏覩來敎 有曰主敬存心(●●●●) 則於直內工夫有矣 而未見義以方外․ 省察工夫 豈非但得衣之領而斷其百裔 但得網之網而絶其萬目者哉 (中略) 又曰先立其體然後下學人(●●●●●●●●●)▶P145-1}事() 此語亦似未當 下學人事時 固當常常主敬存心 安有斷除人事 獨守其心 必立其體然後 始可事於下學乎 所爲體旣立則運用萬變(●●●●●●●●) 純乎一理之正而(●●●●●●●) 縱橫自得者(●●●●●)固無背於聖經賢傳之旨, 然其所謂純乎一理 縱橫自得者 乃聖人從容中道之極致 體旣立後有多少工夫 恐未易遽至於此 伏惟更加精察 且如萬物生於一理 仁者純乎天理之公而無一毫人欲之私 故能以天地萬物爲一體 然其體一之中 親疎遠近是非好惡之分 自不可亂(同上)

이란 회재의 말에 의하여 보면 망기당의 견해에는 의연히 돈오상달적 공부에 치중하고 하학실천적 공부를 경시하였던 것 같고 그리하여 회재는 또한 위와 같이 논박을 한 것인데, 그 변론이 이에 그치고 만 것을 볼진대 망기당은 회재의 제4회답서를 보고는 더 쟁논할 용기를 일으키지 못하고 그만 굴복해 버린 것 같이도 상상된다. 하여간 이상 회재의 서를 통관할 때 노대가인 망기당의 주장이 차차로 회재에게 꿀리고 양보되고 박약하여간 것을 기 인용문에 의하여 규득할 수 있으며 또 연소기예(年少氣銳)의 회재의 논리가 얼마나 달창하고 날카로운가를 우리는 보고 알 수 있다. 물론 그 논설 중에는 선유(先儒)의 설, 특히 주자의 설을 습용하고 또 유가적 편견도 적지 않지만 자득의 묘와 독창의 견도 없지 아니하며 철두철미 유가의 본지(本旨)를 발휘함이 정주(程朱)라도 이(경우)에서 더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회재는 27세 때에 이미 대가와 논전하여 그를 압도할 만큼 실력이 든든하였으되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아니하였고, 또 그 뒤일지라도 그는 힘써 도회(韜晦)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다지 큰 학자로 인식하지 아니하였다. 이퇴계도 회재 생존 당시에는 그처럼 우러러 보지 아니하였으나 회재 졸후에 회재의 아들 이전인(李全仁)이 부의 행장(行狀)을 걸(乞)하려 하여 유저(遺著) 및 사적(事蹟)을 퇴계에게 보냄에 미쳐서 비로소 퇴계는 그 학문의 심천(深淺)을 엿보고 놀래지 아니하지 못하였으며 더욱 위의 「답망기당서」를 읽고서는 미상불 격탄(激嘆)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퇴계는 회재의 행장 중에 특히 위의 글의 가치를 표창하여 말하기를
쪽수▶P145-2이란 晦齋의 言에 依하여보면 忘機堂의 見解에는 依然히 頓悟上達的 工夫에 置重하고 下學實踐的 工夫를 輕視하였든 것 같고 그리하야 晦齋는 또한 右와 같이 論駁을 한 것인데, 그 辨論이 이에 끄치고만 것을 볼진대 忘機堂은 晦齋의 第四回答書를 보고는 더 爭論할 勇氣를 일으키지 못하고 그만 屈服해 버린 것 같이도 想像된다. 何如間 以上 晦齋의 書를 通觀할 때 老大家인 忘機堂의 主張이 次次로 晦齋에게 꿀리고 讓步되고 薄弱하여간 것을 其引用文에 依하야 窺得할 수 있으며 또 年少氣銳의 晦齋의 論理가 얼마나 達暢하고 날칼아운가를 吾人은 보고 알 수 있다. 勿論 그 論說中에는 先儒의 說, 特히 朱子의 說을 襲用하고 또 儒家的偏見도 적지 안치만 自得의 妙와 獨創의 見도 없지 아니하며 徹頭徹尾 儒家의 本旨를 發揮함이 程朱라도 이(境遇)에서 더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晦齋는 二十七歲時에 이미 大家와 論戰하야 그를 壓倒할 만치 實力이 든든하였으되 當時에는 널리 알려지지 아니하였고, 또 그 뒤일지라도 그는 힘써 韜晦하기 때문에 世上에서는 그다지 큰 學者로 認識하지아니하였다. 李退溪도 晦齋生存當時에는 그처럼 우으러 보지 아니하였으나 晦齋卒後에 晦齋의 子 李全仁이 父의 行狀을 乞하려하야 遺著 及事蹟읕 退溪에게 보냄에 미처서 비로소 退溪는 그 學問의 深淺을 엿보고 놀래지 아니하지 못하였으며 더욱 右의 「答忘機堂書」를 닑고서는 未嘗不 激嘆을 禁치 못하였다. 그리하야 退溪는 晦齋의 行狀中▶P146-1에 特히 右書의 價値를 表彰하야 말하기를

其精詣之見 獨得之妙 最在於與曹忘機漢輔論無極太極書四五篇也 其書之言 闡吾道之本源 闢異端之邪說 貫精微 徹上下 粹然一出於正 深玩其義 莫非有宋諸儒之緖餘 而其得於考亭者爲尤多也(●●●●●●●●●●)(퇴계집 권49, 「회재이선생행장(晦齋李先生行狀)」)

쪽수▶P146-2

其精詣之見 獨得之妙 最在於與曹忘機漢輔論無極太極書四五篇也 其書之言 闡吾道之本源 闢異端之邪說 貫精微 徹上下 粹然一出於正 深玩其義 莫非有宋諸儒之緖餘 而其得於考亭者爲尤多也(●●●●●●●●●●)(退溪集卷四十九, 「晦齋李先生行狀」)

라 하고 거듭 이에 계속하여 그의 동방유학사상에 처한 지위를 논하여 왈
쪽수▶P146-3라 하고 仍히 이에 繼續하야 그의 東方儒學史上에 處한 地位를 論하야 曰

嗚呼 我東國 古被仁賢之化 而其學無傳焉 麗氏之末以及本朝 非無豪傑之士有志此道而世亦以此名歸之者 然考之當時 則率未盡明誠之實 稱之後世 則又罔有淵源之徵 使後之學者 無所尋逐 以至于今 泯泯也 若吾先生 無授受之處 而自奮於斯學 闇然日章 而德符於行 炳然筆出而言垂于後者(●●●●●●●●●●) 求之東方(●●●●) 殆鮮有其倫矣(●●●●●●)

쪽수▶P146-4

嗚呼 我東國 古被仁賢之化 而其學無傳焉 麗氏之末以及本朝 非無豪傑之士有志此道而世亦以此名歸之者 然考之當時 則率未盡明誠之實 稱之後世 則又罔有淵源之徵 使後之學者 無所尋逐 以至于今 泯泯也 若吾先生 無授受之處 而自奮於斯學 闇然日章 而德符於行 炳然筆出而言垂于後者(●●●●●●●●●●) 求之東方(●●●●) 殆鮮有其倫矣(●●●●●●)

라 하였다. 퇴계는 유자(儒者)의 특색은 ‘입언수후(立言垂後)’에 있다고 생각하여 이 점에 있어서는 회재와 같은 유자를 동방에서 구하기 드문 양으로 말하였다. 회재와 거의 동시대의 사람으로 조금 선진인 조정암 같은 이도 비록 일세에 숭도창학(崇道唱學)한 공은 있지만 ‘입언수후’ 일사(一事)에는 결핍하였다고 퇴계는 생각하였다. 퇴계의 찬(撰)한 정암행장 중에 “所恃以爲斯道斯人地者 有立言垂後一段事爾(●●●●●●●●) 今先生則未然 一不幸而登擢太驟 再不幸而求退莫遂 三不幸而謫日斯終……其於立言垂後之事 又己無所逮及焉云云”이라 함은 즉 이를 말한 것이다. 퇴계가 회재를 동방사현 중에 넣은 것도 물론 그 입언수후의 사(事)가 있음으로 말미암은 거니와 광해군 2년에 이르러 회재가 문묘(文廟)에 종사하게 됨도 퇴계가 전일 그와 같이 추숭(推崇)하였음에 영향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율곡의 회재에 대한 관(觀)은 퇴계와 매우 다르다. 율곡은 회재를 평하여 경제의 재(才)가 없다 또는 그 출처에 자못 의심할 점도 있다하여 대유자로서의 가치를 썩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선조 6년 8월에 성균관 유생이 오현(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건의할 때에도 율곡은 오현 중 "김문경(굉필) 정문헌(여창)은 언론 풍지(風旨)가 미이불현(微而不顯)하고 이문원(언적)은 출처에 자못 의(議)할 곳이 있으며 다만 조문정(광조)은 도학을 창명하여 후인을 계용(啓牗)하고 이문순(황)은 의리(義理)에 침잠하여 일시에 모범이었은즉 이 2인을 표출종사(表出從祀)하면 수왈불가(誰曰不可)라 하리요"(경연일기2)라고 하여 회재는 정김이현과 아울러 문묘종사의 자격이 없음을 언명하였었다. 퇴계는 회재를 동방희유의 유자로 인정함에 대하여 율곡은 정암을 동방초유의 대현으로 추앙하였다. 율곡의 소견은 ‘입언수후’의 일사만으로는 진유(眞儒)의 여부를 저울질 할 수 없고 그밖에 경제의 재(才), 출처의 의(宜)를 겸한 이라야 대현으로 인정하였다. 학문이 비록 위대하고 입언수후의 저술이 비록 풍부하다 할지라도 이 조건에 결함이 있으면 진유로 치지 아니하였다. 물론 율곡의 설도 크게 일리가 있는 바이지만 퇴계의 본 바도 또한 그릇됨이 없다고 생각되나니 유자는 순전한 정치가와 달라 나아가 자가(自家)의 주의와 이상을 실현하려다가 그 뜻을 얻지 못하면 물러와 입언수후의 일을 찾는 것이 그 본색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이다. 회재가 을사사화에 있어 선유를 위하여 직언극간치 못하고 도리어 권간(權奸)의 소핍(所逼)으로 그 사건의 추관이 된 것은 그의 전기상 하나의 하점이라고 하겠으나, 그러나 이 일사로써 그의 전인격적 생활과 사교천명(斯敎闡明)의 공을 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더욱 그 후래의 학자를 패익(稗益)하고 계용(啓牗)하여 마침내 이학의 전성기를 초치(招致)케 한 선구자의 일인임을 생각할 때 그의 지위의 중함을 스스로 알 것이다.
쪽수▶P146-5라 하였다. 退溪는 儒者의 特色은 「立言垂後」에 있다고 생각하야 이 點에 있어서는 晦齋와 같은 儒者를 東方에서 求하기 드문 양으로 말하였다. 晦齋와 거이 同時代의 人으로 조금 先進인 趙靜菴같은 이도 비록 一世에 崇道唱學한 功은 있지만 「立言垂後」 一事에는 缺乏하였다고 退溪는 생각하였다. 退溪의 撰한 靜菴行狀中에 「所恃以爲斯道斯人地者 有立言垂後一段事爾(●●●●●●●●) 今先生則未然 一不幸而登擢太驟 再不幸而求退莫遂 三不幸而謫日斯終……其於立言垂後之事 又己無所逮及焉云云」이라 함은 卽 이를 말한 것이다. 退溪가 晦齋를 東方四賢 中에 너은 것도 勿說 그 立言垂後의 事가 있음으로 말미암은 거니와 光海君二年에 이르러 晦齋가 文廟에 從祀하게 됨도 退溪가 前日 그와 같이 推崇하였음에 影響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李栗谷의 晦齋에 對한 觀은 退溪와 매우 다르다. 栗谷은 晦齋를 評하야 經濟의 才가 없다 또는 其出處에 자못 의심할 點도 있다하야 大儒者로서의 價値를 썩 認定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야 宣祖六年八月에 成均館儒生이 五賢(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의 文廟從祀를 建議할 때에도 栗谷은 五賢中 「金文敬(宏弼) 鄭文獻(汝昌)은 言▶P147-1論風旨가 微而不顯하고 李文元(彦迪)은 出處에 자못 議할 곳이 있으며 다만 趙文正(光祖)은 道學을 唱明하야 後人을 啓牗하고 李文純(滉)은 義理에 沈潛하야 一時에 模範이었은즉 이 二人을 表出從祀하면 誰曰不可라 하리요」(經筵日記二)라고 하야 晦齋는 鄭金二賢과 아울러 文廟從祀의 資格이 없음을 言明하였었다. 退溪는 晦齋를 東方稀有의 儒者로 認함에 對하야 栗谷은 靜菴을 東方初有의 大賢으로 推仰하였다. 栗谷의 所見은 「立言垂後」의 一事만으로는 眞儒의 與否를 저울질 할 수 없고 그밖에 經濟의 才, 出處의 宜를 兼한 이라야 大賢으로 認定하였다. 學問이 비록 偉大하고 立言垂後의 著述이 비록 豊富하다할지라도 이 條件에 缺陷이 있으면 眞儒로 치지 아니하였다. 勿論 栗谷의 說도 크게 一理가 있는 바이지만 退溪의 본 바도 또한 그릇됨이 없다고 생각되나니 儒者는 純全한 政治家와 달라 나아가 自家의 主義와 理想을 實現하려다가 그 뜻을 얻지 못하면 물러와 立言垂後의 일을 찾는 것이 그 本色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이다. 晦齋가 乙巳士禍에 있어 善類를 爲하야 直言極諫치 못하고 도리어 權奸의 所逼으로 그 事件의 推官이 된 것은 그의 傳記上一瑕點이라고 하겟으나, 그러나 이 一事로써 그의 全人格的 生活과 斯敎闡明의 功을 忘却하여서는 아니 된다. 더욱 그 後來의 學者를 稗益하고 啓牗하야 마침내 理學의 全盛期를 招致케한 先驅者의 一人임을 생각할 때 그의 地位의 重함을 스스로 알 것이다.
회재는 다년관계에 분주하고 또 힘써 도회하기 때문에 많은 문도(門徒)와 종유(從遊)의 사(士)를 가지지 못하고 다만 그의 서자인 이전인(李全仁)이 적거(謫居) 시에 종학(從學)하여 잘 그 여서(餘緖)를 이었었다. 전인의 자는 경부(敬夫)요 호는 잠계(潛溪)니 방간에 행하는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 일편은 즉 잠계가 강계에서 부(父)에게 종학할 때 학문에 관하여 아버지와 문답한 바를 기록한 것으로 회재의 어록이라고 보아도 좋으며 따라 회재의 학문을 연구함에 일조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궐략하여 둔다.
쪽수▶P147-2晦齋는 多年官界에 奔走하고 또 힘써 韜晦하기 때문에 만흔 門徒와 從遊의 士를 가지지 못하고 다만 그의 庶子인 李全仁이 謫居時에 從學하야 잘 그 餘緖를 이었었다. 全仁의 字는 敬夫요 號는 潛溪니 坊間에 行하는 關西問答錄一篇은 卽潛溪가 江界에서 父에게 從學할 때 學問에 關하야 父와 問答한 바를 記錄한 것으로 晦齋의 語錄이라고 보아도 조흐며 따라 晦齋의 學問을 硏究함에 一助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긔에는 闕略하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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