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교양종에 대하여

North Korea Humanities

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XML 문서 다운받기

오교양종에 대하여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五敎兩宗에 對하야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8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김영수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7년 11월
시작쪽 074쪽 종료쪽 101쪽 전체쪽 028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민속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총설


본문1-1: 1. 오교양종이란 무엇인가


오교양종이란 것은 조선 불교의 종파를 총칭하는 이름으로서, 고려 숙종인물조로부터 이조 세종인물조까지의 약 330여 년간을 두고 불러오던 것이다. 불교가 조선에 처음 전래한 것으로 말하면 고구려 소수림왕인물 2년에 중국 전진(前秦) 부견인물(苻堅)이 불경과 불상을 순도대사인물(順道大師)에게 주어서 고구려 임금에게 보내온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하거니와, 당시 순도대사인물가 가지고 온 불교로 말하면 중국에서도 아주 삼론, 지론 등 대승불교가 번역되기 전이므로 순도대사인물가 전래한 불교는 물론 소승불교에 속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최치원인물이 찬한 양산사 지증비(智證碑)에
쪽수▶P74-1五敎兩宗이란 것은 朝鮮佛敎의 宗派를 總稱하는 이름으로서, 高麗 肅宗朝로부터 李朝 世宗朝까지의 約 三百三十 餘年間을 두고 불러오든 것이다. 佛敎가 朝鮮에 처음 傳來한 것으로 말하면 高句麗 小獸林王 二年에 支那 前秦苻堅이 佛經과 佛像을 順道大師에게 주어서 高句麗 님금에게 보내온 것으로 始作되였다고 하거니와, 當時 順道大師가 가지고 온 佛敎로 말하면 支那에서도 아주 三論 地論 等 大乘佛敎가 翻譯되기 前임으로 順道大師의 傳來한 佛敎는 勿論 小乘佛敎에 屬한 것일 것이다. 그럼으로 崔致遠의 所撰인 陽山寺智證碑에

毘婆娑先至 則四郡駈四諦之輪 摩訶衍後至 則一國耀 一乘之鏡

쪽수▶P74-2

毘婆娑先至 則四郡駈四諦之輪 摩訶衍後至 則一國耀 一乘之鏡

이란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나눠져 있든 시대에 있어서 소승불교인 비바사(毘婆娑)가 사군(四郡) 옛 땅인 고구려에 먼저 도달했고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 이르러서 비로소 마가연(摩訶衍)의 대승불교가 전래하였다는 것이다.
쪽수▶P74-3이란 것은 高句麗 百濟 新羅의 三國이 分하여 있든 時代에 있어서 小乘佛敎인 毘婆娑가 四郡古地인 高句麗에 先至하였고 三國이 統一된 以後에 이르러서 비로소 摩訶衍의 大乘佛敎가 傳來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조선에 있어 열반(涅般), 법성(法性), 계율(戒律), 화엄(華嚴), 법상(法相) 등 후세의 소위 오교라고 가리키는 대승불교가 2차로 건립되기는 신라 무열왕인물 때로부터의 일이다. 당시 신라에서 분립되어 전하던 불교 종파는 대소승의 다름은 있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이 오교의 대승불교와 비바사의 소승불교는 다 경론(經論)으로써 소의근본(所依根本) 삼는 불교임으로 이때에 있어서는 교(敎)니 선(禪)이니 하는 소위 선교의 분쟁은 없었던 것이다. 신라 흥덕왕인물 이후에 이르러 가지산의 도의인물와 실상산의 홍척인물과 동리산의 혜철인물, 도굴산의 범일인물, 봉림산의 현욱인물, 사자산의 도윤인물, 의양산의 도헌인물, 성주산의 무염인물, 수미산의 이엄인물 등 구산 조사(祖師)가 차제로 일어나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조계종 풍을 들여옴으로부터 비로소 선교의 대립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신라의 불교는 열반, 법성 등 오종은 교로서 한 편이 되고 가지산, 실상산 등 구종은 선으로서 한 편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세상에서는 오교구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쪽수▶P74-4事實 朝鮮에 있어 涅般 法性 戒律 華嚴 法相 等 後世의 所謂 五敎라고 稱한 大乘佛敎가 次第로 建立되기는 新羅 武烈王때로부터의 일이다. 當時 新羅에서 分立되야 傳하든 佛敎宗派는 大小乘의 다름은 있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이 五敎의 大乘佛敎와 毘婆娑의 小乘佛敎는 다 經論으로써 所依根本 삼는 佛敎임으로 이때에 있어서는 敎니 禪이니 하는 所謂 禪敎의 紛爭은 없었든 것이다. 新羅 興▶P75-1德王 以後에 이르러 迦智山의 道儀와 實相山의 洪陟과 桐裡山의 惠哲, 闍崛山의 梵日, 鳳林山의 玄昱, 師子山의 道允, 義陽山의 道憲, 聖住山의 無染, 須彌山의 利嚴 等 九山 祖師가 次第로 起하야 敎外 別傳의 曺溪宗風을 轉入함으로부터 비로소 禪敎의 對立을 보게 되였다. 그리하야 當時 新羅의 佛敎는 涅般 法性 等 五宗은 敎로서 한편 이 되고 迦智山 實相山 寺 九宗은 禪으로서 한편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世上에서는 五敎九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와 가티 오교와 구산이 서로 대립하여 있는 불교단은 다시 고려 숙종인물 2년에 이르러서 대각국사인물의 천태종이 가첨됨을 따라 오교구산이란 명칭을 변경하여 오교양종이라고 하게 되었다. 구산 선종은 동시 조계 혜능대사인물의 법손에 속한 불교단이므로 이것을 총칭하야 조계종이라 하고 새로 가첨된 천태종을 합하야 양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야 고려 숙종인물 이후의 조선 불교의 교단은 교로서는 열반, 계율, 법성, 화엄, 법상 등 오종이 있었고 선으로서는 조계, 천태 등 양종이 있었으므로 이것을 오교양종이라고 호칭하였다.
쪽수▶P75-2이와 가티 五敎와 九山이 서로 對立하여 있는 佛敎團은 다시 高麗 肅宗 二年에 이르러서 大覺國師의 天台宗이 加添됨을 따라 五教九山이란 名稱을 變更하야 五敎兩宗이라고 하게 되었었다. 九山 禪宗은 同是 曺溪 惠能大師의 法孫에 屬한 佛敎團임으로 이것을 總稱하야 曺溪宗이라 하고 새로 加添된 天台宗을 合하야 兩宗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그리하야 高麗 肅宗 以後의 朝鮮佛敎의 敎團은 敎로서는 涅般 戒律 法性 華嚴 法相 等 五宗이 있었고 禪으로서는 溪 天台 等 兩宗이 있었음으로 이것을 五敎兩宗이라고 呼稱하였었다.
이로써 본다면 고려 숙종인물 이후로 이조 세종인물 때까지의 조선 불교의 종파는 오즉 오교양종 즉 칠종뿐임에도 불구하고 이조 태종인물 6년 3월 의정부로부터 선교 각 종파를 합하여 남겨 둘 사사(寺社)를 정할 것을 주청한 계문(태종실록서적 소재) 중에
쪽수▶P75-3일로써 본다면 高麗 肅宗 以後로 李朝 世宗時까지의 朝鮮佛敎의 宗派는 오즉 五敎兩宗 卽 七宗뿐임에도 不拘하고 李朝 太宗 六年 三月 議政府로부터 禪敎 各宗 合留寺社를 定할 것을 奏請한 啓文(太宗實錄 所載) 中에

(上畧)新舊都 五敎兩宗各留一寺 外方府禪敎 各一寺(中畧)曺溪宗擔摠持宗合留七十寺 天台䟽字法事宗合留四十三寺 華嚴道門宗,合留四十三寺 慈恩宗留三十六寺 中道神印宗,合留三十寺 南山始興宗各留十寺

쪽수▶P75-4

(上畧)新舊都 五敎兩宗各留一寺 外方府禪敎 各一寺(中畧)曺溪宗擔摠持宗合留七十寺 天台䟽字法事宗合留四十三寺 華嚴道門宗,合留四十三寺 慈恩宗留三十六寺 中道神印宗,合留三十寺 南山始興宗各留十寺

라 한―실록 중에 나타난―종명들을 보면 11종이 열거되었고 만일 여기에 다시 소승종을 더하면 도합 12종의 불교 교단이 고려말에 전하였던 것을 추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오교양종에 어떠케 배합시키면 될까. 나는 아래와 같이 배열하여 설명하고 싶다.
쪽수▶P75-5라 한―實錄 中에 나타난―宗名들을 보면 十一宗이 列錄되었고 만일 여기에 다시 小乘宗을 加하면 都合 十二宗의 佛敎敎團이 高麗末에 傳하였든 것을 推想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五敎兩宗에 어떠케 配合시키면 可할까. 나는 아래와 가티 配列하야 說明하고 싶다.
【십이종】 【오교양종】
조계종…………조계종
총지종(摠持宗)…………〇〇〇
천태소사종(天台䟽字宗)/천태법상종…………천태종
화엄종/도문종(道門宗)…………화엄종
자은종(慈恩宗)…………법상종
중도종(中道宗)………법성종
신인종(神印宗)…………〇〇〇
남산종…………계율종
시흥종(始興宗)………열반종
소승종…………〇〇〇
쪽수▶P75-6【十二宗】 【五敎兩宗】
曺溪宗…………曺溪宗▶P76-1
摠持宗…………〇〇〇
天台䟽字宗/天台法事宗…………天台宗
華嚴宗/道門宗…………華嚴宗
慈恩宗…………法相宗
中道宗………法性宗
神印宗…………〇〇〇
南山宗…………戒律宗
始興宗………涅般宗
小乘宗…………〇〇〇
위와 같이 오교양종은 즉 칠종을 십이종에 배정하여 보면 결국 남은 것은 총지종, 신인종, 소승종 등의 삼종뿐이니, 이 삼종은 오교와 동시에 창립된 종들이다 승종으로 말하면 55교라는 것이 아직 세상에 출현되기 전부터 이미 전하여 온 종파이다. 그러나 이 삼종은 다 처음에 있어서는 하나의 독립종으로 행세를 하지 못하다가 오교양종이란 명칭이 이미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올라서 이름이 익혀진 뒤인 고려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립한 하나의 종으로 공인됨을 얻은 종들이므로 오교양종 중에 이름이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삼종을 오교양종에 부치어서 전래한 종이라 하여 부전(附傳) 삼종이라고 이름하여 보았다. 그러므로 오교양종이라 하면 즉 칠종일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칠종 이외에 부전 삼종까지 하여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 조계종, 천태종, 총지종, 신인종, 소승宗의 십종 교단을 모두 이름하여 오교양종이라고 불러온 것임을 특히 주의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쪽수▶P76-2右와 가티 五敎兩宗은 卽 七宗을 十二宗에 配定하여 보면 結局 남은 것은 摠持宗 神印宗 小乘宗 等의 三宗뿐이니, 이 三宗은 五敎와 同時에 創立된 宗들이다 乘宗으로 말하면 五五敎라는 것이 아즉 世上에 出現되기 前부터 이미 傳히야 온 宗派이다. 그러나 이 三宗은다. 처음에 있어서는 一 獨立宗으로 行世를 하지 못하다가 五敎兩宗이란 名稱이 이미 世上 사람들의 口頭에 올라서 이름이 익혀진 뒤인 高麗末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獨立한 一宗으로 公認됨을 얻은 宗들임으로 五敎兩宗 中에 이름이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 筆者는 이 三宗을 五敎兩宗에 부치어서 傳來한 宗이라 하야 附傳三宗이라고 名稱하여 보았다. 그럼으로 五敎兩宗이라 하면 卽七宗일 것 같지만은 事實에 있어서는 七宗 以外에 附傳三宗까지 하야 涅般宗 戒律宗 法性宗 華厳宗 法相宗 豊溪宗 天台宗 摠持宗 神印宗 小乘宗의 十宗敎團을 摠名하야 五敎兩宗이라고 불러 온 것임을 特히 注意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본문1-2: 2. 등전(燈傳)의 방법


이상에서 말한바 오교양종의 내용을 설명하기 전에 종맥을 유지 상속함에 요인이 되고 근본이 되는 등전(傳燈)이란 것을 먼저 말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전등이란 것은 불교의 혜명(慧命)을 계속 대대로 이어서 후세에까지 유전하는 것이 마치 등과 등이 그 화염을 이어받는 것과 같다 하여 그 불교 혜명을 상속, 유전하는 방법을 전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쪽수▶P76-3以上에서 말한바 五敎兩宗의 內容을 說明하기 前에 宗脉을 維持 相續함에 要因이 되고 根本이 되는 傳燈이란 것을 먼첨 말하지 아니 하면 안 될 것이다. 傳燈이란 것은 佛敎의 慧命을 繼續 相傅하야 後世에까지 流傳하는 것이 마치 燈과 燈이 그 火焰을 相傅하는 것과 같다 하야 그 佛敎 慧命을 相續 流傳하는 方法을 傳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오교양종은 무슨 방법으로써 빛을 상속하였던가. 신라, 고려 시대의 승려로 말하면 소위 누구라고 손에 꼽는 승려는 반드시 중국에 들어가 구법(求法)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풍조로서 사람이 중국에 가서 새로 불교를 전수하여다가 그것을 선포하였다고 하면 전부터 전하여 오든 소위 오교양종은 멸망을 보게 될 것이 아닌가. 설령 멸망되지 아니하고 그 법맥을 상전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구법(求法) 고승들을 제외한 나머지의 한 승려들로만이 서로 계속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1년을 두고도 수십인의 고승들이 새 불교를 수입하여 왔었으니 오치양종 이외 수십 개의 종파가 늘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조선 불교는 시종일관으로 오교양종뿐이요 이 이외에 다른 종파의 가첨이 없었던 것을 보면 그 오교양종의 법맥을 전하는 전등 상에 움직이지 못할 철칙이 있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쪽수▶P77-1그러면 이 五敎兩宗은 무슨 方法으로써 빛을 相續하였든가. 羅麗 時代의 僧侶로 말하면 所謂 誰某라고 屈指하는 僧侶는 반드시 支那에 入하야 求法하는 것을 名譽롭게 생각하였었다. 이러한 風潮로서 사람 사람이 支那에 가서 새로 佛敎를 傳受하여다가 그것을 宣布하였다고 하면 前부터 傳하여 오든 所謂 五敎兩宗은 滅亡을 보게 될 것이 아닌가. 設令 滅亡되지 아니하고 그 法脉을 相傳하였다고 하드라도 그것은 반드시 求法高僧들을 除置한 남어지의 한 僧侶들로 만이 互相 繼續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一年을 두고도 數十人의 高僧들이 새 佛敎를 輸入하여 왔었으니 五致兩宗 以外 數十個의 宗派가 늘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치만 實地에 있어서는 朝鮮 佛敎는 始終一貫으로 五敎兩宗뿐이요 이 以外에 다른 宗派의 加添이 없었든 것을 보면 그 五敎兩宗의 法脉을 傳하는 傳燈 上에 움직이지 못할 鐵則이 있었든 것을 推測할 수 있는 것이다.
전등 상에 제일 필요한 것은 사승(師僧)이다. 사승에는 최초로 출가입산하여 득도를 할 때에 만나게 된 득도사(得度師)가 있고 그다음 득도 후 유방(遊方) 행각 중에 상봉하게 된 수법사(受法師)가 있다. 이 득도사와 수법사와의 일개 사승 중에 어느 사승으로써 정사승(正師僧)을 삼았는가 하면 신라, 고려 시대에 있어서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득도사로써 정사승을 삼았던 것이 분명하다. 오교양종 중 어느 사찰에서든지 새로 득도한 승려가 있으면 그 새로운 득도자의 법명 두 자는 반드시 그 소속 종파의 본사에 등록하여 두는 것이 원칙이다. 한번 법명을 등록하여 둔 이상에는 그 뒤에 그 사람이 어디 가서 수법사를 상봉하여 그의 법을 얻었든지 간에 그 승려는 변통할 수 없이 법명을 등록하여 둔 그 종파의 승려로서 그 종파에 속한 사찰의 주지를 보명(補命)하게 되는 터이므로 만일 최초에 득도한 절의 소속 종파를 하직하고 다른 종 승려로 되려고 하면 행정관청의 인가를 얻어 전적 수속을 밟지 아니하고는 하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고려 강종인물의 네 번째 왕자인 경지인물(鏡智) 왕사가 처음에 의양산파의 고승인 보경사 주지 원진국사인물에게 득도를 하였으므로 그의 승적은 의양산에 두었었다. 그 뒤 경지인물 왕사는 도굴산파의 고승인 진명국사인물의 도화(道化)를 흠앙하여 그의 도제가 되려고 할 때에 부득이 의양산에 두었던 승적을 조정의 지령으로써 굴산사에 이적하여 진명국사인물의 문도가 된 후에 도굴산파의 대리(大利)인 진주 단속사 주지로 임명된 일이 있었다. 이로써 보면 고려 시대의 각종 승적은 득도사를 중심으로 하여 득도사의 소속 종파 본사에 등록한 한에는 좀처럼 해서는 이적이 잘 아니 되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 진주 단속사 주지 대감국사인물란 이가 지나 임제인물의 법손인 개심선사인물의 인가를 받아서 그의 제자가 되었던 관계로 대감국사인물임제인물의 9대손이라고 자랑 삼아 떠들어 놓았지만 그의 득도사는 범일국사인물의 원손이기 때문에 그이가 귀적한 후 비명에는 크게 특서하기를 조계종 굴산 하 단속사 대감국사인물의 비라고 하여 그의 종파를 분명히 표방하였다. 삼각산 중흥사 태고국사인물가 중국의 고승 석옥청공인물 선사의 법을 사승하여 개당하였기 때문에 임제인물 19대 법손 태고인물라고 떠들었지만 그의 득도사는 조계종 가지산 도의선사인물의 원손인 회암사 광지선사인물인 까닭에 그이의 귀적한 후의 비명에다가 또한 크게 특서하기를 “高麗國師大曺溪嗣祖”라고 하여 그이의 소속 종파가 조계종인 것을 명시하였다.
쪽수▶P77-2傳燈 上에 第一 心要한것은 師僧이다. 師僧에는 最初로 出家入山하야 得度를 할 때에 맛나게 된 得度師가 있고 그 다음 得度 後 遊方行脚 中에 相逢하게 된 受法師가 있다. 이 得度師와 受法師와의 一個 師僧 中에 어느 師僧으로써 正師僧을 삼었는가 하면 羅麗 時代에 있어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得度師로써 正師僧을 삼었든 것이 分明하다. 五敎兩宗 中 어느 寺刹에서든지 새로 得度한 僧侶가 있으면 그 新得度者의 法名 二字는 반드시 그 所屬 宗派의 本寺에 登錄하여 두는 것이 原則이다. 한번 法名을 登錄하여 둔 以上에는 그 뒤에 그 사람이 어디가서 受法師를 相逢하야 그의 法을 受하든지 간에 그 僧侶는 變通할 수 없이 法名을 登錄하여 둔 그宗派의 僧侶로서 그 宗派에 屬한 寺刹의 住持를 補命하게 되는 터임으로 만일 最初에 得度한 寺의 所屬 宗派를 하직하고 他宗 僧侶로 되려고 하면 行政官廳의 認可를 得하야 轉籍 手續을 밟지 아니하고는 하는 道理가 없는 것이다. 一例를 들면 高麗 康宗의 第四王子인 鏡智 王師가 처음에 義陽山派의 高僧인 寶鏡 寺住持 圓眞國師에게 得度를 하였음으로 그의 僧籍은 義陽山에 두었었다. 그 뒤 鏡智王師는 闍崛山派의 高僧인 眞明國師의 道化를 欽仰하야 그의 徒弟가 되려고 할 때에 不得已 義▶P78-1陽山에 두었던 僧籍을 朝廷의 旨令으로써 崛山寺에 移籍하야 眞明國師의 門徒가 된 後에 崛山派의 大利인 晋州 斷俗寺 住持로 被命된 일이 있었다. 일로써 보면 高麗時代의 各宗 僧籍은 得度師를 中心으로 하야 得度師의 所屬 宗派本寺에 登錄한 限에는 좀처럼 해서는 移籍이 잘 아니 되는 것을 推測할 수 있다. 또 晋州斷俗寺 住持大監國師란 이가 支那臨濟의 法孫인 介諶禪師의 印可를 받어서 그의 弟子가 되었든 關係로 大監國師를 臨濟의 九代孫이라고 자랑삼아 떠들어 노았지만은 그의 得度師는 梵日國師의 遠孫이기 때문에 그이가 歸寂한 後 碑銘에는 大字特書하기를 曺溪宗崛山下斷俗寺大監國師之碑라고 하야 그의 宗派를 分明히 標膀하였다. 三角山 重興寺 太古禪師가 支那의 高僧 右屋淸珙禪師의 法을 嗣承하야 開堂하였기 때문에 臨濟十九代法孫 太古라고 떠들었지만 그의 得度師는 曺溪宗 迦智山 道儀禪師의 遠孫인 檜岩寺 廣智禪師인 까닭에 그이의 歸寂한 後의 碑銘에다가 또한 大字特書하기를 「高麗國師大曺溪嗣祖」라고 하야 그이의 所屬 宗派가 曺溪宗인 것을 明示하였다.
오교양종의 법맥을 계속하는 전등 상에 이러한 철칙이 있었던 것을 주의치 아니함으로 인하여 혹 어떤 이들은 태고선사인물임제인물의 19대 법손이라 하야 태고선사인물의 종파를 말할 때에 임제종이라고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태고인물 화상(和尙)이 생전사후를 통하여 조계종 가지산 하의 승려 노릇을 한 일은 있어도 임제 승려로 행세한 일은 없었다.
쪽수▶P78-2五敎兩宗의 法脉을 繼續하는 傳燈 上에 이러한 鐵則이 있었든 것을 注意치 아니함으로 因하야 혹 어떤 이들은 太古禪師를 臨濟의 十九代 法孫이라 하야 太古禪師의 宗派를 말할 때에 臨濟宗이라고 하지만 事實에 있어서는 太古 和尙이 生前死後를 通하야 曺溪宗 迦智山 下의 僧侶 노릇을 한 일은 있어도 臨濟僧侶로 行世한 일은 없었다.
이와 같이 득도사로서 정사승을 삼아가지고 종의 전등을 상속하는 것이므로 인하여 오교양종이 몇백 년을 두고 그 종풍을 계속하였고 또한 구법 승려들이 년년세세로 중국으로부터 새로 불법을 전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즉 그 승려의 불교 지식을 향상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 승려의 본래 종파에는 하등 변동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새 종파가 오교양종 이외에 증가되는 법도 없었던 것이다.
쪽수▶P78-3이와 가티 得度師로써 正師僧을 삼아가지고 宗의 傳證을 相續하는 것임으로 因하야 五敎兩宗이 幾百年을 두고 그 宗風을 繼續하였고 또한 求法 僧侶들이 年年世世로 支那로부터 새로 佛法을 傳來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즉 그 僧侶의 佛敎智識을 向上시키는 것에 不過한 것임으로 그 僧侶의 本來宗派에는 何等變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新宗派가 五敎兩宗 以外에 增加되는 法도 없었든 것이다.
































본문1-3: 3. 승정기관과 법계의 방법


이상에서는 오교양종의 종풍을 유지, 계속하는 데 득도사를 정사승으로 하는 전등의 방법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여 마쳤거니와 다음으로 또 한 가지 말할 것은 오교양종의 종무를 운행하는 승정기관과 승려의 법계를 승진하는 방법이다. 이 승정의 기관이라든지 법계 승진의 방법이라든지를 잘 밝히지 못하는 때에는 오교양종의 판정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착오가 생기는 것을 면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쪽수▶P78-4以上에서는 五敎兩宗의 宗風을 維持繼續하는 대 得度師를 正師僧으로 하는 傳燈의 方法이 있었다는 것을 說明하여 맟었거니와 다음으로 또 한 가지 말할 것은 五敎兩宗▶P79-1의 宗務를 運行하는 僧政機關과 僧侶의 法階를 昇進하는 方法이다. 이 僧政의 機關이라든지 法階 昇進의 方法이라든지를 잘 밝히지 못하는 때에는 五敎兩宗의 判定에 代하야 여러 가지의 錯誤가 생기는 것을 免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승정기관으로 말하면 신라 진흥왕인물 12년에 처음으로 몇 국통(國統) 1인과 주통(州統) 9인과 군통(郡統) 18인을 두어 가지고 전국 승정을 분장하게 하였다. 이 국통(○○)이니 주통(○○)이니 군통(○○)이니 하는 것은 국승통, 주승통, 군승통을 약칭한 것임으로 이 시대를 이름하여 승통시대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이 승통시대에는 정부기관과 불교기관의 구별이 없는 때이므로 정교를 구분할 필요도 없던 시대이다. 그 뒤 문성왕인물조에 이르러서 승통을 폐하고 대신 정부기관으로서 승록사(僧錄司)를 설치하여 좌우 승록을 두어 전국 승정을 다스리게 하고 주에는 주승정, 군에는 군승정을 설치함과 동시에 불교기관으로는 승려회의소가 있었으니 조계종의 소관 사찰인 광명사는 선종 즉 양종의 도회소가 되고 해동종의 본리인 왕륜사는 교종 즉 오교의 도회소가 되었다. 이 승록시대에는 정부기관과 불교기관과의 구별도 판연하거니와 선과 교의 구별도 분명하여졌다. 왕륜사는 교종의 불교기관이요 광명사는 선종의 불교기관인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정부의 기관으로 좌우 양가 승록을 설치한 것은 그중의 하나는 교종 승정을 맡은 것이라면 남은 하나는 선종 승정을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승록이 선종 승정을 맡고 어느 승록이 교종 승정을 맡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국가에서 교종 중에 유명한 어떤 승려를 영입할 때에는 다분히 우가 승록이 출영(出迎)하였고 선종 중에 유명한 어느 승려을 영입할 때에는 다분히 좌가 승록이 출영한 것으로 보아, 좌가 승록은 선종 승정을 담당하고 우가 승록은 교종 승정을 담당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쪽수▶P79-2僧政機關으로 말하면 新羅 眞興王 十二年에 처음으로 몇 國統 一人과 州統 九人과 那統 十八人을 두어 가지고 全國 僧政을 分掌하게 하였다. 이 國統(○○)이니 州統(○○)이니 郡統(○○)이니 하는 것은 國僧統 州僧統 郡僧統의 畧稱한 것임으로 이 時代를 이름하야 僧統時代라고 하면 조흘 것이다. 이 僧統時代에는 政府機關과 佛敎機關의 區別이 없는 때임으로 政敎를 區分할 必要도 없든 時代이다. 그 뒤 文聖王朝에 이르러서 僧統을 廢하고 대신 政府機關으로서 僧錄司를 設하야 左右 僧錄을 두어 全國 僧政을 統理케 하고 州에는 州僧正 郡에는 郡僧正을 設置함과 同時에 佛敎機關으로는 僧侶會議所가 있었으니 曺溪宗의 所關寺刹인 廣明寺는 禪宗 即 兩宗의 都會所가 되고 海東宗의 本利인 王輪寺는 敎宗 卽 五敎의 都會所가 되였었다. 이 僧錄時代에는 政府機關과 佛敎機關과의 區別도 判然하거니와 禪과 敎의 區別도 分明하여졌었다. 王輪寺는 敎宗의 佛敎機關이요 廣明寺는 禪宗의 佛敎機關인 것은 重言할 必要도 없거니와 政府의 機關으로 左右兩街僧錄을 設置한 것은 그中의 하나는 敎宗僧政을 掌한 것이라면 남은 하나는 禪宗僧政을 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僧錄이 禪宗僧政을 掌하고 어느 僧錄이 敎宗僧政을 掌하였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國家에서 敎宗 中에 有名한 어떤 僧侶를 迎入할때에는 多分히 右街僧錄이 出迎하였고 禪宗 中에 有名한 어느 僧侶을 迎入할 때에는 多分히 左街僧錄이 出迎한 것으로 보아, 左街僧錄은 禪宗僧政을 掌하고 右街僧錄은 敎宗僧政을 掌하였든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것이 이조 세종인물 때 오교양종을 합하여 선교 양종을 삼은 뒤에 이르러서는 정부기관으로 된 승록사는 폐지되고 불교기관으로 흥천사는 선종도회소가 되고 흥덕사는 교종도회소가 되었다. 이와 같이 오교양종의 승정기관은 항상 선과 교를 구별하여 설치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쪽수▶P79-3이러하는 것이 李朝 世宗時 五敎兩宗을 合하야 禪敎 兩宗을 삼은 뒤에 이르러서는 政府機關으로 된 僧錄司는 廢止되고 佛敎機關으로 興天寺는 禪宗都會所가 되고 興德寺는 敎宗都會所가 되였었다. 이와 가티 五敎兩宗의 僧政機關은 恒常 禪과 敎를 區別하야 設置하였던 것이 事實이다.
그 다음 승려 법계의 승진에 있어서는 누구나 불문하고 득도식을 행하여 그 승적이 오교양종에 등록된 이상에는 다 승과에 응시하여 출신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승과는 고려 광종인물 때에 창설된 것으로서 교종선과 선종선에 나누어 가지고 교종선은 왕륜사에서 오교 승려들에게 행하고 선종선은 광명사에서 양종 승려들에게 행하는 것이다. 교종선에 입격한 자에게는 대선(大選)이란 초급 법계를 주어 대덕(大德), 대사,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 수좌(首座) 승통을 차제로 승진하고 선종선에 입격한 자에게는 역시 대선이란 초급 법계를 준 후 대덕,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를 차제로 승진하는 것이다. 대선에로부터 삼중대사까지는 선종, 교종의 구별이 없으나 삼중대사 이상의 법계는 구별이 전연하여 선종 승려에게는 반드시 선사, 대선사를 주고 교종 승려에게는 반드시 수좌 승통을 주는 것이므로 선사, 대선사로 있는 승려를 교종 승려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 수좌 승통의 법계를 가지고 있는 승려를 선종 승려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쪽수▶P80-1그 다음 僧侶法階의 昇進에 있어서는 누구나 不問하고 得度式을 行하야 그 僧籍이 五教兩宗에 登錄된 以上에는 다 僧科에 應試하야 出身할 資格이 있는 것이다. 僧科는 高麗 光宗時에 創設된 것으로서 敎宗選과 禪宗選에 分하여 가지고 敎宗選은 王輪寺에서 五敎僧侶들 에게 行하고 禪宗選은 廣明寺에서 兩宗僧侶들에게 行하는 것이다. 敎宗選에 入格한 者에게는 大選이란 初級法階를 投하야 大德 大師 重大師 三重大師 首座 僧統을 次第로 昇進하고 禪宗選에 入格한 者에게는 역시 大選이란 初級法階를 授한 後 大德 大師 重大師 三重大師 禪師 大禪師를 次第로 昇進하는 것이다. 大選에로부터 三重大師까지는 禪宗 敎宗의 區別이 없으나 三重大師 以上의 法階는 區別이 戰然하야 禪宗僧侶에게는 반드시 禪師 大禪師를 주고 敎宗僧侶에게는 반드시 首座僧統을 주는 것임으로 禪師 大禪師로 있는 僧侶를 敎宗僧侶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 首座僧統의 法階를 가지고 있는 僧侶를 禪宗僧侶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가티 승과에 입격하여 대덕의 법계에 승진한 자는 오교양종 사찰의 주지에 보명(補命)하는 것이다. 오교양종 사찰 주지를 임명할 때에 교종 승려는 교종 사찰 주지에 선종 승려는 선종 사찰 주지에 임명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화엄 승려는 화엄종 사찰 주지에, 천태종 승려는 천태종 사찰 주지에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다. 조계종에 있어서는 구산의 파별이 있으므로―예하면 가지산파 승려는 가지산파 사찰 주지에만, 굴산파 승려는 굴산파 사찰 주지에만 임명하는 것이므로―그 사찰이 어떤 종파의 소속인가 알 수 없을 때에는 그 사찰의 주지에 취임한 승려들의 법계를 고찰하여 보아서 그것을 결정할 것이고 또한 그 승려가 어떤 종파의 소속인가를 잘 알지 못할 때에는 그 승려의 부임한 사찰의 종파를 고찰하여 그것을 결정할 것이다. 이것이 오교양종을 설명하는 데 승정기관과 법계 승진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쪽수▶P80-2이와 가티 僧科에 入格하야 大德의 法階에 昇進한 者는 五敎兩宗寺刹의 住持에 補命하는 것이다. 五敎兩宗寺刹 住持를 任命할 때에 敎宗僧侶는 敎宗寺刹住持에 禪宗僧侶는 禪宗寺刹住持에 任命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華嚴僧侶는 華嚴宗寺刹住持에, 天台宗僧侶는 天台宗寺刹住持에 任命하는 것이 原則이다. 曺溪宗에 있어서는 九山의 派別이 있음으로―例하면 迦智山派僧侶는 迦智山派寺刹住持에만, 崛山派僧侶는 崛山派寺刹住持에만 任命하는 것임으로―그 寺刹이 何宗派의 所屬인가가 未詳할 때에는 그 寺刹의 住持에 就任한 僧侶들의 法階를 考察 하야 보아서 그것을 決定할 것이고 또한 그 僧侶가 何宗派의 所屬인가를 잘 알지 못할 때에는 그 僧侶의 被任寺刹의 宗派를 考察하야 그것을 決定할 것이다. 이것이 五敎兩宗을 說明하는대 僧政機關과 法階昇進을 밝히는 것이 必要하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이미 오교양종을 유지, 계속함에 심밀한 관계가 있는 전등의 방법과 또한 참고가 되는 승정기관, 법계 승진의 방법을 서술하여 마쳤으므로 이제부터는 정각 오교양종의 내용 및 기원에 들어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로 하자.
쪽수▶P80-3以上에서 이미 五敎兩宗을 維持繼續함에 深密한 關係가 있는 傳燈의 方法과 또한 參考가 되는 僧政機關 法階 昇進의 方法을 叙述하여 맟었음으로 이제부터는 정각 五▶P81-1敎兩宗의 內容 及 起原에 들어가 그것을 다음과 가티 說明하기로 하자.
































본문2: 각론


본문2-1: 1. 열반종


이 종은 신라 무열왕인물 때에 보덕인물(普德) 화상이라 하는 이가 개종한 바로서 열반경으로서 소의근본 성전을 삼는 종이므로 열반종이라 이름한다. 또한 오교양종 중에서 제일 먼저 흥기한 종이라고 하여 시흥종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전에 고교형인물(高橋亨) 씨는 조선불교월보학술지에서 발행한 「조선불교종지변천원고」이란 논문 중에서 시흥종은 정토종인 듯하다고 말한 일도 있었고 또 이능화인물 씨는 불교통사서적에서 시흥종은 천태종이라고 의견을 부친 후 그 뒤를 이어 권상로 씨는 불교학술지 잡지에서 시흥종은 천태종의 일파라고 역설한 일도 있었다. 그런대 필자는 잡지 일광학술지 제3호권호에 「시흥은 열반종의 이명원고」이란 논제로써 이상 모든 설을 부인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정토종은 조선에서 독립한 하나의 종으로 그 이목을 유지한 사적이 없으므로 시흥종을 정토종으로 볼 수 없는 것이며 또 천태종은 선종이요 시흥종은 교종인지라 선과 교가 판이한 시흥종으로 천태종의 일파라고 볼 수도 없는 까닭이다.
쪽수▶P81-2이 宗은 新羅 武烈王時에 普德和尙이라 하는 이의 開宗한 바로서 涅般經으로써 所依根本聖典을 삼는 宗임으로 涅般宗이라 이름한다. 또한 五敎兩宗 中에서 第一 먼저 興起한 宗이라고 하야 始興宗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曾前에 高橋亨 氏는 朝鮮佛敎月報에서 發行한 「朝鮮佛敎宗旨變遷」이란 論文 中에서 始興宗은 淨土宗인 듯하다고 말한 일도 있었고 또 李能和 氏는 佛敎通史에서 始興宗은 天台宗이라고 意見을 부친 後 그 뒤를 이어 權相老氏는 佛敎雜誌에 서 始興宗은 天台宗의 一派라고 力說한 일도 있었다. 그런대 筆者는 雜誌 一光 第三號에 「始興은 涅般宗의 異名」이란 論題로써 以上 諸說을 否認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淨土宗은 朝鮮에서 獨立 一宗으로 그 而目을 維持한 事蹟이 없음으로 始興宗을 淨土宗으로 볼 수 없는 것이며 또 天台宗은 禪宗이요 始興宗은 敎宗인지라 禪과 敎가 判異한 始興宗으로 天台宗의 一派라고 볼 수도 없는 所以이다.
필자도 전에 시흥은 혹시 소승종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그것은 시흥이란 말이 신라 법흥왕인물 때의 ‘시흥불법’이란 말에서 근거를 둔 듯하고 그때 그 불법은 즉 소승불교에 불과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시흥종이란 시흥과 시흥불교라는 시흥이 같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근거도 없으므로 시흥은 열반종의 다른 이름이라고 확정하였다. 일광학술지 제3호권호에서는 세 종의 이유를 들어서 열반종의 다른 이름이 시흥인 것을 설명하였지만 여기에는 오직 한 가지만 들어서 말하기로 하자.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조 세종인물 6년에 칠종을 폐하여 선교 양종으로 합성할 때에 조계, 천태, 총남의 삼종을 합하여 선종이라 하고 화엄, 자은 중신, 시흥의 사종을 합하여 교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부에서 양종에 대하여 분배하여 준 사찰이 전국을 통하여 36사가 되었다. 그 36사 중에는 열반종의 근본 도장인 전주 경복사가 들어있다. 36사로 말하면 선교 양종에 각각 18사씩을 분배하여 준 것이므로 교종에 배속할 사찰이 18사이다. 이 교종에 배속하여 준 18사는 즉 당시 교종에 참렬한 화엄, 자은, 중신, 시흥의 사종이 분배하여 갈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화엄 등 사종은 18사를 나누어갈 주인이요 18사는 사종에게 분배될 재산이다. 그러하다면 재산만 있고 주인이 없을 리도 없고 주인은 있고 재산이 없을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런대 열반종의 근거지로서 열반종의 소유 재산인 전주 경복사는 36사 중에 들어있으나 경복사의 소유 주인인 열반종은 당시 참렬한 교종 중에 명목이 나타나지 않고 의외에 그 역사도 알 수 없고 또 그 소유 사찰이 어느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시흥종이란 것이 교종 중에 참렬하였으니 이 주인 없는 경복사와 재산 없는 시흥종을 서로 배부하면 경복사는 시흥종의 소유 재산이요 시흥종은 경복사의 소유 주인인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시흥종이 즉 열반종이요 열반이 즉 시흥종이라고 할 수 있다.
쪽수▶P81-3筆者도 前日에 始興은 或是 小乘宗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하였었다. 그것은 始興이란 말이 新羅 法興王 時의 「始興佛法」이란 말에서 根據를 둔 듯하고 그때 그 佛法은 즉 小乘佛敎에 不過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즉 始興宗이란 始興과 始興佛敎이라는 始興이 같다는 것 以外에는 아무 根據도 없음으로 始興은 涅般宗의 異名이라고 確定하였다. 一光 第三號에서는 三種의 理由를 들어서 涅般宗의 異名이 始興인 것을 說明하였지만은 여기에는 오즉 한 가지만 들어서 말하기로 하자.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李朝 世宗 六年에 七宗을 廢하야 禪敎兩宗으로 合成할 때에 曺溪 天台 摠南의 三宗을 合하야 禪宗이라 하고 華嚴 慈恩 中神 始興의 四宗을 合하야 敎宗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政府에서 兩宗에 對하야 分配하여 준 寺刹이 全國을 通하야 三十六寺가 되였다. 그 三十六寺 中에는 涅般宗의 根本 道場인 全州 景福寺가 들어있다. 三十六寺로 말하면 禪敎兩宗에 各各 十八寺씩을 分配하여 준 것임으로 ▶P82-1敎宗에 配屬할 寺刹이 十八寺이다. 이 敎宗에 配屬하여 준 十八寺는 즉 當時 敎宗에 叅列한 華嚴 慈恩 中神 始興의 四宗이 分配하야 갈 것이다. 다시 말하면 華嚴 等 四宗은 十八寺를 나누어갈 主人이요 十八寺는 四宗에게 分配될 財産이다. 그러하다면 財産만 있고 主人이 없을 理도 없고 主人은 있고 財産이 없을 理도 없을 것이다. 그런대 涅般宗의 根據地로서 涅般宗의 所有財產인 全州 景福寺는 三十六寺 中에 들어있으나 景福寺의 所有主人인 涅般宗은 當時 叅列한 敎宗 中에 名目이 나타나지 안코 意外에 그 歷史도 알 수 없고 또 그 所有寺刹이 어느 것인지도 알 수 없는 始興宗이란 것이 敎宗 中에 叅列하였으니 이 主人 없는 景福寺와 財産 없는 始興宗을 서로 配付하면 景福寺는 始興宗의 所有財産이요 始興宗은 景福寺의 所有主人인 것이 分明하다. 따라서 始興宗이 卽 涅般宗이요 涅般이 卽 始興宗 이라고 할 수 있다.
개조 보덕인물 화상의 이전에 있어서 신라 원광인물도 진(陳)으로부터 열반경을 배워 왔었고 보덕인물 화상의 후에는 원효인물, 의상인물, 경흥인물, 의적인물, 대현인물 등 제덕이 나타나 혹은 경을 가르치고 혹은 소를 지어 열반경을 선양하였으나 이것은 다 일시적 겸학에 불과한 것이요 오즉 보덕인물 화상으로부터서는 열반경을 소의근본 성전을 삼아 가지고 전업으로 선양한 후 그의 문도들이 종풍을 유지하야 하나의 종으로서 면목을 완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쪽수▶P82-2開祖普德和尙의 以前에 있어서 新羅 圓光도 陳으로부터 涅般經을 배워 왔었고 普德和尙의 後에는 元曉 義相 憬興 義寂 大賢 等 諸德이 出하야 或은 經을 講하고 或은 䟽를 著하야 涅般經을 宣揚하였으나 이것은 다 一時的 兼學에 不過한 것이요 오즉 普德和尙으로부터서는 涅般經을 所依根本聖典으로 삼아가지고 專業으로 宣揚한 後 그의 門徒들이 宗風을 維持하야 一宗 面目을 完成하기에 이른 것이다.
보덕인물 화상은 본대 고구려 용강현 사람으로서 자(字)를 지법(智法)이라고 칭하는 이다. 고구려 반룡사에 살았더니 당시 보장왕인물이 도교를 혹신하므로 보덕인물은 말하기를 만일 도교를 신봉하면 국조가 장차 위태하리라 하고 누차 간하였으나 왕은 종내 듣지 않으므로 국망의 광경을 차마 볼 수 없다 하고 남으로 따라와 (전설에는 자기가 사는 방장실(方丈室) 그대로 남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백제 완산주(현재 전주) 고달산에 와 경복사를 지어 근본 도장을 정하고 열반종풍을 크게 떨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복사 안에 비래방장이란 주지실이 있었다고 한다.
쪽수▶P82-3普德和尙은 본대 高句麗 龍崗縣人으로서 字를 智法이라고 稱하는 이다. 高句麗 盤龍寺에 住하더니 當時 寶藏王이 道敎를 惑信함으로 普德은 말하기를 萬一 道敎를 信奉하면 國祚가 將次 危殆하리라 하고 屢次 諫하였으나 王은 終乃 不聽함으로 國亡의 光景을 참아 볼 수 없다 하고 南으로 따라와 (傳說에는 自己의 住하는 方丈室 그대로 南飛하얏다 한다) 百濟 完山州(今 全州) 孤達山에 移하야 景福寺를 創하야 根本 道場을 定하고 涅般宗風을 大振하였다고 한다. 그리 하야 景福寺 內에 飛來方丈이란 住持室이 있었다고 한다.
보덕인물 화상의 제자 중에 11인의 상수 제자가 있어서 8대가람을 창건하여 종풍을 조양(助揚)하였으니 고제 무상인물은 그의 제자금취인물로 더불어 금동사를 만들었고, 고제 적멸인물의융인물의 2인은 진구사를 열었고, 고제 지수인물는 대승사를 열었고, 고제 일승인물은 그의 제자 심정인물으로 더불어 대원사를 세웠고, 고제 수부인물는 유마사를 설립하였고 고제 사대인물와 고제 계육인물은 중대사를 세웠고 고제 개원인물은 그의 이름과 가든 개원사를 지었고, 고제 명덕인물은 연구사를 세웠다. 여기에 고제 개심인물과 고제 보명인물을 합하여 11인의 고제라고 하는 것이다.
쪽수▶P82-4普德和尙의 弟子 中에 十一人의 上首 弟子가 있어서 八大伽藍을 創하야 宗風을 助揚하였으니 高弟 無上은 그의 弟子金趣로 더부러 金銅寺를 創하였고, 高弟寂滅과 義▶P83-1融과의 二人은 珍丘寺를 開하였고, 高弟智藪는 大乘寺를 開하였고, 高弟一乘은 그의 弟子 心正으로 더부러 大原寺를 立하였고, 高弟水浮은 維摩寺를 設하였고 高弟四大와 高弟契育은 中臺寺를 造하였고 高弟開原은 그의 일홈과 가든 開原寺를 지였고, 高弟明德은 燕口寺를 成하였다. 여기에 高弟開心과 高弟普明을 合하야 十一人의 高弟라고 하는 것이다.
































본문2-2: 2. 계율종


이 종은 삼장 중에 율장으로써 교지를 삼는 고로 율종이라 혹은 계율종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당태종인물 때에 남산 도의가 창설한 것이라 하야 남산종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신라 제21대 선덕여왕인물 때에 출세한 자장율사인물의 개종에 속한 종이다. 이보다 먼저 삼국시대에 백제의 고승 겸익인물 등도 계율을 숭상하였으나 이것은 백제의 망국과 함께 실전되었고, 오직 자장율사인물에 이르러서 계율의 종풍이 세상에 크게 드러나고, 그의 법손이 계속 출세하여 종풍을 유지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독립한 하나의 종으로 공인함에 이른 것이다.
쪽수▶P83-2이 宗은 三藏 中에 律藏으로써 敎旨를 삼는 故로 律宗이라 或은 戒律宗이라고 名한다. 또한 支那에서는 唐太宗 時에 南山道宜의 創設한 것이라 하야 南山宗이라고 稱하는 것이다. 朝鮮에서는 新羅 第二十一代 善德女王 時에 出世한 慈藏律師의 開宗에 屬한 宗이다. 이보다 먼첨 三國時代에 百濟의 高僧 兼益 等도 戒律을 崇尙하였으나 이것은 百濟의 亡國과 함께 失傳되였고, 오즉 慈藏律師에 이르러서 戒律의 宗風이 世上에 大闡되고, 그의 法孫이 繼續 出世하야 宗風을 維持하였음으로 世上에서 獨立 一宗으로 公認함에 이른 것이다.
종조 자장율사인물는 신라 진골 소판(蘇判) (제3급)김무림인물의 아들로서 ‘약생남자(若生男子)하면 출가시키어 법해동양(法海棟梁)을 작(作)하겠다’는 예약으로 천부관음에게 기도하여 득생한 이라 한다. 유명은 선종랑이라고 하였다. 율사는 부모를 조실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처자를 버리고 출가하여 소유 世 업 재산을 기울여 원녕사를 짓고, 자기는 말(斗) 만한 소실 하나를 지어 가지고 그 가운데서 단좌하여 고행을 하더니 마침 나라의 대신을 잃었으므로 왕께서는 자장율사인물를 기용하고자 하여 자장인물에게 환속하기를 강권하였던바 자장인물은 이것을 고사하고 따르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왕의 노여움을 일으켜 필경 사죄(死罪)로써 책함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자장인물은 ‘계를 파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차라리 계를 지키고 지금 죽는 것이 좋다’ 하고 태연자약하므로 왕은 자장인물의 견고한 결심에 마음이 움직여 그의 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 후에 입당하여 남산 운제사에 머물러 수법하고 선덕여왕인물 12년에 귀국하였다 조가에서는 자장인물으로 대국통을 배(拜)하였으니, 이것은 특히 자장인물을 위하여 국통의 위에 대국통을 신설한 것이다. 자장인물은 대국통위에 있어 당시에 아직 정리되지 못한 승려의 법강을 확립하며, 통도사를 만들어 천하의 위승려자(爲僧侶者)를 통히 도(度)하였다. 절 안에 금할 계단을 지어 율종의 본색을 표현시키고 반월 반일마다 설계식을 행하여 오부 승니의 지범(持犯)을 소명케 하였다. 또한 정부에 건의하여 의관문물을 당제에 종하여 시행케 하는 등 각 방면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자장율사인물의 호법 노력에 의하여 율종 일문만 대성되었을 뿐 아니라 실로 신라 불교의 면목은 돌연 일신하여 견고한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쪽수▶P83-3宗祖 慈藏律師는 新羅眞骨蘇判 (第三級)金茂林의 아들로서 「若生男子하면 出家시키어 法海棟梁을 作하겠다」는 預約으로 千部觀音에게 祈禱하야 得生한 이라 한다. 幼名은 善宗郞이라고 하였다. 律師는 父母를 早失하고 人生의 無常함을 悟得하고 妻子를 버리고 出家하야 所有世 業財產을 기울리어 元寧寺를 成하고, 自己는 말(斗) 만한 小室 하나를 지어가지고 그 가운데서 端坐하야 苦行을 修하더니 마침 國의 大臣을 失하였음으로 王께서는 慈藏律師를 起用코저 하야 慈藏에게 還俗하기를 强勸하였든바 慈藏은 이것을 固辭不從함으로 드듸여 王의 怒를 招하야 畢竟 死罪로써 責함을 입게 되였었다. 그러나 慈藏은 「戒를 破하고 百年을 사는 것보다 차라리 戒를 守하고 今에 死하 는것이 좋다」 하고 泰然自若함으로 王은 慈藏의 堅固한 決心에 感하야 그의 願을 聽許하였다 한다. 그 後에 入唐하야 南山雲際寺에 住하야 修法하고 善德女主 十二年에 歸國하였다 朝家에서는 慈藏으로 大國統을 拜하였으니, 이것은 특히 慈藏을 爲하야 國統의 上에 大國▶P84-1統을 新設한 것이다. 慈藏은 大國統位에 居하야 當時에 아즉 整理되지 못한 僧侶의 法綱을 確立하며, 通度寺를 創하야 天下의 爲僧侶者를 通히 度하였다. 寺內에 金割 戒壇을 築하야 律宗의 本色을 表現시키고 半月半日마다 說戒式을 行하야 五部僧尼의 持犯을 昭明케 하였다. 또한 政府에 建議하야 衣冠文物을 唐制에 從하야 施行케 하는等 各 方面으로 活躍하였다. 그럼으로 慈藏律師의 護法努力에 依하야 律宗 一門만 大成되였을 뿐 아니라 實로 新羅 佛敎의 面目은 突然 一新하야 堅固한 基礎를 成하게 되였다.


































본문2-3: 3. 법성종


법성종은 즉 해동종으로서 신라 문무왕인물원효인물대성이 개종한 바이요, 분황사를 근본 도장으로 하므로 원효종 혹은 분황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종래의 학자들은 해동종은 즉 화엄종의 일파요 법성종은 즉 삼론종의 다른 이름이라고 설명하여 왔었다. 필자도 처음에는 종래의 설을 그대로 인정하여 왔었다. 그러나 그 뒤에 다시 고찰하여 보니 법성종이 삼론종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곧 해동종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국 화엄종 사람들이 해동 원효인물의상인물으로서 화엄 방조(傍祖)로 숭앙하는 것과 화엄종 대각국사인물의 영통사 비명에
쪽수▶P84-2法性宗은 卽 海東宗으로서 新羅 文武王 時 元曉大聖의 開宗한 바이요, 芬皇寺를 根本道場으로 함으로 元曉宗 或은 芬皇宗이라고 하는 것이다. 從來의 學者들은 海東宗은 卽 華嚴宗의 一派요 法性宗은 卽 三論宗의 異名이라고 設하여 왔었다. 筆者도 처음에는 從來의 設을 그대로 認定하여 왔었다. 그러나 그 뒤에 다시 考察하여보니 法性宗이 三論宗의 異名이 아니라 곧 海東宗인 것을 察得하였다. 支那 華嚴宗人들이 海東元曉와 義相으로써 華嚴傍祖로 崇仰하는 것과 華嚴宗 大覺國師의 靈通寺 碑銘에

義湘|인물西學 傳佛圓音 元暁獨見 窮幽極深

쪽수▶P84-2

義相西學 傳佛圓音 元暁獨見 窮幽極深

이란 것을 의거하면 원효인물의상인물과 한 가지 화엄경을 종한 것과 같이 보는 것도 한편 무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원효인물대사가 어느 경 어느 논이든지 주석 아니 한 것이 없다고 할 만큼 모든 경론의 소를 지었던 까닭에 화엄종에서도 끌어다가 자기 종의 조사를 삼고 법상종에서도 원효인물를 끌어다가 자기 종의 조사를 삼는다. 금산사 혜덕왕사인물 비에
쪽수▶P84-3이란 것을 依憑하면 元曉도 義相과 한가지 華嚴經을 宗한 것과 가티 보는 것도 一向 無理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은 事實에 있어서는 그런 것이 아니다. 元曉大師가 어느 經 어느 論이든지 註釋 아니 한 것이 없다고 할만치 모든 經論의 䟽를 지엇는 까닭에 華嚴宗에서도 끌어다가 自宗의 祖師를 삼고 法相宗에서도 元曉를 끌러다가 自宗의 祖師를 삼는다. 金山寺慧德王師碑에

曉法師導之於前 賢大統踵之於後

쪽수▶P84-4

曉法師導之於前 賢大統踵之於後

란 것을 본다면 법상종에서도 원효인물를 끌어다가 법상종 자기의 해동육조의 하나로 추존한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화엄종에서나 법상종에서나 다 원효인물를 끌어다가 자기 종의 조사를 삼지만 원효인물는 자기 사상 즉 해동종 사상이 따로 있을 뿐 아니라 원효인물의 해동종 사상을 친히 이어받은 그 법손들이 따로 있어서 그 법등을 계속 상전하여 자성일가한 독립한 종이 있다. 이것이 즉 해동종이며 법성종 즉 중도종이란 것이요 화엄종의 일파는 아니다. 그러므로 의상인물의 화엄종에서 원효인물의 법손으로 독립한 하나의 종인 분황종이 자기 화엄종과 관계 없는 것을 또한 자인하였다. 고려 대장을 조조(雕造)할 때 의상인물 화엄종의 법통으로서 당시 교정의 임무를 봤던 개태사 수기인물의 편집한 고려신조대장교정별록서적 제1권에 있는 기사를 보면 수기인물가 대집경 중에 오착처를 발견하고도 거듭 100년간 그 경을 숭봉하여 온 분황종 승려들의 반대를 염려하여 감히 정정하지를 못하고 다못 그 착오된 것을 별록 중에 기재하여 둔다는 것을 본다면 수기인물 등의 자기 종인 화엄종과 분황종과는 원래부터 일종일파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쪽수▶P84-5란 것을 본다면 法相宗에서도 元曉를 끌러다가 法相宗 自己의 海東六祖의 하나로 追尊한 것이 分明하다. 이와 가티 華嚴宗에서나 法相宗에서나 다 元曉를 끌어다가 自己 宗의 祖師를 삼지만은 元曉는 自己 思想 卽 海東宗 思想이 따로 있을 뿐 아니라 元曉의 海東宗 思想을 親承한 그 法孫들이 따로 있어서 그 法燈을 繼續 相傳하야 自成一家▶P85-1한 獨立宗이 있다. 이것이 即 海東宗이며 法性宗 即 中道宗이란 것이요 華嚴宗의 一派는 아니다. 그럼으로 義相의 華嚴宗에서 元曉의 法孫으로 獨立一宗한 芬皇宗이 自己 華嚴宗과 關係없는 것을 또한 自認하였다. 高麗 大藏을 雕造할 때 義相 華嚴宗의 法統으로서 當時 校正의 任에 當한 開泰寺 守其의 集한바 高麗 新雕大藏校正別錄 第一卷에 있는 記事를 보면 守其가 大集經 中에의 誤錯處를 發見하고도 屢 百年間 此經을 崇奉하야 온 芬皇宗 僧侶들의 反對를 念慮하야 敢히 訂正하지를 못하고 다못 그 錯誤된 것을 別錄 中에 記載하여 둔다는 것을 본다면 守其 等의 自己 宗인 華嚴宗과 芬皇宗과는 元來부터 一宗一派가 아니라는 것이 證明될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원효인물의 해동종이 화엄종과 관계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어니와, 다음은 중도종 즉 법성종이 삼론종과 관계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삼론종의 주장 학설인 팔불중도라는 말을 가지고 삼론종을 중도종이라고 하였는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자기 학설을 가리키어 중도라고 자랑하는 것은 삼론종뿐 아니라 법상종에서도 자기 종지가 비공(非空)(삼론종을 가리킴), 비유(非有)(소승교를 가리킴)의 중도라고 자랑하는 것이므로 어느 종파든지 다 자기 종지를 중도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론종은 반야사상 즉 공(空)사상을 만히 주장하는 종이므로 종래 법성종이라고 공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성종 즉 중도종은 삼론종이 아니라 해동종이란 것을 필자는 확정하는 바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동문선서적 제27권에 등재되어 있는 하천단인물(河千旦)의 소작인 해동종승통관고 1장을 인용하기로 하자. 그 관고 중에
쪽수▶P85-2以上에서 말한 것은 元曉의 海東宗이 華嚴宗과 關係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어니와, 다음은 中道宗 即 法性宗이 三論宗과 關係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三論宗의 主張 學說인 八不中道라는 말을 가지고 三論宗을 中道宗이라고 하였는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은 이러한 自己學說을 가리키어 中道라고 자랑하는 것은 三論宗뿐 아니라 法相宗에서도 自己 宗旨가 非空(指三論宗)非有(指小乘敎)의 中道라고 자랑하는 것임으로 어느 宗派든지 다 自己 宗旨를 中道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三論宗은 般若思想 即 空思想을 만히 主張하는 宗임으로 從來 法性宗이라고 公認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法性宗 即 中道宗은 三論宗이 아니라 海東宗이란 것을 筆者는 確定하는 바이다. 이것을 證明하기 爲하야 東文選 第二十七卷에 登載되야 있는 河千旦의 所作인 海東宗僧統官誥一章을 引用하기로 하자. 그 官誥 中에

門下正法西來 餘波東浸 淵源浩不可知際 矛盾相爭者有年 爰及曉公挺生羅代 和百家之異諍 合二門之同歸 荀有襲其遺芳 宜特加其峻級 海東宗首座某 傳祖法器 爲人福田 了知一切因緣 皆從多生熏習 得此金剛三味 佛性自圓 故於玉麈一揮魔膽幾落 可謂上機之達者 孰云中道而廢之

쪽수▶P85-3

門下正法西來 餘波東浸 淵源浩不可知際 矛盾相爭者有年 爰及曉公挺生羅代 和百家之異諍 合二門之同歸 荀有襲其遺芳 宜特加其峻級 海東宗首座某 傳祖法器 爲人福田 了知一切因緣 皆從多生熏習 得此金剛三味 佛性自圓 故於玉麈一揮魔膽幾落 可謂上機之達者 孰云中道而廢之

이것을 해석하면 ‘정법이 서방으로부터 와서 그 여파가 동방에 침입함에 연원이 호한(浩汗)하여 변제(邊際)를 알기 어렵고 모순상쟁함이 오래더니 효공이 신라 대에 정생(挺生)함에 미쳐 백가의 이쟁을 융화하고 이문의 동귀(同歸)를 합성하였다’는 것이니 이는 즉 원효인물의 추익(追謚)인 화정국사라는 의미를 붙여서 해동이란 두 자를 설명한 것이며 또 ‘차금강삼매(此金剛三昧)를 득(得)하면 불성이 자원(自圓)하고 고로 옥진(玉塵)을 일휘(一揮)함에 마담(魔膽)이 기락(幾落)이라’ 하는 것은 법성종이란 의미를 붙여서 승통의 소득을 설명한다. “魔瞻幾落”이란 구와 작대(作對)하기 위하여 “佛性自圓”이라 하였으나 불성은 법성의 글자 바꾸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최후로 ‘상기(上機)의 달자(達者)라고 가위(可謂)할지언정 중도이폐지(中道而廢之)라고 숙운(孰云)하리요’ 하는 말은 중도종이란 중도 두 자를 설명하는 것이니, 그 의미를 간단히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승통을 대할 때에 중도종 모라 중도종 모라고 부르는 그 중도 두 자는 유·무·색·공의 두 변을 원리(遠離)한 상상근기의 통달자라는 중도이므로 중도이폐지라는 중도는 아니다 하는 것이다. 만일 이 ‘중도이폐지’라는 말을 중도종의 해석으로 보지 아니 한다면 이것은 아무 재미도 없는 돌연한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쪽수▶P85-4이것을 解釋하면 「正法이 西方으로부터 와서 그 餘波가 東方에 浸入하매 淵源이 浩汗하야 邊際를 알기 어렵고 矛盾相諍함이 오래더니 曉公이 羅代에 挺生함에 및어 百家▶P86-1의 異諍을 融和하고 二門의 同歸를 合成하였다」는 것이니 이는 즉 元曉의 追謚인 和靜國師라는 意味를 부쳐서 海東이란 二字를 說明한 것이며 또 「此金剛三昧를 得하면 佛性이 自圓하고 故로 玉塵를 一揮함에 魔膽이 幾落이라」 하는 것은 法性宗이란 意味를 붙어서 僧統의 所得을 說明한 다. 「魔瞻幾落」이란 句와 作對하기 爲하야 「佛性自圓」이라 하였으나 佛性은 法性의 글짜 바꾸는 것에 不過한 것이다. 最後로 「上機의 達者라고 可謂할지 언정 中道而廢之라고 孰云하리요」 하는 말은 中道宗이란 中道 二宇를 說明하는 것이니, 그 意味를 簡單히 다시 말하면 世上사람들이 僧統을 對할 때에 中道宗 某라 中道宗 某라고 부르는 그 中道 二字는 有·無·色·空의 二邊을 遠離한 上上根器의 通達者라는 中道임으로 中道而廢之라는 中道는 아니다」 하는 것이다. 만일 이 「中道而廢之」라는 말을 中道宗의 解釋으로 보지 아니 한다면 이것은 아무 滋味도 없는 突然한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이상에 해설한 바의 관고 1장에 의하여 법성종 즉 중도종은 원효인물의 해동종 즉 분황종이라고 필자는 단정하는 바이다.
쪽수▶P86-2以上에 解說한 바의 官誥 一章에 依하야 法性宗 卽 中道宗은 元曉의 海東宗 卽 芬皇宗이라고 筆者는 斷定하는 바이다.
다시 해동종 즉 법성종의 종지도 위에서 인용한 관고에 의하면 일경일론에 치우쳐 한정하여 숭상하는 것이 아니다. 불타의 설법은 일음돈설(一音頓說)로서 대소천심의 차별이 없는 것이지만 문자의 견해에 따라서 대소천심의 차별이 시시로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서적과 같은 대승경전이라고 좋은 경전이고 아함경서적과 같은 소승경전이라고 나쁜 경전이 아니다. 어떠한 경전이나 불문하고 다같이 전미취오(轉迷就悟)의 금언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동문선서적 제50권에 있는 김부식인물의 소작인 화정국사의 영찬(影贊)에
쪽수▶P86-3다시 海東宗 卽 法性宗의 宗旨도 上引한 官誥에 依하면 一經一論에 치우쳐 限定하야 崇尙하는 것이 아니다. 佛陀의 說法은 一音頓說로서 大小淺深의 差別이 없는 것이지만은 聞者의 見解에 따라서 大小淺深의 差別이 시시로 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華嚴經과 같은 大乘經典이라고 좋은 經典이고 阿含經과 같은 小乘經典이라고 낫분 經典이 아니다. 어떠한 經典이나 不問하고 다같이 轉迷就悟의 金言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東文選 第五十卷에 있는 金富軾의 所作인 和諍國師의 影贊에

恢恢一道 落落圓音 機聞自異 大小淺深 如三舟月 如萬竅風 至人大鑿 卽異而同 瑜伽名相 方廣圓融 自我觀之 無往不通 百川共海 萬相一天 廣矣大矣 莫得名焉

쪽수▶P86-4

恢恢一道 落落圓音 機聞自異 大小淺深 如三舟月 如萬竅風 至人大鑿 卽異而同 瑜伽名相 方廣圓融 自我觀之 無往不通 百川共海 萬相一天 廣矣大矣 莫得名焉

이란 말이 있다. 이 가운데 “瑜伽名相 方廣圓融 自我觀之 無往不通”이라 한 말은 즉 유가론을 종상하는 법상종의 법상과 대방광화엄경서적을 숭봉하는 화엄종의 원융(圓融)과를 원효인물 자기로부터 관찰할 때에는 맞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쪽수▶P86-5이란 말이 있다. 이 가운대 「瑜伽名相 方廣圓融 自我觀之 無往不通」이라 한 말은 즉 瑜伽論을 宗尙하는 法相宗의 法相과 大方廣華嚴經을 崇奉하는 華嚴宗의 圓融과를 元曉 自己로부터 觀察할 때에는 맛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원효인물가 이러한 불교관을 가지고 당시 화엄종은 화엄경서적이 제일 좋은 경이라 하고 법상종은 유가유식의 교리가 제일 좋은 법문이라 하고 그밖에 열반종과 계율종도 제각각 자기의 숭봉하는 경률이 제일 법문이라 하는 백가의 모순상쟁을 융화통일한 것이다. 이것이 원효인물의 불교사상인 동시에 해동 법성종의 종지이다. 그러므로 이 법성종은 다른 종들과 같이 오직 일경일론으로써 소의성전을 삼지 아니하고 금강삼매경서적대집경서적화엄경서적과 같은 이러한 경전을 꼭 같은 것으로 숭봉하여 소의성전을 삼는 것이다.
쪽수▶P87-1元曉가 이러한 佛敎觀을 가지고 當時 華嚴宗은 華嚴經이 第一 조흔 經이라 하고 法相宗은 瑜伽唯識의 敎理가 第一 조흔 法門이라 하고 그밖에 涅般宗과 戒律宗도 제각각 自己의 崇奉하는 經律이 第一 法門이라 하는 百家의 矛盾相諍을 融和統一한 것이다. 이것이 元曉의 佛敎思想인 同時에 海東法性宗의 宗旨이다. 그럼으로 이 法性宗은 다른 宗들과 같이 오즉 一經一論으로써 所依聖典을 삼지 아니하고 金剛三時經과 大集經과 華嚴經과 같은 이러한 經典을 꼭 같은 것으로 崇奉하야 所依聖典을 삼는 것이다.
개종조 원효인물의 속성은 설 씨요 소명은 서당(誓幢)이라고 한다. 처음 어머니의 꿈에 유성이 회중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임신하여 신라 진평왕인물 39년 정축에 압량군(현재 경북 자인군의 속지) 남불지촌의 북쪽 율곡 사라수(裟羅樹) 하에서 탄생하였다. 출가한 후에 그 본 집을 버리고 절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초개사라는 절이다. 그 뒤에 의상인물로 더불어 입당구법을 하여보려고 등정하여 요동까지 이르러 총암(塚闇)에서 하룻밤을 경과하다가 목마름으로 인하여 촉루(髑髏)의 물을 마시고 ‘삼계유식 만법유심의 리를 깨닫고 드디어 환국하였다’ 한다. 말년에 요석공주인물와 동거하여 설총을 낳았으니 이는 곧 신라 2현의 하나인 유명한 유학자이다. 신문왕인물 6년 3월 30일에 형년 70세로 귀적하였다. 고려 숙종인물 6년에 이르러 해동종 조사 대성 화정국사라고 추익하였다. 원효인물대성 후에 경주 분황사를 근본 도장으로 하야 종풍을 유지, 선양하다가 고려 광종인물 이후에 이르러 개성 왕륜사로서 본사를 삼게 되었다.
쪽수▶P87-2開宗祖 元曉의 俗姓은 薛氏요 小名은 誓幢이라고 한다. 처음 어머니의 꿈에 流星이 懷中에 들어오는 것을 感하고 有娠하야 新 羅眞平王 三十九年 丁丑에 押梁郡(今 慶北 慈仁郡의 屬地) 南佛地村의 北쪽 栗谷 裟羅樹 下에서 誕生하였다. 出家한 후에 그 本宅을 捨하야 寺를 맨들었으니, 그것이 初開寺라는 절이다. 그 뒤에 義相으로 더불어 入唐求法을 하여보려고 登程하야 遼東까지 이르러 塚闇에서 一夜를 經過하다가 口渴로 因하야 髑髏의 水를 飮하고 「三界唯識 萬法唯心의 理를 悟得하고 드듸어 還國하였다」 한다. 末年에 瑤石公主와 同居하야 薛聰을 生하였으니 이는 곧 新羅 二賢의 하나인 有名한 儒學者이다. 神文王 六年 三月 三十日에 亨年 七十歲로 歸寂하였다. 高麗 肅宗 六年에 至하야 海東宗祖師大聖和靜國師라고 追謚하였다. 元曉大聖의 後에 慶州芬皇寺를 根本道場으로 하야 宗風을 維持宣揚하다가 高麗 光宗 以後에 이르러 開城 王輪寺로써 本寺를 삼게 되였다.
이 법성종의 종세가 화엄종 법상종과 같이 그렇게 융성하지는 못하였으므로 후래 역사상에 굴지할 만한 대덕고승이 없었다. 위에서 인용한 해동종승통관고에 의하면 고려 高종 때에 본종의 고승으로 승통위에까지 승진된 고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것도 그의 이름까지도 관고 중에 드러나지 아니하고 말았다. 하여튼 법성종의 종풍이 이조 세종인물 6년 오교양종을 폐합할 당년까지 유전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쪽수▶P87-3이 法性宗의 宗勢가 華嚴宗 法相宗과 같이 그러케 隆盛하지는 못하였음으로 後來 歷史上에 屈指할만한 大德高僧이 없었다. 우에서 引用한 海東宗 僧統官誥에 依하면 高麗 高宗時에 本宗의 高僧으로 僧統位에까지 昇進된 高德이 있었든 것은 事實이나 이것도 그의 일홈까지도 官誥 中에 들어나지 아니하고 말았다. 何如튼지 法性宗의 宗風이 李朝 世宗 六年 五敎兩宗을 廢合할 當年까지 流傳하였던 것은 事實이다.



























본문2-4: 4. 화엄종


본종은 신라 제31대 신문왕인물 때에 출세한 의상인물대덕의 개종에 속한 것으로서, 화엄경서적으로써 소의성전을 삼는 까닭에 화엄종이라 한다. 또는 원융종이라 혹은 원종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개종조 의상인물대덕이 순흥(지금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여 근본 도장을 정하였으므로 부석종이라 혹은 의상종이라고도 한다. 의상인물대덕이 당에 들어가 법을 구할 적에 지상사 지엄인물 공의 강하에 대하여 동학 현수인물와 한 가지 화엄경서적을 전수할 때 지엄인물 공이 야수를 가리켜 별명을 문지(文持)라고 부르고 의상인물를 가리키어 의지(義持)라고 불렀던 일이 있으므로 의상인물의 법손들은 이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여 의지종이라고 자칭하기도 한다.
쪽수▶P88-1本宗은 新羅 第三十一代 神文王 時에 出世한 義相大德의 開宗에 屬한 것으로서, 華嚴經으로써 所依聖典을 삼는 까닭에 華嚴宗이라 한다. 또는 圓融宗이라 或은 圓宗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開宗祖 義相大德이 順興(今 榮州) 浮石寺를 創하야 根本道場을 定하였음으로 浮石宗이라 或은 義相宗이라고도 한다. 義相大德이 入唐求法할 적에 至相寺 智嚴公의 講下에 就하야 同學賢首와 한 가지 華嚴經을 傳受할새 智嚴公이 野首를 가르키어 別名을 文持라고 부르고 義相을 가르키어 義持라고 불렀든 일이 있음으로 義相의 法孫들은 이것을 榮光스롭게 생각하야 義持宗이라고 自稱하기도 한다.
본종은 삼목화엄으로서 소의본전을 삼지만, 의상인물대덕이 지엄인물 공 밑에서 수학할 때에는 오직 진본(晋本) 화엄경서적 60권이 번역되었고 당본(唐本) 화엄 80권이라든지 정원본(貞元本) 화엄 40권이라든지는 아직 번역되지 못한 때이므로 치우쳐 진본 화엄경서적을 숭상하게 되고 소석(䟽釋)도 지엄인물의 찬인 수현기서적를 썼으며 또 이 밖에 의상인물대덕의 창작인 법계도사를 위주하여 숭상하였다. 법계도라는 것은 해인도라고도 하고 법성도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지엄인물 공의 73개 해인(海印)을 근거로 하여 의상인물가 별로 1개 해인을 작성하여 지엄인물 공의 찬허(讃許)를 받을 것인데 그 문구로는 30구 210자에 불과한 저작이지만 그 의지가 심오하고 그 도식이 기묘하기로는 유일무이한 화엄가의 대표적 창작이었다. 그리고 이 법계도를 가지고 전법보를 삼는 것이 조선 화엄종의 특색이었다.
쪽수▶P88-2本宗은 三木華戰으로써 所依本典을 삼지만은, 義相大德이 智嚴公 밑에서 受學할 때에는 오즉 晋本華嚴經 六十卷이 翻譯되었고 唐本 華嚴 八十卷이라든지 貞元本 華嚴 四十卷이라든지는 아즉 翻譯되지 못한 때임으로 치우쳐 晋本華嚴經을 崇尙하게 되고 䟽釋도 智嚴의 撰인 搜玄記를 썼으며 또 이 밖에 義相大德의 創作인 法界圖祀를 爲主하야 崇尙하였다. 法界圖라는것은 海印圖라고도 하고 法性圖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智嚴公의 七十三個海印을 根據로 하야 義相이 別로 一個 海印을 作成하야 智嚴公의 讃許를 바들 것인데 그 文句로는 三十句 二百十字에 不過한 著作이지만은 그 義旨가 深奧하고 그 圖式이 奇妙하기로는 有一無二한 華嚴家의 代表的 創作이었다. 그리고 이 法界圖를 가지고 傳法寶를 삼는 것이 朝鮮 華嚴宗의 特色이었다.
의상인물화엄종은 아미타와 관세음보살로서 소의본존을 삼는 것도 또한 중국 화엄종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부석사 원융국사인물 비에
쪽수▶P88-3義相華嚴宗은 阿彌陀와 觀世音菩薩로써 所依本尊을 삼는 것도 또한 支那 華嚴宗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浮石寺 圓融國師碑에
라 한 것을 의하면 의상인물대덕의 불신관은 아미타는 즉 무량수로서 불입열반하는 것이니, 불입열반의 무량수불은 즉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해석한다. 이리하여 아미타로서 본존을 삼는 동시에 관세음보살을 또한 본존으로 삼는 것이니, 의상인물대사가 양양 낙산사에 대하여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할 때에 자술한 백화도량원문서적
쪽수▶P88-4라 한 것을 依하면 義相大德의 佛身觀은 阿彌陀는 卽 無量壽로서 不入涅般하는 것이니, 不入涅般의 無量壽佛은 卽 毘盧遮那法身佛이라고 解釋한다. 이리 하야 阿彌陀로써 ▶P89-1本尊을 삼는 同時에 觀世音菩薩을 또한 本尊으로 삼는 것이니, 義相大師가 襄陽洛山寺에 就하야 觀世音菩薩에게 祈禱할 때에 自述한 白華道描願文에

唯願弟子 生生世世 稱觀世音 以爲本師 如菩薩頂戴

쪽수▶P89-2

唯願弟子 生生世世 稱觀世音 以爲本師 如菩薩頂戴

라 한 것을 의하면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불을 본사로 정대(頂戴)하듯이 의상인물대사 자신도 세세생생에 관세음보살을 본사로 추대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상인물 화엄종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로서 본존을 삼는 까닭에 부석사의 불전 명칭이 무량수전이요 불상 이름이 무량수불이다. 또한 화엄경서적 중에서도 입법계품 53선지식 중 보타 낙가산(한역 백화산) 관세음보살의 소설법문으로서 관세음경이란 이름을 붙여 가지고 치우쳐 숭상하는 것이다.
쪽수▶P89-3라 한 것을 依하면 觀世音菩薩이 阿彌陀佛을 本師로 頂戴하듯이 義相大師 自身도 世世生生에 觀世音菩薩을 本師로 推戴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義相華嚴宗은 阿彌陀佛과 觀世音菩薩로써 本尊을 삼는 까닭에 浮石寺의 佛殿 名稱이 無量壽殿이요 佛像 일홈이 無量壽佛이다. 또한 華嚴經 中에서도 入法界品五十三善知識 中 補陀洛迦山(漢譯白華山) 觀世音菩薩의 所說法門으로써 觀世音經이란 일홈을 부치어 가지고 치우처 崇尙하는 것이다.
의상인물대덕은 이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신라 문무왕인물 10년에 칙지(勅旨)를 봉하고 순흥지인 태백산에 이르러 부석사를 창립하여 본사를 정하고 삼천제자들에게 그 법을 전하여 주었었다.
쪽수▶P89-4義相大德은 이와 같은 思想을 가지고 新羅 文武王 十年에 勅旨를 奉하고 順興地인 太白山에 至하야 浮石寺를 創하야 本寺를 定하고 三千弟子들에게 그 法을 傳하여 주었었다.
의상인물대덕은 신라 진평왕인물 46년에 탄생하여 29세 되던 해에 황룡사에서 득도한 후 무열왕인물 2년에 입당하였다가 같은 왕 10년에 귀국하여 효소왕인물 10년 3월에 형년 78세로서 귀적하였다. 그 뒤 고려 숙종인물 때에 이르러 화엄초조원교국사라고 추익하였다.
쪽수▶P89-5義相大德은 新羅 眞平王 四十六年에 誕生하야 二十九歲 되든 해에 皇龍寺에서 得度한 후 武烈王 二年에 入唐하였다가 同 十年에 歸國하야 孝昭王 十年 三月에 亨年 七十八歲로써 歸寂하였다. 그 뒤 高麗 肅宗時에 이르러 華嚴初祖圓敎國師라고 追謚하였다.
의상인물대덕의 교화를 입은 삼천제자 중에는 오진인물, 지통인물, 표훈인물, 진정인물, 진장인물, 도융인물, 양원인물, 상원인물, 능화인물, 의적인물 등 10인의 상수 제자가 있으니 이것을 화엄 10성이라고 한다.
쪽수▶P89-6義相大德의 敎化를 입은 三千弟子 中에는 悟眞 智通表訓 眞定 眞藏 道融 良源 相源 能和 義寂 等 十人의 上首 弟子가 있으니 이것을 華嚴十聖이라고 한다.
부석사의 창립을 본 후 의상인물의 제자 혹은 그의 법손들의 손을 거쳐서 창설된 사찰로서 원주의 비바라사와 가야의 해인사와 금정의 범어사와 비슬(毘瑟)의 옥천사와 남악의 화엄사 등 10대사찰이 있었으니 이것을 화엄 10찰 혹은 의상인물 10찰이라고 한다. 그중 합천 해인사는 의상인물의 법손 신림인물의 고제인 순응인물대덕이 개산한 바요, 화엄사는 의상인물의 법손인 연기조사가 창건한 바이다.
쪽수▶P89-7浮石寺의 創立을 본 후 義相의 弟子 或은 그의 法孫들의 손을 거쳐서 創設된 寺刹로서 原州의 毘婆羅寺와 伽耶의 海印寺와 金井의 梵魚寺와 毘瑟의 玉泉寺와 南岳의 華嚴寺 等 十大寺刹이 있었으니 이것을 華嚴十刹 或은 義相十刹이라고 한다. 就中 陜川 海印寺는 義相의 法孫 神琳의 高弟인 順應大德의 開山한 바요, 華嚴寺는 義相의 法孫인 緣起祖師의 創建한 바이다.
이와 같이 10성 제자의 법손이 10대사찰에 분화한 이래로 대덕 명사가 계속 배출하여 교리를 선양하는 중에 숭복사의 결언인물과 세달사의 신림인물은 그중에서도 쟁쟁한 인물들이요. 법융인물, 법체인물, 융돌인물, 융질인물, 담림인물 등은 다 신라 말에 출세한 고승들이요 유명한 강사들이다. 나말여초에 이르러 2인의 대덕이 나타나 화엄교리를 각각 천양함으로부터 화엄종은 교리 해석상 두 파로 분립되었으니 당시 남조선의 신흥국으로 고려 태조를 성가시게 굴든 후백제왕 견훤인물의 귀의를 받아서 남악 화엄사에 머무르며 종풍을 선양하던 관혜인물를 따르는 학자들을 남악파라 하고 이와 상대되는 고려 태조의 추앙을 얻어 가야산 해인사에 머무르며 가성(家聲)을 크게 떨쳤던 희랑인물을 좇는 학자들을 북악파라고 하였다. 아 양파의 학설에 대하여는 무엇이 피차 서로 다른 점이 되었든지 그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도저히 알아낼 리가 없다.
쪽수▶P89-8이와 같이 十聖弟子의 法孫이 十大寺刹에 分化한 爾來로 大德名師가 繼續 輩出하야 敎理를 宣揚하는 中에 崇福寺의 決言과 世達寺의 神琳은 그中에서도 錚錚한 人物들이요. 法融 梵體 融咄 融質 曇林 等은 다 新羅末에 出▶P90-1世한 高僧들이요 有名한 講師들이다. 羅末麗初에 이르러 二人의 大德이 出하야 華嚴敎理를 各各 闡揚함으로부터 華嚴宗은 敎理解釋上 二派로 分立되였으니 當時 南朝鮮의 新興國으로 高麗 太祖를 성가시게 굴든 後百濟王 甄萱의 歸依를 바다서 南岳華嚴寺에 住하야 宗風을 宣揚하든 觀惠를 宗하는 學者들을 南岳派라 하고 이와 相對되는 高麗 太祖의 推仰을 得하야 伽耶山海印寺에 住하야 家聲을 大振하든 希朗을 宗하는 學者들을 北岳派라고 하였다. 아 兩派의 學說에 對하여는 무엇이 彼此 서로 다른 點이 되었든지 그것은 今日에 있어서 到底히 알아낼 理가 없다.
이러던 것이 고려 광종인물 때의 고승으로 화엄종의 명성인 균여인물의 출세로 인하여 양파의 분쟁은 융화하여 수유상합(水乳相合)함을 얻었다. 균여인물는 원통수좌라 하는 이로서 고려 광종인물의 귀의를 얻어 연산의 개태사와 개성의 귀법사와 가야의 법수사를 돌아다니며 화엄교리를 선양하던 고승인데 지금까지 현행하는 화엄삼보장(華嚴三寶章) 십구장오교장(十句章五敎章)에 대한 “圓通抄”라는 것은 다 원통수좌의 방언 설법을 역성한 것이다.
쪽수▶P90-2이러든 것이 高麗 光宗時의 高僧으로 華嚴宗의 明星인 均如의 出世로 因하야 兩派의 分諍은 融和하야 水乳相合함을 得하였다. 均如는 圓通首座라 하는 이로서 高麗 光宗의 歸依를 得하야 連山의 開泰寺와 開城의 歸法寺와 伽耶의 法水寺에 巡住하야 華嚴敎理를 宣揚하든 高僧인데 지금까지 現行하는 華嚴三寶童十伺章五敎章에 對한 「圓通抄」라는 것은 다 圓通首座의 方言說法을 譯成한 것이다.
균여인물와 동시대인으로서 고려 태조가 별화상이라는 존칭으로써 부르던 해미(지금 서산) 가야산 보원사 탄문인물왕사가 있었다. 탄문인물왕사는 법인국사라 하는 이로서 효공왕인물 4년에 탄생하여 고려 광종인물 29년에 귀적한 인데 구룡산에 살며 화엄경을 가르칠 때에 군도가 요방(繞房)하고 중토(衆兎)가 복잠(伏潜)하는 이서를 감하는 등 법력이 출업하였다 한다.
쪽수▶P90-3이 均如와 同時人으로서 高麗 太祖가 別和尙이라는 尊稱으로써 부루든 海美(今 瑞山) 伽耶山 普願寺 坦文王師가 있었다. 坦文王師는 法印國師라 하는 이로서 孝恭王 四年에 誕生하야 高麗 光宗 二十九年에 歸寂한인데 九龍山에 住하야 華嚴經을 講할 때에 群島가 繞房하고 衆兎가 伏潜하는 異瑞를 感하는 等 法力이 出業하였다 한다.
좀 뒤떨어져서 광종인물 15년에 탄생하여 문종 7년에 귀적한 부석사 결응인물대덕도 익을 원융국사라 하는 이로서 본종 중 유명한 고덕이다. 그러고 정종인물 8년 묘향산 보현사를 개창한 탐밀인물대사와 그의 제자 굉곽인물대덕이 있어서 수백인의 학자를 데리고 교화를 크게 밝혔다. 그다음으로 화엄종의 중흥이오 천태종의 개조인 영통사 의천 승통이 있었으니 이는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문종인물의 네 번째 아들로서 화엄종의 거벽인 경덕왕사에게 득도한 후 호법포정(護法布政)에 헌신적으로 종사한 우세 승통이요 대각국사인물란 이가 그 사람이다. 대각국사인물의 제자 중에 대덕 이상의 인물만 하여도 170여 사람이요 그중에도 합천 반야사 원경국사 낙진인물이라 하는 이와 홍호사 주지 창원인물이라 하는 이와 이기인물징엄인물 등은 다 이 후세에까지 명현한 고승들이다. 이기인물의 제자로 홍원사 교웅인물 승통이 있었으니 동시에 2인의 교웅이 있었다. 국청사에 있던 대선사 교웅은 천태종의 고승이요 지금 홍원사에 있는 승통 교웅은 화엄종의 명장이었다. 교웅인물 승통의 제자로서 삼각산 원각사에 있던 통소인물 승통이라고 하는 지이대사가 있었다.
쪽수▶P90-4좀 뒤떠러저서 光宗 十五年에 誕生하야 文宗 七年에 歸寂한 浮石寺 決凝大德도 謚를 圓融國師라 하는 이로서 本宗 中 有名한 高德이다. 그러고 靖宗 八年 妙香山 普賢寺를 開創한 探密大師와 그의 弟子 宏廓大德이 있어서 數百人의 學者를 데리고 敎化를 大闡하였다. 그 다음으로 華嚴宗의 中興이오 天台宗의 開祖인 靈通寺 義天僧統이 있었으니 이는 世上이 다 아는 바와 같이 文宗의 第四子로서 華嚴宗의 巨擘인 景德王師에게 得度한 후 護法布政에 獻身的으로 從事한 祐世僧統이요 大覺國師란 이가 其人이다. 大覺國師의 弟子 中에 大德 以上의 人物만 하여도 一百七十餘人이요 그中에도 陜川般若寺 元景國師樂眞이라 하는 이와 弘護寺 住持昶元이라 하는 이와 理琦와 澄嚴 等▶P91-1은 다 이 後世에까지 名顯한 高僧들이다. 理琦의 弟子로 洪圓寺 教雄 僧統이 있었으니 同時에 二人의 敎雄이 있었다. 國淸寺에 住하든 大禪師 敎雄은 天台宗의 高僧이요 今洪圓寺에 住하는 僧統敎雄은 華嚴宗의 名匠이었다. 改雄僧統의 弟子로서 三角山 圓覺社에 住하든 通炤僧統이라고 하는 智儞大師가 있었다.
대각의 제자 징엄인물이란 이는 숙종인물의 네 번째 왕자로서 복세 승통이요 원명국사라 하는 이며, 원명의 뒤를 이은 이는 부석사 현오인물국사인데, 그의 법명이라고 한다. 그가 귀적한 후에 명종인물이 추도하는 의미로서 철조(輟朝) 3일을 하였다고 하니 그의 인격을 짐작할 수 있다.
쪽수▶P91-2大覺의 弟子 澄嚴이란 이는 肅宗의 第四王子로서 福世僧統이요 圓明國師라하는 이며, 圓明의 後를 이은 이는 浮石寺 玄悟國師인데, 그의 法名이라고 한다. 그이가 歸寂한 후에 明宗이 追悼하는 意味로서 輟朝 三日을 하였다고 하니 그의 人格을 짐작할 수 있다.
공민왕인물 때에 이르러서 수원군 창성사에 진각국사인물란 이가 있었으니 이이는 법명을 천희인물라고 하는 이로서 반룡사 주 일여대사에게 득도한 후 금생사, 덕천사, 부인사, 개태사 등 10여 사를 역주하고 공민왕인물으로부터 “國師大華嚴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大智無碍性相圓通”의 법호를 받았었다. 이 진각국사인물가 입원하여 몽산의 의발(衣鉢)을 몽수(夢受)하고 만봉(萬峯)의 인가를 현전하였다 하니 교종 승려로서 선종의 전법을 받은 것은 전례가 그리 많지 못한 것이다. 이 진각인물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시봉(侍奉)하던 이로서 경남인물이라 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는 이태조께서 고탑을 중건하고 대장경을 인쇄하여 탑 중에 봉안할 때에 해인사 주지로 있던 이다.
쪽수▶P91-3恭愍王 時에 이르러서 水原郡 彰聖寺에 眞覺國師란 이가 있었으니 이이는 法名을 千熙라고 하는 이로서 盤龍社 主一如大師의게 得度한 후 金生寺 德泉寺 符仁寺 開泰寺 等 十餘寺를 歷住하고 恭愍王으로부터 「國師大華嚴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大智無碍性相圓通」의 法號를 받았었다. 이 眞覺國師가 入元하야 蒙山의 衣鉢을 夢受하고 萬峯의 印可를 賢傳하였다 하니 敎宗 僧侶로서 禪宗의 傳法을 受한 것은 前例가 그리 많든 못한 것이다. 이 眞覺의 左右를 떠나지 안코 侍奉하든 이로서 敬南이라 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는 李太祖께서 古塔을 重建하고 大藏經을 印刷하야 塔 中에 奉安할 때에 海印寺 住持로 있든 이다.
이와 같이 대덕 명승이 많이 출현한 것으로 보아 화엄종 종세가 얼마만치 융성하였던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이조 태종인물 6년 실록서적“華嚴宗宗道門宗合留四十三寺”라 한 것을 보면 고려 말에 화엄종이 두 파에 분립되어 화엄종과 도문종으로 되었던 것 같으나, 소위 그 도문종이란 정체는 알아낼 도리가 없는 바이다.
쪽수▶P91-4이와 같이 大德 名僧이 만히 出現한 것으로 보아 華嚴宗 宗勢가 얼마만치 隆盛하였든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대 前에 말한 바와 같이 李朝 太宗 六年 實錄에 「華嚴宗宗道門宗合留四十三寺」라 한 것을 보면 麗末에 華嚴宗이 二派에 分立되야 華嚴宗과 道門宗으로 되였든 것 같으나, 所謂 그 道門宗이란 正體는 알아낼 道理가 없는 바이다.


























본문2-5: 5. 법상종


이 법상종은 유가론과 유식론으로 소의성전을 삼음으로 유가종이라고도 하고 유식종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유가론과 유식론에는 모든 법의 명상(名相)을 천명하였기 때문에 법상종이라는 종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종이 중국에 있어서는 현장인물법사가 유가론을 번역하고 유식론을 집성하여 이것을 그의 제자 규기인물법사에게 전하였는데 규기인물법사는 자은사를 근본 도장으로 종풍을 크게 떨쳤으므로 세상에서 자은종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의 법상종은 신라 제35대 경덕왕인물 때에 출세한 진표인물율사의 대성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니 이 종에서는 미륵불을 본존으로 숭봉하며 당의 현장인물, 규기인물 양사와 해동육조를 합하여 이것을 팔조라고 한다. 해동육조는 진표인물율사를 제외한 이상 오사는 다 추존한 조사다. 오조란 것은 금산사 혜덕왕사인물 비에
쪽수▶P91-5이 法相宗은 瑜伽論과 唯識論으로 所依聖典을 삼음으로 瑜伽宗이라고도 하고 唯識宗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瑜伽論과 唯識論에는 諸法의 名相을 闡明하였기 때문에 法相宗이라는 宗名을 얻게 된 것이다. 이 宗이 支那에 있어서는 玄獎法師가 瑜伽論을 翻譯하고 唯識論을 集成하야 이것을 그의 弟子 窺基法師에게 傳하였는데 窺基法師는 慈▶P92-1恩寺를 根本道場으로 宗風을 大振하였음으로 世上에서 慈恩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朝鮮의 法相宗은 新羅 第三十五代 景德王 時에 出世한 眞表律師의 大成에 依하야 成立된 것이니 此宗에서는 彌勒佛을 本尊으로 崇奉하며 唐의 玄奘規基兩師와 海東六祖를 合하야 이것을 八祖라고 한다. 海東六祖는 眞表律師를 除한 以上 五師는 다 追尊한 祖師다. 五祖란 것은 金山寺 慧德王師碑에

曉法師導之於前 賢大統鍾之於後 燈々傳焰 世世嗣興

쪽수▶P92-2

曉法師導之於前 賢大統鍾之於後 燈々傳焰 世世嗣興

이라 함을 의하면 원효인물대현인물은 오조 중 2인인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고 나머지 삼조는 오늘날에 고찰할 수 있는 기록이 부하지 아니하므로 알 수 없다. 원효인물대현인물의 중간에 경흥인물, 순경인물, 도징인물 등 사가 있어서 다 유식 교리를 천양한 이들이지만은 이들이 오조 중에 참렬하였는지는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원효인물로부터 대현인물까지에 추존된 오조로 말하면 이 종에 대하여 소초(䟽抄)를 저작하여 교리를 알린 공로는 있다 할지라도 면전수수(面傳手授)의 계통적으로 된 것은 아니요 특히 진표인물의 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자상전(師資相傳)의 전종(專宗)을 이룬 것이다.
쪽수▶P92-3이라 함을 依하면 元曉와 大賢은 五祖 中 二人인 것이 無疑하고 나머지 三祖는 今日에 可考할 記錄이 傅하지 아니함으로 알 수 없다. 元曉와 大賢의 中間에 憬興 順景 道澄 等 諸師가 있어서 다 唯識敎理를 闡揚한 이들이지만은 이들이 五祖 中에 叅列하였는지는 斷定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元曉로부터 大賢까지에 追尊된 五祖로 말하면 此宗에 對하야 䟽抄를 著作하야 敎理를 發闡한 功勞는 잇다 할지라도 面傳手授의 係統的으로 된 것은 아니요 特히 眞表의 代에 이르러서 비로소 師資相傳의 專宗을 成한 것이다.
진표인물는 전주 벽골군(지금 김제) 도나산촌 대정리 사람으로서 신라 성덕왕인물 때에 탄생하여 나이 20세 되는 해에 금산사 순제법사인물에게 득도하고 27세 되는 해에 부안 변산 불사의방(不思議房)에 취하여 미륵상 앞에서 37일의 전념으로 참회를 간구한 결과로 미륵불의 현신 설계(說戒)와 점찰법의 189간자(簡子)를 받은 후 경덕왕인물 말년에 금산사에 돌아와 미륵불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어 봉안하여 본종의 근본 도장을 정하고 계법과 점찰참회법을 정행(井行)하여 종풍을 대양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의 법상종은 유식유가를 소의성전으로 숭상하는 이외에 점찰전간(点察傳簡)과 대승계를 수수하는 것으로서 수행요문을 삼는 것이 특색일 것이다. 또한 세상에서는 진표인물율사라는 명사에 귀가 기울어져서 진표인물를 율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와 반대로 원래부터 진표인물는 율종이 아니다. 미륵불 앞에서 계법을 얻은 것이라도 이것은 현상수계(現相受戒)라는 대승계법이요 계통적 소승적 율종은 아니다.
쪽수▶P92-4眞表는 全州碧骨郡(今 金堤) 都那山 村大井里人으로서 新羅 聖德王時에 誕生하야 나히 十二歲 되는 해에 金山寺 順濟法師에게 投하야 得度하고 二十七歲 되는 해에 扶安邊山 不思議房에 就하야 彌勒像 前에서 三七日의 專念으로 懺悔를 懇求한 結果로 彌勒佛의 現身 說戒와 点察法의 百八十九簡子를 受한 후 景德王 末年에 金山寺에 歸來하야 彌勒佛의 丈六像을 鑄하야 奉安하야 本宗의 根本道場을 定하고 戒法과 点察懺悔法을 井行하야 宗風을 大揚하였다. 그럼으로 朝鮮의 法相宗은 唯識瑜伽를 所依聖典으로 崇尙하는 以外에 点察傳簡과 大乘戒를 授受하는 것으로써 修行要門을 삼는 것이 特色일 것이다. 또한 世上에서는 眞表律師라는 名詞에 귀가 기울어져서 眞表를 律宗이라고 하지만은 事實은 이와 反對로 元來부터 眞表는 律宗이 아니다. 彌勒佛 前에서 戒法을 受한 것이라도 이것은 現相受戒라는 大乘戒法이요 系統的 小乘的 律宗은 아니다.
이와 같이 진표인물율사가 금산사를 근본 도장으로 하여 유가종풍을 크게 떨친 후 그 문하에 영심인물, 보종인물, 신방인물, 체진인물, 진회인물, 진선인물, 석충인물 등 고덕 제자들이 나타나 일방식 각화(各化)하는 중에 영심대사인물는 속리산 법주사를 창건하여 가풍을 크게 떨쳤다. 오늘날 법주사에서 개산조를 의신대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영심인물의 음전(音轉)이거나 그러지 않으면 영심인물의 익호가 의신일 것이다. 영심인물의 문하에 심지왕사인물라 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이는 신라 헌덕왕인물의 세 번째 왕자로서 팔공산 동화사의 개산조다. 심지왕사인물가 30세 되는 해에 출가하여 속리산 동관음사 영심대사인물의 회상에 참여하여 진표인물율사로부터 전하여 오는 불골간자(점찰법요 때 쓰는 189간자 중 제8, 9 양개 간자)를 전수하여 가지고 동화사를 창건하고 종풍을 크게 떨쳤다. 이와 같이 금산사, 법주사, 동화사는 법상종의 대찰이 되었다.
쪽수▶P92-5이와 가티 眞表律師가 金山寺를 根本道揚으로 하야 瑜伽宗風을 大闡한 후 그 門下에 永深 寶宗 信芳 體珍 珍悔▶P93-1眞善 釋忠 等 高德 弟子들이 出하야 一方식 各化하는 中에 永深大師는 俗離山法住寺를 創하야 家風을 大振하였다. 現今 法住寺에서 開山祖를 義信大師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永深의 音轉이거나 그러지 안흐면 永深의 謚號가 義信일 것이다. 永深의 門下에 心地王師라 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이는 新羅 憲德王의 第三王子로서 八公山 桐華寺의 開山祖다. 心地王師가 十三歲 되는 해에 出家하야 俗離山 東觀音寺 永深大師의 會上에 叅與하야 眞表律師로부터 傳하야 오는 佛骨簡子(点察法要時에 用하는 百八十九簡子 中 第八, 九兩個簡子也)를 傳受하야 가지고 桐華寺를 創하고 宗風을 大闡하였다. 이와 가티 金山寺 法住寺 桐華寺는 法相宗의 大刹이 되였었다.
이 법상종 중 유명한 고승으로 고려 문종인물 때에 출세한 이가 있으니 이는 즉 죽산군 칠장사 주지 혜소국사인물라고 하는 이다. 혜소(慧炤)의 법휘는 정현이요 속성은 이 씨인데 광교사 충회인물의 제자로서 덕종인물 때에 가서 승통의 법계를 받았다. 문종인물 때에 이르러 칠장사에서 입적한 후 익호를 혜소라고 하였다. 이 법상종 칠장사 승통 혜소와 동시대 사람으로서 조계종 광명사에 대선사 혜소(慧昭)가 또한 있었으므로 이것을 흔히 동일인으로 오인하는 수가 많이 있다. 그러나 광명사 혜소는 조계종 굴산파 고승으로서 대선사의 법계를 가졌음에 반하여 이 칠장사 혜소는 법상종 고승으로서 승통의 법계를 가지고 있었는지라 종파에 있어서 선교가 판이한 것을 재득치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쪽수▶P93-2이 法相宗 中 有名한 高僧으로 高麗 文宗時에 出世한 이가 있으니 이는 卽 竹山郡 七長寺 住持 慧炤國師라고 하는 이다. 慧炤의 法諱는 鼎賢이요 俗姓은 李氏인데 光敎寺 忠會의 弟子로서 德宗時에 가서 僧統의 法階를 受하였다. 文宗 時에 이르러 七長寺에서 入寂한 後 謚號를 慧炤라고 하였다. 이 法相宗 七長寺 僧統 慧炤와 同時人으로서 曺溪宗 廣明寺에 大禪師 慧昭가 또한 있었음으로 이것을 흔히 同一人으로 誤認하는 수가 만히 있다. 그러나 廣明寺 慧昭는 曺溪宗 崛山派 高僧으로서 大禪師의 法階를 가졌음에 反하야 이 七長寺 慧炤는 法相宗 高僧으로서 僧統의 法階를 갖이고 있었는지라 宗派에 있어서 禪敎가 判異한 것을 在得지아니 하면 안 될 것이다.
이 혜소와 동시대 사람으로 원주 법천사에 지광국사인물라 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는 법명을 해린이라 하는 이로서 문종인물 10년 5월 실록에 화엄 영통사 난원인물으로 왕사를 삼고 해린인물으로 국사를 삼았다는 이가 곧이 법천사 지광국사인물해린인물이다. 이 지광의 제자로서 금산사 혜덕왕사인물라 하는 이가 있었다. 이는 휘를 소현이라 하는 인데 문종인물의 여섯 번째 왕자로서 출가 후 법주사 주지로 있던 도생인물 승통의 사승이다.
쪽수▶P93-3이 慧炤와 同時人으로 原州 法泉寺에 智光國師라 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는 法名을 海麟이라 하는 이로서 文宗 十年 五月 實錄에 華嚴靈通寺 爛圓으로 王師를 삼고 海麟으로 國師를 삼았다는 이가 곧이 法泉寺 智光國師인 海麟이다. 이 智光의 弟子로서 金山寺 慧德王師라 하는이가 있었다. 이는 諱를 韶顯이라 하는 인데 文宗의 第六王子로서 出家 後 法住寺 住持로 잇든 道生僧統의 師僧이다.
혜덕왕사인물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유명한 덕이 높은 분이 있으니 이는 곧 인종인물 7년에 중국 혜원인물의 유풍을 본받아 염불왕생을 목적으로 하여 지리산 오대사에 수정결사를 창립하여 유가종을 널리 알렸던 진억대사인물가 그이다. 진억대사인물가 삼천여 사람의 입사자로써 결사된 이 수정사가 생겨난 이후로는 자은종의 법식 수행상에 일대 변동이 생겨났다. 원래 고려 자은종은 유가유식을 성전으로 하여 성립된 현장학설에 다시 진표인물의 점찰전계법을 덧붙이고 또 게다가 지금 진억대사인물의 염불왕생법을 더하여 본종의 종지가 되었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이 진억인물의 수정결사가 창립된 그 영향은 실로 굉장하여 오교양종 불교단에서 다 결사포교의 방법을 행하게 되는 동시에 한 명제인물 이래로 소위 백마사니 동림사니 하는 절 사짜까지 변경되어 사사(寺社)라는 이름이 유행되었으니 송광산 수선사라든지 만덕산 백련사라든지 하는 것이 다 이 진억인물의 수정사의 여풍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쪽수▶P93-4이 慧德王師의 弟子 中 한 사람으로써 有名한 高德한 분이 있으니 이는 곧 仁宗 七年에 支那 慧遠의 遺風을 본바다 念鐔往生을 目的으로 하야 智異山 五臺寺에 水晶結社를 創立하야 瑜伽宗을 大闡하든 津億大師가 그이다. 津億大師가 三千餘人의 入社者로써 結社된 이 水晶社가 생▶P94-1겨난 以後로는 慈恩宗의 法式修行上에 一大 變動이 생기여 났다. 元來 高麗 慈恩宗은 瑜伽唯識을 聖典으로 하야 成立된 玄奘學說에 다시 眞表의 点察傳戒法을 加添하고 또 게다가 今津億大師의 念佛徃生法을 增加하야 本宗의 宗旨가 되였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이 津億의 水晶結社가 創立된 그 影響은 實로 宏壯하야 五敎兩宗 佛敎團에서 다 結社布敎의 方法을 行하게 되는 同時에 漢明帝 以來로 所謂 白馬寺니 東林寺니 하는 절 사짜 까지 變更되야寺社라는 일홈이 流行되였으니 松廣山 修禪社라든지 萬德山 白蓮社라든지 하는 것이다. 이 律億의 水晶社의 餘風으로 이러나게 된 것이다.
이상에 말한 지광국사인물를 중심으로 한 시대가 경과한 이후 충렬왕인물 때에 이르러 이 법상종 내에 삼대 고승이 나타났으니 이는 즉 동화사의 흥진국존인물과 법주사의 자정국웅인물과 원국 대숭은복원사의 제1세 주지 원공국사인물가 그들이다.
쪽수▶P94-2以上에 말한 智光國師를 中心으로 한 時代가 經過한 以後 忠烈王 時에 至하야 이 法相宗 內에 三大高僧이 出하였으니 이는 卽 桐華寺의 弘眞國尊과 法住寺의 慈靜國雄과 元國大崇恩福元寺의 第一世住持圓空國師가 그이들이다.
흥진국존인물은 문경 강화(康化)의 아들로서 11세 되던 고종인물 25년에 남백월사 충연인물 장로에게 득도한 후 법명을 혜영인물이라고 한다. 충렬왕인물 28년에 국존이 되고 같은 왕 30년 5월 24일에 동화사 주지로 귀적하였다.
쪽수▶P94-3弘眞國尊은 聞慶康化의 子로서 十一歲 되든 高宗 二十五年에 南白月寺 沖淵長老에게 就하야 得度한 後 法名을 惠永이라고 한다. 忠烈王 二十八年에 國尊이 되고 同 三十年 五月 二十四日에 桐華寺 住持로 歸寂하였다.
자정국존인물은 일선군 출생으로 속성은 김 씨요 법명은 미수인물라고 하는데 나이 30세 되는 고종인물 42년에 원흥사 종연인물 화상에게 득도한 후 국녕사, 태신사, 장의사, 법주사, 중흥사, 유가사를 역주하고 충숙왕인물 때에 이르러 양가 도승통 삼학법주가 되는 동시에 국존으로 봉함을 입었다. 최후로 법주사 주지에 임하였다가 향년 88세로서 귀적하였다.
쪽수▶P94-4慈靜國尊은 一善郡 出生으로 俗姓은 金氏요 法名은 彌授라고 하는데 나이 十三歲 되는 高宗 四十二年에 元興寺 宗然和尙에게 投하야 得度한 후 國寧寺 態神寺 莊義寺 法住寺 重興寺 瑜伽寺를 歷住하고 忠肅王 時에 이르러 兩街都僧統 三學法主가 되는 同時에 國尊으로 封함을 입었다. 最後로 法住寺 住持에 就하였다가 享年 八十八歲로써 歸寂하였다.
원공국사인물는 법명을 해원인물이라 하는 이로 금산사 석굉대사인물에게 득도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대숭은복원사를 만들고 고려왕에게 명하여 계행고결한 고덕을 추천하라는 것에 의하여 이 원공국사인물가 추천을 입어서 대숭은복원사 제1세 주지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후에 충선왕인물께서 원 황제에 청하여 이 원공국사인물로 하여금 백제 금산사를 요주(遙住)케 하고 혜감원명편조무애국일대사(慧鑑圓明徧照無碍國一大師)라는 법호를 주시는 동시에 중대광(重大匡) 우세군(祐世君)을 봉하였다.
쪽수▶P94-5圓空國師는 法名을 海圓이라 하는 이로 金山寺 釋宏大師에게 投하야 得度하였다. 元朝皇帝가 大崇恩福元寺를 創하고 高麗王에게 命하야 戒行高潔한 高德을 推薦하라는 것에 依하야 이 圓空國師가 推薦을 입어서 大崇恩福元寺 第一世 住持로 就任하게 된 것이다. 後에 忠宣王께서 元皇帝에 請하야 이 圓空國師로 하여곰 百濟 金山寺를 遙住케 하고 慧鑑圓明徧照無得國一大師라는 法號를 주시는 同時에 重大匡祐世君을 封하였었다.





























본문2-6: 6. 부전(附傳) 삼종


이상에서 말한 오교 이외에 다시 소승종, 총지종, 신인종의 삼종이 신라시대에 오교와 한가지 성립된 것이 있다. 이 삼종은 종세가 그다지 왕성치 못하였던 관계로 당시에는 세상에서 하나의 독립종으로 공인함을 얻지 못하였으나 고려 말에 이르러 삼종이 다같이 하나 종으로 공인함을 얻어 12종의 열에 참여케 된 것이므로 이제 이 삼종을 이제 설명하기로 하는 것이다.
쪽수▶P94-6以上에서 말한 五敎 以外에 다시 小乘宗 摠持宗 神▶P95-1印宗의 三宗이 新羅時代에 五敎와 한가지 成立된 것이 있다. 이 三宗은 宗勢가 그다지 枉盛치 못하였든 關係로 當時에는 世上에서 一 獨立宗으로 公認함을 得치 못하였었으나 高麗末에 이르러 三宗이 다같이 一宗으로 公認함을 得하야 十二宗의 列에 叅與케 된 것임으로 이제 이 三宗을 次第로 說明하기로 하는 것이다.
소승종은 어느 대, 어느 사람의 개종인지 알 수 없으므로 그 본사와 개종조를 다 알 수 없으나 추측으로 생각하면 이 소승불교는 아직 오교의 대승불교가 조선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유전하던 재래 불교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 법흥왕인물 때 시흥불법하는 마당에 흥법 삼성의 주인옹인 아도인물 화상이 이 소승종의 개종조가 아닐까 하는 억단을 내리고 싶다. 이 종이 고려 말에 이르러서 당당한 독립한 하나의 종으로 행세한 것은 동문선서적에 등재된 소승업수좌관고로 보아 짐작할 수 있는 동시에 이 소승종 인으로 수좌 법계에까지 승진되었던 이가 있었다는 것도 추측할 것이다.
쪽수▶P95-2小乘宗은 何代何人의 開宗인지 未詳함으로 그 本寺와 開宗祖와를 다 알 수 없으나 推測으로 생각하면 이 小乘佛敎는 아즉 五敎의 大乘佛敎가 朝鮮에 들어오기 以前부터 流傳하든 在來 佛敎일 것이다. 그러타면 新羅 法興王 時 始興佛法 하는 마당에 興法 三聖의 主人翁인 阿道和尙이 이 小乘宗의 開宗祖가 아닐까 하는 億斷을 내리구 싶다. 이 宗이 高麗末에 이르러서 堂々한 獨立 一宗으로 行世한 것은 東文選에 登載된 小乘業首座官誥로 보아 斟酌할 수 있는 同時에 이 小乘宗人으로 首座法階에까지 昇進되였든 이가 있었는 것도 推測할 것이다.
그 다음 총지종과 신인종은 같은 시밀종(是密宗)에 속한 것인데 후세에 이르러 총지종은 선종에 참렬하였고 신인종은 교파에 참여하였다.
쪽수▶P95-3그 다음 總持宗과 神印宗은 同是密宗에 屬한 것인데 後世에 이르러 摠持宗은 禪宗에 叅列하였고 神印宗은 敎派에 叅與하였다.
총지종은 또한 지념종이라고도 한다. 신라 문무왕인물 때에 종조 혜통대사인물의 개종에 속한 것이다. 혜통인물은 수달의 변괴가 인연이 되어 출가한 후에 입당하여 선무외 삼장인물에게 대하여 법을 청하였드니 삼장인물은 오랑캐라 하여 홀대를 하거늘 사는 더욱 분개하여 3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몹시 힘들 일을 하였으되 결국 법을 불허함으로 사는 다시 일층 분발하여 두상에다가 큰 화로를 이고 입정하더니 짧은 시간에 정렬함과 동시에 뇌성하는 소리가 나거늘 삼장인물이 이 소리를 듣고 급히 나가서 불을 털고 손으로 피부가 찢어진 곳을 어루만지니 창처는 합하여 평시와 같아졌으나 오직 합창한 자리에 왕 자와 같은 흔적이 남아있음으로 세상 사람들이 왕화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문무왕인물 5년에 귀국하였더니 문무왕인물 때에 이르러 신라 왕께서 배창(背瘡)를 앓아서 고생하다가 혜통인물에게 치료를 청하였던바 혜통인물은 주력을 빌어 치료하여 드린 뒤에 신충의 원한으로 인하여 치병된 숙인을 설명하였다. 왕께서 마음이 감동되어 봉성사를 창건하여 주어 종풍을 크게 떨치도록 하였다. 천마산의 총지사와 무악산의 주석원은 다 유명한 사찰로서 총지종의 법손들이 유지, 상전하는 도장이다.
쪽수▶P95-4摠持宗은 또한 持念宗이라고도 한다 新羅 文武王 時에 宗祖 惠通大師의 開宗에 屬한 것이다. 惠通은 獺의 變恠가 因緣이 되야 出家한 後에 入唐하야 善無畏三藏에게 就하야 法을 請하였드니 三藏은 隅夷之人이라 하야 忽待를 하거늘 師는 더욱 憤慨하야 三年이란 긴 歲月을 두고 服勤하였으되 終不許法함으로 師는 更一層 憤發하야 頭上에다가 烘爐를 이고 立庭하더니 須臾에 頂裂함과 同時에 雷聲하는 소리가 나거늘 三藏이 이 소리를 듣고 急히 나가서 불을 털고 손으로 裂傷한 處를 어리 만지니 瘡處는 合하야 平時와 같어야젔으나 오즉 合瘡한 자리에 王字와 如한 痕跡이 남아있음으로 世上 사람들이 王和尙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한다. 文武王 五年에 歸國하였더니 神文王 時에 이르러 新羅 王께서 背瘡를 알아서 辛苦하다가 惠通에게 治療를 請하였든바 惠通은 呪力을 빌어 治療하여 드린 뒤에 信忠의 怨恨으로 因하야 致病된 宿因을 說明하였었다. 王께서 마음이 感動되야 奉聖寺를 創하여 주어 宗風을 大振케 하였다. 天摩山의 摠持寺와 毋岳山의 呪錫▶P96-1院은 다 有名한 寺刹로서 摠持宗의 法孫들이 維持相傳하는 道場이다.
신인종은 또한 이름을 문정루종이라 하는 것으로 결수법으로써 주지를 삼는 종이다. 신라 선덕주인물 때에 조사 명랑인물이 개종한 것이니 금광사를 근본 도장으로 하는 것이다. 개조 명랑의 자는 국육이니 사간 재량인물의 아들이요 자장인물의 조카이다. 형제 3인이 있었으니 맏이는 국교대사란 이요. 둘째는 의안대덕이란 이요 이는 즉 명랑대사인물란 이다. 명랑은 선덕주인물 원년에 입당 구법하여 같은 왕 4년에 귀국하였다. 문무왕인물 때에 이르러 당고종인물이 설인방에 명하여 병으로써 신라를 공격하려 함에 또는 명랑인물을 청하여 비법을 펼쳐 이를 양(禳)함으로부터 신인종풍이 세상에 크게 퍼졌다고 한다.
쪽수▶P96-2神印宗은 또한 일홈을 文定婁宗이라 하는 것으로 結手法으로써 主旨을 삼는 宗이다. 新羅 善德主 時에 祖師 明郞의 開宗한 것이니 金光寺를 根本道場로 하는 것이다. 開祖 明朗의 字는 國育이니 沙干才良의 子이요 慈藏의 甥姪이다. 兄弟 三人이 있었으니 長은 國敎大師란 이요. 次는 義安大德이란 이요 李는 卽 明朗大師란 이다. 明朗은 善德主 元年에 入唐 求法하야 同 四年에 歸國하였다. 文武王 時에 이르러 唐高宗이 薛仁邦에 命하야 兵으로써 新羅를 攻하려 하매 또는 明朗을 請하야 秘法을 開하야 이를 禳함으로부터 神印宗風이 世上에 大振하였다 한다.
이상 총지와 남산종이 합하여 총남종이 되고 중도종과 신인종이 합하여 중신종이 되야 이조 초에 나타난 것은 세종인물 6년 종 폐합할 때에 총남종과 중신종이란 종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으나 여하한 관계에서 합종이 되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쪽수▶P96-3以上 摠持과 南山宗이 合하야 摠南宗이 되고 中道宗과 神印宗이 合하야 中神宗이 되야 李朝 初에 나타난 것은 世宗 六年 宗廢合할 때에 摠南宗과 中神宗이란 宗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으나 如何한 關係에서 合宗이 되였는지 그 理由는 알 수 없다.
































본문2-7: 7. 천태종


이 천태종은 북제 혜문선사인물가 창건한 바로서 남악 혜사대사인물를 거쳐서 지자대사인물에 이르러 천태산에 구주하여 교리를 널리 퍼뜨렸으므로 천태종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종은 법화경서적으로서 소의경전을 삼는 고로 법화종이라고도 칭하는 것이다.
쪽수▶P96-4이 天台宗은 北齊惠文禪師의 創한 바로서 南岳慧思大師를 거쳐서 智者大師에 이르러 天台山에 久住하야 敎理를 大闡하였으로 天台宗이란 名을 얻게 된 것이다. 또한 이 宗은 法華經으로써 所依經典을 삼는 고로 法華宗이라고도 稱하는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는 고려 태조인물가 삼한을 통합한 것이 마치 천태종에서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소의로 하고 일심삼관(一心三觀)을 수행으로 한 것과 그 사적이 일치하므로 천태교리가 만일 고려에 유포되면 국조(國祚)가 연장되고 분열의 화가 영식(永息)되리라는 전설까지 있었던 것이다. 태조인물 때로부터 천태종을 퍼뜨릴 양으로 아닌 게 아니라 유의하였으나 종이란 것은 회사를 조직하듯이 사람의 힘으로 억지로 할 것은 아니다. 교리를 철저히 깨닫고 알아서 일가의 시조될 만한 특출한 인물이 출현한 이외에 그 법을 유지할 만한 법손이 계속 배출한 연후에 비로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숙종인물 때에 이르기까지 천태종이란 것이 아주 조선 불교 종파 중에 참렬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숙종인물 2년 정축 5월에 시조 대각국사인물가 개성 국청사에 머무르며 천태교을 초강(初講)함으로부터 비로소 천태종이 세상에 탄생하였다. 그 후 12년을 지나서 예종인물 4년 즉 건통 9년에 이르러 국가에서 태종대선(台宗大選)을 개시함으로부터 세상에서 천태종을 독립한 하나의 종으로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선시하여 신라 말년에 체관법사인물라는 이가 중국 오월(吳越) 왕의 청에 응하여 천태교리를 그 땅에 전하여 준 것을 보면 신라시대에 있어서 천태학설이 벌서 전포되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으나 아직 하나의 종으로 형성함에는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 지시하야 비로소 독립한 한 개 종의 면목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쪽수▶P96-5朝鮮에 있어서는 高麗 太祖가 三韓을 統合한 것이 마치 天台宗에서 會三歸一을 所依로 하고 一心三觀을 修行으로 한 것과 그 事跡이 一致함으로 天台敎理가 萬一 高麗에 流布되면 國祚가 延長되고 分裂의 禍가 永息되리라는 傳說까지 있었던 것이다. 太祖 時로부터 天台宗을 傳布할 양으로 未嘗不 留意하였으나 宗이란 것은 會社를 組織하듯이 人力으로 强作할 것은 아니다. 敎理를 徹底히 悟得하야 一家의 始祖될 만한 特出 人物이 出現한 以外에 그 法을 維持할 만한 法孫이 繼續 輩出한 然後에 비로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肅宗 時에 이르기까지 天台宗이란 것이 아주 朝鮮 佛敎 宗派 中에 叅列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肅宗 二年 丁丑 五月에 始祖大覺國師가 開城國淸寺에 住하야 天台敎을 初講함으로부터 비로소 天台宗이 世上에 誕▶P97-1生하였다. 그 後 十二年을 지나서 睿宗 四年 卽 乾統 九年에 이르러 國家에서 台宗大選을 開始함으로부터 世上에서 天台宗을 獨立 一宗으로 公認하기에 이르렀다. 先是하야 新羅末年에 諦觀法師라는 이가 支那 吳越王의 請에 應하야 天台敎理를 彼地에 傳하야 준 것을 보면 新羅時代에 있 어서 天台學設이 벌서 傳布되었든 것을 推測할 수 있으나 아즉 一宗으로 形成함에는 이르지 못하였든 것이 至是하 야 비로소 獨立 一宗의 面目을 完成하게 된 것이다.
이 조선의 천태종지로 말하면 개종조인 대각국사인물는 화암종의 출신이요 그 문도 되는 이들은 달마 구산파의 승려 중에서 응모되어 들어오게 된 관계상 본 천태종의 소의근본 성전인 법화경서적과 그 교판인 사교삼관(四敎三觀)의 학설 이외에 다시 화엄사상과 달마선리를 가미, 혼합하여 한 개 종의 종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다시 원묘국사인물 당대에 이르러 백련결사가 성립된 이후로는 정토사상까지 혼합하게 된 것이므로 조선 천태종은 실로 천태, 조계, 화엄, 정토의 4가 사상을 혼합한 불교라고 하면 상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 천태종은 국청사로서 총 본사를 삼고 남숭산(인동 금오산 선봉사), 북숭산(해주 수양산 신광사) 등 6 본산이 있었으니 이것이 곧 천태육파의 근본 도장이다.
쪽수▶P97-2이 朝鮮의 天台宗旨로 말하면 開宗祖인 大覺國師는 華巖宗의 出身이요 그 門徒 되는 이들은 達摩九山派의 僧侶 中에서 應募되야 들어오게 된 關係上 本天台宗의 所依根本聖典인 法華經과 그 敎判인 四敎三觀의 學說 以外에 다시 華嚴思想과 達摩禪理를 加味 混合하야 一宗의 宗旨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다시 圓妙國師 當代에 至하야 白蓮結社가 成立된 以後로는 淨土思想까지 混合하게 된 것임으로 朝鮮 天台宗은 實로 天台 曹溪 華嚴 淨土의 四家 思想을 混合한 佛敎라고 하면 相當할 것이다. 그리고 이 天台宗은 國淸寺로써 總本寺을 삼고 南崇山(仁同 金烏山 僊鳳寺) 北崇山(海州 首陽山 神光寺) 等 六本山이 있었으니 이것이 곧 天台六派의 根本道場이다.
개종조사 대각국사인물는 고려 문종인물의 네 번째 왕자로서 위(諱)를 후(煦)라 하고 자를 의천인물이라 하더니 그 후에 후 자는 송조 철종의 휘라고 하여 자로써 행세하게 되었으므로 의천인물 승통이라고 하였다. 어머니 인예태후인물 이씨의 꿈에 용이 입회함을 느끼고 그로 인해 임신하여 문종인물 9년 을미 9월 28일 궁중에서 탄생하였다. 어느 날 문종인물께서 모든 왕자를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이 중에 누가 출가 득도하여 복국우세(福國祐世)를 하려는가 함에 이에 응하여 국사가 일어나 ‘신유출세지(臣有出世志)하오니 유망청허(唯望聽許) 하소서’ 하였다. 즉시 화엄종의 명장 경덕국사 난원인물을 들여 내전에서 체발하고 경덕인물을 따라서 영통사에 출거케 하였으니 때는 문종인물 19년 을사 5월이었다. 국사가 득도한 후로 학업에 유의하여 화엄교관은 물론이고 대소승의 경률론 소장(䟽章)을 무불탐색(無不探索)하고 여력을 외학(外學)에 옮겨 중니인물(仲尼), 노담인물(老聃)의 학과 백가의 설을 완이심지(玩而尋之)하여 종횡 담론에는 비록 노사, 숙덕이라도 추양치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문종인물 22년에 우세(祐世) 승통을 받았고 선종인물 6년에 입송 구법하려다가 조의(朝議)가 불허함으로 원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 해 4월에 제자 수개(壽介) 등을 이끌고 미복(微服)으로 암행 입송하였다. 송제가 수공전에 영입하여 빈객의 예로써 우대하고 당시 양가에서 추천한 유계법사에게 법을 묻고 그다음 항주 정원법사인물를 만나 화엄교리를 얻고 그 후 자변대사인물에게 천태교관을 여쭙고 천태산에 나아가 지자대사인물의 탑 앞에서 천태교를 동쪽 나라에 널리 알리겠다는 서원(誓願)을 맹세하였다. 선종인물 3년 5월에 귀국하여 흥왕사에 교장사를 세우고 중국, 거란, 일본으로부터 구득한 서적 4천여 권을 간행하였다. 숙종인물 2년 6월에 국청사를 창립하고 같은 왕 6년 10월 5일에 귀적하시니 향령은 47이요 법랍(法臘)은 36이었다. 익을 대각국사인물라고 하였다.
쪽수▶P97-3開宗祖師 大覺國師는 高麗 文宗의 第四王子로서 諱를 煦라 하고 字를 義天이라 하더니 그 後에 煦字는 宋朝 哲宗의 諱라고 하야 字로써 行世하게 되였음으로 義天僧統이라고 하였다.母仁睿太后 李氏의 夢에 龍이 入懷함을 感하고 仍히 有娠하야 文宗 九年 乙未 九月 二十八日 宮中에서 誕生하였다. 一日 文宗께서 諸 王子를 모아노코 말씀하시기를 此中에 뉘가 出家 得度하야 福國祐世를 하려는가 하매 이에 應하야 國師가 起하야 󰡔臣有出世志하오니 唯望聽許 하소서󰡕하였다. 卽時 華嚴宗의 名匠景德國師爛圓을 召入하야 內殿에서 剃髮하고 景德을 따라서 靈通寺에 出居케 하였으니 時는 文宗 十九年 乙巳 五月이였다. 國師가 得度한 後로 學業에 留意하야 華嚴敎觀은 勿論이고 大小乘의 經律論䟽章을 無不探索하고 餘力을 外學에 移하야 仲尼, 老聃의 學과 百家의 說을 玩而尋之하야 縱橫談論에는 비록 老師宿德이라도 推讓치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文宗 二十二年에 祐世僧統을 受하였고 宣宗 元年에 入宋 ▶P98-1求法하려다가 朝議가 不許함으로 願을 이루지 못하고 明年 四月에 弟子 壽介 等을 率하고 微服으로 暗行入宋하였다. 宋帝가 垂拱殿에 迎入하야 賓客의 禮로써 優待하고 當時 兩街에서 推薦한 有誡法師에게 法을 問하고 그다음 杭州淨源法師를 叅하야 華嚴敎理를 受하고 그後 慈辯大師에게 就하야 天台敎觀을 稟하고 天台山에 晋하야 智者大師의 塔前에서 天台敎를 東國에 傅布하겠다는 誓願을 發하였다 宣宗 三年 五月에 歸國하여 興王寺에 敎藏司를 置하고 中國 契丹 日本으로부터 求得한 書籍 四千餘卷을 刊行하였다. 肅宗 二年 五月에 國淸寺를 創하고 同 六年 十月 五日에 歸寂하시니 享齡은 四十七이요 法臘은 三十六이였다. 謚를 大覺國師라고 하였다.
대각국사인물의 문하에 덕린인물, 익종인물, 경란인물, 연묘인물 등 수백 사람이 있어서 교법을 유지하여 후세에 부하니 이들은 다 근본 달마 구산문에서 출신한 고승들로서 대각국사인물가 처음 천태학자를 모집할 때에 각기 문인 수백 명씩을 이끌고 응모하여 온 이들이다.
쪽수▶P98-2大覺國師의 門下에 德麟 翼宗 景蘭 連妙 等 數百人이 있어서 敎法을 維持하야 後世에 傅하니 이들은 다 根本 達摩九山門에서 出身한 高僧들로서 大覺國師가 처음 天台學者를 募集할 때에 各其 門人 數百人式을 率하고 應募하여 온 이들이다.
익종인물의 밑에 대선사 교웅인물이라 하는 이가 있으니 이는 평양 사람으로서 속성은 박씨이다. 처음 장경사 석찬선사인물에게 득도한 후 사자산문의 학장인 쌍봉사 익종선사인물에게 수업하였다. 그 후 사승 익종인물을 따라 천태교에 와서 제1회 천태대선상 상과에 입격하여 대덕을 받고 다음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에 차례로 승진되어 인종인물 13년에 이르러 대선사가 되어 국청사 주지에 취임하였다가 같은 왕 27년 7월 16일에 귀적하거늘 묘응(妙應)이라고 익하였다.
쪽수▶P98-3翼宗의 밑에 大禪師敎雄이라 하는 이가 있으니 이는 平壤人으로서 俗姓은 朴氏이다. 처음 長慶寺 釋贊禪師에게 投하야 得度한 後 師子山門의 學匠인 雙峯寺 翼宗禪師에게 就하야 受業하였다. 그 後 師僧 翼宗을 따라 天台敎에 來하야 第一回 天台大選上上科에 入格하야 大德을 受하고 다음 大師重大師三重大師에 次第로 昇進되야 仁宗 十三年에 이르러 大禪師가 되야 國淸寺 住持에 就하였다가 同 二十七年 七月 十六日에 歸寂하거늘 妙應이라고 謚하였다.
교웅대사인물가 항상 말하기를 우리 천태가풍을 진흥할 자는 ‘필차사미(必此沙彌)’라는 예기를 받은 사람으로서 명종인물의 봉숭을 입어 천태종풍을 대흥한 이는 충청북도 옥천 영국사 원각국사인물다. 국사의 법휘는 덕소요 속성은 전씨다. 예종인물 2년에 탄생하여 9세 되던 해에 이르러 교웅인물에게 득도하였다. 인종인물의 잠저(潜邸) 때에 사와 공히 불전에 참배하다가 대장당에 들어가 손에 잡히는 대로 경권을 들어서 물으면 사가 능통치 못한 것이 없이 선답을 하였다 한다. 인종인물께서 찬탄하시기를 ‘이 승이 다른 날에 대법사가 반드시 되리라’ 한 일이 있었으니 사의 천품이 명민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입신한 후에 의종인물, 명종인물의 양조 추대를 입어 종풍을 크게 떨치고 명종인물 5년 11월에 귀적하는지라, 그 해골을 봉하여 영국사에 안장하고 비를 세워 덕을 기록하였다.
쪽수▶P98-4이 敎雄大師가 恒常 말하기를 우리 天台家風을 振興할 者는 󰡔必此沙彌󰡕라는 預記를 바든 사람으로서 明宗의 封崇을 입어 天台宗風을 大興한 이는 忠淸北道 沃川 寧國寺 圓覺國師다. 國師의 法諱는 德索요 俗姓은 田氏다. 睿宗 二年에 誕生하야 九歲 되든 해에 이르러 敎雄에게 投하야 得度하였다. 仁宗의 潜邸時에 師와 共히 佛殿에 叅拜하다가 大藏堂에 入하야 손에 잡히는 대로 經卷을 들어서 請問하면 師가 能通치 못한 것이 없시 善答을 하였다 한다. 仁宗께서 讃歎하시기를 󰡔此僧이 異日에 大法師가 반다시 되리라󰡕 한 일이 있었으니 師의 天稟이 明敏하든 것을 斟▶P99-1酌할 수 있다. 立身한 後에 毅宗 明宗의 兩朝 推戴를 입어 宗風을 大振하고 明宗 五年 十一月에 歸寂하는지라, 그 骸骨을 奉하야 寧國寺에 安葬하고 竪碑記德하였다.
원각국사인물가 귀적한 지 40년 후 고종인물 때에 이르러 보현도장의 결사를 설치하여 화엄삼매참(華嚴三昧懺)을 닦는 동시에 정토사상을 고취하여 천태종의 교리상에 이채를 나타나케 한 이로서 세인들이 서참회(徐懺悔)라는 별명을 지어 부르던 원묘국사인물라는 이가 한 분 있었다. 국사의 법휘는 요세라 하고 속성은 서씨라고 한다. 경상남도 신번(新繁) 사람으로서 의종인물 17년 10월 탄생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합천 천락사 균정선사인물에게 가서 득도하였다.
쪽수▶P99-2이 圓覺國師가 歸寂한 지 四十年 後 高宗 時에 이르러 普賢道場의 結社를 設하야 華嚴三昧懺을 修하는 同時에 淨土思想을 鼓吹하야 天台宗의 敎理上에 異彩를 發케 한 이로서 世人들이 徐懺悔라는 別名을 지어 불루든 圓妙國師라는 이가 한 분 있었다. 國師의 法諱는 了世라 하고 俗姓은 徐氏라고 한다. 慶尙南道 新繁人으로서 毅宗 十七年 十月 誕生하였다. 十五歲 되든 해에 陜川 天樂寺 均定禪師에게 가서 得度하였다.
후에 송광 목우자인물와 같이 남원 귀정사를 경과하던 중 그 전날 그 주지 현각인물의 꿈에 온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삼세지법화사(三世持法華師)가 내일 올 터이니 마땅히 소탑(掃搨)하고 영접하라’고 부탁하고 간 일이 있었다. 현각인물은 여교대지(如敎待之)러니 해가 저물고 과연 점잖은 빈객 두 분이 도착하였으니 그 가운데에 항상 법화경을 지송(持誦)하는 한 분이 즉 원묘국사인물다. 좌정 후에 현각인물은 그 꿈을 구설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사가 천태교에 대하여 숙연이 깊은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고종인물 4년에 강진 만덕산에 백련사를 딱고 보현도장의 결사를 세우니 당시 입사자가 3백여 사람에 달하였다. 고종인물 32년 7월 7일에 귀적하니 향년이 83이요 법랍이 70세라고 한다.
쪽수▶P99-3後에 松廣牧牛子와 共히 南原 歸正寺를 經過하든 中 그 前날 그 住持 玄恪의 夢에 왼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三世持法華師가 明日 來臨할 터이니 맛당히 掃搨하고 迎接하라고 付囑하고 간 일이 있었다. 玄格은 如敎待之러니 日晚에 果然 점잔은 賓客두 分이 來到하였으니 그 가운대에 恒常 法華經을 持誦하는 한 분이 卽 圓妙國師다. 座定 後에 玄恪은 所夢을 具說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師가 天台敎에 對하야 宿緣이 깊은 것을 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高宗 四年에 康津 萬德山에 白蓮社를 修하고 普賢道場의 結社를 立하니 當時 入社者가 三百餘人에 達하였다, 高宗 三十二年 七月 七日에 歸寂하니 享年이 八十三이요 法臘이 七十歲라고한다.
원묘국사인물의 문하에 문장으로써 당세를 이름을 떨쳤던 정명국사 천인인물이란 이로부터 제11대 무외국통에 이르기까지 천태종은 백련사를 근거 도장으로 하여 종풍을 크게 떨쳤다. 무외국통인물원혜국통인물의 법사요 삼장법사 선공인물의 삼촌 되는 이라고 한다. 충렬왕인물 28년에 왕이 진주 반성현 용암사로부터 청거(請居)하여 강화 묘련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니, 묘련사는 송광사의 출장소가 강화 선원사인 것과 마찬가지로 백련사의 출장소인 것이다. 왕이 문무백관을 이끌고 묘련사에 나아가서 구의(摳衣)의 예를 행한 후 ‘백월낭공적조무애대선사(白月朗空寂照無碍大禪師)’라는 법호를 봉하였으며 같은 왕 33년에는 왕사로 봉하고 ‘불일보조정혜묘원진감대선사(佛日普照靜慧妙圓眞鑑大禪師)’라는 법호를 주었다. 충선왕인물 원년에 이르러서는 선교각종산문도반총섭제조(禪敎各宗山門道伴摠攝提調)라는 직을 주었고, 충숙왕 원년에 이르러서는 대천태종사쌍홍정혜광현원종무외국통(大天台宗師雙弘定慧光顯圓宗無畏國統)이라는 최고 사위를 주었다.
쪽수▶P99-4圓妙國師의 門下에 文章으로써 當世를 鳴動하든 靜明 國師天因이란 이로부터 第十一代 無畏國統에 이르기까지 天台宗은 白蓮社를 根據道場으로 하야 宗風을 大闡하였다. 無畏國統은 圓慧國統의 法嗣요 三藏法師璇公의 猶父 되는 이라고 한다. 忠烈王 二十八年에 王이 晋州 斑城縣 龍岩寺로부터 請居하야 江華 妙蓮社에 住케 하였으니, 妙蓮社는 松廣社의 出張所가 江華禪源社인 것과 마찬가지로 白蓮社의 出張所인 것이다. 王이 文武百官을 率하고 妙蓮社에 나아가서 摳衣의 禮를 行한 후 󰡔白月朗空寂照無碍大禪師󰡕라는 法號를 奉하였으며 同 三十三年에는 王師로 封하고 󰡔佛日普照靜慧妙圓眞鑑大禪師󰡕라는 法號를 贈하였다. 忠宣王 元年에 至하여는 禪敎各宗山門道伴摠攝提調라는 職을 주었고, 忠肅王 元年에 至하여는 大天台宗▶P100-1師雙弘定慧光顯圓宗無畏國統이라는 最高 師位를 주었다.
삼장법사 선공인물은 조정숙공 인규인물의 네 번째 아들 의선으로서 특사정통지견무애삼장법사대천원연성사(特賜定通知見無碍三蔵法師大天源延聖寺) 대보은광사(大報恩光寺) 겸고려영원사(兼高麗瑩原寺) 주지복국우세정명보조현각대선사(住持福國祐世靜明普照玄恪大禪師) 삼중대광자은군(三重大匡慈恩君)이란 이니 이 선공인물의 후를 이어 수원 만의사에서 천태종사 수백 명을 회집하고 화엄삼매참과 법화경서적 강설법회를 열었던 신조대사인물란 이가 있었다. 이이는 완산백 이성계(이태조 즉 위전어휘)의 휘하에서 장상으로 더불어 정책 후 거의회군(舉義廻軍)하여 고려의 종사를 안정시킨 공훈이 있었으므로 봉복군을 봉하여 준 이다.
쪽수▶P100-2三藏法師 旋公은 趙貞肅公仁規의 第四子義旋으로서 特賜定通知見無碍三蔵法師大天源延聖寺 大報恩光寺 兼高麗瑩原寺 住持福國祐世靜明普照玄恪大禪師 三重大匡慈恩君이란 이니 이 旋公의 後를 이어 水原 萬義寺에서 天台宗師 數百人을 會集하고 華嚴三昧懺과 法華經講說法會를 開하든 神照大師란 이가 있었다. 이이는 完山 伯李成桂(李太祖 即 位前御諱)의 揮下에서 諸將相으로 더부러 定策後 舉義廻軍하야 高麗의 宗社를 安定시킨 功勳이 있었음으로 奉福君을 封하여준 이다.
이 조공보다 좀 앞서서 충혜왕인물 후 3년에 영록대부(榮錄大夫) 태의원사(太醫院使) 조분인물이란 이가 원황제를 위하여 황성에 법왕사를 창건하고 주법인을 구할 적에 그 법왕사에 입원하여 최초로 천태종지를 선포하여 천태 법왕사라는 절 이름을 얻게 한 자신선사와 일인선사도 다 천태종 중 유명한 고덕들이다.
쪽수▶P100-3이 照公보다 좀 앞서서 忠惠王 後 三年에 榮錄大夫太醫院 使趙芬이란 이가 元皇帝를 위하야 皇城에 法王寺를 創하고 主法人을 求할 적에 그 法王寺에 入院하야 最初로 天台宗旨를 宣布하야 天台 法王寺라는 寺名을 얻게 한 孜信禪師와 一印禪師도 다 天台宗 中 有名한 高德들이다.
그 후 이조에 들어서 태조인물 때에는 국사 조구인물란 이가 있었고 세종인물 때에는 천태종의 명장인 행호인물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이는 지리산 금대, 안국이란 절에 가서 들으면 자기 모당을 효양하던 행호조사인물하고 떠드는 이다. 사는 본시 해주 사람으로 최문헌인물 공의 후예라고 한다. 세종인물 20년 7월에 효녕대군인물의 청으로 행호인물를 함양 금대암으로부터 오게 하여 흥천사에 잠시 머무르게 하였는바 대동(臺錬)들의 배척으로 인하여 세종인물께서는 청해오기는 했지만은 면회도 해보지 못하고 은염주와 가사(袈裟) 등의 물건을 상의원에 명하여 장만하여 이것도 세종인물께서 친히 주시지를 못하고 효녕대군인물에게로 보내서 대군으로 하여금 전치케 하였다. 그 후 대자암에 머무리게 하였다가 또 얼마 아니 되어 행호인물의 본래 소주처인 강진 만덕사로 돌아가게 하였다.
쪽수▶P100-4그 후 李朝에 들어서 太祖 時에는 國師 祖丘란 이가 있었고 世宗 時에는 天台宗의 名匠인 行乎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이는 智異山金臺 安國이란 절에 가서 들으면 自己 母堂을 孝養하든 行乎祖師하고 떠드는 이다. 師는 本是 海州人으로 崔文憲公의 後裔라고 한다. 世宗 二十年 七月에 孝寧大君의 請으로 行乎師를 咸陽金臺菴으로부터 請來하야 興天寺에 住接케 하였는바 臺錬들의 排斥으로 因하야 世宗께서는 請해오기는 했지만은 面會도 해보지 못하고 銀念珠와 袈裟 等物을 尙衣院에 命하야 작만하야 이것도 世宗께서 親히 주시지를 못하고 李寧大君에게로 보내서 大君으로하 여금 傳致케 하였다. 그 후 大慈菴에 住케 하였다가 또 얼마 아니 되야 行乎의 本來 所住處인 康津 萬德寺로 還山케하였다.
이 천태종이 고려 말에 이르러서 소자종과 법사종의 양파로 나누어졌으니 오늘날에 있어서 그 양파의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추측으로 말하면 천태 법사종이란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참회(除懺悔)라는 별호를 듣게 된 만덕산 원묘국사인물를 심중으로 하는 백련사 일파를 이름한 것이요 천태 소자종이란 것은 백련사 일파를 제외하고 남은 재래의 천태종을 이름한 것인 듯싶다. 끝으로 조계종에 대하여는 제를 달리하여 발표하려 하니 독자―이를 양해하기를 바란다.
조선불교 종파 연혁도
쪽수▶P100-5이 天台宗이 麗末에 이르러서 䟽字宗과 法事宗과의 兩派로 分하였으니 今日에 있어서 그 兩派의 內容은 알 길이 없으나 推測으로 말하면 天台法事宗이 란 것은 上에서 말한 바와 같이 除懺悔라는 別號를 듯게 된 萬德山 圓妙國師를 心中으로 하는 白蓮社 一派를 일홈한 것이요 天台䟽字宗이란 것은 白蓮社 一派를 除外하고 남은 在來의 天台宗을 일홈한 것인 듯싶다. 끝으로 曺溪宗에 就하여는 題를 달리하야 發表하려 하니 讀者-이를 諒하기를 바란다.
朝鮮佛敎宗派沿革圖




























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현대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