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형

North Korea Humanities

홍종욱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1월 28일 (일) 22:36 판

김석형(金錫亨)
DoYu-Ho.jpg
출처 : 1966년 9월호 <새조선>[1]
 
한글명 김석형 한자명 金錫亨 영문명 Kim Seok-hyeong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15년 몰년 1996년 출신지 대구 전공 역사학


개요

역사학자. 191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사학과를 졸업하였고, 양정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5년에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석방되었다. 해방 후 경성사범대학(지금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이동하였다. 1945년 10월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46년 월북하여 평양에 신설된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에 취임하였다. 1956년 1월 과학원(사회과학원의 전신) 역사연구소 소장이 되어 북한의 역사학 연구를 주도하였다. 그는 북한 역사학계의 초기 주요 논쟁 중 하나인 전근대 시기구분과 사회구성 논쟁에서 삼국시대를 노예제사회가 아닌 봉건사회로 규정하는 견해가 학계의 공식적인 견해가 되는 과정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고대 한일관계 연구에 천착하여 이른바 ‘분국설’을 제기함으로써 ‘임나일본부설’ 비판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970년대 북한에서 󰡔조선전사󰡕가 편찬된 이후로는 북한 역사학계의 원로로서 󰡔삼국사기󰡕의 역주 작업을 비롯한 자료 수집과 정리 작업에 종사하는 한편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의 후속 작업을 진행하였고, 1996년 11월 26일에 사망하였다.

생애

출생과 성장

1915년 11월 7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변호사로서 대구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던 아버지 김익균(金宜均)과 어머니 이원경() 사이에서 5남 6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김익균이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희도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8년 3월에 졸업하였다. 이 시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지만 북한에서 펴낸 그의 전기 󰡔신념과 인간󰡕은 그는 어린 시절에 한반도 유적 발굴을 위한 발굴대의 조수로 일하면서 김의균의 집에 머물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를 만나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논쟁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2] 이 전기는 실화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어떠한 기록을 바탕으로 사건을 서술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교차 검증을 통한 사실 확인이 어려워서 해당 일화가 사실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다만 그의 여동생인 김석조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어릴적부터 고구려 벽화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였고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3]
희도보통학교를 졸업한 김석형은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이하 대구고보)에 입학하였다. 대구고보에서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말까지 여러 차례 학생 맹휴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김석형은 공부에만 전념하였던 학생으로 여겨진다.[4] 그는 1933년 3월의 대구고보 제15회 졸업식에서 졸업생을 대표하여 답사를 하였고, 동기생 4명과 함께 정근상을 수상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진학과 졸업 이후의 행적

김석형은 1년의 재수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이때 김석형의 스승은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정립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학자이자 󰡔신념과 인간󰡕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김석형과 논쟁한 바 있는 스에마쓰 야스카즈였다. 강의 시간에 스에마쓰가 ‘미마나 미야케(任那 屯倉)설’을 설명할 때 김석형이 강하게 반발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5] 스에마쓰가 임나 문제에 대한 강의를 할 때 항상 검정물을 들인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괜 채 강의를 듣는 김석형의 태도에 스에마쓰가 곤혹스러워했다는 일화도 있다.[6] 학부 과정을 이수한 그는 조선에 관련된 글을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였고, 이 글은 1942년에 「이조 초기 국역 편성의 기저」라는 제목으로 󰡔진단학보󰡕14집에 게재되었다. 졸업 후 김석형은 양정중학교의 교원이 되었다가 1945년 3월 검거되어 6월에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검거된 이유는 조선어학회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거나,[7] 서울에서 조직된 무장봉기준비결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검거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8] 대체로 전자의 추정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9]

해방 이후 월북과 북한 역사학계 구성에 참여

해방 이후 김석형은 석방되었고 양정중학교 교원으로 복직하였으나 7개월 뒤 사직하였다. 1946년 3월 경성사범대학(지금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그해 8월 월북하였다. 이때 평양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교수진을 확보하기 위해 교섭다는 남쪽에 파견하였는데 김석형은 교섭단을 만난 뒤 곧바로 북행을 결심한 것으로 여겨진다.[10] 그는 이보다 앞선 1945년 10월 서중석을 보증인으로 하여 공산당에 가입했으므로 당의 명령이 내려지자 월북해야만 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11] 월북 이후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다. 1948년 10월 북한 내각 제4차 회의에서 교육상에게 조선역사 편찬위원을 선임함과 동시에 1949년 3월 말까지 최근세사를, 같은 해 12월 말까지 통사를 간행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1949년 1월 13일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편찬위원이 선임되었는데 김석형은 상임위원이 되었고, 산하 분과위원회에서 봉건사분과위원회를 운영하였다. 그는 1948년 󰡔조선력사󰡕(초급중 1학년)와 1951년 󰡔조선력사󰡕(초급중 1,2,3년용 수정본󰡕 편찬에 참여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로 와서 󰡔조선왕조실록󰡕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하였고, 전쟁 중인 1952년 12월에 과학원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역사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후 김석형은 러 학술 토론회에 참여하고 논문을 발표하면서 북한에서 한국사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1955년 1월 발행이 시작된 󰡔력사과학󰡕 창간호에서는 역사학자들의 16개 당면과제가 제시되었는데, 김석형은 󰡔이조병제사󰡕(인민군출판사, 1954)와 󰡔역주 동국병감󰡕(국립출판사, 1955)를 편찬하고 󰡔조선통사(상)󰡕(1956)에서 고려 후기 부분을 집필하는 한편, 당면과제 가운데 노예제사회 유무론, 시대구분 문제, 봉건사회 토지소유 형태 문제에 천착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1955년 3월에 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는데 이 학사는 우리 학계의 석사와 유사한 학위이다. 1956년 1월에는 과학원 산하 역사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박사학위 수여와 삼국시기의 사회구성 논쟁을 주도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주체적 확립과 혁명적 원칙성’이 내외에 선포되었으며 당사업에서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의 청산, 사상사업에서 사대주의, 교조주의, 종파주의, 수정주의 등의 청산이 제기되었다. 이어서 열린 8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등에 대한 비판을 통해 반종파투쟁을 벌일 것이 주장되었고, 그 결과 이청원 등의 역사학자와 이론가들이 숙청되었다. 김석형은 1958년 역사연구소의 소장과 함께 사회과학원 사회과학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학계에서의 위치를 통해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와 토론을 주도하였다. 그는 1961년 9월 27일에 개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가 민족위원회 연차회의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에서 역사학 박사를 수여받았다. 이때 그가 제출한 논문은 「양반론」(1959, 󰡔역사논문집󰡕 3집)과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1957, 과학원출판사)이었다. 이 연구는 그가 1955년부터 진행해 온 조선봉건사회의 토지소유 문제와 조선의 노비 문제 등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당시 북한 역사학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삼국시기의 사회구성에 관한 토론’에서 삼국시대 봉건사회론을 제시하였고 토론을 거쳐 그의 주장이 북한 역사학계의 공식적인 견해로 채택되어 1962년 출간된 󰡔조선통사(상)󰡕에 반영되었다.

삼한·삼국의 분국설 제기

한국 고대 사회구성에 대한 논의가 일단락되자 김석형은 고대 한일관계사로 눈을 돌렸다. 그는 1963년 「삼한 삼국의 일본 렬도 내 분국(分國)들에 대하여」(󰡔력사과학󰡕1963-1)란 논문을 통해 이른바 ‘분국설’을 제기하였다. 그의 견해는 이전까지 일본학계에서는 묵수되어 왔고, 한국학계에서는 외면되어 왔던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는 연구를 지속하였고 그 성과는 1966년에는 󰡔초기조일관계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라는 단행본으로 일단락되었다. 그의 주장은 일본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으며, 󰡔일본서기󰡕의 사료비판 필요성을 재고시킨 견해로 현재까지 ‘임나일본부설’ 연구와 비판이 진행되는 기틀을 제공하였다. 지금까지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고대 한일관계사를 김석형의 ‘분국설’에 입각하여 이해하고 있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한국사 편찬사업을 주도

1970년대 김석형은 개별논문의 집필이 아닌 통사의 편찬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물이 1977년의 󰡔조선통사(상)󰡕과 1979년부터 3년에 걸쳐 북한의 모든 역사학자들이 동원되어 편찬한 33권의 󰡔조선전사󰡕였다. 이 저작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인민사’류의 통사이면서도 ‘혁명운동사’와 ‘당사’가 결합된 특성을 가진다고 여겨진다.[12] 김석형은 󰡔조선전사󰡕에 대해 “인민의 투쟁과 창조의 역사를 주체적 방법론에 기초하여 전면적으로 폭넓게 체계화하였다”고 평가하였다.[13] 이후 그는 「구《삼국사》와 《삼국사기》」(1981, 󰡔력사과학󰡕1981-4), 「고구려시조 동명왕 주몽의 출생설화에 대하여」(1984, 󰡔력사과학󰡕1984-1), 「527년 북규슈호족 이와이의 《반란》사건」(1985, 󰡔력사과학󰡕1985-3), 「《삼국사기》를 통하여 본 4세기말 5세기초의 조일관계에 대하여」(1988, 󰡔력사과학󰡕1988-2)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새롭게 사료 정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한편 고대 한일관계사의 후속 연구를 진행하였다. 특히 사료 정리에 대한 관심은 󰡔삼국사기󰡕의 주해본 집필로 이어졌으며, 이 저작은 훗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2016년에 출간되었다.

다양한 직책과 활발한 활동

김석형은 북한의 역사학계를 주도하면서 다양한 직책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14] 1961년 5월 조평통 중앙위원, 1962년 10월 최고인민위원회 제3기 대위원, 1967년 11월 제4기 대위원, 1972년 12월 제5기 대의원, 1982년 2월 제7기 대의원, 1982년 2월 조평통 상무위원, 1986년 11월 제8기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8년 8월에는 김일성종합대학교 교수 박사,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고문, 원사 교수 박사가 되었으며, 1989년 5월에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남북회담대표로 남북 역사학자 회담을 제의하는 등 대남사업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1990년 4월 최고회의 제9기 대의원이 되었고, 1990년 8월 일본 오사카 조선학학술대회에 참가하여 누이동생인 김금숙 등과 상봉하였다. 1991년 1월 조통연합 중앙위 위원이 되었고, 1992년 4월에는 김일성 훈장을 수상하고, 사회과학원 원장과 조평통 상무위원, 재북평화통일추진협의회 상무위원에 임명되었다. 1993년 12월에는 최고인민위원회 상설회의 위원에 임명되었다. 1993년 10월에 열린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주관하였다. 1994년 12월 2일에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2차 학술발표회’에서 단군·고조선 역사의 전면 재서술을 주장하였다. 1995년 11월 15일에는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3차 학술발표회’를 개최하였다.

사망

1996년 11월 26일에 사망하였다. 일설에는 마지막 논문인 「단군민족의 통일」을 저술하던 중 자신의 서재 책상에서 펜을 쥔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15]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연구

분국설: 고대 한일관계사의 관점을 전환하려는 시도

김석형은 「삼한 삼국의 일본 렬도 내 분국(分國)들에 대하여」(󰡔력사과학󰡕1963-1)에서 5세기 초에도 일본 열도는 수십 개 소국의 분립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들 소국 중에는 삼한(마한․진한․변한)과 삼국(백제․신라․가락) 계통의 소국들이 이른바 本國에 대한 分國의 형태로 존재하였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고사기󰡕․󰡔일본서기󰡕와 같은 일본측 문헌과 末松保和가 4∼6세기 왜의 南鮮경영을 입증하는 객관적 사료로 들었던 󰡔광개토대왕비󰡕 및 󰡔송서󰡕 왜국전의 책봉 기록을 逆으로 해석하여 일본 열도 내의 조선 분국을 상정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 분국들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유적으로 일본 열도 내의 조선식 산성을 들었다. 「삼한 삼국의 일본 렬도 내 분국(分國)들에 대하여」를 제출할 단계에서 김석형의 주장은 방대한 체계를 입증할 만한 문헌사료 및 고고학 자료가 너무 소략하게 제시되어 실증적 기반에 약점을 보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으로 다른 연구자들과 김석형 자신에 의한 추가 논증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논증들 중 일부를 종합한 결과가 1966년 󰡔초기조일관계연구󰡕라는 단행본으로 정리되었다. 이 책에서 김석형은 초기 조일(한일)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개괄하였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보이는 出雲 신화의 素戔嗚尊 관련 설화는 신라 세력의 出雲 진출을, 천손강림 신화는 가락 세력의 北九州 진출을 각각 보여주는 것이며, 신무 東征 전승은 일본 열도에 성립한 삼국(백제․신라․가락)계의 분국이 그 원주민을 정복한 과정의 반영이었다. 이러한 삼국의 분국은 󰡔삼국지󰡕 위서 왜인전에 보이는 백여 국에 포함되어 있으며, 조선식 산성은 이들 분국의 정치군사적 거점이었다. 「광개토왕릉비문」과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라는 것은 백제, 신라, 가락계의 분국이 그 본국과의 관계에서 수행한 군사 활동을 의미하고 기내의 야마토 정권과는 무관계한 것이었다. 또한 󰡔송서󰡕 왜국전에 보이는 왜왕의 도독제군사호에 포함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등의 국명은 일본 열도에 있던 삼한․삼국계 분국을 가리킨다. 왜왕 武의 상표문에 보이는 “渡平海北九十五國”은 한반도 남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畿內의 야마토 정권에 의한 北九州 통일, 즉 北九州에 산재해 있던 삼한․삼국의 분국을 통합한 사실을 과장한 것이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 관련 문제는 야마토 정권에 의한 吉備 지역 등의 삼국계 분국에 대한 병합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일본부라는 것은 가락계 분국에 두어진 야마토 정권의 통치기관이었다. 임나 부흥 관련 기사로서 계체21년(529)조에 임나 부흥을 위한 대규모의 출병이 계획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임나(금관 가락국)가 신라에 병합된 것은 532년이므로 󰡔일본서기󰡕의 기사가 조작임을 알 수 있다. 磐井 난의 기사는 백제의 가락계 九州 경영이 회복된 것이 그 역사적 사실이었다. 소위 임나 부흥 기사라는 것은 금관 가락국이 멸망한 사실을 󰡔일본서기󰡕가 조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계체기」의 대사나 「흠명기」의 안라는 각각 吉備의 賀夜郡과 安那郡에 비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때의 임나관련 기사는 야마토 정권에 의한 吉備 경영의 사건을 보여준다.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에 吉備臣이 다수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에는 임나도 일본부도 없었다.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의 전부는 九州의 백제계 분국과 야마토 정권의 사이에서 吉備의 가라계 분국의 지배를 둘러싸고 충돌한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내용은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동반하여 제시된 것이었다. 김석형은 일본의 야요이 문화와 고분 문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정리하여 한국 문화의 일본 전파라는 큰 틀을 제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기원3세기 이후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삼한의 주민들이 北九州 지방에 이주하면서 일본의 청동기 문화인 야요이 문화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이주민의 파동이 단절 없이 진행되어서, 그 결과 3세기 중엽에는 北九州 일대부터 고분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고분 시대의 유적을 검토하면 크게 北九州, 出雲∼吉備, 畿內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열도 내 3개의 세력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6세기까지도 일본 열도가 통일된 야마토 조정의 전국적 지배 아래 있지 않았음을 입증해주는 증거라고 하였다. 이처럼 김석형의 분국설은, 문헌사학과 고고학, 그리고 신화학 등 다방면에서의 치밀한 검토를 통해 제기된 것이었다.

논저목록

저자명 기사명 단행본/잡지명 권호 출판사 출판일자 분류
도유호 歐洲行 印度洋 건너서서(1) 동아일보 1930.09.02
도유호 歐洲行 印度洋 건너서서(2) 동아일보 1930.09.03
도유호 歐洲行 印度洋 건너서서(11) 동아일보 1930.09.16
도유호 歐洲行 印度洋 건너서서(20) 동아일보 1930.10.01
도유호 歐洲行 印度洋 건너서서(23) 동아일보 1930.10.05
도유호 苦悶의 獨逸에서, 타고翁의 訪獨, 米國品의 洪水, 失業擴大 동광 21 1931.5
도유호 獨逸留學日記 동광 25 1931.9
도유호 詩人 「꾀테」의 舊家를 찾고 (獨逸留學日記) 동광 26 1931.1
도유호 獨逸大學生의 生活(劍客男女 祼體生活 尖端戀愛) 동광 27 1931.11
도유호 民族問題에 對한 나의 誤謬 동광 28 1931.12
도유호 民族問題에 關하야 동광 30 1932.1
도유호 緊急抗議文 동광 33 1932.5
도유호 旋風부는 獨逸에서 동광 37 1932.9
도유호 彙報:都宥浩氏 書信(維也納로부터) 진단학보 5 1936
도유호 Konfuzius und Laotse im Lichte der Chinesischen Sozialgeschichte(支那社會史上으로 본 孔子와 老子, 獨文) 진단학보 8 1937
도유호 中國都市文化의 起源(1) 진단학보 12 1940
도유호 感想 (上) 感謝와 訂正 조선일보 1940.04.24
도유호 感想 (中) 感謝와 訂正 조선일보 1940.04.25
도유호 感想 (下) 感謝와 訂正 조선일보 1940.04.25
도유호 “비엔나 그리웁다!(1)” 조선일보 1940.06.01
도유호 “비엔나 그리웁다!(2)” 조선일보 1940.06.04
도유호 “비엔나 그리웁다!(3)” 조선일보 1940.06.05
도유호 “비엔나 그리웁다!(4)” 조선일보 1940.06.07
도유호 “비엔나 그리웁다!(終)” 조선일보 1940.06.08
도유호 「「요세프·헥겔」씨의 「토템」主義論」 진단학보 12 1940
도유호 中國都市文化의 起源(2) 진단학보 13 1941
도유호 中國都市文化의 起源(3완) 진단학보 14 1941
도유호 安岳의 高句麗 壁畵墳 자연과학 5 국립인문출판사, 평양 잡지
도유호 安岳에서 發見된 高句麗古墳들 문화유물 1 조선물질문화유산보존위원회 1949 잡지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위한 몇개의 基本問題(상) 력사제문제 15(1집) 조선역사편찬위원회 1950 잡지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위한 몇개의 基本問題(하) 력사제문제 16(2집) 조선역사편찬위원회 1950 잡지
도유호 奉先寺址考 문화유물 2 조선물질문화유산보존위원회 1950 잡지
도유호 조선 석기 시대 사상(史上)에서 새로 판명된 몇가지 사실에 관하여 력사과학 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55 잡지
도유호 조선 력사상에는 과연 노예제 사회는 없었는가 력사과학 3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56 잡지
도유호 정백운 라진 초도 원시 유적 발굴보고서(유적발굴보고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평양 1956 보고서
도유호 민족 문화 유산의 계승 발전과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의 당면 과업 문화유산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7 잡지
도유호 황기덕 지탑리 유적 발굴 중간보고(1) 문화유산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7 잡지
도유호 황기덕 지탑리 유적 발굴 중간보고(2) 문화유산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7 잡지
도유호 황기덕 궁산 원시 유적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2) 과학원출판사, 평양 보고서
도유호 조선 원시 문화의 년대 추정을 위한 시도 문화유산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8 잡지
도유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학술 보고회- 공화국 기치하 10년간의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사업 성과 문화유산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8 잡지
도유호 삼국 시기의 사회 경제 구성에 관한 토론집-삼국 시대는 봉건 시대가 아니다 력사연구소 편집, 과학원출판사 1958
도유호 안악 제 3호분 발굴 보고(유적유물보고 3)-머리말 과학원출판사, 평양 1958
도유호 안악 제 1호 및 제 2호분 발굴보고서(유적유물보고 4)-머리말 과학원출판사, 평양 1958
도유호 대동강 류역 고분 발굴 보고(고고학자료집 1)-서언 1958
도유호 조선 거석 문화 연구 문화유산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2 잡지
도유호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유래와 서역 문화의 영향 문화유산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9 잡지
도유호 재령과 단천 지방에서 나온 몇 개 유물에 관하여 문화유산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9 잡지
도유호 태성리 고분군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5)-서문 1959 보고서
도유호 강계시 공귀리 원시 유적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6)-머리말 1959
도유호 회령 오동 원시 유적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7) 1960
도유호 초도 유적의 주인공에 관하여 문화유산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0
도유호 조선 원시 고고학 과학출판사 1960 저서
도유호 고고학에 관한 새 용어의 해설 문화유산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0 잡지
도유호 고조선에 관한 약간의 고찰 문화유산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0 잡지
도유호 기원전 3~2세기에 조선 북부지역의 금속문화 제25차 국제동방학자 대회(소련, 모스크바) 1960.08.09.~1960.08.16 학술대회
도유호 고조선 문화에 대하여 력사과학 5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61 잡지
도유호 황기덕 지탑리 원시 유적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8) 1961 보고서
도유호 신천 명사리에서 드러난 고조선 독널에 관하여 문화유산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고고학이란 어떠한 과학이며, 력사 연구에는 왜 고고학이 필요한가? 문화유산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진번과 옥저성의 위치 - 고조선 령역 문제와 관련하여 - 문화유산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빙하기란 무엇인가 문화유산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인류의 기원 문화유산 5 조선민주주의 1962 잡지
도유호 왕검성의 위치 문화유산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예맥조선에 관하여 문화유산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구석기란 무엇인가 문화유산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우리 나라 최초 국가 형성 과정에 관한 연구 발표되지 않음
도유호 1963년 중 고고학에서 거둔 성과 고고민속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3 잡지
도유호 조선의 구석기 시대 문화인 굴포 문화에 관하여 고고민속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4 잡지
도유호 평천리에서 나온 고구려 부처에 대하여 고고민속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4 잡지
도유호 김용남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와 이른 신석기시대의 년대론에 대하여 력사과학 4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64 잡지
도유호 조선의 민속 놀이-다리밟이 군중문화출판사 1964
도유호 서평 : 금탄리 원시 유적 발굴 보고 고고민속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5 잡지
도유호 김용남 굴포 문화에 관한 그 후 소식 고고민속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5 잡지
도유호 로동신문-우리 나라 구석기 시대 연구를 위하여 196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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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평양에서 러시아어로 나오는 잡지 <새조선> 1966년 9월호에 실린 도유호의 사진. <고송무 씨 제공>
  2. 리규춘, 2001, 󰡔신념과 인간󰡕, 금성청년종합출판사, 7~8쪽.
  3. 김일수, 2005, 「역사가 金錫亨의 역사학」, 󰡔역사와 경계󰡕54, 37쪽의 주 25.
  4. 김일수, 2005, 「역사가 金錫亨의 역사학」, 『역사와 경계』 54, 38쪽.
  5. 리규춘, 2001, 『신념과 인간』, 금성청년종합출판사, 9~15쪽.
  6. 김현구, 2002,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 비평사, 51~52쪽.
  7. 이광린, 1988, 「북한의 역사학」, 『동아연구』16, 48쪽.
  8. 리규춘, 2001, 『신념과 인간』, 금성청년종합출판사.
  9. 김일수, 2005, 「역사가 金錫亨의 역사학」, 『역사와 경계』 54, 41쪽.
  10. 김일수, 2005, 「역사가 金錫亨의 역사학」, 『역사와 경계』 54, 42쪽.
  11. 이광린, 1988, 「북한의 역사학」, 『동아연구』 16, 48~49쪽.
  12. 송호정, 1997, 「김석형 사거를 맞아 북한 역사학계의 거두 김석형과 한국사연구」, 『역사비평』 38, 378쪽.
  13. 김석형, 1980, 「주체의 빛발아래 개화발전한 우리나라 력사과학」, 『력사과학』 1980-4.
  14. 이기동, 2001, 「김석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427)
  15. 한선범, 2007, 「‘임나일본부설’ 뒤엎은 북역사학계 태두 - 남북의 경계 넘어 민족의 거학으로 살다」, 『민족21』 73, 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