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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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1947년 ‘조선력사 편찬위원회’와 ‘조선어문 연구회’가 설립되었다. 1952년 3월 내각 결정 제57호로 교육성 산하의 두 조직을 각각 ‘조선력사연구소’와 ‘조선언어학연구소’로 개편하여 ‘정치경제학 아까데미야’로 이관했다.[1] ‘정치경제학 아까데미야’는 1949년 12월 8일 내각 결정에 따라 1950년 1월 10일에 창립되고 2월 1일에 개교한 정치인, 관료 재교육기관이었다.[2] 두 조직의 이관은 ‘정치경제학 아까데미야’를 연구기관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2월 과학원이 설립되면서 두 연구소는 다시 과학원 소속으로 이관되었다. 한편, 1946년 10월 17일에 ‘조선 과학자, 기술자 대회’가 열렸다.[3] 1947년 2월 7일에 ‘북조선중앙연구소’가 세워졌다. 소장은 신건희였다.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자립적 민족공업 발전 위한 과학기술적 문제를 종합적으로 풀고 가장 중요한 기술자재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 해결하고 선진과학기술을 광범하게 섭취 도입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4]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지질, 광업, 금속, 섬유, 기계, 전기, 화학의 7개 연구부서를 두고, 행정관리부서로 서무부, 부서별 연구활동을 조정하는 기구로서 연구위원회를 두었다. 하지만 북조선중앙연구소는 계획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연구원이 설립되면서 그곳으로 관련 기능 및 설비들이 이관되고 말았다.[5]

창립

1952년 4월 27일에 평양의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전국 과학자 대회’가 열렸다. 국가계획위원회 과학연구국이 소집한 대회에는 전국에서 190여 명의 과학자 대표와 정부·당 고위 인사, 각 대학과 연구소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정준택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에서 교육상 백남운은 ‘1951년 공화국 과학연구 사업의 총결과 1952년 당면 과업’을 발제 보고했다.[6]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과학원 설립을 처음으로 제안했다.[7] 29일과 30일에는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초이론, 공업, 농업, 의학 등 5개 분과의 연구 보고회가 진행되었다. 1952년 5월 7일에 내각 결정 제86호로 ‘조선 과학아카데미야 창립에 관하여’가 채택되고 ‘조선과학아카데미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은 홍명희, 부위원장은 정준택과 백남운이었다.[8] 같은 해 10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조직에 관하여’가 내각 결정 제183호로 채택되었다.[9] 이에 따라 과학원 조직에 관한 규정이 최종 확정되었고 10명의 원사와 15명의 후보원사, 원장, 부원장, 서기장 및 각 부문 위원회 위원장이 선출되었다.[10] 11월 5일에 ‘1차 과학원 총회’를 열어 1기 ‘상무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연구소 소장을 인선하는 등 세부적인 인선 작업을 마쳤다. 1952년 12월 1일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이 개원식이 열렸다. 사회과학, 공학, 자연과학, 의학, 농학을 포괄하는 명실공히 북한 최고의 전문연구기관이 설립된 것이다.[11] ‘과학원 규정’에 따르면 과학원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12]

1. 전체 과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문제, 특히 전국적 의의를 가진 과학적 문제에 집중한다. 2. 국내의 자연부원 및 생산력과 쏘베트 동맹의 과학을 위시한 인류의 과학적 성과를 연구하며 전국적 의의를 가진 과업에 대한 학술적 계획을 수립한다. 이 과업은 과학원의 조직 자체 또는 정부의 결정에 의하여 과학원에 소속되어 있는 학술연구소에서 수행한다. 3. 공화국 과학기관의 사업개선과 과학 활동가들의 력량 제고에 협력한다. 4. 공화국 정부의 자문에 응한다. 5. 학술연구의 제 결과를 발표하기 위한 보고회를 조직하며, 잡지를 출판하며, 외국학자들의 권위 있는 로작들을 번역 출판하며 매년 자기 사업을 총결하여 출판한다. 출판물은 조선어로 출판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는 외국어로도 출판할 수 있다. 6. 근로 인민들에게 과학지식을 계획적으로 보급시키며 그들의 문화수준 향상을 촉진시킨다.

구성

제1기(1952~1955)

원사와 후보원사

전체 원사 10명 중에서 월북한 사람은 8명으로 80%였다. 후보원사 15명 중에서는 월북한 사람은 9명으로 60%였다. 여전히 연구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과학원 구성원들은 대부분 대학 교수를 겸임했다. 과학원 구성원이 전임을 보장받는 것은 1956년이 되어야 가능했다.[13]

상무위원회

과학원의 최고 기관은 ‘총회’이다.[14] 총회는 원사, 명예원사, 후보원사로 구성되고 1년에 한 번 소집되는 ‘정기총회’와 상무위원회 결정에 따라 개최되는 임시총회가 있다.[15] 총회에서는 “상무위원회 총결보고를 청취 승인하며 과학원 및 그의 각 구성부문의 일반 로선을 수립하며, 조직적 성질의 기본 문제를 해결하며, 예산안을 승인하며, 과학원의 각 기관 및 개인의 보고를 청취하며, 과학-기술적 및 과학-사회적 성질을 띤 제 문제를 토의하며, 과학원 원사, 명예원사 및 상무위원을 선거하며 또 후보원사를 승인”하게 된다.[16] 상무위원회는 “총회 휴회 중에 있어서 과학원의 최고지도기관”으로서 “과학원의 활동을 지도하며, 과학원 각 기관의 사업계획을 검토 승인하며, 각 기관의 보고를 청취하며, 과학사업 조직문제를 심의 해결하며, 과학원의 매년도 예산안을 작성하며, 재정을 감독하며, 국가기관, 협동단체 및 사회단체와 련계를 가지며, 과학원 편집-출판 위원회의 사업을 지도하며, 과학원 총회를 소집하며, 각 부문 회의 및 위원회의 결정을 승인”하는 기구로 정의되어 있다. 상무위원회는 1개월에 1차 이상 소집되어야 한고, 위원장(과학원 원장), 부위원장(과학원 부원장), 서기장(과학원 서기국 서기장), 각 부문위원장 및 기타 위원 3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된다. 상무위원 임기는 3년이다.[17]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확대상무위원회’가 열렸다. 이 때는 과학원 상무위원들뿐만 아니라 각 연구소장, 원사, 후보원사가 모두 모였다.[18] 부문위원회는 “과학적 보고와 제의를 청취하며, 그들의 관하에 있는 과학기관에 대한 지도를 하며, 분기마다 자기 사업에 대하여 상무위원회에 보고하며, 부문의 활동방향을 결정하며 그 부문의 학습 연구 계획을 준비하여 부문 회의에 제출하며 자기 부문사업에 관계되는 각종 예산안을 작성하며 그 실행을 보장한다”고 되어 있다. 임기는 3년이고 1개월에 1차 이상 소집되어야 했다.[19] 상무위원회는 정책적 차원에서 과학원 전체를 관리하는 조직이었고 부문위원회는 소속 연구소들의 실제 연구 내용을 직접 관리하는 조직이었다.[20] 1기 상무위원회는 과학원이 창립된 1952년 12월부터 1956년 1월까지 활동하였고, 2기 상무위원회는 1956년 2월부터 1958년 11월까지 활동했다. 과학원 3기 상무위원회는 언제까지 활동했는지 명확치 않으나 적어도 1961년 하반기에는 새로운 상무위원회가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상무위원의 임기는 원칙적으로 3년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1기 상무위원들은 3년 2개월 동안 재임했다. 2기 상무위원들은 2년 10개월 동안 재임했다.[21]

1대 원장은 홍명희였다. 1948년부터 북한 내각 부수상을 맡고 있던 그를 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과학원이 북한 최고의 학술기관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조치였다.[22] 그를 보좌하여 과학기술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도한 사람은 부원장 최삼열이었다. 최삼열은 동북제대 화학과 출신으로 이화학연구소, 이화여대에서 근무하다가 월북한 후 김일성종합대학의 화학부장을 역임했다.[23] 과학원 사업을 검열하는 서기장은 사회주의 체제와 이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장주익이 담당했다.[24]

소속 연구소

1952년 11월 총회에서는 과학원 소속 연구소를 8개로 결정했는데, 1952년 12월 29일에 열린 상무위원회에서 ‘공학연구소’ 추가 설치를 결정했다. 이로써 과학원 초기 연구조직은 9개 연구소와 43개 연구실 및 편찬실로 구성되었다.

제2기(1956~1958)

상무위원회

예정보다 2개월 늦은 1956년 1월에 과학원 원장은 홍명희에서 백남운으로 교체되었고 21일에 열린 ‘4차 과학원 총회’에서 2기 상무위원회가 구성되었다.[25] 백남운은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공부하고 연희전문 문과에서 교원을 지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 1948년 9월부터 1956년 1월까지 내각 교육상을 지냈다. 서기장 신건희는 교토제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대동공전에서 교원으로 근무한 인물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공학부장을 맡았고 월북 과학자가 중심이 돼 설립된 흥남공업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부위원장과 부문 위원장은 유임됐다.[26] 2기 상무위원회 기간 동안 과학원 본사 청사가 마련되었다. 1956년 11월 착공하여 1958년 상반기에 완공하였다.[27]

소속 연구소

농학연구소가 농업성 직속 ‘농업과학연구원’으로 확대, 분리됨으로써 8개 연구소와 1개 독립연구실로 구성되었다. 각 연구소 소속 연구실에도 변화가 있었다. 경제법학연구소는 남조선경제연구실을, 역사연구소는 철학연구실을, 언어문학연구소는 외국어문연구실을 새로 여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그밖에 고전편찬위원회와 조선어문자개혁위원회도 새로 설치되었다.[28]

제3기(1959~1961)

상무위원회

1958년 11월 7일에 ‘과학원에 대한 규정’을 개정하고 3기 상무위원회와 부문위원회를 예정보다 앞서 조직했다. 총회, 상무위원회, 부문위원회 등의 역할구분이 명확해졌다. 원사나 후보원사, 명예원사 칭호를 박탈할 수 있는 조건을 명시한 조항이 들어간 것은 과학원 원사와 후보원사들이 연루된 8월 전원회의 사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최창익, 리청원, 김두봉, 김정도, 김원규, 손군창, 최정환 등이 8월 전원회의 사건에 연루되어 과학원에서 축출되었다. 특히 김두봉은 원사 칭호를 박탈 당하였고, 최창익과 리청원은 후보원사 칭호를 박탈당했다.[29]

부문 위원회와 소속 연구소

사회과학원 설립

1961년 3월에 강영창이 과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 2월 17일에 경제법학연구소와 언어문학연구소 등은 경제연구소, 법학연구소, 력사연구소, 철학연구소, 언어학연구소, 문학연구소,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고전연구소 등 8개의 연구소를 가진 ‘사회과학원’으로 분리 독립되었다.[30]

참고문헌

  1.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선인, 2007.



주석


  1. 「조선력사편찬위원회 및 조선어문연구회를 정치경제학 아카데미야에 이관함에 관하여(1952.3.27. 내각 결정 제57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99~100쪽, 수록).
  2.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88쪽.
  3. 「(북조선과학기술인대회)결정서」, 『공업지식』(46.11), 81~82쪽(김근배, 「월북과학기술자와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아세아연구』(1997), 95~130, 109쪽에서 재인용.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선인, 2007, 102쪽.
  4. 「북조선중앙연구소 설치에 관한 결정서」, 『북한법령집 4』, 242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5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2쪽.
  5. 김근배, 「월북과학기술자와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아세아연구』(1997), 116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3쪽.
  6.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192~193쪽.
  7. 윤명수, 『조선 과학기술 발전사 1』, 50쪽. 김일성, 「우리나라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과학자대회에서 한 연설, 1952년 4월 27일)」, 『김일성저작집 7』, 182~20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7쪽.
  8. 「조선 과학아카데미야 창립에 관하여(1952.5.7. 내각 결정 제86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38~239쪽, 수록).
  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10.9. 내각 결정 제183호)」(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40~243쪽, 수록).
  1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09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9쪽.
  11.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05쪽.
  1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07~18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1쪽.
  13. 『김일성종합대학 10년사』, 103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11~33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1쪽.
  1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24조.
  1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26조.
  1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25조.
  1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31~33조.
  18.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3쪽.
  1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규정(1952년 10월 9일 내각 결정 183호로 승인됨)」 37조.
  20.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3쪽.
  21.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3~114쪽.
  22.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4쪽.
  23. 박성래, 「한국 과학기술자의 형성」(한국과학재단, 1995), 부록.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5쪽.
  24.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15쪽.
  2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63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6쪽.
  26.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7쪽.
  2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6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8쪽.
  2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의 연혁(1952~1957)』, 과학원출판사, 1957, 93~94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48쪽.
  29. 백남운,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보고」, 『과학원 통보』 1958-1, 3~11쪽. 「과학 대열의 순결성을 위하여」, 『과학원 통보』 1958-3, 5~10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175쪽.
  30. 『조선중앙연감 1964』(조선중앙통신사, 1964), 207쪽. 강호제,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1』, 331쪽. 김용섭,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 지식산업사, 2005, 233~2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