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록주

North Korea Humanities

이윤서(JBNU2025)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8일 (월) 21:33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이윤서(JBNU2025))이 작성했습니다.




박록주(朴綠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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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글명 박록주 한자명 朴綠珠 영문명 Park Rokju 가나명 이칭 판소리 명창
성별 여성 생년 1906년 몰년 1979년 출신지 경상북도 선산(善山) 전공 판소리(춘향가·흥보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박록주(1906-1979)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를 아우르며 활동한 대표적 여류 판소리 명창이다.[1]그는 《춘향가》와 《흥보가》 등 주요 바디를 완창할 수 있었던 당대 드문 여성 소리꾼으로 평가된다.[2]</ref>특히 박록주는 영남 출신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사례로,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은 명창으로 언급된다.[3]


생애


성장과 입문

박록주는 영남 지역 출신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비교적 험난한 삶을 살았다. 그는 열네 살 무렵, 아버지가 대구의 기생 앵무에게 200원을 받고 넘기면서 기생 활동을 시작하였다.[4] 이러한 출발은 사회적·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그는 이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소리를 접하게 되었고, 이후 정정렬 등 당대의 명창들과 연을 맺으며 판소리 수련을 다져 나갔다.[5]


일제강점기의 활동

박록주는 1920–30년대에 걸쳐 판소리 바디를 중심으로 공연과 음반 활동을 활발히 이어갔다. 특히 그의 음반 수록 기록은 여러 매체에 남아 있으며, 이는 그가 단순한 지역 명창을 넘어서 전국적 인물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 준다. [6] 1930년대 박록주는 《숙영낭자전》·《흥보가》·《춘향가》 등 다양한 소리를 무대에서 부르며 명성을 얻었다.[7] 또한 그는 부분창 중심이던 당시 판소리계에서 완창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소리꾼으로 인정받았고, 여러 음악·문학 연구자들이 그의 바디[8]와 창법의 특징을 논문으로 다룰 만큼 큰 영향력을 지녔다. 또한 조선성악연구회 등 창극 및 판소리 관련 단체에 적극 참여해 전통예술의 보존과 대중화를 위해 활동하였으며, 이는 지역 언론에서도 중요한 문화적 공헌으로 평가되고 있다.[9]


해방 이후의 활동과 말년

해방 이후 박록주는 개인 활동을 넘어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여성국악동호회, 국극사, 판소리보존연구회(현 한국판소리보존회)를 결성·운영하며 판소리 보존·전승 체계를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10] 이 과정에서 여러 제자를 양성했고, 각 단체를 통해 창극의 발전, 공연 기획, 레퍼토리 정리 등 다양한 활동을 지속했다. 이러한 행적은 지역 언론에서도 전통문화 발전의 핵심적 사건으로 소개되고 있다.[11] 박록주는 평생 동안 번 돈 대부분을 공연 활동과 제자 양성, 그리고 판소리 보존을 위한 단체 운영에 사용하였다.[12] 그는 스스로도 “돈을 저축하지 못하고 한평생 무턱대고 쓰며 살아왔다”고 회고했으나, 제공된 연구 자료에서는 이를 ‘자신의 삶을 예술과 후진 양성에 모두 쏟아부은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13] 말년에는 재산 대부분을 소리와 제자들에게 남기고 떠났다고 평가되며, KBS World 역시 그가 예술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명창이었다고 전한다.[14]





연구


여성 명창으로서의 음반 및 무대 예술 연구

박록주는 근대 판소리 음반 취입과 무대 활동에 적극 참여한 대표적 여성 명창으로, 이는 당시 여류 소리꾼에게는 드문 이력으로 평가된다.[15] 그가 남긴 《숙영낭자전》, 《흥보가》, 《춘향가》 관련 음원과 기록은 1930년대 판소리 공연 양상과 여성 창자의 호흡·성음 구조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1차 자료로 활용된다.[16] 특히 박록주의 음반 활동은 완창 시대가 형성되는 시기와 맞물려 근대 판소리 레퍼토리 구성의 변화 과정을 입증하는 근거로도 다뤄진다.[17]


창극‧판소리 전승 체계 구축과 단체 활동

해방 이후, 박록주는 국극사와 판소리보존연구회(현 한국판소리보존회) 등을 결성해 판소리 전승 체계를 제도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18] 이러한 활동은 개인 중심 전승이 대세였던 당시 환경에서 단체 중심 전승 체계를 도입한 이례적 사례로 평가된다.[19] 그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공연과 제자 양성에 사용했으며, 이는 그가 남긴 예술적 유산이 물질적 기반보다 전승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20]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박록주 Location: 경북 선산 A bornIn B
Person: 박록주 Person: 앵무 A soldTo B
Person: 박록주 Group: 판소리보존연구회 A founded B
Person: 박록주 Article: 「나의 이력서」 A creatorOf B
Person: 박록주 Event: 일제강점기 판소리 공연 활동 A participatesIn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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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최동현, 「박록주 명창의 판소리 세계」, 『민속학연구』제42호, 국립민속박물관, 2018, 139.
  2. 「[명인시리즈 17. 박록주(1905~1979),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KBS WORLD』online, 한국방송공사, 작성일: 2012년 02월 29일.
  3. 최동현, 「박록주 명창의 판소리 세계」. 『민속학연구』제42호, 국립민속박물관, 2018, 140.
  4. 「[박록주, 나의 이야기]」, 『한국일보』online, 한국일보, 작성일: 1974년 01월 05일.
  5. 「[박록주, 나의 이야기]」, 『한국일보』online, 한국일보, 작성일: 1974년 01월 05일.
  6. 국악음반박물관, “박록주(朴綠珠)” 인물 소개.
  7. 최동현, 「박록주 명창의 판소리 세계」. 『민속학연구』제42호, 국립민속박물관, 2018, 139.
  8. 『[국악사전]』online, 국립국악원.
  9. 전북일보, 「박록주 명창 탄생 100주년 행사 개최」, 2010.06.06.
  10. 최동현, 「박록주 명창의 판소리 세계」. 『민속학연구』제42호, 국립민속박물관, 2018, 140.
  11. 「[최동현의 명창이야기 (33)박록주①]」, 『전북일보』online, 전북일보, 작성일: 2010년 06월 06일.
  12. 박록주, 「나의 이력서」.
  13. 최동현, 「박록주 명창의 판소리 세계」. 『민속학연구』제42호, 국립민속박물관, 2018, 140.
  14. 「[명인시리즈 17. 박록주(1905~1979),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KBS WORLD』online, 한국방송공사, 작성일: 2012년 02월 29일.
  15. 최동현, 「박록주 명창의 판소리 세계」, 『민속학연구』제42호, 국립민속박물관, 2018, 139.
  16. 최동현, 「박록주 명창의 판소리 세계」, 『민속학연구』제42호, 국립민속박물관, 2018, 140.
  17. 최동현, 「박록주 명창의 판소리 세계」, 『민속학연구』제42호, 국립민속박물관, 2018, 1340.
  18. 「[최동현의 명창이야기 (33)박록주①]」, 『전북일보』online, 전북일보, 작성일: 2010년 06월 06일.
  19. 「[명장 박녹주의 예술과 비운의 사랑]」, 『국악신문』online, 국악신문, 작성일: 2021년 01월 10일.
  20. 「[명인시리즈 17. 박록주(1905~1979),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KBS WORLD』online, KBS WORLD, 작성일: 2012년 02월 29일.